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63화
요란스런 상황이 끝나고 나는 그 정체 모를 괴물로부터 빼앗은 붉은 광석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일반적인 광석과는 달리 힘이 응집된 결정체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그놈에게서 빼낸 거야?”
“일단은. 그런데 뭘 하는 거야.”
“네가 말했잖아. 위험한 놈이라고. 그러니까 이번엔 너 혼자 싸우게 두지 않아.”
일리나는 자신의 힘을 갈무리하며 내게 못을 박았다.
“네 검이 되어 싸울 거야. 나를 죽이기 전에는 절대 너를 해치지 못하게.”
“반대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네가 지켜주겠지? 히힛.”
“그래.”
지키니 뭐니해도 일리나가 도와준다면 화력 면에선 확실할 것이다.
그녀가 배우고 몸에 익힌 시공격검은 과거의 타나토스도 위협적일 테니.
재능을 개화하지 못하고 사그라진 레이나와 다르게 그녀는 온전히 자신의 재능을 개화했다.
그 차이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샐쭉하니 웃으며 혀를 쏙 내미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 결정으로 뭘 하려고?”
“일단 거대한 에너지 응집체니까. 한번 볼까 싶어서.”
“그냥 보면 되는 거 아니야? 난 마법은 잘 몰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기억의 파편 같은데.”
“기억의 파편? 그 괴물의? 그럼 그 녀석이 누구인지 목적이 뭔지도 잘 알 수 있겠네?”
“바로 보면 좋겠는데. 그 방법을 모르겠네.”
비화가 깨어났을 때 그녀에게 가능한지 물어보면 될 일이지만 더 이상 비화가 그놈과 엮이게 둘 수 없었다.
“데이비. 이거 말이야. 그놈의 기억 파편이랬지?”
“그렇지.”
“그럼 혹시나 하는 건데. 그놈의 영향을 받은 미친 천사의 안에 그 힘이 있지 않을까?”
그녀는 붉은 결정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미친 천사가 품고 있는 그 힘을 이용하면 트리거를 해제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녀가 어설프게 웃었다.
“너무 상황이 좋은 궤변인가?”
“아니. 좋은 생각이야.”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칼디라스를 품에 안고 따라왔다.
“같이 가게?”
“적어도 어떤 녀석인지 직접 봐야지.”
혀를 살짝 내밀며 귀엽게 웃는 그녀는 가벼워 보였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겉으론 괜찮은 척하지만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을 테니까.
뭐가 됐건 미친 천사가 활동하는 범위는 지구.
그런 만큼 일리나를 데리고 지구로 넘어온 나는 정보를 빠르게 전달해줄 수 있는 현아에게 찾아갔다.
“새언니, 오빠. 어서 와.”
약간 피곤한 얼굴로 그녀가 나를 반긴다.
“꼴이 왜 이래.”
“몰라…… 며칠간 잠도 못 잤어. 그 괴물 때문에.”
“음?”
“그 괴물이 각성자의 몸에서 튀어나오고 있잖아. 일각에선 넬타리드 신이 인간의 몸에 괴물을 심었다니 뭐니 하는 말이 나와서. 이쪽도 엄청 피곤하지.”
각국이 미친 천사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도 기밀에 붙이는 건 막대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벌써 몇 차례 이런 사태가 벌어지니 마냥 숨기는 게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당연히 넬타리드 교단과 함께하고 있는 신성 그룹은 상당히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새 몇 차례 벌어진 건가?”
“어. 미국, 영국, 일본, 중국. 생각보다 굵직한 국가 쪽에서 나왔어, 뭐…… 대부분 상위 각성자들이 많은 국가들이지만.”
“그걸 어떻게 처리한 거야.”
“어떻게 처리하긴. 처리 못 했어.”
그녀는 태블릿 피씨에 적힌 기밀영상이라는 영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미국에서 나온 녀석이야. 크리스가 혹시나 해서 영상을 촬영한 건데…….”
