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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450화 (1,450/1,559)

제 1450화

데이비가 분노에 가득 찬 페르세르크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 여신은 마치 다른 세상 이야기라도 보듯 노래한다.

아무리 인생이라는 것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곤 하지만, 설마 프리아 여신이 그를 팔아치웠을 거라고 데이비는 생각지 않았다.

“어딜 보는 게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 칼이 물을 넘어 대양까지 갈라버릴 정도라면 이건 하나의 사생결단이 된다.

“페르세르크! 나 죽는다!!”

순식간에 날아든 바람 칼날이 머리카락 몇 올을 자르고 사라지는 걸 보며 데이비는 식은땀을 흘렸다.

반격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의 마법을 디스펠하지도 않았다.

이건 결국 그의 업보일지니. 그녀의 행동이 과한 것을 탓하는 건 지금 데이비가 취해야 할 자세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가 그녀를 화나게 했다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만약 그녀와 데이비가 타인이었다면 이런 일 자체가 의미 없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데이비가 처음 사랑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사랑하며 아껴줄 여인이다.

그런 만큼 격한 수단을 취할바에 몇 대 맞고 말지라는 마음이 그의 심리 곳곳에 깔려 있었다.

그렇게 몸이 걸레짝이 되고 나서야 데이비는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차라리 이게 나은 결과일 수도 있다.

어정쩡하게 무언가를 들이대며 용서해주십사하는 건 그녀를 쉽게 본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으니까.

상황이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데이비는 본래 하려던 뇌물계획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았다.

어느새 여신의 노래도 끝이 난 상황.

마치 마운트하듯 그를 깔고 앉은 채 그의 가슴팍을 팍팍 내리치지만, 이제는 크게 힘이 담겨있지 않았다.

“하아…….”

“원하는 만큼 화내도 돼. 솔직히 잘못한 건 사실이니.”

“본녀가 그대의 목을 졸라도?”

“네가 졸라주는 거면 달게 받지 뭐.”

능청스러울 정도의 대처에 그녀는 천천히 힘을 빼며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듯 감쌌다.

“후우…… 좋아하는 놈이 지는 거라더니…….”

상황이 진정되자 복부를 짓누르는 그녀의 부드러운 몸의 감촉이 느껴진다.

마치 어딘가에 격리되어있다가 풀려난 듯 현실성을 되찾는 감각과 함께 조금 전까지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도 깨달았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는 어떻게 말할까.

“페르세르크.”

“…….”

그녀가 얼굴을 감싸 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가슴 위에 엎드렸다.

그녀의 작은 체구가 내 몸 위에 고스란히 포개지듯 뉜다.

새삼 느끼지만 정말 작고 따스하다.

데이비는 페르세르크의 이 온기를 참 좋아했다.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다독이듯 손을 뻗었다.

“미안해. 정말 다 쓸 생각은 없었어.”

재차 이어지는 내 사과에 그녀는 내 쇄골쯤에 머리를 묻은 채 조용히 말했다.

“마음 같아선 그대도 미식연구회마냥 매달아버리고 싶지만…….”

그녀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대신할 소재를 구해온다면…… 용서해주지.”

“아까는 화낼 거라더니.”

“분노는 다 발산했으니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값싼 이유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봐. 그대가 구해주겠다 약속한 아이도 있지 않은가.”

“알고 있었어?”

“여신께서 본녀를 언제 이곳에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게야.”

이미 다 보았다는 뜻이었다.

“허니 다녀와서 이야기하게.”

“키스 한번 안 해줘?”

“지금 그대가 저지른 짓을 보고도?”

그 물음에 데이비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그녀가 화를 내는 건 핑계일 뿐이다. 신나게 쥐어패면서 분노가 거짓말처럼 많이 풀렸으니 말이다.

“그러면 힘이 날 것 같긴 한데. 내가 생각한 소재를 금방 찾을 거 같다.”

그녀는 데이비의 뻔뻔한 작태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채로 그의 입에 그녀의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따스한 촉감을 서로 주고받은 뒤에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 밤까지는 꼭 와.”

“음?”

“나머지 둘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본녀 때문에 며칠째 도망만 치지 않았는가.”

“괜찮아?”

“이거라도 쓰지 뭐. 색다른 경험도 될 터이니.”

그녀는 데이비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냈다.

그제야 페르세르크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데이비가 피식 웃었다.

“아…… 분신술법. 별로 안 좋아했잖아.”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에 데이비는 쓰게 웃으며 여신에게 말했다.

“저를 배신한 자애의 여신님. 그만 돌아가도 됩니까?”

