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92화
데오르트 황제의 출현은 조금 의문스럽지만, 비화는 눈치 빠르게 판단했다.
운이 좋다고 하기엔 너무 절묘하니 애초에 그가 직접 온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아무리 손녀에게 다정한 할아버지라도 일국의 황제일진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할아버지. 솔직히 말해줘요. 순방 온 거 아니죠?”
“허허허. 맞단다.”
“정말요?”
“그래. 다만 오는 길에 네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으로 먼저 날아온 것뿐이다.”
“할아버지는 황제 폐하시잖아요. 아무리 무력이 있어도 호위가 너무 적은 거 아니에요?”
그녀의 물음에 데오르트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걱정 말거라. 이 땅에서 감히 누가 짐을 위협한단 말이더냐.”
“흐음…… 약속해요. 위험한 곳에는 가지 않으신다고.”
“어이구, 우리 손녀가 바란다면 그리해야지.”
비화의 마음이 고마운지 그는 연신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었다.
“비화야.”
“네.”
“이번 일은 네 아비가 네게 거는 시험이라는 걸 잘 알고 있겠지?”
“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요. 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고.”
비록 비화가 영지를 물려받을 생각은 없다지만 데이비에게 신뢰를 받아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일의 진척이 쉽지 않다 할지라도 주변을 둘러보는 게 중요하다. 이곳은 린디스. 이 나라에는 네 아비가 만들어놓은 중한 인연들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네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잘 생각해보려무나.”
“할아버지요?”
“예끼 이 녀석. 할애비가 이 정도로 말해준 게 큰 도움 아니더냐.”
“우와…… 이거 사기 당한 거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샐쭉하니 웃는 비화였다.
이쯤 되니 뭔가를 눈치챈 듯 보였다.
“할아버지. 혹시 말이에요. 이곳에 온 이유가 할머니하고 관련된 거예요?”
그 질문에 데오르트 황제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묻어난다.
“영특하구나. 그래 맞다. 이곳에는 그녀와의 어떤 추억이 깃들어있지.”
그가 레디미아 황비와의 추억을 위해 이곳에 왔다면, 반드시 따라붙을 한 사람이 있었다.
“할아버지. 솔직히 도와주러 온 거라기보단 거래하러 온 거죠?”
“에잉. 알아도 적당히 넘어가거라.”
“바사스 황자님이죠?”
겔룹상단이 있는 이곳, 베르다륨의 영주는 바사스 황자를 따르는 귀족이 다스리는 곳.
그런 만큼 바사스 황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상당한 정보의 이점을 얻을 수 있다.
“데이비 그놈이 네게 시험을 내리는 이유는 알겠구나.”
“헤헤. 제가 좀 실력이 있죠.”
“껄껄. 그래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다만, 그놈 좀 데려가거라. 이거야 원, 황비와 이야기라도 조용히 나누려니 그놈이 영 방해가 된다.”
“걱정 마세요. 길이 보이면 바로 움직여야죠.”
바사스 황자는 한때 적대적 관계였다.
그런 그가 도와줄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버텨도 돕게 만드는 것.
데이비도 그러하지만, 비화도 길을 뚫고 지나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럼 바로 움직여볼까.”
“너무 날뛰진 말거라. 짐이 도와주는데에도 한계는 있으니.”
“걱정 마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가볍게 뛰어가는 비화의 뒤를 륀느가 말없이 바라본다.
그러더니 이내 데오르트 황제를 흘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박자박 뛰어간다.
* * *
베르다륨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팔코스 백작은 귀족파의 중진 중 하나였다.
물론, 중진이라곤 하지만 뼛속까지 귀족파라기보다는 바사스의 충신에 가까웠다.
현재 팔코스 백작이 머무르는 저택에는 한 남성이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손님이 많군.”
착잡한 얼굴로 말을 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저택의 보안을 뚫고 들어온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실제로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바사스 알 린디스 황자님. 저는…….”
“알고 있다. 조카.”
“어…… 어어…… 네.”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비화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조금만 관심을 두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지.”