그곳에 비친 것은 처음 본 것과 동일한 미친 천사가 수백 개의 눈으로 엄청난 수의 광선을 쏘아대며 모조리 파괴하는 모습이었다.
“A급 각성자, 릭 바스타의 몸에서 튀어나온 거야. 문제는 단순히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퍼레이드 도중에 변했어. 숨기기도 어려워진 거지.“
변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전조현상도 없었다.
영상에는 수많은 각성자들이 목숨을 걸고 미친 천사를 막으려 했지만 오래가지 못해 모조리 제압당하는 모습이었다.
사상자도 상당히 나왔다.
“그래서. 이놈은?”
“현재 어디로 사라졌어.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고 있겠지만 이것도 나름 기밀이라.”
각성자가 괴물로 변해버리는 일로 인해 이미 세계 각지에선 괴물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는 쪽이 늘었고, 일부에서는 각성자를 잠재적 위험요소로 취급하는 쪽도 나오고 있었다.
“구속을 해야 한다느니. 감시를 해야 한다느니. 혹은 위험하니까 죽여야 한다느니 말이 많아. 문제는 각성자들도 그냥 듣고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지. 일부는 자신도 괴물이 될까 두려워 숨어버린 이들도 존재하고. 뭐가 됐건 통제가 극도로 어려워진 건 사실이야.”
“흠…….”
“오빠…… 이거 해결돼?”
“해봐야지.”
“넬타리드께서 정말로. 인류를 멸절시키려는 거야?”
“그 양반은 그럴 존재가 아니야.”
범인이라면 미친 천사의 심층에서 본 그 거대한 눈동자가 범인일 것이다.
“미국에서 나온 게 이러면 나머지는?”
“그게 좀 이상하단 말이야.”
그녀는 다른 영상을 틀어주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 출현한 미친 천사들이었는데 이들은 미국과 같이 처음에 날뛰다가 한참을 날뛴 후에 가루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괴물이 사라진 곳에선 쓰러진 인간만이 남아있었다.
“이들도 힘을 잃어버렸나?”
“아니. 신기하게도 이렇게 사라져버린 것들은 힘에 변동이 없어.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마치. 날뛰다가 다시 잠들면서 내부로 들어간 느낌?”
“맞아요. 새언니. 딱 그런 느낌.”
현아가 손뼉을 치며 대답해주지 일리나가 배시시 웃으며 내게 눈웃음을 쳤다.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놈이 다수의 미친 천사를 제어할 힘은 없다는 건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미친 천사는 그 괴물과는 별개의 존재이며. 기본적으로 잠들어 있으려 하나. 그 괴물이 미친 천사를 강제로 끄집어내 폭주시킨다는 것.
다만 시간이 흐르면 점차 제어력이 떨어지면서 폭주하던 미친 천사들이 다시 각성자의 내면으로 스며들며 상황이 종료된다는 소리였다.
“일단 해야 할 일이 생겼네.”
“뭔데?”
“지금 미친 천사 때문에 각성자들을 억압하고 있는 상황. 절대 좋지 않아.”
“무슨 소리야?”
“그렇게 억압되고 있는 상황에서 게이트가 다수발현하면 골치 아프다고.”
게이트를 처리할 수 있는 것은 각성자. 현재 지구는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할 여유가 없었다.
“후……그 부분에 관해선 삼촌하고 상의해볼게. 일단 우리 신성 그룹은 국제 공인 그룹이라 국제 조약에 한발 걸치고 있으니까 의견 정도는 내 볼 수 있을 거야. 명분도 충분하고.”
“무리하지 말고. 말 안 들으면 내게 말해.”
자기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자기들끼리 싸운다면 현 상황을 인지시켜주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럼 일단 사라지지 않고 도망친 그놈을 찾아야겠네.”
“이쪽에서도 일단 협력하고 있고, 크리스가 미국 상원의원들을 모아 협력해야 한다고 크게 요청하고 있어. 잘되면 곧바로 연락이…….”
