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6화
세계의 역할 변환이 온전하게 끝난다.
세계의 법칙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두 세계의 역할을 바꾸었다.
하지만 생명체가 사라짐으로써 순환시켜야 할 에너지가 동결되어버린 부서진 차원의 심장은 쉬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커헉!!”
성녀로서 각성한 슈네리아의 기도에 이어 레이나의 새하얀 신성력이 그들의 활력을 회복시켜주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 사실상 메인은 그들의 마나량이 얼마나 버텨주느냐가 한계일 뿐이었다.
전보다는 확실히 약해졌지만, 서서히 밀고 내려오는 붕괴는 여전하다.
“이……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마법사 중 하나가 현실을 직시하며 황급히 소리친다.
심장의 교체가 끝났음에도 마치 발악하듯 남은 붕괴 현상은 계속해서 세계를 갉아먹었다.
명백한 계산 실수였을까.
레이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자신의 검게 변질된 기운을 살짝 성녀 슈네리아에게 먹이는 투정을 부리긴 했지만, 데이비가 바라는 일인, 이곳의 인간들을 지키는 건 그녀가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론 세계의 붕괴를 늦춰 심장이 제구실하도록 늦추는 게 쉽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까.
그를 불러야 할까.
그녀는 데이비를 불러낼 힘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곤란해하고 있는 건 사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현 상황에서 성녀가 성흔을 각성함으로써 문제를 막아낸 건 좋지만 그래 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신을 강림시키겠어요.”
가만히 기도를 올리던 슈네리아가 올곧은 시선으로 고개를 들며 말한다.
이에 상황을 지켜보던 뮤린 황녀를 포함한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 그게 무슨!”
한때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슈네리아는 반역분자일 뿐이었지만 통치권자가 바뀌고 성녀로서 각성한 현재 그들에게도 성녀는 고귀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게…… 가능한가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가능할 거 같아요. 지금 이대로라면 시간을 벌 수는 있지만, 제시간 안에 이곳을 지키는 건 불가능해요.”
슈네리아가 그렇게 말할수록 레이나는 속에서 뭔가 비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모시는 신인데.
나만 모시는 신인데.
왜 이제와서 성혼하나 홀라당 내려받은 여자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묘하게 어두워진 기분이 들었지만, 레이나는 애써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억눌렀다.
“그런 게 가능한 줄은…….”
“신께서는 이 상황을 지켜보고 계세요."
그녀는 확신에 찬 대답을 내놓았다.
“그때까지만 버텨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레이나는 들리지 않게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 데이비가 부른다고 막 오고 가는 그런 존재인 줄 아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어디 한번 헛고생이나 해보라는 듯 침묵하는 그녀였다.
그때였다.
그녀의 기도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주변으로 새하얀 신성력이 더욱 강렬하게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그 모습을 본 레이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잖아요. 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가 부른다고 홀랑 오는 건데요.
거대한 신성력의 흐름이 누구의 것인지 깨달은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오로지 자신이 모시는 존재인데. 자신의 종주인데.
왜 다른 이의 부름에 응하는 건지 그녀는 괜히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츠츠츳!!!
하지만 역시는 역시라고 할까.
갓 각성한 성녀 슈네리아는 끝내 데이비를 소환하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흑…….”
고통스러운 듯 비틀거리며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보며 레이나는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숨을 몰아쉬던 슈네리아가 레이나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제 성흔의 힘만으론 불가능한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그 한마디에 레이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화를 내듯 말했다.
“흥! 신이 그렇게 쉽게 부른다고 강림할 수 있는 존재인 줄 아나 보지?”
존대는 가져다 버린 듯한 말투. 하지만 어째서인지 슈네리아와 현 상황을 지켜보던 뮤린 황녀는 레이나가 굉장히 기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작 성흔 하나 받고 뭐든 다 해낼 거 같지? 어림도 없어.”
그렇게 말하며 신성력을 거둬드린 레이나가 천천히 걸어온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나 없이는 안되지?”
“쿡…….”
그 말에 슈네리아는 뭔가 눈치챈 듯 쿡쿡 웃어 보였다.
“네. 저로선 힘들 거 같아요. 그러니 부탁드려요.”
“원래라면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이번만 내가 조금 거들어주지.”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막대한 힘이 흘러나와 그녀를 보조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슈네리아의 몸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성력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슈네리아는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와줘요. 당신이 필요해요.]