조금? 비화는 지금까지 공식 석상에 나선 적도 없었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도 최근이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정보가 아닌 이상 알아낼 수가 없어야 하건만.
“에이리아에게 네 이야기를 들었다.”
아.
그제야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흐음…… 그런데 제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네요.”
“그렇겠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달랐으니.”
실제로 그는 에이리아와 적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본 그는 이전보다 더욱 마음이 편해진 듯 보였다.
“괜찮으세요? 무슨 이유가 있었건 아빠가 삼촌의 조카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언젠가 사고를 칠일이었다. 그걸 막지 못한 것은 나의 죄일 뿐.”
데이비에게 듣기로는 그를 사람으로 개과천선 시키면 용서해주겠다고 에이리아가 말했던 모양이었다.
데이비는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듯 보였지만 에이리아는 사람이 너무 좋은 게 문제였다.
“뭐 상관없죠. 실은 조금 뻔뻔하긴 하지만 삼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말해봐라.”
“이 도시에서 사람 하나를 좀 찾고 싶어요.”
“하인스의 정보력은 제국 못지않을 텐데?”
“그러게나 말이에요. 지금 하인스의 정보체계는 다들 바빠서 말이죠. 제 개인적인 일에 마구잡이로 동원할 수도 없고.”
비화는 여유로운 척 말하며 속으로는 그와 협상할 카드를 빠르게 정리했다.
아마 쉽게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그러니 그가 도울 수밖에 없는…….
“좋다. 반나절 후에 연락하도록 하지.”
“네?”
“못 들었나? 반나절 후에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냥…… 들어주신다고요?”
“조카의 부탁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지.”
싸늘한 외관에 냉기가 풀풀 날리는 말투와는 달리 너무 흔쾌히 들어주는 모습에 비화는 혹여 자신의 행동이 아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두려움이 들었다.
“그…… 저기 하나만 물어도 돼요?”
“편한 대로.”
“혹시…… 뭐 잘못 드셨어요?”
대뜸 불어보는 비화의 질문에 그는 피식 웃어 보였다.
이래도 화를 안 내? 그가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있는지 비화는 이제 이해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굉장히 예의 없는 질문이었지만 바사스는 크게 신경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반나절 후에 만족할만한 정보를 넘겨줄 테니 객실에서 쉬고 있거라. 내가 일러두마.”
“여…… 여기서요?”
“문제 있나? 그렇군. 고급 다과나 차라도 준비하라 이르지. 어째서인지 몰라도 다리안 올 라운도 데리고 온 듯한데.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아이에겐 무리한 행군일 거다, 정 부족하다면…….”
“아…… 아뇨! 괜찮아요! 제가 여기 있으면 먹은 게 체할 거 같아서 그러니까 반나절 후에 올게요.”
그를 구워 삶아보려 했던 비화였다. 사실 바사스가 생각을 조금 고쳐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그녀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오히려 비화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바사스의 제안을 거절한 채 저택을 나오자 륀느의 머리카락과 뺨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다리안이 보였다.
“누우아!”
“누나 왔어. 우리 동생 잘 놀고 있었어?”
“배기! 배기!!”
양손을 뻗어 앙증맞게 웃는 남동생의 행동에 비화는 눈을 번뜩였다.
청단이와 홍단이를 오랜 시간 봐왔던 그녀였기에 아이 특유의 발음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깨닫는다.
“그래. 비행기 한번 태워줄까?”
우웅…….
옅은 힘이 발현되며 다리안이 날아오르기 시작하자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륵 웃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을 놀아주었을까.
기분이 좋아진 녀석은 비화의 뺨에 뽀뽀를 하고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작디작은 손으로 토닥거리는 것은 또 어디서 배운 것인지.
가끔 이 녀석이 정말로 천재 같은 아기인지 아니면 이미 다 큰 녀석이 아기 행세를 하는 것인지 궁금증이 인다.
“아유, 이 귀여운 녀석, 어디서 이런 애교를 배워가지고.”
“상황 설명을 륀느가 요청.”
