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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381화 (1,381/1,559)

제 1381화

테이머가 잡히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꽁꽁 숨어 벨류아드를 처리함으로써 린디스와 하인스 사이에 생길 미묘한 흐름에 불을 지필 계획이었던 테이머는 결국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채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그를 데이비는 단번에 태워버리려 했지만 불안함을 느낀 요시아가 쫓아와 그를 만류하면서 다행히 목숨은 건진 셈이었다.

[부탁이니까. 날뛰면서 한두 놈만 남겨놔요. 선생님이 날뛰면 뒷정리는 하인스에서 할 테니까.]

제자의 부탁에 데이비는 결국 힘을 거두었다.

데오르트 황제는 자신의 앞에 널브러진 소년과 그 소년을 데리고 온 데이비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자잘한 서론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데오르트 황제에게 있어서 사람을 보는 눈은 하나의 거대한 무기나 다름없다.

그런 그가 보기에 지금 데이비는 폭발 직전, 아니 폭발이 확정되어 서서히 예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해야겠나.”

“무얼 말씀이십니까. 장인어른.”

“자네 지금, 뭐하나 크게 사고 칠듯한 표정이로군. 보아하니 그냥 문제는 아닌듯한데.”

데오르트 황제에게 데이비는 외인이나 다름없지만, 한켠으론 아들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초강대국인 제국의 황제에게 툭툭 말을 던지는 건 건방지다 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데오르트는 데이비를 더욱 각별하게 신경 써주었다.

마치 아들이 아빠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데이비와 데오르트 사이엔 제법 벽이 얇았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에게 말해보라.”

“…….”

데이비는 기절한 벨류아드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고민 중입니다. 이 일을 폐하께 고하는 게 맞을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말에 데이비가 에이리아를 흘끗 보았다.

그러자 에이리아는 고민 끝에 품 안에 있는 작은 보석을 꺼냈다.

“그것은?”

“십수 년 전. 베르나르트 협곡에서 사망하신 레디미아 황비 마마의 혼이 담겨있는 보석입니다.

쿠당탕!!!

데오르트 알 린디스는 체통도 잊어버린 채 벌떡 일어났다.

초기에는 레디미아 황비의 혼을 만나게 하는 게 맞는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에이리아는 조금일지라도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무슨…… 그게 무슨 말이냐!!”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느냐!! 어찌 된 일인지 소상히 말하라!!!”

평정심을 순식간에 잊어버린 데오르트의 눈동자는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레…… 레디미아의 혼이라고? 사실이더냐.”

에이리아에게 확인을 하듯 그가 어렵게 물었다.

“예, 아바마마…… 어머니의 혼이 지금 이안에 계세요. 십여 년간…….”

말을 하던 에이리아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긴다.

“말해보라……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휘청거리며 옥좌를 움켜쥔 그가 물었다.

이에 에이리아는 천천히 최근 있었던 일들에 대해 천천히 털어놓았다.

* * *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데오르트 황제는 벨류아드를 노려보았다.

“짐의 입장 상 한쪽 이야기만 들을 순 없네.”

“편한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만약 자네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데오르트 알 린디스의 전신에 지독한 위압이 퍼져 나왔다.

“으…… 으윽…….”

동시에 에나벨을 보고 기절했던 벨류아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폐…… 폐하? 흐아아아악!!”

데오르트를 발견한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켠에 조용히 서 있는 에나벨을 보고 기겁하며 엉금엉금 데오르트 쪽으로 기어갔다.

지금의 에나벨은 멀쩡한 엘프의 모습이지만 그때의 공포가 지독한 트라우마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앞쪽은 데오르트. 뒤쪽은 그 섬뜩한 여인.

어느 쪽이든 벨류아드는 자신이 x됐음을 깨달았다.

“폐…… 폐하…….”

“벨류아드. 묻겠다. 이 편지. 네놈이 보낸 것이 맞더냐.”

“그…… 그것은…….”

저것은 벨류아드가 직접 써서 보낸 편지였다.

“아…… 아닙니다! 제가 보낸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가 뭔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그…… 그것은…….”

“이미 다 알고 묻는 것이다. 이 편지를 보낸 것이 네놈이 맞느냐.”

데오르트의 물음에 벨류아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벌벌 떨었다.

‘그래. 잡아떼는 게 지금으로선 상책이다. 증거가 있다곤 하지만 계속해서 부인한다면…….’

“아……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폐하!”

필사적으로 외치는 그의 모습에 데오르트가 물었다.

“이놈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이미 있겠지?”

“사실 없어도 됩니다. 마법저항력이 낮은 이상 방법은 많으니까요. 요시아.”

