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99화
본래 형태와 다르게 자아가 확고한 여신은 가끔씩 회랑의 영웅들 중 일부와 조용히 대화하곤 했다.
물론 대화를 주도하는 건 영웅들 쪽이고 그녀는 듣는 쪽이었지만 오늘은 반대였다.
사실상 헤라클래스를 제외하고 이 신의 영역에서, 아니 이전 영웅의 회랑에서부터 가히 절대적인 무력을 자랑해왔던 로 아이아스는 마법사의 신이라 불리는 오딘과는 별개의 관점으로 여신을 보았다.
“많이 괴로우세요?”
소매로 입을 살짝 가린 채 물어오는 바이올렛 머리칼의 아름다운 여성의 질문이 이어진다.
여신은 말없이 연못에 비치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현재 지상에 따로 현신해있는 다프네와 로브를 뒤집어쓴 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저 아이에게 기회를 주는 건 당신의 변화를 확인해보고 싶으셨던 것 아닌가요?”
로 아이아스의 질문에 여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리고는 말했다.
[전지전능. 그보다 오만하고 덧없는 단어는 없단다.]
“전지전능이라, 누가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정말로 고독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해요.”
위로 올라갈 장소도 남지 않은 전지전능한 존재에게 남은 것은 내려다보는 것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만, 너무 높기에 보여야 할 것도 보이지 않게 되죠. 당신은 태초신으로써 이 모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분이세요.”
로 아이아스의 아부는 언뜻 들으면 단순한 아부처럼 들리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측은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히 태초신을 향해 측은지심을 보내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로 아이아스의 관점이 놀라운지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을 아니? 내가 생명체를 만들었을 때. 감정이라는 것을 준 이유는 내가 그것이 없기 때문이야. 정확히는, 그것이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보통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만든다.
그리고, 여신에게 있어서 감정은 그녀에게 필요 없되 가장 흥미로운 변수이기도 했다.
오래전 여신에게 이렇게 풍부한 감정은 없었다.
겉보기엔 이렇다 할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과거에 비하면 지금 아바타에 불과한 그녀의 감정은 놀라울 정도로 풍부했다.
태초신으로써 가질 수 없는 슬픔, 기쁨, 분노, 그 외에도 여러 감정들을 말이다.
그저 내려다보고 변해가는 것을 관조하는 것, 하지만 미래를 알기에 결말을 아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이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감정은 전지전능에 방해만 될 뿐이다.
세계를 창조한 신에게 감정?
그것만큼 지독한 사치도 없을 것이다. 감정이 부여된다는 것은 편향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후회하시죠?”
본래 불가능하지만, 어떤 인물로 인해 그녀에겐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 여신에게 감정이 생길 수 있는 강신을 발현시키려 한 것이 데이비의 오래전 전생이었으니까.
신부라는 족쇄로 옭아매진 데이비의 영혼은 오랜 시간이 지나 그녀가 관측하지 못하는 미래를 만들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미약한 피조물이, 고작해야 특이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피조물이.
그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여신으로써 그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그에게 막대한 신성력을 부여해주었다.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녀에게 어떤 새로운 견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감정이 없는 그녀가. 감정의 편린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컴퓨터로 치면 버그나 다름없지만, 여신은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다.
일만 년 전 그녀의 신녀였던 헤라클래스의 누이, 프리아에 대한 어떤 미묘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의 진심과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보았을 때.
그녀는 태초신으로써 가져선 안 될 측은함과 슬픔, 대견함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한 감정은 어느새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깊은 감정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감정이 없는 전지전능의 조율자로서의 관점을 버리고, 조금 낮은 곳으로 내려와 세상을 다시 보았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전지전능에 한없이 가까웠으나 결국 전지전능은 아니라고.
그녀가 어째서 과거 실패를 했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알게 되었다.
모르는 게 없어야 할 전지의 존재가 몰랐던 게 나온 것이다.
“감정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제노엔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받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과거엔 그러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나요?”
로 아이아스의 불경한 질문에도 여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살짝 달싹이더니 어떤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어떤 가사도, 배경 음악도 없는 노랫가락이었지만 로 아이아스는 그 노래 속에서 여신의 슬픔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다른 생명체의 관점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생명체란 모두 똑같이 사랑하고 싶은 존재.
물론, 그중 여신을 배신한 이들에 대한 분노도 어려있지만, 그녀는 대부분의 생명체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렇기에 자애의 여신이며, 그녀가 태초신으로써 지금까지 세상을 지켜온 이유이기도 했다.