불경하기 짝이 없는 그런 기도에 뮤린 황녀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아…… 아니 불경하게 신을 향한 기도가 그래도 되는 건가요. 성녀?”
“…….”
슈네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붕괴 현상과 충돌하고 있는 하늘이 찢어지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존재를 눈에 담은 뮤린 황녀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여진다.
마법사들을 진두지휘하던 마법사 집행관 이니스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맙소사…….”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녀였다.
뭔가 관련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천사나 혹은 같은 신을 모시는 존재라고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인간이 천사나 신의 종자가 아니라…….
“신이었다고…….”
이니스의 중얼거림에 사람들은 멍한 얼굴로 하늘이 찢어지며 모습을 드러내는 한 존재를 올려다보았고.
이내 그 존재가 내뿜는 막대한 힘에 자신들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아…… 아아…… 신께서 강림하신다!!”
“신께서 강림하신다!!!”
그 격한 외침 속에서 창공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 데이비는 말없이 붕괴 현상이 내려오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다 입을 뻐끔거렸다.
시력이 좋은 이니스 집행관은 그가 중얼거리는 입매를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살면서 별별 일 다 겪네. 진짜.]
쩌적!!!
붕괴 현상의 종료는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 * *
세상의 종말 전조.
생명체가 모두 손을 잡고 붕괴에 저항한다.
그리고 성녀의 각성과 신의 강림.
그야말로 나차 제국 내의 상황을 본 모든 이들은 쉬이 그때 그 모습을 잊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황궁의 접견실에선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뮤린 황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천한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아뵙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나이다.”
대관식을 올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나 다름없는 뮤린 황녀가 고개를 숙이며 극존칭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는 집행관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마법사 집행관 이니스.
집행관 말석 샤드란.
그리고 메가로드리아를 소환했던 소환사 유라와 알보 단장까지도.
그들 모두 뮤린 황녀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접견실에 놓인 거대한 테이블 가장 상석에 앉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 데이비가 빙그레 웃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신이 아닌데?”
“하지만 당신의 강림은 이미 봤습니다. 저희가 당신을 미처 알아뵙지 못한 저희의 불경함을…….”
“그러니까 됐다고.”
싸늘한 데이비의 한마디에 뮤린 황녀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죄…… 죄송합니다.”
“거 죄송한 것도 많네.”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가 레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고했어. 레이나.”
“이 정도는 어렵지도 않아요. 그런데…… 왜 소환되신 거예요?”
“차원 역할 변환도 끝났으니 널 데려가려고 왔지.”
자신을 데려가려고 직접 왔다는 말에 레이나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당연한 일인데. 왜 이리 기분이 좋은 것일까.
묘하게 승리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데이비의 시선이 슈네리아에게 향한다.
“기도문 아주 끝내주더라?”
그 한마디에 슈네리아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저…… 그게…….”
“뭐? 은총을 내놔? 내 신력을 네가 맡겨놨냐?”
그 말에 깜짝 놀란 뮤린 황녀를 포함한 집행관들이 슈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성녀가 신에게 기도를 그딴 식으로 했단 말인가.
경이적인 현 상황에 머리가 따라가질 못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히지만 이렇게 하라고 계시를 내리셨잖아요.”
이윽고 슈네리아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뭐?”
“분명히 계시를 내렸어요. 이렇게 하는 거라고.”
“나는 계시를 내린 적이 없는데?”
“하…… 하지만 제 기도는 분명 당신에게…….”
“성녀! 아무리 성녀라지만 신께 당신이라니!”
뮤린 황녀가 황급히 슈네리아를 말리자 데이비가 손을 들었다.
“됐어. 그런 거로 신 대접 받으려고 신격을 얻은 게 아니야. 평소처럼 대해. 이전이 훨씬 더 편하니까.”
그 말에 뮤린 황녀가 입을 다물었다.
“진짜 그런 계시가 내려왔다고?”
“네. 성흔을 물려받을 때요.”
“프리아 여신…….”
프리아 여신이 너와 똑같은 성녀 두고 어디 한 번 고생해보라 했던가.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가 말 안 듣는 자식을 향해 너도 나중에 똑같은 자식 낳고 고생해보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됐다. 그보다 붕괴 현상은 저게 끝인가?”
“네. 전부 정리됐어요.”
“안 그래도 생명력이 잘 순환되고 있네.”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가 일어났다.
“그럼 가자. 여긴 볼일 끝났으니.”
