제 1227화
레이나의 태도가 묘하다는 느낌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가 간섭할 권리는 없었다.
따지고 들면 그녀는 내 종속인 만큼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런 시스템은 내게 마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대체 여긴 어디죠?”
“파괴된 차원.”
“파…… 파괴요?”
“그래. 앞뒤 분간 없이 부수는 데에 미친년 중 하나가 생명체들을 싸그리 말살시켜버린 곳이야.”
이곳을 파괴한 심연의 공주는 누구인지 모른다.
차라리 울드가 파괴한 룩스 대륙이 신사적이다 말할 정도로 끔찍한 참상은 보고 있자니 참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울드처럼 상위 심연의 공주도 아닌데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은 그 심연의 공주가 조금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었거나 이곳의 수준이 생각 이상으로 낮았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문명의 흔적은 보이는데 일부만 남았네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가 양손을 모아 무릎을 꿇었다.
“자비로우신 신이시여, 이곳의 영혼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그녀의 기도에 가만히 있던 레이나가 말했다.
“당신의 신은 여기 있잖아요. 그런데 다른 신을 따르는 거예요?”
“네…… 네?”
당황한 슈네리아가 허둥지둥거리자 레이나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레이나 그만해.”
“…….”
뭔가 불만인 듯 입을 삐쭉이는 그녀였다.
“죄…… 죄송해요.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
같이 식사하고 같이 이야기했던 인간이 자신에게 성흔을 내려준 신이라는 사실이 아직 쉬이 믿기지는 않는 듯 보였다.
“그…… 그런데 정말 제게 성흔을 내려주신 거죠?”
“그럼 네가 소환한 건 뭐 환각이냐?”
“아니 그건 아닌데요…….”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곳에 성녀 슈네리아를 데려올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지금 내 곁을 지키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저건…….”
“심장.”
나는 대륙의 중심부에 부자연스럽게 떠 있는 거대한 붉은 바위를 보며 말했다.
여기저기 갈라져 검붉은 빛을 일렁이고 있는 겉보기에도 심각한 상태로 보이는 심장이다.
“저건…… 정화를 해야 하나요?”
“정화하기엔 늦었어. 빨리 제 역할을 끝내고 재워버리는 게 맞아.”
“저…… 그런데 저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조심스레 슈네리아가 내게 설명을 요청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탓일까.
입을 댓발 내민 그녀가 나를 한껏 째려보는 게 보였다.
불경하기 짝이 없다.
레이나가 내게 물어온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정화 도중에 쓸데없는 게 나를 방해하려 들 거야. 한번 당해봤으니 어느 정도 대비는 해두고 갈 텐데 혹여라도 새어 나오는 건 네가 막아주면 돼.”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레이나는 내 몸에서 나왔던 부정적인 에너지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만 가능한 거야.”
“저…… 저도 가능할까요?”
그때 슈네리아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자신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도 못 하고 저러는 꼴을 보니 저걸 어째야 하나 싶은 생각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유예가 길지 않으니까 한번 말할게. 잘 들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정교한 톱니바퀴에 이물질을 조금만 끼워 넣으면 돼.”
타나토스의 잔재는 소멸하기 전, 현 상황에서 문제없이 정화를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내게 전달했다.
아마 놈이 없었다면 이리 쉽게 결정을 내리진 못했을 터였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데이비가 정화를 시작하자 거대한 심장과 세 사람을 기준으로 적당한 사이즈의 결계가 펼쳐졌다.
“신기하네요…….”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슈네리아는 그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면 그녀를 곱게 보지 못하는 레이나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거대한 심장에서 흘러나온 백색의 기류가 데이비와 연결되고 그가 눈을 감는다.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빠져나온 검은 기류. 이전에도 본 적이 있던 데이비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데이비에게 돌아가기 위해 결계 밖에서 공명하기 시작했다.
“우……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정화가 지속될수록 부정적인 에너지의 수는 점점 많아진다.