요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어간다.

그리고 벨류아드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내 눈 똑바로 봐.”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팔찌가 공명한다. 태초의 진조가 있던 묘지에서 찾은 아티펙트.

그녀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물건인 듯 보였다.

일반인도 아니고 후손이나 다름없는 뱀파이어 로드이니 그 효과는 탁월할 터.

당황한 듯 버둥거리던 그가 천천히 몽롱한 눈을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전부 진실로 대답해. 이 편지를 쓴 건 네가 맞나?”

“……네…….”

이윽고 몽롱한 시선으로 벨류아드가 답한다.

“이 편지를 보냄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나?”

“……들키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그들은 누구지?”

요시아의 물음에 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됐어. 물러나라 요시아.”

“잠깐만요 선생님! 조금만 더 캐보면 증거가…….”

“증거는 됐다고.”

요시아가 입술을 댓발 내밀며 툴툴거렸다.

증거는 필요하지 않다.

매료안이 풀린 벨류아드는 이내 본래대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멍한 얼굴로 데이비와 요시아를 바라보았고 이내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이…… 이건 음해입니다! 폐하! 저…… 저 사특한 년이 저에게 최면을 걸어 조종한 겁니다!! 폐하! 살려주시옵소서! 저들은 단순한 원한으로 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그의 절박한 외침에 데오르트 황제는 짧게 침음했다.

“벨류아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진실을 말해라. 네 입으로 말한다면…… 목숨은 구해주마.”

그 말에 데이비가 데오르트 황제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폐하…….”

“네 사실 여부를 가릴 방법은 많다. 하지만 여기서 끝낸다면 최소한의 방법은 존재할 터.”

그의 말에 벨류아드는 덜덜 떨었다. 계속해서 우긴다고 해도 죽는 게 확정이라면. 차라리 목숨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제가…… 제가 한 게 맞습니다…….”

결국, 그는 자백했고.

데오르트는 데이비를 보며 말했다.

“데이비. 장인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놈은 내게 맡겨줄 수 있겠는가.”

“…….”

사실 지금 그 누구보다 분노했어야 할 인물이 데오르트였기 때문일까.

데이비는 짧게 혀를 찬 뒤 물러났다.

“벨류아드. 약속대로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황족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골육상쟁을 저지르려 한 죄가 명백하다. 그 죗값은 치러야 할 터. 지금부터 네놈의 황실 권한을 모두 몰수하고, 평민으로 격하한다.”

“폐…… 폐하!!”

“또한, 네 네 행보는 주기적으로 보고 되며 허튼짓을 할 경우 제국의 법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다. 본래라면 왼쪽 팔을 잘라야 하지만, 그것은 보류하도록 한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왔고, 선민사상이 서린 벨류아드가 평민으로 격하 당한다는 건 사실상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이었다.

죽으면 끝이니까.

“폐하!! 폐하!! 이럴 순 없습니다! 이런 식이면 저는 인정할 수 …….”

터어엉!!!

예리한 철검이 날아들어 그의 몸 바로 옆으로 지나갔다. 눈을 부릅 뜬 그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왼팔에 큰 상처가 남은 듯 그가 피가 흐르는 팔을 붙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 왼팔은 이제 평생 힘을 주기 힘들 정도의 부상이었다.

“네 대답 여하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거 같나? 지금 폐하께서 네 목숨을 살릴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거야.”

제대로 된 물증이 나오면 벨류아드는 아무리 낮게 처도 극형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데오르트 황제는 더 일이 커지기 전에 그의 목숨만은 구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근위대는 저놈을 끌고 나가라. 집행은 사흘 뒤로 한다.”

“폐하!! 폐하아아!!”

절규하며 끌려나가는 벨류아드를 뒤로한 채 데오르트는 데이비에게 말했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조금만 더 망설이셨으면 저도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조금 후회했습니다. 그냥 폐하께 데려오지 말걸 그랬나 하고요.”

“에이리아를 아끼는 마음은 합격이지만 네놈, 장인어른에 대한 대우가 너무 막무가내가 아니더냐.”

“제가 아니면 폐하께서 베어버리셨을 것 같은데요.”

“……바사스에겐 빚이 있다.”

벨류아드의 부친 바사스 황자가 저 지경이 되는 데에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아비의 업이라는 것일 터다.

“그래서. 고란 왕국은 어찌할 셈인가.”

데오르트 황제의 물음에 데이비는 차갑게 웃었다.

“라운 왕국 왕실에 이미 전갈을 보냈습니다.”

“선전…… 포고인가.”

“전쟁이니까요. 보고는 해야겠지요.”