우웅!! 우웅!!
“아. 네 전화 받았습니다.”
-아가씨. 해결됐어. 필요정보는 보내줄 테니 티오니스 성자에게…….
“듣고 있습니다. 크리스.”
-오…… 티오니스 성자님. 마침 잘됐군. 곧바로 움직여줄 수 있습니까? 인명피해가 생각 이상이라.“
“그러죠.”
공적인 자리라고 존대를 하는 것인지. 익숙하지 않다.
“바로 이동할 거야?”
“가자.”
나는 집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환수왕이자 폭풍용왕인 흑룡 메가로드리아를 불러냈다.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그래. 그놈은 나와 마주친 적이 있어. 신력을 함부로 쓰다간 도망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의미는 없어 보인다만. 상관없겠지.]
메가로드리아는 머리를 살짝 낮췄고, 나는 일리나와 함께 메가로드리아의 등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내 스마트폰에 일정 좌표가 전송되었다.
“일단 동쪽으로 날아. 위치는 플로리다 해변이다.”
* * *
몬스터가 사라지고 재해도 사라졌다. 과거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는 플로리다 해변은 이전 태초의 겨울에도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던 곳인 만큼 무슨 액이 꼈나? 라는 말을 해도 할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나는 미국으로 날아가기가 무섭게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크리스와 합류했다.
현재 미국정부에서는 막대한 인명피해가 날수 있으며 각성자들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괴물을 무상으로 처리해준다는 내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멈추십시오. 이곳부터는 현재 진입금지…… 아! 크리스 님이시군요.”
방독면을 쓴 다수의 미 해병대가 막아서다 총을 내렸다.
“괴물은?”
“현재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면 곧바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진입할 테니 최대한 피해자가 없게끔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절도있게 경례를 올리며 손을 빠르게 흔드는 병장이었다.
“1분대는 진입한다! 2분대와 3분대는 진행 중인 피난행렬을 돕도록! 그리고 4분대는 이곳에 남는다. 뭣들 하나! 움직여!”
“알겠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인들의 안내를 따라 차량에 오르자 멀리서 나를 지켜보던 메가로드리아가 물었다.
[계약자.]
“하늘로 올라가서 기다려. 내가 신호하면 언제든 난입할 수 있게.”
[알겠다.]
후웅!!! 콰아앙!!!
이윽고 검은 날개를 한창 펄럭인 메가로드리아가 엄청난 속도로 비상하자 미 해병대원들은 멍하니 메가로드리아를 바라본다.
“갑시다.”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면 난동을 부리는 만큼 현재 미 해병대도 거리를 두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하는 동안 미 해병대 부사관은 나와 일리나. 그리고 크리스에게 괴물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현재 확인된 놈의 정보를 브리핑하겠습니다.”
간단한 크기와 생김새. 그리고 위험한 능력.
제법 조사를 꼼꼼하게 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현재 놈의 능력 중 광선을 쏘는 능력이 가장 위험하다 판단됩니다. 허공에서 굴절하는 에너지 체의 질량이 상당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 외에는요?”
“딱히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당장 괴물이 쏘아내는 광선만으로도 재앙에 가까울 것이다.
일반적인 무기는 당연히 통하지 않는 듯했다.
“일반적인 화기는 안 먹힙니까?”
“그게…… 몬스터보다 더 기괴합니다. 먹히고 안 먹히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마치 완전히 별개의 무언가처럼 말이다.
“여기부터는 차량에서 내려서 직접 진입해야…….”
“수고했습니다. 여기부터는 알아서 진입할 테니 기다리세요.”
괜히 보는 눈이 많으면 귀찮을 수밖에.
나는 일리나와 크리스만을 대동한 채 이동했다.
“무운을.”
부사관은 현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뒤 경례를 올렸다.
“사실 위험한 괴물이라곤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잖아. 안 그래?”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돌아가지?”