본래라면 심장이 멀쩡하다는 전제하에 심장의 힘이 저 부정적인 에너지의 접근을 막아주어야 하건만, 현재의 심장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오랜 시간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과 악마에 의해 여기저기가 오염되었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생긴 문제를 레이나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퉁…… 퉁!!
데이비가 쳐둔 결계를 뚫고 들어오려 드는 검은 에너지체들을 보며 레이나가 눈을 감았다.
동시에 막대한 천사의 힘이 쏟아져 나오며 그녀의 등 뒤에 응축되어 날개가 되었다.
한 쌍 두 쌍. 세 쌍.
서서히 늘어나는 날개는 이내 찬란한 빛을 내뿜었고 새하얀 깃털들을 흩날렸다.
쿠웅!!
슈네리아는 그런 레이나의 변화를 보며 옅게 탄성을 흘렸다.
처음엔 그저 외부차원에서 온 이방인인 줄 알았건만. 지금 보는 세상을 뒤흔드는 데이비의 모습이나 고서에나 나올법한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레이나의 모습은 그녀가 알던 상식을 한번 부서뜨렸다.
치직…… 치직…….
데이비의 결계가 단단한 건 사실이지만 빠르게 소모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조용히 기도를 읊은 그녀가 양손을 뻗었다.
동시에 그녀의 의지에 따라 새하얀 빛의 기둥이 결계를 뚫고 들어오려는 부정적인 에너지와 충돌한다.
힘의 차이는 명백하지만, 압도적인 상성 차이가 그들을 주춤하게 만든다.
레이나의 힘은 그것들과 충돌하자마자 사라져버리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에너지 또한 먼지가 쌓인 타일 위에 새하얀 비누거품을 떨어뜨린 것처럼 큰 주춤거림을 유발했다.
쾅!!!
그 틈으로 인해 놈들이 진입하는 속도가 엇박자로 어긋나기 시작하자 빠르게 소모되던 결계가 다시 제 역할을 하며 그것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그 수는 많아지지만, 레이나의 집중력을 흩트리진 못했다.
“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성녀 슈네리아는 입을 살짝 벌렸다.
겉보기엔 별거 없어 보이지만 정교한 톱니바퀴 하나에 이물질을 끼워 넣는 것으로 그 흐름을 부서뜨리고 있는게 쉬워 보일 리가 없었다.
다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아마 레이나가 하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은 시간을 버는 행위이리라.
그렇다면 레이나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자신도 가세하면 될 일이었다.
[나의 숭고한 신께 고하옵니다.]
그녀의 입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반적인 신성력과 흡사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의 힘이다.
세상에 익히 알려진 주신의 신성력이 아닌 슈네리아가 모시는 신인 데이비의 신력이었다.
그렇기에 저 검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주춤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미약한 힘일지라도, 그녀는 성녀였다.
그리고. 성녀는 신의 뜻을 행하며 신을 모시는 가장 숭고한 인물.
그녀는 마치 무아지경에 빠지듯 익숙하지 않은 신성력을 끌어올려 결계 밖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어이쿠!”
그때 가만히 있던 레이나가 펄럭이던 날개 하나로 슈네리아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쳤고 그로 인해 슈네리아의 집중력이 끊어졌다.
“미안. 실수야.”
실수라고 말하는 이가 혀를 쏙 내미는 걸 보니 문득 슈네리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알 수 없는 게 끊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괘, 괜찮아요.”
“무리하지 말지? 나 혼자도 충분하니.”
“아니요. 제가 모시는 신이에요. 저도 할거에요.”
그녀의 말에 레이나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윽고 슈네리아가 다시 집중하려던 찰나.
휘이잉!!
어디서 불어온 건지 알 수 없는 바람이 그녀에게 강하게 휘날리며 그녀의 집중을 흩어버렸다.
“읏…….”
“아. 미안. 무리하게 힘을 주다 보니……”
슈네리아의 머릿속에서 또 한 번 뭔가가 울컥했다.