물론, 국왕도 아닌 일개 대공이 전쟁을 벌이겠다 단정하는 것부터 월권에 가깝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자네의 동생에게 미안하지도 않는가.”

“바리스에겐 미안하다 생각합니다.”

사실 답신이 어떻게 되든 돌아가는 것과 달리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하면, 이제 다시 의제를 되돌리지. 레디미아와 대화하고 싶네.”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장모님은 폐하도 그렇지만 바사스 황자를 만나고 싶어 하더군요.”

“바사스…….”

“그러니 조금 기다려주십시오. 바사스 황자가 연관이 없다는 걸 대충 알았으니 그와 장모님을 만나게 해드릴 겁니다. 그때 같이 보시죠.”

“에이. 못난 놈…….”

데오르트 황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 *

왕실에서 온 답신은 허가였다.

전쟁이라는 게 본디 그리 쉽게 결정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는다고 하여서 막힐 태풍이 아닌 것을 그들은 잘 알았다.

물론, 소식을 전해 들은 고란 왕국 측에서는 자신들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려 들었다.

하인스의 성자가 미쳐서 자신들의 왕국을 핍박한다.

어떤 증거도 없이, 어떤 이유도 없이 침략을 하려 한다.

이대로 두면 그의 전쟁 범죄에 온 고란 왕국이 불바다가 될 것이다.

도와달라.

길게 설명하긴 하지만 요약하자면 그런 내용이었다.

잘못이 없는데 자신들을 핍박한다.

다만 다른 이들은 이 심상찮은 분위기에 함부로 끼지 않았다.

진실이 무엇이건 중요한 것은…….

지금껏 국제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 이상 어지간해선 유하게 넘어가던 하인스의 대공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선전포고를 때려버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실제로 고란 왕국 내에선 복잡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허세입니다. 절대로 이렇게 막무가내로 전쟁을 벌이진 못할 겁니다.”

“볼티즈의 일을 잊으셨소? 그는 한다면 하는 자란 말이오.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이자고? 그리되면 우리 고란이 저지른 짓이 밝혀지게 됩니다. 린디스가 가만히 있을 거 같습니까? 안 그래도 빌미만 잡히면 찍어눌러 버리려고 벼르고 있는 제국입니다.”

“차라리 린디스 제국과 싸우면 싸웠지 하인스는 좀…….”

“물론, 그는 강력한 존재지요. 일인군단이라 불릴 정도입니다. 하지만 소문이 조금 과장됐다는 생각은 아니 해보셨소?”

고란의 귀족 대부분은 절대 물러나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순간 고란의 미래는 끝장일 테니 말이다.

“어차피 죽는 건 병사 놈들이오. 적당히 싸우다가 항복하는 쪽도 괜찮습니다. 체면과 명분은 챙길 수 있으니까요.”

“그가 막대한 배상을 요구한다면요?”

“빌어먹을…… 그러게 들키지 말았어야지! 이걸 왜 들켜서…….”

“증거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저희 고란 왕국이 저지른 일이라는걸 아는 이는 한 명도 없단 말입니다!”

이번 계획을 구상하고 진행했던 이들로썬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유일한 변수라면 벨류아드가 살아있는 것이지만 그에게도 고란 왕국에 대한 진실을 알린 적이 없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정보를 흘렸단 말인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폐하!!”

그때 대신 한 명이 고란의 국왕 접견실로 황급히 들어왔다.

“파…… 팔란 제국에서!”

“팔란? 팔란이 왜 나오지?”

“그것이…… 강대국의 통수권자나 대리자들을 불러 최후 협상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고란의 국왕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왔군, 최후의 명분을 챙길 수 있는 자리가. 하인스의 성자는? 참석한다고 하던가.”

“일단은 삼제국 쪽에서 그의 마음을 돌린 모양입니다.”

“좋다. 바로 가도록 하지.”

준비된 회의실로 들어선 고란의 국왕은 커다란 수정 아티펙트 앞에 앉았다.

그러자 빛이 터져 나오며 국왕이 앉은 회의 테이블의 빈자리에 사람의 인영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팔란의 황제. 린디스의 황제. 알베르타의 젊은 재상인 튜나 이외에도 동부와 중부 사이에 꽤 내로라하는 국가의 통치권자나 대리자들이 자신의 몸을 투영하여 수정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 왕국의 자리에.

그가 나타났다.

모두가 긴장한 듯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제가 제일 마지막이군요. 라운 왕국 국왕 대리로 참석한 데이비 올 라운입니다.”

젊은 외견이다.

하지만 너무도 서늘하고 깊었다.

