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8화
가르강티아의 기습적인 마법에 대처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완전한 대처는 실패했다.
예측은 했으나 너무 뜬금없었고, 생각 이상으로 용의주도한 마법이었다.
표식을 남기고 그것을 회수하면서 표식이 가해진 이들의 몸까지 전이시킨다는 방법은 페르세르크로써도 바로 해석하기 힘든 고위 마법이었다.
거대한 마법의 흔적만이 남은 공허한 공간.
페르세르크는 말없이 팔에 생긴 멍 자국을 보며 붕대를 감았다.
타박상은 아니었다.
무리하게 마나 싸움을 하면서 생긴 몸의 무리였다.
“하…….”
대부분의 영식과 영애는 보호했지만 네 명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크로네스 왕자와 문제가 많던 베르타스 공작 영애. 페트릭 가문의 이오샤와 린디스 제국의 후작가 영애인 라우라 멜.
하필이면 크로네스 왕자를 놓고 경쟁하던 두 영애였고 이 둘을 상당히 싫어하는 이오샤가 휘말렸다.
본래라면 막아낼 수 있었을 터였다.
부상까지는 피할 수 없겠지만 엄연히 대처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트롤러 하나만 아니었다면.
“할 말이 있으면 해봐. 대체 당신의 그 어리석은 판단으로 벌어진 이 사태에 대해서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상당히 덩치가 큰 소년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시선을 애써 피했다.
“말해보라고!!”
그리고 그런 그의 멱살을 마치 작대기 휘두르듯 잡고 흔드는 에반젤린의 눈동자엔 서슬 퍼런 살기가 서려 있었다.
“네까짓 놈 살리겠다고 휘말린 이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다 지켜준다고!”
“으…… 으아아! 이거 놔!”
급기야 소년은 패닉이 왔는지 에반젤린의 손을 떨쳐내고 도망치려 했다.
어이가 없는 대처에 에반젤린이 그를 집어 던져버리려 들자 곁에 있었던 라티우스와 크라마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 말린다.
“진정하십시오. 공녀!”
“이봐! 진정해! 그러다가 저놈 진짜로 죽어!”
“이거 놔! 저 새끼 때문에 엄마 팔에 상처 난 거 안 보여?!”
에반젤린이 놈을 놓치듯 놓자 거구의 소년은 허겁지겁 도망치더니 제 몸보다 작은 가구에 몸을 숨기며 소리 질렀다.
“지켜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놓고 적의 마법에 대처 하나 못하다니!! 이건 약속과 다르지!”
그의 외침에 에반젤린의 움직임이 우뚝 굳었고 크라마가 흠칫 놀라며 에반젤린에게서 물러났다.
“다시 지껄여봐. 왕자.”
에반젤린이 그대로 용신검을 뽑아 들고 걸어 나가자 거구의 소년이 비명을 내질렀다.
꼴에 왕자라고 자존심을 내세우도록 교육을 받아왔겠지만 에반젤린에겐 눈앞의 트롤러가 왕자건 평민이건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흐…… 흐아악! 누…… 누구 없는가! 나를 지켜라! 나는 고귀한 혈통…… 꾸어억!!”
다급히 소리치던 소년의 얼굴에 그대로 라티우스의 주먹이 꽂혔다.
이후 라티우스는 에반젤린이 나서기도 전에 미친 듯이 그를 짓밟으며 소리쳤다.
“닥쳐! 좀 닥쳐 개자식아!”
“크……크억! 이……일개 귀족가의 자제 놈이 감히 일국의 왕자인 이 몸을!”
퍽퍽!!
라티우스의 손속은 가차 없었다.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지만 실상은 달랐다.
‘미친 새끼 그 입 좀 다물라고! 자존심을 세울 때가 있지!’
지금 그가 나서서 소년을 패지 않았다면 필시 몇 초 후 놈의 목이 허공을 날았으리라.
그만큼 소년은 자신이 선을 공중제비 돌 듯 넘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었다.
물론. 라티우스의 입장에선 아무리 개자식이라도 죽게 둘 순 없기에 손을 쓴 것이지만 에반젤린은 그딴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
“라티우스 영식. 비켜요.”
“아…… 아닙니다. 공녀! 이놈은 내가!”
반사적으로 존대가 나갈 정도로 서슬 퍼런 기세에 눌린 라티우스가 소리치지만, 그의 몸은 에반젤린과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굳어버렸다.
“두 번 말 안 해, 비키라고.”
처음 그녀와 대적했을 때와는 급이 다른 살기가 주변을 짓누른다.
아, 애초에 그녀는 멈출 생각 따윈 없었구나.
굳어버린 그를 향해 에반젤린이 다가갔다.
그리고, 한순간 검붉은 용신검이 거구의 소년의 목에 겨누어진다.
“그래도 일국의 왕자니까 유언은 들어줄게. 지껄여봐.”
“이……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은가!”
“반대로 물을게. 엄마 몸에 저런 부상을 남긴 네가, 우리 아빠한테서 무슨 수로 살아남을래?”
“흡?!”
“분명 말했지. 움직이지 말라고, 주변에 있는 마나 진식 함부로 건드리거나 밟지 말라고.”
일의 발단은 간단했다.
가르강티아가 자신의 언데드에 빙의해 회의를 관망하고 있던 그 시각.
그는 다른 방면으로 몰래 표식을 새겨둔 몇몇 영식과 영애들을 기점으로 강제 전이 마법을 발현시켰다.