그 말에 프리아 여신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물었다.

[결정했니?]

“혼란스럽긴 해도 결국 바뀌진 않을 겁니다. 다만 더는 숨길 이유가 없네요.”

그 말과 함께 데이비가 허공을 찢었다.

“이거…….”

[차원이 자기방어에 들어간 거야. 마냥 뚫고 들어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이후 페르세르크는 자신을 돌려보내 주려는 여신을 보며 물었다.

“여신님.”

그녀는 페르세르크를 쳐다보진 않았다.

“성녀가 만들어졌고, 이번엔 용사가 만들어졌으니.”

그녀가 물었다.

“어째 마왕 토벌 준비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 물음에 여신은 태블릿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아이들이 데이비를 토벌하리라 생각해?]

“그렇진 않겠지요.”

[대적자와 마왕의 시스템은 이제 폐기야.]

“한데 용사를 만드신 겝니까?”

[차원을 넘나들 수호자가 필요하긴 하니까. 숭고한 신념을 지닌 수호자가.]

자잘한 문제를 수호하는 수호자가 필요할 때도 됐지.

여신의 뜻을 납득한 페르세르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데이비가 균열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륀느 또한 같이 휘말린 탓에 원정대는 혼란에 빠졌다.

콰앙!! 쾅!!

“아악!!!”

데이비가 사라지면서 버프가 사라진 대가는 제법 뼈아팠다.

정확히는 본래 예측한 대로였다.

원정대는 상당한 출혈과 희생을 감수하고 진입을 결정했고, 사망자나 큰 부상자가 나오는 것도 예상했던 범위였다.

하지만.

“……좋은 곳으로 가라…….”

데이비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맹공세를 펼치는 데몬들로 인해 피해가 막심했다.

지진이 일어나며 생겨난 촉수들은 공격은 없었지만, 생기를 빨리는 느낌이었고 균열 속에서 나타난 거대 몬스터들은 극도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첫 희생자가 나오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어리지만 실력이 좋은 기사 하나가 데몬의 가시에 몸을 꿰뚫렸고, 대성녀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쇼크를 이기지 못해 사망했다.

극도로 어둡고 무거워진 원정대 분위기 속에서 대성녀는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뼈저리게 통감해야 했다.

“아아…….”

고작 한 명이 사라졌다고 이리 차이가 나는가.

“내가…… 내가 조금만 더 힘을 길렀다면…….”

초월급은 대체적으로 제멋대로지만 이곳에 파견 온 대성녀나 검성의 경우 굉장히 자기 헌신적인 인물이다.

“그런 말 말아요. 대성녀님이 없었다면 이미 죽었을 사람도 살아남았으니.”

물론, 그녀가 아무도 지키지 못한 건 분명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의 힘으로 인해 상당수의 상위기사들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완벽하게 지켜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목적지가 생각보다 가까운 거 같아요…….”

용사 아리스는 성검을 꽉 틀어쥔 채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의 기척을 느꼈다.

갈수록 저항은 거세지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두머리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는 거라곤 상당한 기척이 느껴진다.

“목적지가 코앞이다. 생각보다 각성 위치가 가까웠어. 놈이 각성을 마치게 되면 우리는 9마리에 달하는 우두머리 데몬과 데몬 로드를 상대해야 한다.”

아무리 아리스의 힘이 데몬에게 치명적이라도 각성을 마치는 순간 순식간에 포위되어 찢겨나갈 것이다.

그러니 늦기 전에 각성을 저지해야 했다.

“움직이자. 아리스.”

“응…….”

예측한 대로의 각성은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았지만 그건 우두머리 데몬일 뿐이다.

데몬 로드의 각성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그녀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정비를 마치고 빨리 진입하려 했다.

살아남은 원정대는 빠르게 베이스캠프에서 정비를 마쳤고 다시금 진입에 나섰다.

여전히 방해하는 놈들이 나타난다. 문제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점점 그 수나 저항이 거세졌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등한시하고 싸우는 기사들의 희생이 이어졌다.

그들은 본래 그들이 약속했듯 자신들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진입하기를 원했고, 원정대는 슬픔을 짓씹으며 파고들었다.

살아남은 상위기사는 고작해야 6명. 초월급 두 명과 용사파티 세 명이 전부였다.

고작 하루도 안 돼서 벌어진 사태였다.

“저게…… 데몬 로드…….”

원정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제단과 그 제단 위에 놓인 막대한 크기의 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척 보기에도 위험천만해 보이는 거대한 알과 그 알을 둘러싸듯 모여 석상처럼 굳어있는 우두머리 데몬들을 보니 섬뜩함이 일었다.

