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9화
팔란 제국은 적이 많은 편이다. 물론 제국이 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팔란 제국이 가장 중앙에 있으며 많은 힘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린디스와 콘타스 사이에 있는 거대한 완충 지역. 그런 주제에 대륙 전역에 압도적인 입지를 내보일 수 있는 강대한 국가.
그리고.
일부 존재들이 반대하는 대륙 평화, 대륙연합을 주축으로 두고 있는 것이 팔란이었다.
물론, 팔란이 마냥 평화주의자인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피의 역사를 써 올린 티오니스 대륙에서 강자의 입지를 굳힌 팔란은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고 국가의 위상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출범한 것이 대륙연합이었다.
당연 지칠 대로 지쳐있던 린디스나 콘타스 역시 파란의 대륙연합에 찬동했다.
하지만 이 흐름을 극도로 거부하는 존재들 또한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반등을 꾀하는 중소규모 국가들. 정복욕을 숨기지 못하는 국가들에 해당하는 사안이었다.
그렇기에 일리나는 이번 테러 또한 팔란과 물의를 빚고 있는 중소규모 국가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연회장을 감싸는 거대한 결계는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저하. 아무래도 저희 마법사들의 실력으론 단시간 안에 저 결계를 부수는 건 어려울듯합니다…….”
테러 의심 정황은 있었으나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마치 그 모든 것을 놀리기라도 하듯 테러는 벌어졌고, 황성 내에선 테러를 일으킨 이들을 추적하고 잡아내기 위해 굉장히 부산스러웠다.
“팔란 황성의 지리. 방어 마법진의 위치를 교묘하게 피했다면. 이건 하루 이틀 준비한 게 아닌 거 같은데. 기사단장.”
“죄송합니다…….”
“기사단장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 황실 마법사들의 경계가 게을렀다는 뜻이니까. 살리반 오라버니는?”
“이미 대신들이 입궁하여 폐하와 상황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비밀리에 움직이는 건 불가할 듯 싶습니다.”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
아마 살리반은 계속해서 비밀리에 움직이는 이들이 있게끔 만들고자 했을 것이나 살리반에게 몰려간 황실 귀족들의 여파 때문에 더 이상의 그런 수는 취할 수 없게 된 것일 터다.
“페르 언니와 나는 연회장을 감싼 결계를 파훼해볼 테니 기사단장은 내가 알려준 통로를 타고 들어오는 것들을 모두 제압해.”
“알겠습니다. 저하.”
“위험하면 도망치고…… 괜히 목숨 걸지 말고.”
일리나의 씁쓸한 명령에 기사단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명령에는 강제권 따위 없다. 화이트버드가 그녀의 말을 따르는 건 그만큼 그녀의 인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리나는 에반젤린이 들어간 연회장. 결계에 갇힌 공간을 먼저 조사하고 있는 페르세르크에게 물었다.
“부술 수 있겠어요?”
“독특한 걸 넘어 정교하구나. 무엇보다, 너무 촘촘하게 이 황성과 이어져 있어.”
“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잘못 건드렸다가 내부가 터져버릴 수도 있고, 황성 곳곳에 연결된 부분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게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체 이런 마법진을 설치하는 동안 황실 마법사단은 뭘 한…….”
말을 하던 일리나의 말이 멈춰졌다.
“일리나?”
“황실 마법사 단장…… 분명 살리반 오라버니와 정적관계였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게야?”
“아직은 모르겠어요. 우선 결계를…….”
페르세르크는 다시금 자신의 마법을 발현시켜 균열과 접촉했다.
“30분. 그 안에 이 겉멋이 잔뜩 든 결계를 부술 테니 본녀에게 향하는 방해를 거둬주면 되겠구나.”
“그거면 쉽죠.”
동시에 어둠 속에서 서너 발의 화살이 정확하게 페르세르크를 향해 날아들었고 일리나는 검을 빼 들지도 않고 맨손으로 화살들을 낚아챘다.
“반란? 아니면, 외부? 뭐가 됐건.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에반젤린이야.”
일리나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차갑게 절제된다.
순식간에 검은 형체의 인영 서넛이 놀라울 정도의 호흡으로 일리나의 급소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왔다.
명백히 그녀를 죽이려던 공격이었다.