“버…… 벌써 가시는 건가요?!”
“저하! 신적 존재는 본디 하계에 오래 강림해있을 순 없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마법사인 주제에 마치 사실인 양 떠드는 이니스의 말에 데이비가 피식 웃었다.
“나는 일반 신과 달라서 그런 건 상관이 없는데.”
“아…… 죄…… 죄송합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깍듯함에 오히려 데이비가 불편해진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럴수록 레이나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콧대가 높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맞아요. 그렇게 대단한 분이라고요. 그러니까 모실 수 있는 건 오로지 천족인 나뿐입니다.”
“얘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데이비의 타박에 레이나가 울상을 지으며 데이비를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해주면 좀 덧나요?!”
“아니 누가 나 모시라든? 그냥 편하게 지내라니까.”
“싫어요!”
레이나의 외침에 데이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뮤린 황녀.”
“예…… 예! ……아, 무슨 일이죠?”
깍듯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가 좀전의 말이 떠올라 어색하게 예전처럼 묻는 뮤린 황녀였다.
“이제 문제는 없을 겁니다.”
존대에 깜짝 놀란 그녀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말 안 듣긴 해도 일단 내 성흔을 물려받은 성녀니까. 잘 대해주세요.”
슈네리아를 가리키며 당부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그녀는 국가에서 모시는 성녀로서 그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이미 신의 강림과 기적을 목격한 이들이다.
손짓 한번에 붕괴가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건 보통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사실 데이비가 한 것이라곤 생명력을 대신 유동시켜서 아직 제 역할을 못 하는 심장 대신 이 세상의 생명력을 순환시킨 것뿐이지만 보는 이들에겐 절대적인 기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신을 모시는 성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슈네리아.”
이윽고 데이비가 그녀를 불렀다.
“네?”
“아니다. 이미 받은 걸 어쩌겠냐.”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성흔을 받았으니 그걸로 이상한 짓은 하지 마라. 혼나기 전에”
“네. 당신의 이름에 누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데이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자. 정화의식을 시작해야 하니.”
“역시 나밖에 없죠?”
“뭐?”
“됐어요. 어서 가요.”
뭐가 기분이 좋은지 레이나는 데이비의 손을 황급히 잡았다.
“자…… 잠깐만요 이대로 가시는 거예요?!”
“걱정 마, 또 놀러 올 테니.”
“시…… 신적인 존재가 그렇게 쉽게 놀러 와도 되는 거예요?”
경건함도 잊어버린 채 뮤린 황녀가 소리쳤다.
다만 그녀의 당혹스런 어조와 다르게 그녀의 입꼬리에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말이다.
“또 오는 거죠?”
“……그래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스스스스…….
동시에 데이비의 전신에서 새하얀 신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데이비의 형체가 사라졌다.
신의 목격. 신과의 대면.
아무리 인간이었던 존재라는 사실을 들어도 그가 내뿜는 신격은 거짓이 아니었다.
“후우…… 수명이 확 줄어든 느낌이네…….”
뮤린 황녀는 멍하니 데이비가 사라진 지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뭔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슈네리아 성녀. 혹시 인간과 신이 사랑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있…… 슈네리아 성녀?”
질문을 던지던 뮤린 황녀는 문득 이곳에 있어야 할 한 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 여자 어디 갔어?!”
레이나와 데이비가 사라진 건 좋은데. 왜 성녀 슈네리아까지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인지 뮤린 황녀는 알지 못했다.
* * *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저…… 그게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도 당황한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파괴된 차원으로 이동한 데이비와 레이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성녀를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말끝을 흐린 슈네리아는 이내 차갑게 죽어버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나를 가리켰다.
“저분 좀 말려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진짜 무서운데…….”
그녀의 말에 데이비가 레이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이나?”
하지만 레이나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강하게 들어차 있었다.
[저 빌어먹을 여자가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지?]
마치 복사 붙여넣기라도 하듯 그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차고 있었다.
“레이나?”
스르릉…….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양손에 새하얀 기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레이나?”
다시 한번 데이비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강타했다.
그제야 그녀가 상념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했다.
순식간에 그녀가 만들어낸 기검은 사라졌고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데이비를 향해 미소지었다.
“네?”
“어디 아프냐?”
그 질문에 레이나가 손을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럼 그건 왜 만든 건데.”
“아.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짓는 레이나의 시선이 슈네리아에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