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5화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것은 마치 빛이 머금어져 있는 듯 연한 보랏빛이 감도는 은발의 뒤통수였다.
마치 복숭아 같은 향 때문에 잠에서 깬 모양이다.
아. 페르였구나.
다시금 졸려오는 시선에 품에 안은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자 그녀는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침묵했다.
그러던 중 전날의 일이 떠오른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내 분신체를 마치 안는 베개마냥 끌어안고 잠들어있는 일리나와 에이리아도 보였다.
“데이비. 잠에서 깼으면 그만 놓아주면 좋겠는데.”
“아…….”
그녀의 심통한 목소리에 나는 더욱 그녀를 끌어안았다.
“누구 마음대로. 한 시간은 더 기다려.”
“……놓아.”
끙끙대며 그녀가 몸을 돌린 뒤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그런 뒤척임에 곤히 잠들어있던 두 사람도 천천히 깼다.
이후 나는 남아있는 두 분신체까지 모두 없앤 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찬물을 그대로 맞으며 벽에 머리를 들이박고는 중얼거렸다.
“아이고 삭신이야…….”
부담이 보통이 아님을 알면서도 미소가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꽤 뻐근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다만 트로이에 너무 한정적이었던 만큼 하인스 영지 내의 일을 등한시하는 건 영지민들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여기 이번 예산안 보고서류입니다.”
“이건 왜 이렇게 많이 나갔어.”
“그게…… 축제 기간이라 각 동아리들이 예산신청을 한 거라서요. 그 외에도 교수들의 급여나 비품 예산 보수 예산 등등 생각 이상으로 많이 나갑니다. 혹, 하인스 아카데미로 들어오는 기부금으로 어찌해볼까요?”
“아니, 그렇게 받기 시작하면 속부터 썩어 문드러지는 건 한순간이야. 그리고 간만 보는 기부금 받아봐야 크게 효과도 없고.”
“하지만 이렇게 운영하면 아카데미는 만성적자입니다. 자칫 영지 운영에도 큰 지장이…….”
하인스 아카데미는 다른 아카데미에 비해 그 등록금이 싼 편이다.
아니, 일부 학생들에게 한해서는 거의 무료에 가까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무리 하인스가 재정적으로 풍족해도 미래를 보지 않은 행동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때문에 하인스 아카데미에서 취하고 있는 스탠스는 졸업생들을 원하는 곳에 취직시켜주는 것으로 그 대가를 받는 것.
말이 편해 보이지 사실 그리 벌이가 좋은 것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언제까지고 유능한 학생만 오는 건 아니었으니까.
“에이미.”
“네?”
“아카데미에서 필요로 하는 연간 예산은 이게 전부야?”
“월별 예산이세요…….”
“그렇단 말이지…….”
아무래도 하인스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들만으론 유지에 하자가 생길 것 같았다.
여러 왕국에서 전쟁고아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초창기엔 큰 지원금을 내주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쪽 국가들에도 예산이 떨어지기 시작할 터.
한번 목줄이 끌리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파진다.
“저…… 저하. 외람되지만 이 같은 경영은 좋지 못해요. 다른 요소는 몰라도 하인스 아카데미는 정말로 소모가 큰 사업이니까요.”
“등록금을 올리라는 말로 들리는데?”
“잔인한 말이지만 그렇습니다.”
땅 파서 학교를 운영할 순 없으니까.
이에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한번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곤 생각했지.”
“네?”
“됐어. 이건 내가 생각해볼 테니까 다음 안건 가져와.”
“아 넵! 미식연구회에서…….”
“또?!”
“그…… 이번에 굉장히 인기가 많은 제품을 만들어서요. 아무래도 해외나 타 영지에 수출하면서 꽤 벌이가 있을듯싶어요.”
또 사고 친 줄 알았는데 꽤 큰일을 해냈다.
유리아 헬리샤나. 그녀의 실력은 확실하니까.
“어떻게. 이걸로 벌어들인 예산으로 일단 충당할까요?”
“그 정도로 안 좋아?”
“저금은 필수니까요.”
없다고 영지가 무너지는 수준은 아니지만, 향후의 사태를 대비하면 저축은 필수였다.
에이미에게 자잘한 보고를 받은 뒤 한참을 고민해본다.
근본적으로 생산성이 있는 다른 것들과 다르게 아카데미는 소모가 큰 편이다.
그렇다고 잘 운영하는 아카데미를 예산문제로 바꾼다면 이건 자존심상 골치 아파진다.
“못해도 100년은 거뜬하게 운영해야지.”
에이미가 나가고 고민하기를 한참.
문이 열리더니 레이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잠깐 시간 될까요.”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책상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트로이.”
“어?”
“용사를 만드셨다면서요.”