하지만, 일리나의 손에서 검이 쥐어지고 한번 백은의 빛이 번뜩인 그 순간, 그녀를 습격했던 테러리스트 셋의 몸이 양단되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온전한 시공격검을 다룰 수 있는 그녀의 저력은 고작해야 테러리스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 * *
마석등은 물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밝혀진 예쁜 촛불들마저 모두 꺼진 혼란은 당연 패닉을 불러온다.
그나마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능력에 어느 정도 자신 있다고 하는 녀석들도 당황하는 낌새가 가득했다.
단순한 정전이 아니다. 연회장 전체를 휘감는 이 불쾌한 기류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다른 곳도 아니고 파란의 황성이다.
팔란 내부에서 묵인한 게 아닌 이상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 아닌가.
그때였다.
파악!!!
방금 전까지 꺼져있던 마석등이 일제히 빛이 들어오며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그들에게 강렬한 눈부심을 부여했다.
동시에 일부를 제외하고 인상을 찌푸렸던 이들은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한 존재를 시야에 담았다.
그것은 해골이었다.
“꺄아악!”
“해…… 해골!”
하지만 그것은 그냥 해골이 아니었다. 명백히 안광을 띠고 있었고 살아 움직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해골은 조용히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놈은 뭐지?”
아무리 좋게 봐도 좋은 의도로 침입한 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에 가장 호기롭게 라티우스가 나선다. 조금 전 에반젤린에게 개쪽을 당한 것 때문에 상당히 열이 받아있는 상태였다.
“제게는 이름 따윈 없습니다. 뭐, 굳이 부르시겠다면 무명이라고 해주십시오.”
“무명?”
“예, 실례지만 여러분들은 각국 고위인사들의 자제분들이시지요.”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전부 죽어주셔야겠습니다.”
해골이 손뼉을 친다.
동시에 라티우스가 누구보다 먼저 해골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앙!!!
거의 중장기병이 돌진하는듯한 굉음과 함께 폭음이 울려 퍼졌고 해골은 요란스레 나타난 것치고는 굉장히 볼품없이 튕겨 나갔다.
콰앙!! 쾅!!
뒤이어 라티우스는 쓰러진 해골을 잘게잘게 부수듯 주먹을 내리쳤다.
“그만! 라티우스! 그는 이미 조각났다.”
한참동안 주먹을 내리꽂는 라티우스를 제지했다.
“후우…… 별것도 아닌 게.”
해골은 침묵했다. 이에 일부 아이들은 안도한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위험해 보이는 놈을 라티우스가 처리해준 것이다.
“죽은 건가?”
“아마 그렇겠지. 어떤 마법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다행이네. 그런데…….”
크로네스의 설명에 라티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결계는 안 없어지는 거지?”
“우선 내가 결계를 파훼해보겠다.”
이윽고 크로네스와 라티우스 두 사람과 자주 다니는 천재마법사, 크라마 린덴이 결계를 향해 다가갔다.
“조심해라 크라마.”
“걱정 마라. 내가 분석하지 못하는 결계학 같은 건 없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차가운 미소를 짓는 그를 뒤로한 채 크로네스는 다시금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신경이 쓰이던 소녀였다.
순백과 흑색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소녀.
딱히 이렇다 할 말을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녀가 신경 쓰였다.
그도 그럴 그것이 이곳에 온 대부분의 영애의 관심을 자연스레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 영애와 달리 그녀는 크로네스의 외관이나 분위기만 보고 빠져드는 다른 영애와 달랐다. 아니 오히려 그의 수준으로는 딱히 신경 쓸 것도 없다는 듯 고고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이런저런 핑계를 가져다 대며 자신이 에반젤린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에 유별나게 눈에 띄는 순백의 소녀가 보였다.
“이오샤 영애. 다친 곳은 없죠?”
“네…… 그런데. 에반젤린 영애. 구두 굽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던데…….”
“괜찮아요. 여분이 있으니까.”
값비싼 공간 주머니를 슬쩍 보여주며 웃는 그녀의 모습에 이오샤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에반젤린 공녀님은. 그보다 이 결계는…….”
“밖에서 아마 파훼를 시도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건 사실 결계가 아니에요.”
그말에 이오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에반젤린의 입이 열린다.
“방금 그거, 인형이에요. 사령술.”
그 말과 동시에.
“커헉?!”