“그러고 싶지만 이래 봬도 미국의 국방을 책임지는 페이스라서 말이지.”
크리스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힘을 발현했다.
“내 안에는 저런 괴물이 없다고 했으니 마음껏 날뛸 수 있어. 적어도 시선을 끌 순 있겠지.”
건물을 박차며 빠르게 이동한 끝에 거대한 백사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백사장의 한가운데에 몸을 뉘듯 침묵한 채 눈을 감고 있는 거대한 괴물이 보였다.
“저 괴물이 되기 전에 각성자는 나와 친분이 있던 놈이라서. 가능하면 살려줄 수 있나?”
“괴물과 각성자는 별개야. 신경쓰지 마.”
그렇게 말한 내가 손을 풀고 있자 일리나가 칼디라스를 뽑아냈다.
“저기 아가씨. 아가씨가 나서게?”
“내가 먼저 해?”
“그래. 내 힘에 반응할 수 있으니까. 도망치지 못하게만 해줘.”
내 말에 일리나가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고 크리스는 혹시라도 다치는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일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력을 제대로 본 적이 있던가.
있다고 해도 그녀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모를 것이다.
일리나가 단순 공격력만 놓고 보면 극도로 강력하다는 것을 말이다.
터엉!!
바닥에 소리 나게 검을 내려놓은 일리나의 몸에서 백색의 기류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칼디라스. 오랜만에 움직이자. 다만 힘 조절은 해야 해.”
그렇게 말한 일리나가 한 발, 두 발 내디딘다.
그리고 가볍게 타다닥! 소리를 내며 빠르게 진입하기 시작했고 괴물은 곧바로 일리나의 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부릅뜨며 날아올랐다.
동시에 놈의 몸에 있는 수많은 원고리에 달린 수백 개의 눈을 번뜩였다.
“위험해! 저 광선…… 헙?!”
너무 느긋하게 진입하는 일리나의 행동에 크리스가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곧 숨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가볍게 이동하던 일리나가 일순간 사라지더니 곧바로 괴물의 코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시공격검]
[극신공참.]
쩌엉!!!
허공이 거대한 일렁임을 만들어낸다.
순식간에 사라지듯 다시 나타난 일리나는 괴물의 맞은편으로 넘어가 버렸고 괴물이 발사한 광선이 일제히 토막 나듯 잘려나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게 무슨…….”
강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자신의 상상 이상의 힘을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에 크리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휘두른 일검은 괴물의 날개는 물론 원고리들을 완전히 조각내버리며 놈을 제압했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공격에 크리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참…… 부부싸움 한번 하면 세상이 멸망하겠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물러나. 충격파가 터질 수 있으니.”
뒤이어 몸을 가볍게 푼 내가 움직인다.
놈의 움직임을 일리나의 기습으로 막았으니 이제 나를 발견했다 한들 놈은 도망치지 못하리라.
물론 도망친다 해도 잡아낼 순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끼이이이익!!!!
괴성을 내지르며 잘려나간 몸을 수복하려는 괴물이 일리나에게 반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놈이 반격을 가하기도 전에 내 손이 놈에게 닿았다.
[8서클 폭염계]
[프로메테우스]
쩌어엉!!! 콰아아아아아앙!!!
순간적으로 압축되었다가 팽창된 열풍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근처 일대의 건물들을 아주 조각을 내버렸다.
푸르게 피워 오른 거대한 화염 기둥은 단순 8서클 마법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있었다.
엄청난 화염에 그대로 휩싸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찌그러지기 시작하는 놈이 황급히 도망치려 든다.
역시 숨겨놓을 수가 있었지.
“메가로드리아.”
이에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엄청난 굵기의 브레스가 그대로 낙하하며 미친 천사가 만들어낸 수백 개의 마법진들을 박살 내버렸다.
그동안 나는 신력을 응축시켰다가 그대로 폭발시키며 제압당한 미친 천사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고 공명했다.