툭!
또다시.
휘이잉!!
또 한 번.
“아 진짜! 그만두세요!!”
“뭘 그만두라는 건데?”
레이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자신의 힘으로 부정적인 에너지를 과부하시킬 뿐이었다.
“아까부터 자꾸 집중을 방해하시잖아요!”
“내가? 모르겠는데?”
저 얄미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슈네리아의 인내심이 서서히 과부하 되어간다.
전엔 안 그랬는데. 분명 착하고 배려가 넘치는 여성이었는데.
왜 자신에게만 이러는 건지 그녀로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녀가 데이비라는 존재를 두고 질투를 하는 줄 알았건만. 그런 것치고는 데이비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뮤린 황녀에게는 무어라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그러고 있는 것이다.
슈네리아 레켄은 이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녀 정도의 이타성을 지닌 이는 사실 세상에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데이비 올 라운. 즉 새로운 신격의 성녀로서 내정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빠득…….
“그렇게 나온다 이거죠.”
슈네리아는 양손을 가볍게 부딪쳐 박수 소리를 낸 뒤 빠르게 기도를 읊었다.
“은총 주세요.”
정말 기도 안 차는 기도문에 데이비가 들었으면 기함을 토할 기도문이었지만 그런 건 그녀에게 상관이 없었다.
그녀가 성녀로 추대된 이유.
“읏! 뭐하는 잣이야!”
“제가 뭘요?”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데이비와 닮은꼴이라는 사실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피식 웃으며 신성력을 빠르게 퍼뜨려 레이나가 하던 행위를 인터셉트하는 그녀였다.
그쯤 되자 레이나의 적의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슈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공허한 죽은 눈으로 슈네리아를 직시하는 레이나는 확실히 이전과 다르게 굉장히 섬뜩한 느낌을 주었지만, 슈네리아도 생각 이상의 또라이 기질이 강했다는 걸 레이나는 몰랐다.
“하! 조만간 사람 하나 담가버리시겠네요? 네?”
“지금 보내버리는 수가 있어. 그 입 닥쳐.”
점점 싸늘해지는 그 시선 너머로 슈네리아는 속으로 움찔했다.
레이나의 분위기가 심상찮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자극했나.’
당한 게 있어서 자신도 열이 받은 건 사실이지만 레이나의 변화는 그녀로서도 조금 당혹스러웠다.
“아니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자꾸 저한테만 이러시는데요!”
그녀의 외침에 레이나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을 모시는 건 나뿐이야. 다른 사람은 용납 안 해.”
신격을 지닌 인간 데이비 올 라운은 애초에 부인도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런 질투를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그 흐름 속에서 슈네리아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종속된 존재로서의 독점욕…….’
그쯤 되자 왜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못마땅해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서걱!!
갑작스럽게 날아든 기검에 식겁한 그녀가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해냈다.
“쯧…….”
동시에 레이나가 시선을 돌리며 혀를 차는 걸 본 슈네리아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사람 죽이려고 한 거예요, 지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 이상의 변화에 놀란 슈네리아가 주춤거리며 양손을 모은 채 물러났다.
“너만 없으면…… 그 사람을 모시는 온전한 종속은 나뿐이야. 끼어들지 마.”
“이거 전부 일러 바칠 겁니다. 저 성녀예요? 제 기도가 신에게 들리는 건 알고 계시죠?”
“여기서 죽으면 문제없겠네. 그러면.”
무감각한 목소리로 그녀가 다가왔다.
쾅!! 쾅!!
그 와중에도 레이나와 슈네리아는 자신들의 힘을 퍼뜨려 부정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계속해서 방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레이나가 점차 다가온다.
이 미친 여자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슈네리아는 한발 두발 물러나며 소리쳤다.
“혀…… 협상해요! 어차피 그 사람의 곁에 있는 건 당신이잖아요! 내게도 삶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레이나가 잠시 멈칫한 듯했지만 이내 걸어왔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영 거슬려서 안 되겠어.”