결국, 전지전능이라 말하던 여신은 그 위대한 시야를 내려놓고 조금 아래로 내려온 뒤에야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전지전능하다고 해놓고, 고독하다 한 주제에. 정작 보지 못한 것이 있음에도 완벽하다 착각하였으니.
그 꼴이 우습다.
“언젠가 그 감정이라는 것이 고고하고 숭고한 당신을 좀먹어서 당신을 타락시킬 수도 있을 거예요.”
여신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부족한 제 생각은 그래요. 그것이 있다고 그리 쉽게 무너질 존재가 아니라는 거, 차라리 이런 관점도 있다는 것을 알고 품고 가시는 게.”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심스레 이어나갔다.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궁극적인 자애의 방향이 아닐까.”
물론, 로 아이아스도 잘 알고 있었다. 고작해야 피조물주제에 여신의 생각을 재단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아스.]
그때 가만히 선율을 노래하던 여신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로 아이아스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제 이름을…… 불러주셨네요.”
[신이 될 생각은 없니?]
그 물음에 로 아이아스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여신을 바라보았다.
지금 여신이 말하는 것은 넬타리드나 타나토스 같은 정도가 아니었다.
태초신의 자리를 물려받지 않겠냐는 질문이었다.
본래 여신은 데이비를 품에 받아들여 하나가 되는 것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그것을 포기했고, 그 후엔 데이비를 태초신의 위계에 올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 또한 포기했다.
자애의 여신인 그녀가 편애하게 되어버린 데이비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고, 또 그가 그런 자리까지 오르게 되면 다시는 본래의 데이비가 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현재 여신은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존재로서 로 아이아스를 선택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여신의 제안은 유혹이 강했다.
태초신. 의지와 말 한마디로 세상 모든 것을 조율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로 아이아스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부드럽게 웃었다.
“제게 그 자리는 너무 과분해요. 당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겠죠.”
확고한 로 아이아스의 대답에 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의지를 존중한 것이다.
과거 감정이 없던 그녀였다면 생각지도 못할 흐름이었다.
“그런데. 그 어리고 자신감 넘치던 어린 신관. 그가 정말로 미래에 막내에게 큰 도움이 될까요?”
토펜느 부주교.
파르테논의 꼬임에 넘어가 자신의 욕심을 발산했던 로암과 다르게 가짜 성흔에 속아 사고를 친 성국의 젊은 엘리트.
여신은 다프네를 통해 데이비에게 그의 목숨을 연명하게 만들었다.
데이비는 처음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결국 여신의 뜻대로 그의 목숨만은 구제할 수 있게 손을 썼다.
로 아이아스의 질문에 여신은 조용히 답했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성장할 줄 아는 것은 너희들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그 아이는 바뀔 거야. 데이비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토펜느 부주교는 언젠가 데이비에게 큰 도움을 줄 인물이 되리라.
모든 것을 자애하는 여신이기에. 그에게도 어떤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후 여신은 살짝 발을 들어 연못의 수면을 살짝 두드렸다.
투웅…….
동시에 어떤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 * *
연합의 회의는 오래갔지만,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인간과 마족의 첫 번째 협상 일자가 잡힌 것이다.
물론, 반대하는 세력도 많을 것이고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테지만 언제까지고 끝이 없는 수렁에 물을 붓는 것처럼 증오만 서로 쌓기엔 생각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반대로 섣부른 종전 협상 또한 문제가 많기에 섣부른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오랫동안 구상해야 했을 마족과 인간의 종전에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다.
이것이 마족을 위한 것이냐고? 혹은, 또 인간을 위한 것이냐고? 그리 질문한다면 반은 맞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다만, 본래 내가 마왕이 되고 마족들을 거둬들인 이유는 페르세르크가 마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육신은 이제 마족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녀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숨기면서 살아가길 바라진 않았다.
“아, 좋은 날이다. 이런 날은 숨겨둔 술을 꺼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으로 돌아온 나는 눈을 부릅 뜨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본능적으로 주변을 뒤적거리며 찾아보지만 역시 없다!
“이……이게 어디 갔냐.”
다른 술도 좋지만, 그동안 정말 참고 참았던 좋은 물건이었다.
단순히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닌 오랜 시간 공들여야 하는 만큼 신의 영역에 있는 술고래 4인방조차 틈만 나면 그것을 호시탐탐 노리던 물건이기도 했다.
식은땀이 흐른다.
보이지 않는 비수가 내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불안함이 들었다.
