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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454화 (1,454/1,559)

제 1454화

종말을 부르던 세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졌다.

제멋대로 폭주하던 시스템을 강제로 휴면상태에 빠뜨린 대가였다.

물론, 그렇게 휴면상태로 바꾼다고 하여 문제가 되는 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잠시 멈추는 것일 뿐.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차원이 향후 또 폭주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질 테니까.

‘오늘은 약속도 있고.’

페르세르크가 오늘 밤만큼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라 하였던가.

나는 내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며 피식 웃었다.

한 손에 초단이를 든 채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비화가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이제 속 시원해요?”

“그러네. 속 시원하다.”

내 속 편한 대답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렇게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아리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데이비…… 끝난 거야?”

“그래. 끝났다. 이제 데몬은 없고, 몬스터를 변이시키던 것도 사라졌어.”

내 설명에 아리스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꿈틀거리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아…… 그럼 이제 더 이상 아프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다는 거네?”

“그렇겠지.”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다른 이들은 나를 신이라 여기며 극도로 경배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아리스만은 달랐다.

“아…… 아리스!”

“용사님! 저분은 신님이십니다! 최소한의 예의를…….”

“응? 하지만 데이비는 그런 거 싫어하는데?”

그녀의 말에 대성녀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치?”

“아니?”

“어…… 진짜?”

깜짝 놀란 듯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그럼 나도 고개 숙여?”

“장난이야.”

“이 씨!”

“용케 알아봤네.”

“헤헤. 내가 눈썰미가 좋은 편이지.”

그녀는 헤헤 웃어 보였다.

“고개 드세요. 나는 당신들이 아는 프리아 여신이 아닙니다.”

“소, 송구하오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저희로선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못한 터라…….”

“그럼 그리 계시던가.”

“화…… 황공하옵니다.”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과한 예우는 오히려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할 수 있다는걸 잊지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내 뜻을 받아들였는지 대성녀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때 아리스가 주저앉은 채로 맑게 갠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검을 들 이유도 사라졌네…… 그럼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

그 물음에 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한창 놀고 공부할 나이지. 돌아가면 하고 싶은 것들을 다시 해봐. 늦은 나이는 아니니까.”

비록 오랜 시간 전장을 굴렀지만, 그녀는 아직 창창했다.

“글세…… 이렇게 끝날 거라곤 생각지 못해서.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본 적도 없어.”

“평소에 생각해둔 게 아예 없나?”

“음…… 글쎄…….”

오랜 시간 검을 잡고 싸워온 탓에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도 못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육체는 치료했다지만 다들 지쳐있을 거다. 적이 사라졌으니 긴장도 풀렸겠지. 그러니 베이스캠프로 돌아가 푹 쉬고 내일은 극지를 벗어나. 당장은 오염되어있겠지만 빠른 시간 안에 울창하고 맑은 숲으로 돌아올 거다.”

아마 대륙 각지에 있는 변이 몬스터들은 근본이 되는 에너지체와 이어지지 않아 사라지지 않았겠지만, 더 늘어나지 않으리라.

“그…… 그리하겠습니다!”

대성녀가 검성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한다.

“괜찮으신가요?”

“육체는 괜찮소만…… 심력 소모가 크군…….”

“내가 부축하죠.”

“부탁하지.”

마족과 엘프가 저렇게 화기애애한 모습은 참 신기하기 그지없다.

원정대는 원정을 떠나 극지 심층부로 들어오자마자 설치했던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전령을 제외한 이들은 당장이라도 이 숲을 떠나고 싶어 하는 낌새였지만 심적으로 극한으로 지쳐있는 그들은 휴식이 필요했다.

“요새로 돌아가는 건 하루 뒤다. 다들…… 고생이 많았다.”

기사들을 향해 검성이 말했다.

“오늘만큼은 두 다리 펴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와아아아아!!!”

수는 많지 않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살아남았고, 적을 격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뻐했다.

“아…… 나는 집에 돌아가면 진짜 다 때려치우고 맛집이나 찾아다니면서 연애나 할 거야.”

“부족으로 돌아간다. 이번 일로 내 부족함을 남김없이 깨달았으니 더욱더 수련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살아남은 용사 파티원 기르올과 페어리 마리는 자기들의 욕망을 드러냈다.

페어리 마리던 오크 기르올이건 아직 어린 녀석들이지만 적어도 그들은 용사에 비하면 상황이 나았다.

