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4화
세계의 법칙은 프리아 여신과 하나 되는 세계의 기둥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온전한 신격이라도 잘못된 것도 아닌 부분을 가지고 멋대로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따위는 내게 없었다.
거대한 빛으로 만들어진 구체를 향해 신체의 상태로 다가가자 여신이 언제 왔는지 나를 바라본다.
“상황은 아시죠?”
내 물음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나는 짜증을 담아 물었다.
“미래가 정해지지 않는다면서요. 그래서 아벨이 시간까지 역행해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에 묶여있으면 그런 역변을 일으키진 못해.]
할 말이 없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다…….
“이름에 권능을 담으셨더군요. 아이의 미래에 자유를 주는데에 그 권능을 이용하신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블릿을 톡톡 두드렸다.
-이 일을 계기로 그 아이는 완전히 자기 미래를 개척하게 될거야.
시간을 역행해 자신의 미래를 바꾼다는 점에서 이미 정해진 운명을 비트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일을 해결하고 나면 미래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은 청산유수라고, 프리아 여신의 뻔뻔한 대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세계의 법칙의 핵에 손을 올렸다.
융통성 없는 세계의 법칙에게 잠깐 동안의 유예를 요청하는 데에 필요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어쩌면 미래의 나는 이것을 알고 내게 보낸 게 아닐까.
아니, 어쩌면…….
“코오나의 그 사태를 막지 못한 게 지금 대가를 지불해서 그런 건가?”
시간의 역학관계는 여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함부로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지금 내가 여기서 지불한 대가가 미래에 있을 내게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망상에 불과한 가설이지만 말이다.
“기왕이면 좀 싸게 하고 싶은데.”
남남이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아벨은 내 아들이다. 오랜 시간 고생해서 겨우 만난 소중한 아들.
그런 아들을 스스로 부하까지 걸어가며 보낸 것은 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벨의 몸 상태가 저 지경이 된 것에 대해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여신님.”
규칙의 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내가 질문을 던졌다.
“시간의 틈 안에서 아벨의 몸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망가졌습니다. 치료를 해봤는데 임시방편으로 시간을 늘리는 정도지 근본적인 치료는 안 되더군요.”
내 말에 여신은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치료 가능할까요.”
내 말에 그녀가 태블릿을 들었다.
[권능을 가진 아이야. 온전한 시간대로 돌아가는 순간 본래 그 아이의 시간이 흘러가겠지. 그때 회복이 가능할 거야.]
녀석이 죽지 않고 본래 시간대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해결된다는 소리네.
나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 모를 수밖에.
“가져가라. 요구사항은 아벨이 이 시간대에 잠깐 유예하는 거다. 그 대가를 내가 지불하지.”
시간을 계속해서 역행할 수 있다면 못 해먹을 장사지만 단 한 번. 아들이 제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라면 아비로서 한 번 정도는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
내 목소리에 신언이 섞이며 흘러 들어가고 세계의 규칙이 공명한다. 내 몸에 스며든 그 힘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팔 한쪽이 크게 뒤틀리며 피가 터져 나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터.
예상대로라면 내 신격을 일부 내어준다든지 팔 한쪽을 못 쓰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기를 잠시.
맹렬하게 공명하던 핵이 다시 침묵한다.
“어?”
팔에 무리가 오는 거로 끝이야?
마치 투정을 부린 것 같은 변화에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게 여신은 생각보다 큰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번 일을 끝으로 이 세계에서 시간 축의 변동은 용납되지 않아. 법칙이 권능을 받아갈 테니.]
즉. 과거 페르세르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로 갔던 일과 지금의 사태 같은 시간 역행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는 소리였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어차피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그 말인 즉.
“아벨의 이름에 담긴 권능이 사라지는 겁니까?”
내 말에 여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축의 변동은 세계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이야.]
결국, 내가 여신의 권능 하나를 지워버린 셈이었다.
단순히 아벨이 능력 부족으로 시간 역행을 할 수 없는 것과는 달랐다.
창조신이 고유적으로 가지고 있던 힘 하나를 자신의 다른 일면에게 완전히 양도한 것이다.
그게 얼마나 큰 것을 감수한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전능의 존재가 전능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작 저와 아벨 하나 때문에 당신이 전능을 포기하는 건 좀…….”
[언젠가는 봉인시킬 권능이야.]
아벨의 이름에 시간의 권능을 담아준 것으로 이렇게 된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표정을 굳히고 있자 여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의 뺨에 입이라도 맞춰달라는 뜻일 터다.
“이거면 됩니까?”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하단다.]