눈에서 초점이 아예 사라진 그녀가 씨익 웃었다.
그녀의 손에 새하얀 기검이 생겨나자 슈네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쿠웅!!!!!
그때였다.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대지가 모조리 비틀어지고 갈라진다.
하늘은 조각조각 갈라져 흩어졌고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세계의 종말.
서로 노려보며 기 싸움을 하던 두 종속은 하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데이비는 정화가 진행될수록 결계 밖의 세상이 부서져 내릴 것이라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실감해본 세상의 종말은 상상 이상으로 무섭고 두려웠다.
파스스스스…….
그리고, 그렇게 부서지며 리셋이 된다.
결계 밖에서 부서지는 세상에 휩쓸린 부정적인 에너지는 근본 단위부터 부서지는 세상에 휩쓸리듯 분해되어 사라졌다.
“이런 결계 하나가 극과 극을 나누다니…….”
슈네리아는 쉬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결계의 밖은 파괴와 분해가 이어지고 있건만, 결계 안쪽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너무도 고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세상이 리셋 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데에 걸린 시간은 어림잡아 5분.
그리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슈네리아는 그동안 눈이 돌아간 채 자신을 향해 씨익 웃으며 다가오는 레이나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잡히면 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좋은 꼴은 못 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괜찮아. 성흔만 도려낼게. 그러면 너도 그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어.”
레이나의 날개 중 하나가 검게 변질된다.
저 싸이코 같은 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슈네리아는 본능적으로 양손을 강하게 부딪쳤다.
그리고는 잘 다루기 힘든 신성력을 자신에게 온전히 두른 뒤 폭발시키듯 퍼뜨렸다.
그녀의 성격에 영향을 주고 있는 저 검은 것은 바깥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것인지. 부정적인 에너지는 급기야 결계를 뚫고 살아남기보다 레이나를 더욱 오염시키려는 듯 보였다.
“안 아프게 없앨 수 있어. 성흔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서 몸에 상해를 입히지 않고 지울 수가 있을 거야.”
“정신 안 차려요?!”
“괜찮아.”
무표정한 눈매에 씨익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슈네리아는 사태의 모든 근본적인 원인이 결국 자신의 성흔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완전히 파괴되어 정화되는 세계 너머 결계 안에서 그녀의 손이 슈네리아에게 닿으려 하던 찰나.
파앙!!!
데이비를 감싸던 빛이 온전히 터져나가더니 이내 사라지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갈라져 있던 심장은 그제야 편안히 잠든다고 말하듯 서서히 빛을 꺼뜨리며 수축하기 시작했다.
정화가 끝이 난 것이다.
소리가 사라진듯한 그 고요한 폭풍 속에서 레이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검게 변했던 날개 하나가 다시 백색으로 돌아온다.
데이비가 완전히 정화되면서 그 영향을 받고 있는 레이나의 날개도 본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 죽는 줄 알았네…….”
울먹거리며 주저앉아있던 그녀가 레이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저 싸이코 같은 여자. 반드시 다 고자질해버리든지 해야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레이나가 후다닥 뛰어가더니 눈을 천천히 뜨며 비틀거리는 데이비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어…… 레이나.”
천천히 눈을 뜬 데이비는 피곤한 표정으로 레이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좀전의 죽은 눈동자니 약간의 광기가 섞인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 저 불여우 같은 여자가!’
슈네리아는 처음으로 남을 보고 속에 천불이 이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껏 이토록 격렬한 억울함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흔을 없애자며 다가오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그래. 날개가 오염됐으니 그녀의 성정에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이미 검게 변질된 힘에 장시간 노출되었었으니 말이다.
이에 그녀가 현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저…….”
“다 된 거죠? 이제 돌아가요. 나 많이 피곤해.”
마치 아이가 칭얼거리듯 배시시 웃는 레이나를 보며 슈네리아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단순히 오염돼서 변한 게 아니었다.