아리스와의 약속대로 그녀를 구해주었음에도 내가 바로 떠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공허한 눈동자.

평생의 염이라 생각했을 데몬을 모두 처단하고 난 후의 그녀는 극도의 공허함에 노출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은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녀도 인생을 모조리 베팅한 용사 일이 끝나버렸으니 말이다.

아직 어린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것조차 몰랐다.

본인은 기뻐하고 있고, 잘 되었다고 말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끝없는 의문에 시달리고 있으리라.

“아리스.”

“응?”

“왕궁으로 돌아가. 용사로서 네 업적을 온전히 치하받아라.”

“데이비가 다 한 거잖아.”

그녀의 말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베이스캠프로 향하던 원정대원들이 모두 멈췄다.

“원정대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위대한 초월자시여.”

“이번 일에서 내가 한 것은 오로지 당신들을 보조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따라서 나는 데몬 로드를 제압한 적도. 미친 세계가 세상을 리셋시키려는 걸 처리한 적도 없습니다. 당신들 또한 본적이 없고.”

내 말에 대성녀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주제 넘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입을 다문다.

“내 말 뜻 이해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저희는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이해할 수가…….”

“이 세상은 당신들의 세상입니다. 위기의 순간 신이 내려와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말은 번지르르하죠.”

나는 빙그레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진실이 되었을 때. 다음 위기에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할 거 같습니까.”

“아…….”

극한의 상황에서 신께서 내려와 주실 거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은 신이 만들었으나 당신들의 세상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마세요.”

스스로 설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스스로 서라 말하자마자 개입해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모순이었다.

“용사 아리스.”

“어…… 응?”

“비록 세계의 용사 직은 모두 끝마쳤으나 넌 아직도 용사다.”

“아…….”

내 말뜻에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감쌌다.

내가 가호를 새겨넣은 걸 기억하는 것이다.

“데이비는…… 아니 데이비 님은 신님이시지?”

“편한 대로 생각해.”

“그럼 이제 나는 데이비 님의 용사가 된 거야?”

“그래.”

“그럼 내게 목적을 부여해줘.”

그녀가 결연할 얼굴로 말했다.

이후 나는 슬슬 벗어나야 할 때임을 깨닫고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다른 애들처럼 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사람 만나서 풋풋한 연애도 해. 세상사도 배우고, 아카데미에서 공부해도 좋다.”

“어…… 어?”

“다만 그렇게 했음에도 네가 부족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거칠게 헝클어뜨리던 손을 멈춘 뒤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자로 받아주마.”

네가 성년이 되어서 모든 차원을 넘나들며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 정도는 지원해주겠다.

그게 단순히 정에 휩쓸려서 구한 내가 그녀에게 질 책임이었다.

무책임하게 일만 벌이고 놓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니까.

나는 흐릿해지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데…… 데이비?! 데이비!! 어디 가는 거야!!”

“잊지 마라, 아리스. 넌 아직 애다. 한창 놀고 웃어야 할 나이라고.”

물론, 나는 그녀를 용사로 만들었고, 언젠가 나를 대신하여 차원을 돌며 세상에 구원의 손길을 뻗을 진짜 첫째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녀의 숭고하고 새하얀 신념은 꽤 좋아하는 편이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너도 참 묘한 연이다.”

다만, 데몬을 처리하고 당당하게 개선한 그녀가 만약 사람으로서 살고자 한다면.

그 또한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확률은 낮겠지만.

그리 떠난 내가 차원의 틈에서 여신의 성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여신이 조용히 다가와 나를 끌어안는 걸 보았다.

[잘했어. 대견해.]

“저 잘한 거 맞습니까?”

[성장하는 네 모습을 보니 뿌듯해.]

그녀가 살짝 떨어진 뒤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제가 가져도 됩니까?”

나는 데몬 로드의 핵에 담겨있던 거대한 에너지가 응축된 특수마석을 보여 주었다.

힘의 척도도 상당하고, 순수함도 굉장하다. 불순물을 정제한 힘은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 집약체 그 자체였다.

“페르세르크에게 줄 겁니다.”

[네 뜻대로 하렴.]

그것이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집어주지 않지만, 그녀는 늘 그러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그저 지켜보는 존재.

그것이 프리아 여신이었으니까.

* * *

하인스 영지로 돌아온 나는 아리스의 일을 머릿속으로 깔끔하게 지웠다.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아리스가 아니었다.