처음 내게 흥미만 느낄 뿐 애정 따윈 없다고 생각했던 여신은 어느새 내게 많은 사랑을 주고 있었다.
* * *
아무리 유예를 얻었다 해도 아벨의 존재가 퍼지면 퍼질수록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사태에 대해 이미 파악한 몇몇을 제외한 모두에게 비밀에 부칠 생각이었다.
신의 영역에 돌아왔을 때 나는 말 없이 아벨의 팔에 난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페르세르크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많이 아프니?”
“아뇨. 견딜만해요.”
“네가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몸에 이렇게 부하가 걸리는 게 마음이 아프구나.”
“괜찮아요. 어머니.”
뭔가 잘못한 강아지가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녀석이 시선을 돌렸다.
본래 검었어야 할 눈은 새하얗게 새어버렸고 눈에선 핏발이 잘 빠지지도 않았으며 온몸에 흉터와 화상 상처로 가득했다.
어떤 어미가 아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멀쩡할 수 있을까.
결국, 페르세르크는 울음을 참지 못했는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토해냈다.
“어…… 어머니 저는 괜찮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 미안하구나…… 미안해. 엄마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한 게야…….”
“괜찮아요. 제가 선택한 일이고, 돌아가면 제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회복될 겁니다. 아시잖아요. 이 정도 흉터는 금방 돌아오는 거.”
울고 있는 페르세르크를 끌어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을 보니 저 자리에 끼어들기가 애매했다.
“데이비. 아벨이 왜 나한테 친근한지 알아?”
그런 내 존재를 눈치챘는지 일리나와 아이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왜?”
“아벨이 게임을 너무 좋아해. 그런데 페르 언니는 게임을 그렇게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나와 함께 게임을 했다는 거야.”
같이 게임하다 보니 서로 투덕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페르세르크 이상으로 친근하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가 키득거렸다.
그리고는 신검 대신 그녀가 들고 다니는 평범한 미스릴제 거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헤탄으로 갈 거지? 아벨도 데리고 가. 페르 언니와 나는 그림자와 함께 인근을 조사해볼 테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과 아빠로서 어딘가에 같이 활동해본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 * *
“절대 무리하지 말렴.”
날이 밝자마자 페르세르크는 떠날 채비를 한 뒤 아벨을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가 함께 계시는데요.”
“데이비. 아벨을 잘 부탁해.”
“그래.”
페르세르크는 아벨이 다 큰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영 걱정이 되는지 표정이 밝지 못했다.
“데이비 잊지 마. 아벨은 환자야.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제 신변을 지킬 정도는 돼요.”
썩어도 준치라고 8서클 마법사의 저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아벨. 엄마도 한번 안아줄래?”
뒤이어 일리나가 양팔을 펼치며 그에게 말하자 그는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엄마.”
“그래. 데이비 우린 먼저 가볼게. 조사가 끝나는 대로 영지에서 만나.”
아이나와 함께 로브를 깊게 눌러쓴 일리나가 먼저 걸어 나가자 페르세르크는 걱정스레 아벨과 나를 보다 일리나를 뒤따랐다.
마음 같아선 그녀도 함께 움직이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괜한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녀의 신변이 드러나면 상당히 귀찮아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반대로 나는 이미 헤탄 왕국에서 출입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기에 정면에서 나섰고 아벨은 단서를 찾기 위해 내게 붙은 상황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보자.”
“저기, 아버지. 이 인식저해마법. 제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른데요.”
“신경쓰지 마. 절대 모를 테니.”
현재 아벨의 외향은 멀끔한 모습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당장 시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녀석의 몸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신성 마법으로 덧씌운 뒤 인식변환마법으로 녀석의 상처를 가린 상황이었다.
그 탓일까.
아벨은 상처를 입기 전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 누구 아들인지 참 잘생겼네.”
내가 우스갯소리를 하듯 장난스레 말하자 그는 조금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매번 저보고 못생겼다고 놀리셨는데요.”
“장난이겠지.”
아벨의 등을 철썩 소리 나게 후려치며 씨익 웃어주자 그는 묘한 시선으로 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헤탄 왕국의 왕성은 라운 왕국과 비교해도 상당히 소박했다.
워낙에 척박한 지역이기도 하고, 헤탄 왕국은 라운 왕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약소국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내가 진입하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왔다.
“그런데 이분은?”
“내 시종이다. 상관없겠지?”
“예. 상관없습니다. 드시지요.”
일단 겉으로는 아벨을 시종이라 속였다. 그가 내 아들이라고 해봐야 혼란만 생길 뿐 어떤 이점도 없으니 말이다.