그녀의 눈동자에 묘한 기류가 서린다.
“어…… 어, 그렇긴 한데.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진 않을 거야. 아직 어린애니까. 못해도 6년은 지나면.”
“…….”
비화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외곽차원에서 성흔을 받았다는 이유로 눈이 돌아갔던 모습도 떠올랐다.
설마. 진짜로?
내가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내 만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요. 나는 지지할게요.”
“어?”
“다만, 용사는 용사이니 선대였던 제가 이것저것 가르쳐줄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용사 레이나.
그녀는 한때 빛의 용사라 불렸었다.
비록 검에 대한 압도적인 재능을 과거 잃어버렸기에 지금의 일리나처럼 강대한 성장을 이룰 순 없지만, 그녀는 독자적으로 빛의 기검을 만들어 다루는 기술을 완성해냈다.
아마 아리스의 능력도 저것과 합쳐지면 굉장한 시너지를 내리라.
“이거 허락해주세요.”
그녀는 어떤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수호과. 대학원생 모집서?”
“네. 외곽차원에 있던 당신의 성녀와 이번에 새로이 생겨난 용사. 두 사람을 제가 가르칠게요.”
그 미소에 나는 서늘함을 느꼈다.
왜 하필 대학원생이라는 불안한 단어를 쓰는 건지. 비화의 우려대로 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가 왜 이렇게 지지를 하는 건지.
“너 설마…… 두 사람 불러다가 아카데미의 대학원생 좀비들마냥 굴릴 생각은 아니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때 요시아가 담당 교수이자 상관인 앨리스 대주교에게 얼마나 굴려졌는지 알고 있다.
그뿐일까. 테라리아 왕국의 막시모스의 동생 또한 대학원생으로 들어가고 몇 주 만에 반 좀비 상태로 교정을 거닐던 걸 본적이 있다.
“설마요. 저는 그렇게 굴리지 않아요.”
“그렇지?”
“반 죽여놓지.”
나는 바로 서류를 찢어버렸다.
“레이나.”
“네?”
“학장 연구실에 대학원생으로 들어올래?”
그 물음에 레이나의 표정이 환해진다.
“정말인가요?!”
“아니…….”
이걸로 확실해졌다.
레이나는 일단 독특한 방향으로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아마 대학원생이라는 명목으로 받은 다음 생존을 명목으로 죽도록 굴릴 것이다.
아직 어린 용사 아리스에겐 너무 가혹해 보인다.
* * *
팔란 제국.
에반젤린 올 라운은 하인스 아카데미에서 만들어진 특수한 마차를 타고 팔란의 황성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으 불편해.”
“많이 불편해?”
그녀가 드레스 곳곳을 건드리며 투덜거리자 일리나가 옅게 웃었다.
“연회에 들어서면 그보다 더 불편한 옷을 입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요. 편한 옷을 입어야지.”
“그렇지. 나도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하게 해주고 싶은데.”
일리나가 스산하게 웃었다.
“원래 사교회라는 게 그런 곳이야. 불편해도 웃어야 하는 지독한 자리. 가겠다고 한 건 에린이 너였지?”
“이런 줄 몰랐죠…….”
“경험이라 생각해. 그런 옷을 입는 건 호스트에 대한 예의니까.”
애초에 그런 번거로움이 있기에 일리나는 가지 않는 걸 추천했지만 선택한 건 에반젤린이었다.
“그렇죠……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수밖에…….”
에린이 추욱 늘어지며 투덜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하인스에서 오셨습니까.”
“맞습니다.”
집사의 대답에 황실을 지키는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시지요.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본래 기사가 직접 호위했었어, 보스턴?”
“엇! 저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화이트 버드 소속 기사는 일리나를 보자마자 반색했다.
“저하께서도 오셨습니까.”
“그래도 에린이 공식 첫 행사이기도 한데 곁은 지켜야지.”
“하하. 그렇군요.”
“그보다 왜 화이트 버드가?”
“그…… 어디 가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문제가 생겼어?”
“뻐꾸기가 울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일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뻐꾸기? 솔개가 아니고?”
“예.”
하나의 암호였다. 본래라면 어디 가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엄마. 뻐꾸기가 운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우선 들어가자. 보스턴. 그럼 경계 잘 부탁해.”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저하. 참고로 저하께서 부쳐주신 편지는 기사단장실에 잘 보관되어있습니다.”
“다 읽었으면 태워 이 미친놈들아…….”
“어떻게 그럽니까. 저희 기사단을 이끌던 분이신데. 정말로 그리하면 후대 기사단장이 피를 토할 겁니다.”
“…….”
미친놈들이라 생각하며 일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후 다시 마차가 움직인다.