결계를 간섭하려던 크라마 린덴이 저항조차 못 하고 나뒹굴었다.
동시에 연회장에 검은 로브를 입은 몇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는 끝났다. 미안하지만 다들 죽어줘야겠다.”
그렇게 말한 한 사내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듯한 가는 팔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사령 마나가 넘실거리듯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이내 연회장 전체에 검은 안개를 내뿜었다.
“어…… 어어?!”
당황한 이들 속에서 크로네스와 라티우스가 반사적으로 바닥을 박차며 그들을 향해 날아든다.
“본체냐? 그럼 이걸 제압하면 되는 거 아닌가?!”
콰앙!!!
묵직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멧돼지의 돌진과 같이 저돌적이고 뒤가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조금 전의 해골때와 달랐다.
“커헉…….”
한발 앞서듯 나선 거구의 로브인이 라티우스의 복부에 주먹을 박아넣은 것이다.
“꺼흑…….”
쿠당탕!!!
순식간에 라티우스가 튕겨 나갔고 뒤이어 수차례 검을 든 로브인과 검을 마주하던 크로네스도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견제하듯 밀려났다.
“그래도 불세출의 천재라더니 틀린 말은 아닌가 봐.”
로브를 입은 이는 빈정거리듯 검을 빙글빙글 돌리더니 말했다.
“뭐해. 빨리 안 옮기고.”
그말에 연회장 전체에 대규모 마법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 안에 있던 모두의 신형을 다른 곳으로 날려버렸다.
스팡!!!
반사적으로 이오샤의 팔을 잡았던 에반젤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이 내던져진 공간을 둘러보았다.
석재 벽과 어두운 공간.
이런 곳을 본 적이 있다.
던전. 그곳이었다.
“에…… 에반젤린 공녀님!”
“진정해요. 공간계 마법…… 아니 이건 공간마법이라고 하긴 애매하네요. 뭐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세요.”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을까.
침입자들은 단순히 학살하기보다는 모두를 뿔뿔이 흩어지게 날려버렸다. 7서클 마법사의 수준으론 이런 짓이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마법의 흐름 방식이 에반젤린의 시야에선 다르게 보였다는 점을 볼 때 이건 마법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오히려 특질능력자들의 초능력에 가까운 힘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마가 낀 게 틀림없어.”
에반젤린은 짜증을 부리며 공간 주머니에 넣어둔 편한 옷과 신발을 꺼내려 했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파란의 황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대체 이런 공간을 어디서 확보했는지 몰라도 지상이냐 지하냐 묻는다면 지하에 가깝다.
“던전인가요?”
처음엔 패닉에 빠져있던 이오샤였지만 어느새 평정을 되찾았는지 조심스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다.
“다만 팔란 황성에서 멀리 날려진 건 분명해 보이네요.”
“다른 이들도 이곳에 왔을까요.”
“아마 그럴 거예요. 중구난방으로 날리는 건 오히려 어려울 테니.”
그 말과 함께 가벼운 지구식 단화를 꺼낸 에반젤린은 보석이 달린 구두를 공간 주머니에 던져넣은 뒤 신발을 갈아신었다. 먼지가 가득한 던전인 탓에 그녀의 새하얀 순백의 드레스가 더러워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클린.
용언이 발현되며 그녀의 드레스에 묻었던 먼지들이 후두둑 하고 떨어져 내렸다.
“옷을 갈아입기엔 시간이 부족하네요.”
“네? 그게 무슨…….”
중얼거리던 이오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두운 던전 너머로 완전무장을 한 고블린들이 마치 행군하듯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엔 덩치가 큰 홉이나 트롤도 섞여 있었다.
“풀아머 고블린에 홉, 트롤까지?!”
“얼른 가야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저런 공세를 버티지 못할 테니까.”
과거 사람들을 구하려고 암흑신관과 싸우기까지 했던 그녀였다.
그녀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어디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에반젤린은 한 손을 튕기듯 뻗었고, 빛과 함께 검붉은 장검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공녀!”
스캉!!!!
그야말로 일순간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번뜩인 오러블레이드가 검기처럼 날아들었고, 접근하고 있던 몬스터들을 일거에 갈라버렸다.
“어?”
“어서 가죠.”
“어…… 네.”
떨떠름하게 대답한 이오샤가 황급히 에반젤린을 뒤따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