생각 이상으로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녀석에게 전음을 날렸다.
-네가 느낀 그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 있어?
-아뇨. 저도 단서가 거의 없어서 당장은 알아보기 힘드네요. 아무래도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코오나가 휘말렸다는 재해의 흔적을 본 것은 아벨뿐이었기에 녀석은 가장 먼저 그와 관련된 마나의 흐름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하지만 타 왕국인 만큼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을는지는…….
이놈 아직 한참 멀었네.
“아들.”
“네?”
“안되면 머리부터 들쑤시면 돼.”
“폐하! 라운 왕국에서 데이비 왕자가 도착했사옵니다.”
“들라 하라…….”
노쇠하고 피곤에 절어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천천히 문이 열리며 중년의 사내가 피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그만한 사고를 쳤으니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다수의 기사들이 양쪽에 일열로 늘어선 채 위압을 내뿜고 있는게 보였다.
잘 쳐 줘봐야 익스퍼트급 수준.
마스터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라운 왕국이 소드마스터의 보유 수가 많을 뿐 소왕국에선 당연한 인선이었다.
하고자 하는 건 뻔히 보인다. 어디 가서 얕잡아 보이지 않겠다는 필사의 저항일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아벨.”
“네?”
“네 아빠의 외교실력을 잘 봐놔라.”
“네? 자……잠깐만…….”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동시에 내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양측에 일열로 도열해 위압감을 풍기고 있던 기사들을 모조리 짓눌러버렸다.
“환영인사가 거치시군요. 폐하. 라운 왕국의 1왕자. 데이비 올 라운이라고 합니다.”
적당히 예우를 담아 고개를 숙여 보이자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보였다.
아무리 헤탄 왕국에 유감은 없다고 하지만 아벨을 저 지경으로 만든 원인이며 코오나를 혼수상태에 빠뜨렸다니 분위기가 고와질 리가 없었다.
제대로 분석조차 되지 않는 무형의 압박이 주변을 짓누르니 자세한 정황을 모르는 국왕이나 기사들은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식은땀을 흘리는 게 보였다.
“잘 왔네. 데이비 왕자. 짐이 왕자에게 입궁을 요청한 이유는 알고 있으리라 믿네.”
안 그래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더욱 찌푸린다.
그는 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이렇게 무분별하게 사고를 치는 내게 압박을 가해 뭔가를 얻어내려는 심산일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정석이긴 하지만 나는 거기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무형의 압박을 더욱 짙게 넣으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예 폐하. 실은 재밌는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이나라에서 어떤 놈이 제 부인을 마족이라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내 미소가 짙어진다.
-아들. 잘 들어라. 외교는 우선 기선제압이다.
-아니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외교를 합니까…… 저기 표정 죽어가는 거 안보이세요? 다리안 형이나 아버지나 진짜…….
전음을 통해 아벨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허, 아빠 못 믿어?
외교의 교본 제1장이다. 이 말이야.
나는 당당하게 그리고 노기를 담아 적반하장으로 말했다.
“제가 난동을 부린 것은 그놈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본래라면 절차에 따라 요청을 했을 테지만 이상하더군요. 그가 이 정보를 뿌렸을 때. 헤탄 왕실에서 정보를 사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설마 그 정보를 구해 제 부인을 마족으로 몰아가려 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억측이네! 그리고 지금 왕자의 행동은 엄연히 국제법 위…….”
“예.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겠지요. 그런데. 왕실에서 그 정보를 판 놈과 접촉하려 했다는 정보를 얻었지 뭡니까.”
정확히는 아벨에게서 들은 사실이다. 정보를 판 장본인이 아벨이지만 이들은 아벨이 정보를 넘긴 존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내 잘못에서 최대한 시선을 돌리고 다른 곳을 물고 늘어진다.
이런 경우 서로 패를 가지고 있으니 목소리 큰 놈이 우선권을 챙길 수밖에 없다.
이른바 개싸움식 외교의 시작이었다.
“폐하. 통탄한 일이군요. 헤탄 왕국은 과거 마족과의 전쟁에서 동맹국으로써 동고동락한 전우일 텐데…… 이렇게 제 뒤통수를 얼얼하게 후려치실 줄 몰랐습니다.”
“그…… 그 무슨! 결단코 그럴 일은 없네!”
무형의 압박감 때문에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는 국왕이 말려들기 시작한다.
내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내 곁에 있던 아벨이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다리안 형이나 아버지나…….
조용히 해라. 아들. 이게 네 아버지가 사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