“데이비. 돌아온 게야.”
“페르세르크. 여기 있던 그거…… 어디 갔어?”
내 물음에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놀란 듯 비어있는 보관함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이게 어딜 간 게야, 그대가 마신 게 아니었나?”
“약속했잖아. 좋은 날에 애들은 두고 넷이 모여서 같이 마시자고.”
평소엔 술을 마냥 즐기지도 않는 페르세르크조차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게 없을 리가 없는데.”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문득 이 술을 노릴법한 존재를 추려내기 시작했다.
우선은 툭하면 사고 치는 미식연구회.
음, 이쪽은 패스.
유리아가 비록 별의별 것을 다 만들어 먹는 엘프라곤 하지만 이 술을 만들어 내게 선물한 게 그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걸 그녀가 굳이 다시 훔쳐갈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인가.
새하얗게 타버린 분노가 머리를 잠식했다.
그때였다.
“응? 데이비. 무슨 일이야?”
전쟁이 끝나고 하인스 영지로 돌아와 아벨을 보며 힐링을 해야겠다던 일리나가 한 손에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다리안과 품에 아벨을 끌어안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와 같이 찬장을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왜 그래?”
“없어졌다.”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아벨을 페르세르크에게 넘겨준 뒤 옹알거리는 다리안을 소중하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거, 아벨이 가져갔던데. 네가 마시고 싶다고 가져오라고 했다면서.”
그 말에 페르세르크와 나 사이에 말이 사라졌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벨. 이 새끼 어딨어.”
아벨을 정말로 아끼는 페르세르크였지만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자식의 못된 손버릇은 고쳐놔야 하는 게야.”
* * *
아벨은 고급술을 가지고 하인스 영지를 벗어났다.
그리고, 코오나를 대동한 채 에반젤린의 레어를 찾았다.
“누님! 여기 있죠?”
“엉? 무슨 일이야?”
전쟁으로 꽤 장시간 휴방을 해온 그녀였던 만큼 발성을 연습하고 손을 푸는 것으로 방송을 준비하던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아벨의 행각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한 에반젤린이었다.
현재 티오니스 대륙에선 정체를 숨긴 아벨과 달리 에반젤린이 전쟁을 종식시킨 공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건 그녀에게 별로 관심 없는 주의였다.
일반적인 귀족가와 달리 그녀에겐 현대적인 가족상이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가문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현재 관심사는 드레스를 입고 호호거리면서 남들마냥 사교계에 출석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아벨이 코오나의 팔을 잡아끌고 온 것이었다.
“누님, 여기 적당히 조용한 곳 있어요?”
그의 물음에 괜히 불안함이 든다.
그동안의 경험이 절대 저 둘을 레어에 받아들이면 안 된다 외치지만 그래도 소중한 동생이 아니던가.
적당한 자리를 안내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녀의 시야에 문득 무언가가 잡혔다.
보기에도 익숙한 어떤 술병이다.
분명 아빠인 데이비가 저걸 보며 매번 기쁜 웃음을 지었더랬다.
얼마나 아끼는지 보는 것도 아낄 정도의 자린고비가 된 것이 데이비였다.
그런데 그게 데이비도 없이 아벨의 손에 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눈치챈 그녀가 소리쳤다.
“여……여기서 당장 꺼져!!”
이미 미식연구회로 인해 당해본 경험이 있는 그녀는 지금 아벨이 저 술을 훔쳐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미 늦었어요. 누님. 제가 그냥 혼자 죽으려고 온 줄 알아요?”
“뭐……뭐?!”
“협조하시죠. 누님도 이거 맛이 궁금했잖아요.”
아벨의 사악한 웃음에 코오나는 떨떠름한 얼굴이었고 에반젤린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너……너 이 개…….”
쩌적!! 쩍!!!
그와 동시에. 에반젤린의 레어가 강제로 찢어지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벨, 이 새끼 어딨어.”
크지 않은 목소리이지만 에반젤린은 온몸에 오한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데이비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의 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아빠가 엄청나게 화났다는 것을 말이다.
“일단 튀죠.”
그러거나 말거나. 이놈의 자식은 전혀 겁을 먹은 기색도 아니었다.
이에 에반젤린은 머릿속을 회전하는 고민을 빠르게 해결했고, 이내 소리 질렀다.
“아빠! 여기에요! 이 새끼 여기 있어!!”
동생을 팔아먹는 거로 결론이 났다.
얼마 전에도 전쟁이 있었건만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