레이나라는 저 천사는 그녀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질투심이 너무 강했다.
* * *
생명의 순환이 되지 않아 부서져 가던 차원은 더 이상 순환이 필요 없는 구조를 지니게 되면서 붕괴가 멈췄다.
오염된 심장은 다시금 잠들어 언젠가 다음에 올 신격의 정화를 준비하며 자신의 상태를 온전하게 되돌리기 시작했다.
데이비에게서 받고 돌려주는 과정에서 상당량의 힘을 흡수해 자신의 상태를 원상 복구시켰다.
연심과는 다른 집착욕.
슈네리아는 피곤해진 기분을 애써 누르며 데이비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한때 용사라고 했던가.
슈네리아가 보기엔 참…… 성격 나쁜 여자일 뿐이었다.
* * *
데이비가 정화를 마치고 온전히 힘의 밸런스를 완전히 맞춘 그 시각.
심장을 타고 나타난 검은 존재. 블랙 슬라임이 레이나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복잡한 듯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이내 입처럼 몸을 쩌억 벌렸다.
동글동글한 입안으로 레이나에게서 빠져나온 검은 기류들이 남김없이 녀석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꿀럭…… 꿀럭꿀럭!
그리고는 마치 고양이가 토를 하는 것처럼 몸을 일렁거리더니 이내 어딘가에 뱉어내 버렸다.
그렇게 뱉어진 것은 다름 아닌 레인보우 슬라임의 알이었다.
이후 블랙 슬라임은 자신의 알을 물고는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흩어졌고 슈네리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뒤 그녀의 성복 주머니 안에 알을 쏙 하고 넣어버렸다.
그 후 만족스럽게 다시 통통 튀어나간 녀석은 데이비가 레이나와 슈네리아를 데리고 사라지자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사라진 심장에 다가갔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심장의 고동 소리에 맞춰 블랙 슬라임의 몸에서도 똑같은 고동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통! 통통!
이윽고 녀석은 자신의 뒤로 다가온 푸른 머리의 여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블랙 슬라임을 내려다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랜 기다림이구나.]
…….
블랙 슬라임은 몸을 이리저리 튕기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동안 많이 아팠을 거야.]
그녀의 아름다우면서도 신성한 미성에 블랙 슬라임이 몸을 끄덕거렸다.
[그래서 그를 찾았지. 너를 구해달라고.]
그 말에 블랙 슬라임은 다시 한번 몸을 끄덕였다.
정화를 해야 하는 심장이 정화를 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깨어있었던 탓에 상태가 일그러졌다. 죽어가던 정화의 심장은 급기야 어떤 존재를 만들어냈고.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이를 찾았다.
[이제 편히 쉬렴.]
블랙 슬라임.
그 존재의 근원은 여신이 신을 정화시키기 위해 만든 차원의 심장이었다.
비틀린 신격을 먹어치우는 힘은 가히 숭고할 정도였다.
그녀의 손이 블랙 슬라임에게 향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블랙 슬라임이 통통 튀어나가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잠들고 싶지 않은 거니?]
그녀의 물음에 블랙 슬라임은 이내 몸을 이리저리 비틀더니 몸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에반젤린과 똑같은 얼굴을 한 뒤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고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에 여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의사는 전해졌다.
블랙 슬라임은 사라지는 여신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공간을 가볍게 뛰어넘었고 침대에 잠들어있는 에반젤린과 레인보우 슬라임을 흘끗 본 뒤 레인보우 슬라임을 툭 쳐서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레인보우 슬라임이 몸을 꾸물거리며 두리번거리다 블랙 슬라임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인 것을.
레인보우 슬라임은 눈치를 살피다 결국 에반젤린의 발치에 가서 잠들었고 블랙 슬라임은 그제야 만족한 듯 에반젤린의 품속에 파고들어 황색의 눈을 감았다.
살기위해 의지체를 만들어낸 차원의 심장의 행동치고는 참 엉뚱하고 귀여운 행동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