물론, 원정대의 진입과 동시에 돌처럼 굳어있던 그곳의 몬스터와 우두머리 데몬들 일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치 자기방어를 하듯 말이다.

“역시…… 우두머리 데몬들은 싸울 수 없다. 다시없을 기회다. 용사. 힘을 비축해라. 저놈들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길을 열게 해주마.”

검성이 금이 간 자신의 애검을 갈무리하고 예비용 검을 틀어쥐었다.

“대성녀. 보조 부탁하오.”

“맡겨주세요…….”

굳은 얼굴로 그녀가 말하자 상위기사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의 목표는 용사파티가 데몬 로드의 알 근처까지 갈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것.

우두머리 데몬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지만 불가능해야 해야 했다.

-크아아아아앙!!!

돌처럼 단단한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우두머리 데몬 한 마리와 근처에 있던 수십 마리의 변이된 상위 몬스터들이 일제히 원정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검성은 숨을 짧게 들이킨 뒤 용감하게 쇄도했다.

아무리 초월급이라도 지금 그들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실제로 상위기사 중 일부는 벌써 베르울 저주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저항력인 높은 이들만 골라서 왔다곤 하지만 그 침식속도가 원정대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농도가 짙었다.

카아아아앙!!!

강대한 오러 블레이드가 우두머리 데몬의 접근을 틀어막으며 충돌한다.

동시에 용사파티원인 아리스와 오크 기르올, 페어리 마리는 그들이 만들어준 틈을 타고 빠르게 파고들었다.

속이 반쯤 비치는 알 속에는 마치 성경에 나오는 악마와 같은 몰골의 괴물이 잠들어있었다.

저게 깨어나게 두면 안 된다.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아리스는 미소도 지운 채 소리쳤다.

“맡길게요!!”

우두머리 데몬이 황급히 몸을 돌려 아리스의 진입을 막으려 했다.

그들도 생존에 필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봐. 어딜 보나.”

쩌억!!!

아무리 힘이 우두머리 데몬 쪽이 강하다곤 해도 초월급 용병의 저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우두머리 데몬은 어떻게든 자신을 귀찮게 하는 원정대원을 떨쳐내고 자신의 왕을 보호하려 했지만, 목숨을 등한시하고 달려드는 이들의 공격을 완전히 걷어내진 못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사 둘이 빠르게 희생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 덕에 검성은 대성녀의 버프를 받아 우두머리 데몬의 단단한 날개에 큰 상처를 남겼다.

용사의 힘이 깃들지 않았기에 치명적이진 않지만 상처는 분명 컸다.

같은 시각.

데몬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던 용사파티의 앞에도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처럼 굳어져 있던 우두머리 데몬 두 마리가 추가로 몸을 일으킨 것이다.

데몬 로드의 각성을 위해 굳어있는 변이된 몬스터는 추가로 늘어나지 않았지만, 우두머리 데몬 두 마리가 난입한 시점에서 사태는 심각하게 굴러갔다.

“아리스. 우리가 길을 터주마.”

페어리 마리와 오크 기르올은 그녀에게 받은 힘을 활성화하며 긴장한 듯 말했다.

“이 싸움은 데몬 로드만 처리하면 우리의 승리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우리의 존재 목적은 너의 보조다.”

오크 기르올의 말에 마리도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 없어. 아무래도 각성이 임박한 거 같아. 저들도 필사적이겠지.”

마리의 설명대로 알의 고동이 점차 커지고 있다. 아리스는 절대 안 된다며 소리치고 싶었다.

우두머리 데몬 하나 때문에 사제이자 동료, 친구였던 발린이 사망했다.

그런데 그런 놈들 두 마리를 고작 두 명에게 맡기는 미친 짓을 어찌할까.

그런데도 안된다고 할 수 없었다.

이를 깨질 듯 강하게 깨문 아리스는 포효를 내지르며 돌진하는 기르올과 마법을 보조하는 페어리 마리를 뒤로한 채 고작해야 10미터 남은 알을 향해 파고들었다.

당연 우두머리 데몬들은 아리스를 우선적으로 막으려 들었지만, 기르올과 마리의 저력은 그들의 발을 묶을 수준은 되었다.

촤악!!!

대신 기르올의 팔 한쪽이 잘려나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빨리 가라!!”

기르올의 외침에 아리스는 눈물을 머금고 검에 백색의 휘광을 휘감았다.