오늘 밤 기다리겠다고 말한 페르세르크의 의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무방어전까지는 아니지만…….”

쓴웃음을 지어 보인 나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머리카락을 다섯 올 정도 뽑았다.

그리고는 후욱 불어 내 의지를 심어 넣는다.

육체의 분열. 분신체.

저것들은 머리카락을 매개체로 만든 몸체이긴 하지만 모두가 나이기도 했다.

다섯이 모여 서로를 바라본다.

“침 삼키고 긴장해라. 자존심 상하게 밀리는 놈은 내가 먼저 죽인다.”

이 경고는 분신체에게 하는 게 아닌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분신체라곤 해도 내 의식을 분열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다섯 모두가 나이며, 내가 곧 다섯이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런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야시시한 호랑이 복장을 한 에이리아였다.

“그…… 서방님. 저는 맹수예요.”

“어…… 어어.”

긴장하고 들어온 내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잡아먹어도 되나요?”

“그…….”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있자 에이리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귀를 추욱 늘어뜨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 아아……. 먹이가 다, 다섯. 정말 많네요…… 포식할 수 있겠어요…….”

절대 본인이 생각한 멘트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에이리아는 이런 걸 스스로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 * *

데이비가 떠난 이후 원정대는 묘하게 싱숭생숭한 분위기를 지울 수가 없었다.

“아리스.”

“응?”

“왕성에 돌아가면 발린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캐슈비어 알 먹으러 가자.”

페어리 마리의 제안에 아리스는 쓰게 웃었다.

“그럴까?”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은데.”

그 말에 아리스는 자신의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있잖아, 마리.”

“응.”

“우리 꿈꾸는 건 아니겠지?”

“꿈 아니야. 아까 나도 볼을 얼마나 꼬집어봤는지 몰라.”

“히히 그런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이비가 있었잖아.

하지만 그는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의 투쟁을 가엽게 여긴 신이 내려와 우리를 도왔다라…… 솔직히 어디 가서 이야기해도 못 믿을 이야기이긴 해.”

그녀의 미소에 아리스도 쓰게 웃었다.

누구도 쉬이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직 은혜도 못 갚았는데.”

그때였다.

“아리스. 너 설마…….”

“응?”

“반한 건 아니지?”

그 말에 아리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얘는, 정신 차려. 데이비, 아니 데이비 님 곁에 있던 아름다운 소녀 못 봤어? 여신님이겠지만 아빠라고 했잖아.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는 거 아니야.”

신의 존재는 알려진 게 없다. 어떤 존재인지. 그들이 부모자식이 있는지조차.

다만, 마리나 아리스가 보기에 데이비는 강대한 힘은 지녔으나 그 모습은 오히려 신보다는 인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아리스가 헤헤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솔직히 말해. 내가 널 하루 이틀 봐온 게 아닌데?”

그 말에 아리스는 침묵했다.

“응, 아니야. 오히려 따스하고 듬직한 게 아빠 같았어.”

“아빠라…… 아빠라고 하기엔 너무 젊은 외견이긴 한데…….”

“신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데이비는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 않을까?”

“그렇긴 하네…….”

“분명 내가 도저히 길을 못 찾겠으면 제자로 삼아준다고 했지?”

“너 설마…….”

“마리. 나 배우고 싶어. 그 사람의 검과 마법을.”

그녀의 미소에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로 뭘 하게?”

“많은 사람들을 구할 거야.”

그녀가 눈을 반짝인다.

“만약 데이비가 신님이 아니라고 해도 대단하잖아. 우리 차원을 구하기 위해 온 진짜 용사님 같았어.”

페어리 마리는 용사 아리스의 변화를 빠르게 캐치한 편이었다. 목적을 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싸우는 것뿐이다. 어린 그녀가 선택할 건 뻔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충동적이고 굉장히 다급한 결정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바람이라면 마리는 존중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성급했다.

“데이비 님…… 후…… 영 입에 붙질 않네. 데이비는 네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간 거야.”

“응?”

“우선은 네 인생을 살아봐. 그 후에 결정해. 시간은 많잖아.”

“그렇게 할게. 그런데. 지금 데이비는 뭘 하고 있을까.”

나긋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물음에 마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글쎄. 적어도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일검에 세상을 가르는 대단한 사람이잖아.”

“그렇겠지? 얼른 배우고 싶다…….”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물론, 두 사람은 데이비가 5:3으로 자존심을 건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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