“뭐 상황이랄 것도 없는 게. 너무 흔쾌히 받아줘서 오히려 내가 당혹스럽네…… 반나절 정도 기다려달라곤 했지만 정보라는 게 어디 쉽게 모이나. 하루 정도는 린디스 제국이나 구경하면서 시간 보내지 뭐. 다리안 누나랑 같이 수중 정원 가볼까? 여기 그렇게 예쁘다던데.”
“꺄아!”
신이 나서 팔을 흔드는 다리안을 뒤에서 바라보던 륀느는 조용히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륀느였으나 뭔가 걸리는 듯한 낌새를 지우지 못했다.
* * *
“벌써요?”
비화는 놀란 감정을 애써 추스르며 눈앞의 차가운 인상을 지닌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찾았다.”
“아니…… 어떻게요? 그…… 죽은 사람을 찾았다고요? 진짜루?”
“그래. 찾았다.”
“대체 어떻게…….”
“쪼았다.”
짧은 단답에 비화의 눈이 꿈틀했다.
“쪼…… 쪼아요?”
“그래. 팔코스 백작을 닦달했다. 고리대금업체인 겔룹상단의 눈은 속였을지 모르지만, 팔코스 백작의 눈을 속일 순 없지.”
“세상에…….”
지금 개인적인 부탁을 위해 부하를 개처럼 쪼아댔다는 소리가 아닌가.
대체 무엇이 저 인간을 저렇게 만든 것일까.
그런 생각에 비화가 입을 뻐끔거리자 그가 몸을 돌리고 천천히 말한다.
“어머니를 다시 볼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아…….
레디미아 황비의 혼에게 남은 시간이 이제 극도로 희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단 1초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네 아비에겐 빚이 있다. 라고 하면 편하겠지.”
“다른 이유인가요?”
“바뀌고자 한다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겠지. 존재할 수 없었던 신뢰를 얻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행해온 하나의 방법이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삼촌.
입 밖으론 나오지 않았지만, 비화는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윽고 바사스가 건네준 서류뭉치를 받아든 비화가 탄성을 흘렸다.
그때 바사스가 무언가를 그녀에게 건넨다.
“이게 뭐예요?”
“먹을 테냐.”
“…….”
간단한 간식거리를 보며 비화는 피식 웃었다.
“잘 먹을게요.”
사람이 참 신기한 양반이다. 보통이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혹은 다른 이유로 인해 행동에 제약이 걸릴 법도 하건만, 그는 결단이 내려지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을 바꾸려 들었다.
“어디 가세요?”
“어머니께 간다.”
“그…… 황손은…….”
“할 말이 있나? 깊이 고려해보도록 하지.”
이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에이리아에게 듣기로는 정말 부드럽고 활기찬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오랜 시간이 그를 많이 바꾼 모양이었다.
“조심하세요. 독기가 바짝 올라있어서 모든 게 미워 보일 테니. 그렇다고, 마냥 다그친다 해서 해결되진 않을 거예요.”
“생각보다 잘 알고 있구나.”
“경험담이거든요.”
* * *
팔코스 백작의 정보력은 생각 이상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귀가 잘 들어맞았다.
“하……. 기가 막히네.”
비화는 눈앞에 널브러진 사내를 보며 헛숨을 내뱉었다.
“맥거펜 맞아?”
“흐, 흐흐흐흐흐…….”
비화와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도 한치의 변함없이 기이한 웃음을 터뜨리는 몰골은 그가 정상이 아님을 알려준다.
“각성이 필요하다 분석.”
다리안을 안아 들고 있던 륀느가 한 손에 묵빛의 크로우바를 만들어내자 비화가 말렸다.
“다리안이 보고 있잖아. 내가 해보지 뭐.”
그리고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힘을 발현한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윽고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이건 완전히 텄네.”
“상황 설명을 요청.”
“살아있는 거 같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야. 영혼은 빠져나가고 남은 건 잔념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꽤 오래 방치된 거 같은데. 죽은 지 벌써 일주일은 넘은 것 같아.”