그리고, 데몬 로드의 알을 향해 맹렬하게 파고든 뒤 검을 휘둘렀다.

[성광의 검궤]

[일섬필광]

그녀가 내보인 필살의 일검이 알을 향해 파고든다.

데몬과 변이된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일검은 그대로 반투명한 알에 적중했다.

쩌적!!!

그리고.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다.

하지만 아리스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방금 전 알이 깨진 건 그녀의 힘으로 깨진 게 아니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터어엉!!!

동시에 무형이 충격파가 그녀를 튕겨냈고 그녀는 수차례 구르며 튕겨 나갔다.

“아윽…… 커헉…….”

끔찍한 격통에 숨을 쉬지 못하며 아리스가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 너머로 알의 균열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고, 잠들어있던 거대한 데몬이 천천히 눈을 뜨며 알을 깨뜨린다.

아리스의 힘으로 알이 깨진 게 아니었다.

그녀가 공격하기 직전…… 각성을 끝마친 것이다.

콰직…… 콰지지직!!!

데몬 로드는 순식간에 알을 박살 내며 천천히 나왔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가히 끔찍할 정도로 짙고 어두웠다.

“예언서…… 데몬 로드가 이 땅에 강림했을 때…… 종말이 시작될 지어니…….”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되면서까지 우두머리 데몬을 상대하던 이들은 허망한 얼굴로 데몬 로드의 각성을 바라보았다.

콰앙!! 쾅!!

동시에 무형의 힘이 안 그래도 빈사 상태이던 원정대 대부분을 지면에 처박듯 짓눌러버렸다.

“커헉…… 이게 무슨 힘이…….”

몸에 상처가 있고 지쳤어도 이리 일방적으로 제압당할 거라곤 여기지 못했는지 검성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순식간에 베르울 저주가 심화되듯 온몸이 검게 변하는 기사들을 보았고 자신과 대성녀의 몸에도 변화가 생기는 것을 감지했다.

그건 용사파티도 마찬가지였다.

베르울 저주에 면역이나 다름없는 그들 또한 몸 곳곳에 검은 증세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데몬 로드의 저주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던 것인가…….

전의를 상실하고 멍하니 서 있는 아리스와 다르게 다른 원정대는 압력조차 견디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갔다.

이윽고 알에서 나온 데몬 로드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굳어있는 우두머리 데몬 하나를 한 손에 틀어쥐고는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리고는 아리스를 향해 히죽, 웃었다.

마치 사냥감을 놀리는듯한 모습이었다.

“대…… 대…… 대성녀님!!”

그때 겁을 먹은 것처럼 파르르 떨던 용사 아리스가 소리쳤다.

“최후의 빛을 쓸 거예요!!”

최후의 빛 들어본 적이 있었다. 용사의 힘과 혼을 불태워 일대 전체를 정화시켜버리는 최후의 힘. 당연 그 대가로 용사의 혼은 조각나듯 찢겨 나갈 것이다.

“우린 패배했구나…….”

그제야 자신들의 패배를 직감한 사람들은 숙연한 분위기였다.

“어차피 죽을 거. 뭐라도 하고 죽어야겠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 대의 용사들이 저 괴물 놈을 토벌할 발판이 된다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죽어가던 기사의 외침에 두 명의 초월급 용병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해요. 용사. 당신만큼은 살려서 내보내고 싶었는데.”

그녀의 말에 용사 아리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기르올, 마리.”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제일 고통스러운 건 너니까.”

이들은 정화와 함께 소멸될 일대에 휘말려 죽는 게 전부지만 용사는 그 혼부터가 조각나리라.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마리가 눈물을 한 방울 떨구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아리스…… 네게 너무 큰 짐을 지웠어.”

천천히 다가오며 데몬 로드가 아리스의 앞에 섰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빛을 가릴 듯 덮었다.

이윽고 아리스는 절도있는 도작과 함께 검을 바르게 아래로 향하게 했고 자신의 안에 있는 힘을 모조리 불사르기 위해 힘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쩌적.

그림자에 가려져 어두워진 아리스의 뒤쪽 공간에 금이 간다.

마치 빛이 사라지고 어두워진 용사의 빛에 한 줄기 빛이 더해지듯 그림자 안쪽부터 환하게 비치는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가락이 그 사이로 삐져나와 마치 단단하게 고정된 미닫이문을 힘으로 잡아 열 듯 허공을 벌리기 시작했다.

“내가 약속했잖아.”

다 지켜준다고. 완전히 지키지 못한 지금 시점에서 얼마나 열이 뻗치는지 넌 모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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