직접 마주하는 것도 아니건만. 차갑게 내리깔린 그의 눈동자는 극한의 공포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줄줄 흐를 정도의 위압이 수정 아티펙트 너머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후우…… 조용하다 싶더니 대형사건을 터뜨리는군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알베르타의 재상, 튜나 드 머전트였다.

“일반적인 분쟁과 달리 전쟁은 큰 문제지. 라운 왕국은 국제연합의 소속자만큼 절차를 지켜주었으면 하오.”

팔란의 젊은 황제. 살리반이 운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고란의 국왕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맞소! 이것은 폭거요! 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선전포고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우리가 국제연합에서 탈퇴했다곤 하나 이 같은 처사는 말도 안 되는 일이외다! 이것을 방치할것이오? 우리 고란 왕국이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면, 그다음은. 다른 이들은 무사할 것 같소?!”

격하게 소리친 고란 국왕은 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열변했다.

“저자는 미친 자요! 아무런 증거도 이유도 없이 선전포고라니! 현재 우리 고란 왕국은 지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민초들의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소이다! 이 와중에 전쟁을 하면 아사하는 자가 속출할 것이오. 하인스의 성자. 그대는 그것을 바라는가!”

확실히 증거도, 명확한 이유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선전포고였기에 회담에 참석한 이들 대부분이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쳤다.

평소 하인스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여론이 고란 쪽으로 움직일 정도로 말이다.

“국제연합의 규약상 이 같은 이유 없는 정복행위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대공, 할말이 있소?”

개인 속내로썬 데이비를 지지하겠지만 위치라는 건 그럴 수가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데이비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고란의 국왕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데이비를 몰아세우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실토했다.

아무리 고란 왕국이 국제연합을 탈퇴했다 해도 쉬이 편 들 수 없을 정도로 여론몰이를 한 것이다.

그렇게 상황이 모두 고란의 국왕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였을 때였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던 데이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뭐…… 뭐라?!”

“할 말은 다 했습니까?”

“이…… 이 피에 미친 자가! 기어이 피를 봐야겠다는 것이오?! 정말 광오하고 제정신이 아니로군.”

“할 말은 다 한 것 같으니 이쪽에서 통보하겠습니다. 고란 왕실에서 보낸 세작들이 린디스와 하인스의 충돌을 유도하기 위해 황손 벨류아드 알 린디스를 이용, 대공비인 에이리아 알 라운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그 말에 주변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만약 그녀가 다치거나 죽었다면, 또 린디스의 황제께서 참작을 해달라 요청하지 않았다면 이런 회의 따위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데이비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 말을 이어나갔다.

“증거라…… 증거가 없으니 그쪽이 유리하고, 내가 전쟁을 벌이지 못할 거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고란의 국왕.”

“이…… 이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중요한 건 고란이 내 부인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고.”

데이비의 전신에서 푸르스름한 기류가 마치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붉은 안광이 꼬리를 문 것처럼 일렁이며 반짝였다.

“지금 내가 고란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거라는 겁니다.”

“그…… 그리하면 침략전쟁을 인정하는 것인가?”

“침략? 웃기고 있네. 이건 침략 전쟁 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 경고야. 사람이 적당히 선을 지키면서 평화를 바라고 있으면 건드리질 말았어야지.”

그것은 하나의 경고였다.

절대 건드리면 안된다는 기준을 새겨준 하나의 기준이 드러난 셈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단순 고란 왕국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이곳의 모두가 눈치챌 수 있었다.

“흐…… 흐읍!!”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무거운 기류가 흘러나오자 튜나는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비틀거렸다.

그나마 제법 마나를 쌓아 올린 이들은 버티고 있지만, 상황이 조금 나을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데이비는 유별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가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고 하인스에서 조용히 지내는 건 그가 약하거나 인류 박애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선을 넘지 않았기에 배려를 해준 것.

그런데 그걸 넘었다면.

더 이상 배려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선은 넘지 말았어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데이비가 서슬 퍼런 살기를 고란의 국왕에게 쏘아 보냈다.

그것은 고란을 향한 선언이기도 했지만. 영리한 이들은 눈치챌 수 있었다.

데이비가 지금 하는 말은…… 고란 뿐만이 아닌 모든 국가를 향한 경고라는 것을.

고란 왕국과 하인스 영지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일부는 말은 그리해도 정말로 뒤 없이 전쟁을 벌일까 싶었던 이들도 있었다.

그동안 데이비가 웬만한 일에도 조용히 있었던 것을 보며 대공이 힘을 거의 다 잃은 게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간이 품기엔 너무 거대한 힘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생각은 단 하루 만에 박살이 났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바사스 알 린디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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