정보에 따르면 그가 이 폐건물에서 나오지 않은 지 벌써 일주일은 되었다고 했다.
그동안 팔코스 백작이 찾아다니던 마약에 맥거펜도 연루되어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를 금방 찾아낸 건 그 마약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악랄하네. 오랜 시간 마약에 중독된 채로 치료를 못 받으면 서서히 죽어가는 거지. 다만 일반적인 마약과 달리 이 마약은 죽은 후에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의 몸을 약 기운이 멋대로 흉내 내는 거야.”
마치 사후경직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보다 악질이다.
좋진 않은 경과였다.
“이러니 린디스에서도 눈을 까뒤집고 찾아내지.”
“맥거프 주방장 아들의 소재는…….”
“찾아내기 힘들 것 같긴 한데…… 일단 답은 보이네. 이놈이 돈을 벌기 위해서 맥거프 주방장의 아들을 어딘가에 숨긴 거야. 그리고, 죽은 척 위장해서 모두를 속인 뒤 모든 어그로를 겔룹상단에 덮어씌우고 본인은 이렇게 은신한 뒤에 맥거프 주방장을 이용해 정보를 팔고 돈을 챙긴 거겠지.”
“하지만 본인도 사망.”
“아마 이렇게 죽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겠지.”
결국, 도박중독자인 동생의 욕심이 선을 넘으면서 중간에서 하인스의 기밀을 팔아치웠다.
모든 죄는 겔룹상단이 뒤집어쓰겠지만 그게 실패하더라도 이미 죽어버린 맥거펜을 범인이라고 생각하진 못할 터였다.
물론, 그 본인은 이름을 바꾸고 다른 인간인 척 챙긴 돈을 가지고 도망갈 계략이었던 것 같지만. 마약에 중독되어있던 그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맥거프의 소재는 찾을 수가 없는데.”
륀느는 조금 전부터 뭔가를 생각하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륀느의 등에 업혀있던 다리안이 버둥거리더니 바닥에 내려섰고 아장아장 걸어가며 무언가를 집어 들고 입안에 넣으려 했다.
“다리안!! 지지! 그거 지지야!”
대뜸 입안에 넣으려 드는 다리안의 행보에 비화가 깜짝 놀라 다리안의 손에 쥐어진 것을 빼앗았다.
“얘가 진짜! 뭔지도 모르고 주워 먹으면 어떻게 해!”
“우아아앙!!”
엉엉 우는 그의 행동에 비화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다리안이 먹으려던 편지에 쓰여진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비화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 * *
데이비가 하인스로 잠시 돌아왔다. 외부로 유출된 정보를 회수하거나 파기하는 쪽으로 움직이던 그는 모든 일을 끝마쳤는지 제법 피곤한 표정이었다.
“아빠. 맥거프 주방장의 아들은 찾았어요.”
“그래? 어디서 찾았는데?”
“맥거펜에게 온 편지 중에 주방장의 아들 맥거핀을 돌봐주고 있던 아낙의 편지가 있었어요. 아마 맥거핀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그냥 주변에 잠시 맡겨두는 식으로 그를 숨겨두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 꼬마는?”
“일단 맥거프 주방장의 사가에 있어요. 잠깐 동안 그를 돌봐줄 사람도 있으니까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좋아. 잘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해줬으면 해?”
일을 잘 처리했으니 보상을 말해보라는 그였다.
“사실 생각을 좀 많이 해봤는데요…… 맥거프 주방장…… 자비를 베풀어주는 건 어떤가 해서…….”
“맥거프 주방장은 이번 사태를 일으킨 인물이야.”
“그도 피해자잖아요. 그의 동생인 맥거펜이 그의 아들을 납치하고 맥거프 주방장을 이용한 거예요. 그도 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잖아요.”
비화의 설득에 데이비는 짧게 침음했다.
“비화야. 그렇게 일일이 다 봐주면 선례가 남는다.”
“그건 알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저도 아빠 목숨을 걸고 뭘 가져오라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래도 안 돼.”