“엄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음……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니야. 엄마가 해결할 테니까 에린이는 걱정 말고 참석하고 와. 가서 적당히 말맞춰서 대화 나누고 인사하고, 맛있는 거 먹고 나오면 다 해결되어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한 일리나는 숨을 짧게 들이쉬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엄마?”
“미안. 널 봐주는 건 아무래도 페르 언니를 불러야 할 거 같다.”
그렇게 말한 일리나는 곧바로 수정구를 활성화시켰다.
“언니. 저에요. 문제가 좀 있어서 그런데. 제가 보낸 좌표로 와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연락이 닿은 지 고작 3분.
3분 만에 허공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페르세르크가 워프 마법을 타고 나타났다.
8서클 마법인 워프를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이 대륙에서 극히 드물다.
“일리나.”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절 대신해서 에린이를 좀 돌봐주세요.”
그 말에 페르세르크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반젤린을 시야에 담았다.
“어…… 엄마…….”
“걱정 말려무나. 엄마가 있으니.”
“네에…….”
“전 그럼 화이트 버드 기사단 본부에 잠시 다녀올게요.”
“일리나.”
“네?”
“몸 조심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데이비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을 지녔음에도 페르세르크는 그녀를 걱정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던 탓일까, 일리나는 옅게 미소지은 뒤 곧바로 숨을 짧게 들이쉰 후 바닥을 박찼다.
순간적으로 작은 먼지가 일며 그녀의 신형이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순식간에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창공에서 곡예를 하듯 건물과 건물을 넘나드는데도 전혀 경보 따위 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도망쳐다녔는데. 이정도야.”
데이비와 일리나가 공국 이후로 재회했을 때.
그녀가 하인스 영주성을 월담한 건 사실 괜히 나온 기술이 아니었다.
스팍!!!
순식간에 기사단 본부에 도착한 그녀는 경계상태에 들어있는 기사들을 보며 걸어 나갔다.
“누…… 누구냐!”
경보가 울리지 않았음에도 누군가가 접근해오자 경계를 서던 기사들이 흠칫 놀라며 검을 빼 들었다.
“바든, 빅터.”
“저…… 저하?”
일리나의 정체를 깨닫고 나서야 그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저하라면 경보가 안 울리는 것도 정상이지…….”
“아직 실력이 녹슬진 않으셨군요. 역시 밤의 여왕의 재목.”
“둘 다 뒤지고 싶어?”
“아하하하!”
“한데 저하, 어인 일로 팔란 제국에…….”
“딸아이가 이번 연회에 참석해. 그런데 뻐꾸기가 운다는 말을 들어서.”
일리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본부의 정문이 열리며 수염이 지긋한 노령의 기사가 나타났다.
“아. 전달이 된 모양이군요. 본래 유념해두시라고 전달해드린 겁니다만…….”
“오랜만이야. 부사단장. 아니지, 이제는 기사단장이지?”
“저하께는 언제나 부사단장일뿐입니다. 하면……”
“우리 딸 첫 데뷔나 다름없어. 뻐꾸기가 울게 둘 순 없잖아.”
기사단장은 일리나의 미소에 식은땀을 흘렸다.
과거 성년이 되기가 무섭게 익스퍼터 최상급에 이를 정도로 천재였던 팔란의 금지옥엽이다.
하지만 소드마스터인 기사단장의 눈에 비친 일리나는 이제는 그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경지에 있다고 느껴졌다.
“그동안…… 대체 얼마나 강해지신 겁니까.”
“선조님의 덕이 좀 있었어. 덕분에 데이비와 부부싸움 할 일이 생겨도 꿀리진 않거든.”
“데이비 대공이 못되게 굽니까? 당장 기사단을…….”
“아니, 그냥 하는 말이야. 데이비는 나를 사랑해주고 있어. 나도 행복하고.”
일리나의 미소에 기사단장은 허허 웃어 보였다.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어쩔 수 없군요. 드시지요. 본래라면 출가외인이 된 저하께 정보를 넘기면 곤란하지만 제 재량으로 어찌해보겠습니다.”
“좋은 판단이야. 그리고 난 출가외인이라는 말 별로 안 좋아해. 팔란은 여전히 내 가족이고 내 집이니까.”
기사단 내부로 진입하자 순찰을 도는 기사단원을 제외하고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그녀를 보고 반색했다.
“저하!”
“오신 겁니까?!”
“세상에. 파괴 공주님께서 오셨으니 우리도 한시름…… 커헉!!”
기사단장의 안내를 받아 걸어가던 일리나가 근처에 있던 테이블의 찻잔을 자연스럽게 걷어차듯 날려 한 기사에게 맞춰버린다.
이에 깐족거리던 젊은 기사는 저항도 못한 채 데굴데굴 굴러 뻗어버렸다.
“죽고 싶으면 그렇게 불러, 바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