그놈에게서 빼앗은 붉은 광석이 일리나의 가설대로 그 괴물의 힘에 반응한다면 분명 무언가를 보여주리라.
화아아아악!!!
그리고, 그런 가설이 들어맞았음을 느끼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놈의 기억일까.
어두컴컴한 잿빛 하늘.
사방에 꽂힌 엄청난 수의 묘비들이 보인다.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지만 나는 이 문자들이 뭔지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고대어구나.”
1만 년 전. 3신이 싸웠던 시기의 문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전생의 존재이자 프리아 여신에게 변화를 주게 만들고 그녀에게 프리아 여신이라는 이름을 새기게 만든 존재.
신녀. 프리아가 존재하던 시기의 문자였다.
수많은 묘비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갈수록 내 손에 쥐어진 붉은 광석이 더욱 강하게 공명하며 흔들린다.
-맥시아. 카르곤. 부르스탄. 롬펠. 브렐리스, 말콘…… 헤라클래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아…… 나를 용서하지 마라.
그리고. 익숙한 이름이 들려온다.
주변의 풍경이 마치 엄청난 시간이 흐르듯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세상의 흐름이 사라졌을 때 내 눈앞에 새하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커다란 석장이 꽂힌 무덤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어차피 기억의 파편이다.
그 남성은 내게 등을 돌린 채 긴 석장이 꽂힌 무덤을 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천천히 다가갔을 때였다.
-세상은 참…… 평화로워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치 허공에 대고 말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평화로워졌어. 그래. 이 평화는 좋은 것이지. 모든 세상에 썩어 문드러져 있던 고름들이 새살이 돋아 치유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이전엔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어. 그렇기에 나는 묻고 싶다.
그는 무덤을 향해 계속 말했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쩌어엉!!!
순간적인 힘이 나를 밀어낸다.
동시에 이전에 본 적이 있던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는 게 보였다.
“보여주면 안 되는 거라도 있나 보지?”
내가 씨익 웃으며 묻자 거대한 눈동자는 나를 직시하며 거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꺼져라.
그의 말에 나는 차갑게 조소했다.
목소리도 처음 듣고 생긴 것도 처음 봤다.
눈앞의 괴물 또한 처음 본다.
하지만 나는 이것 하나는 확실히 할 수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 모든 일을 꾸민 놈이 누구인지를 말이다.
“하나 묻자.”
-꺼져라.
“대체 왜 이러는 거냐.”
넬타리드.
거대한 눈동자. 뒤틀린 신력. 본래 가진 힘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품은 신적인 존재.
미친 천사 같은 만들어지다 만 반쪽짜리 신격과 달리 온전한 신격.
뒤틀려버린 괴물은 다름 아닌 넬타리드.
그것도 파괴가 사라지고 남은 평온이었다.
아니. 이제는 평온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거대한 눈동자를 직시하며 느낄 수 있는 건 지독한 슬픔과 증오뿐인 것을.
이전 넬타리드가 태초의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일부러 연기를 하며 비화를 가뒀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땐 단순히 신으로서 비화를 위해 움직인 것이라면 지금 놈은 스스로 제어를 못할 정도로 슬픔과 증오에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가 영향을 끼친 게 아닌 온전한 그의 상황이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넬타리드는 이런 극도의 감정을 품을 수가 없을 텐데?
내 물음에 거대한 눈동자가 거대한 빛을 토해냈다.
동시에 내 의식이 그대로 심층의식에서 퉁겨져 나왔다.
“데이비! 괜찮아?!”
내가 주저앉자 일리나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크리스가 뛰어온다.
미친 천사는 소멸하기라도 했는지 가루가 되어 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른 놈들 더 찾아봐야겠어. 단편적인 정보로는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넬타리드는 내가 붉은 광석을 통해 본 어떤 기억을 보지 못하게 막았다.
그렇다면. 분명 그 기억 안에 넬타리드가 이렇게 변해버린 이유가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