단호한 데이비의 대답이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맥거프 주방장은 규율에 따라 처형한다. 그의 아들에겐 연좌제를 씌울 수 없으니 굳이 건드리지 않으마.”
“아빠!!”
쾅!!
비화가 화가 난 듯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번 일에서 맥거프 주방장이 기밀을 유출한 건 사실이지만 엄연히 피해자이기도 했다.
“안돼.”
“아빠. 진짜 이럴 거예요?!”
“너야말로 이럴 거냐? 기껏 준 상을 그렇게 쓰겠다고?”
“아빠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라는 것에 놀라울 지경인데요. 솔직히 이건…….”
울먹거리는 비화의 눈빛에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했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나?”
“수년간 아빠를 보좌해온 주방장이에요! 정도 안 들었어요?! 아 물론, 원리 원칙을 생각하면 벌을 주는 게 맞지만…… 그도 피해자잖아…….”
비화의 호소에 데이비는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네 판단은 그렇다 이거지?”
“흐흑…… 도저히 주방장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비화의 대답에 데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더니 좋아. 그렇게 해.”
“진짜죠?! 정말 잘 생각했어요. 아빠! 용서는 어렵지만 한 가정을 살린 셈이에요!”
비화가 데이비를 끌어안고 기뻐하자 데이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날 이후 맥거프 주방장은 죽은 인물이 되었고, 비화가 조용히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를 내보내 주었다.
그는 비화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기밀을 유출한 것에 대해 사죄를 했다.
“가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떠나서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거듭 감사를 표하던 맥거프 주방장은 멀리 창문을 통해 그를 보고 있는 데이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데이비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려 모습을 감추었다.
“아빠도 마음이 편치않았을 거예요. 가세요. 가는 길에 누가 당신을 발견하진 않을 테니.”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괜히 울컥하는 느낌이 든 비화가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하인스의 주방장을 일임해온 맥거프는 떠났다.
* * *
“그를 그냥 둘 건지 의문.”
륀느가 물어온다.
“그래야지. 그게 비화가 바란 것이니까.”
“원리 원칙상 그는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평가.”
“륀느.”
데이비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에 륀느가 그를 똑바로 직시한다.
“그냥 보내줘라. 비화가 저렇게 바라는데 어쩌겠냐. 괜히 어디 가서 추적하라 소리하지 말고, 그냥 보내줘.”
“…………”
륀느는 결국 대답하지 않았다.
* * *
하인스 영지를 떠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린디스 제국으로 향하는 행로에서 맥거프 주방장은 묵묵히 마차를 몰았고 린디스의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숲에서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주변을 스윽 둘러본 뒤 어디론가 급히 들어갔고 거대한 나무의 옹이구멍 아래로 천천히 기어서 들어간 뒤 그 안에 숨겨진 삽을 이용해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삽질을 했을까.
이윽고 그는 커다란 궤짝을 파냈다.
모든 일의 원흉은 사실 맥거펜이 아니었다.
맥거펜은 제 형의 제안에 속아 넘어가 일을 꾸몄다가 마약에 중독되어 끝내 살해당한 진짜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겔룹상단과 제 동생을 이용해 모든 용의 선상에서 벗어남은 물론, 이 상황을 절묘하게 이용하여 목숨까지 건질 계략을 짠 주방장. 맥거프의 계획이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제 아들은 정말로 부잣집 아들처럼 키우고 싶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곳에서 일할 수 없는 몸이니까요.”
욕심으로 인해 비롯된 단순한 사고였다.
그가 미각을 잃어버린 것은 말이다.
처음엔 데이비에게 도움을 요청해 치료를 받아보려 했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같은 업계에서 비슷한 일로 독버섯을 잘못 먹었다가 미각을 완전히 죽여버린 이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죽은 이를 살리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완전히 죽어버린 미각을 되살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는 더 이상 요리를 제대로 만들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주방장의 직위는 유지할 수 없고 수익도 불안정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욕심에 무너졌다.
도박중독자이자 인생의 원수나 다름없는 동생을 만나 그에게 마약을 몰래 먹인 뒤, 계획을 말했다.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고. 더는 목숨을 걸고 용병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일정량의 돈을 도박에 써도 괜찮을 거라고 기밀유출계획을 말했다.
거기에 혹시 모르니 맥거펜을 죽은 사람으로 위장하여 맥거펜의 목숨을 보호할 계획이라고.
죽은 사람까지 어떻게 할 순 없을 테니 말이다.
당연히 동생은 미쳤다고 했지만, 벼랑 끝에 몰려있던 맥거펜도 결국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된 탓에 받아들이고 말았다.
아들을 숨긴 뒤 겔룹상단과 충돌을 유도하고 죽은 척 시신을 만들어 모든 사태를 흔들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맥거펜이고 맥거프고 둘 다 죽은 사람이 되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세상과 조금만 동떨어진 작은 영지에서 이름을 바꾸고 살아가면 되는 것을.
하지만 맥거펜은 몰랐다. 이 계획의 유일한 변수인 맥거펜은 맥거프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지뢰라는 것을 말이다.
맥거프는 동생에게 약을 장기적으로 투여하게 유도했고, 결과적으로 그가 죽게 만들었다.
진실을 아는 동생은 그렇게 자신의 형에게 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돈을 가지고 돌아올 형을 기다리다가 사망했다.
그리고 맥거프는 그런 동생을 이번 일의 원흉으로 완전히 덮어씌우며 자신을 피해자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가 마약에 중독되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이상한 증세를 눈치챘을 테지만 이미 상황이 가속화되었을 땐 맥거펜의 판단은 이미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다.
“후우…….”
긴장감 서린 식은땀을 흘리며 그것을 천천히 질질 끌어낸 그는 마차에 그것을 실은 뒤 다시 마부석에 앉으려 했다.
서걱!!!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맥거프 주방장은 문득 자신의 시야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내 시야가 평소 이상으로 높아진 것을 느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시야가 순식간에 낮아지며 지면과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했던 그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었다.
* * *
맥거프가 떠난 이후 비화는 이번 일이 생각보다 좋게 끝났다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라? 야. 다리안 어디 갔어?”
어린이용 퍼즐을 놓고 꼬물거리며 퍼즐을 맞추던 청단이와 홍단이를 툭툭 건드리며 비화가 묻자 홍단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리안? 모르게써!”
“아니 누나가 모르면 어떻게 해 이 멍청이들아…….”
“흐윽…… 비하가 막 화내…….”
그러자 곤히 잠들어있던 아벨의 볼을 콕콕 찌르던 청단이까지 울먹거렸고 비화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하…… 됐다. 미안해.”
“흐윽…… 아니야 홍다니가 나빴서……. 다…… 다리안 차자야대…….”
“됐어. 놀아 내가 찾아볼게.”
손사래를 친 그녀가 방을 나섰다.
“다리안? 다리안! 어딨어!”
그리고는 여기저기 불러보며 다리안을 찾았다.
그때였다.
“누아!!”
저 멀리서 다리안이 꺄르륵 웃으며 비화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는 게 보였다.
“다리안!”
이에 그녀가 황급히 다리안을 안아 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 막 다니지 말랬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꺄르르륵!”
뭐가 그리 좋은지. 허탈하게 웃던 비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배님. 다 노셨습니까?”
“뭐 이 새끼야?”
“후우…… 아닙니다. 그보다 성역으로 돌아오세요. 할 일이 많습니다.”
“야. 야! 잠깐만! 조금만 더 놀다가!”
“안됩니다.”
“으아아아…… 싫어!!”
편히 쉬려던 비화는 뒤이어 찾아온 후배. 후대의 넬타리드에게 질질 끌려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바닥에 내려선 다리안을 품에 안은 데이비는 말했다.
“기밀 유출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거든.”
단순히 기회가 생겼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다리안, 네 누나는 정에 관련되면 어설퍼지는 것 같다.”
다리안은 그저 꺄르륵 웃으며 데이비의 가슴에 파고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