그가 만든 독자적인 마법으로 실상 그의 경지는 페르세르크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있었다.
마법이란 준비를 많이 한자가 이기는 법.
놈의 독특한 전이 마법은 페르세르크가 설치해둔 은폐 위장 방어를 모조리 뚫고 발현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지금 쓰러져있는 거구 소년의 몸에 특수한 마법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생긴 거대한 마법의 빛에 당황한 그가 패닉에 빠져 엉엉 울며 빨리 자신을 살리라 소리치자 결계를 유지하던 페르세르크가 황급히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 보는 마법이며, 그녀는 데이비처럼 엄청난 속도의 디스펠이 불가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이런 강제전이를 카운터칠 수 있는 마법을 빠르게 준비한 것이다.
암 왕국에서 온 거구의 왕자 굴롬은 자신의 몸이 터질 거라며 미친 듯이 소리 질렀고 페르세르크는 그를 진정시키며 그를 중심으로 카운터 마법진을 펼쳤다.
‘절대 움직이지 마라. 지금 움직이면 다른 이들이 휘말릴 수 있다.’
“네가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이 사태가 벌어지진 않았을 거야.”
그랬다. 그가 움직이지만 않았다면 페르세르크가 마법전에서 타격을 받을 일도, 네 명의 영애와 영식이 강제전이를 당해버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겁에 질려 자신의 몸을 휘감고 관통하는 페르세르크의 마나와, 그를 매개체로 발현하는 광역 전이 마법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페르세르크의 당부를 무시. 급기야 마법진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본래 마법이라는 게 디스 팰 이 더 어려운 법이다.
당연히 좌표를 고정시켜놨던 페르세르크의 마법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무너졌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냥 두면 다른 이들조차 다칠 수 있기에 페르세르크는 그것을 한쪽 팔에 가두듯 잠가 폭주를 억눌렀다.
그 때문에 한쪽 팔의 혈관이 여럿 터진 셈이다.
그리고, 그가 방해해버린 탓에 결국 일부 발현된 전이 마법에 4명의 남녀가 휘말렸다.
스파르트 왕국의 왕자 크로네스.
팔란의 황실 마법사단장의 딸이자 아직도 이 사태의 현실을 모르고 있는 베르타스 공작 영애.
베르타스 공작 영애와 함께 크로네스 왕자에게 교태를 부리던 린디스의 후작가 재녀인 라우라 멜.
마지막으로 이 셋 모두를 싫어하던 이오샤 페트릭이었다.
가르강티아의 마법도 페르세르크로 인해 완성되지 못했기에 일부만 전이되었고 그 대상이 무작위였다지만 하필이면 조합이 끔찍하기 그지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암 왕국의 왕자 굴롬은 어떤 의미로는 단순한 배신자, 언데드 이상으로 악질이었다.
“거…… 겁이 나는 걸 어찌한단 말이냐! 나…… 나는 왕자다! 암 왕국의 위대한 혈통! 내 몸에 생채기라도 난다면 네년이 책임질 수 있단 말이냐?!”
“그럼 암왕국이 지도에서 사라지면 다 해결되는거네? 넌 망국의 왕족이 되는거니까. 책임을 질 필요도 없는거지.”
“흐아아악!!”
평소 이상으로 격노한 에반젤린의 피어가 그를 짓누르자 그는 뻔뻔하게 몸을 웅크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에 에반젤린이 그의 목을 날려버리려던 찰나.
“에린아. 그만하거라.”
“엄마는 화도 안 나요?!”
에반젤린의 격노에 페르세르크는 담담하게 붕대를 감아 묶고는 말했다.
“어찌 화가 안 날까.”
페르세르크의 우아한 목소리에 안심하던 굴롬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만 지금 그를 책망해봐야 전이된 이들이 돌아오진 않는 게야. 지금은 향후의 문제를 대비하는 게 우선, 그에 대한 책임은 후에 따져도 늦지 않아.”
페르세르크의 책임소재 발언에 굴롬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왕자라도 팔란과 린디스, 그리고 요즘 떠오르는 강국인 스파르트를 모두 무시할 순 없었다.
“이…… 이보게 대공비! 이건 사고!”
“분명 본녀가 말했을 텐데. 움직이지 말라고. 그대가 움직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어…… 어찌 일국의 왕자인 나를 이리 겁박한단 말이오!”
그가 절박하게 외치지만 그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영식과 영애들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래 이 모든 사달은 결국 대공비가 우리를 이곳에 가둬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는 급기야 선을 리듬 타듯 넘어대기 시작했다.
그말에 페르세르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에반젤린이 극대노하기 시작했다.
“그래. 죽는 게 소원이다. 이거지? 네까짓 놈까지 살려서 데려온 과거의 내가 지독하게 원망스러울 정도야.”
그냥 두면 정말로 그를 베어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동시에 한 소년이 뛰어나와 굴롬의 멱살을 잡고 소리 질렀다.
“그 입 닥쳐!! 네까짓 놈 때문에 내 약혼자가 지금 납치되었다고! 알아?!”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에반젤린의 친구가 된 이오샤 페트릭의 약혼자였다.
“으…… 으아아! 이거 놓거라 이놈! 내…… 내가 누군지 알…… 쿠어억!!!”
버둥거리던 그의 뺨을 후려친 소년은 그대로 쓰러진 그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누…… 누가 이 미친놈을 말려주게!”
그럼에도 다른 영애와 영식들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난장판 같은 상황 속에서 페르세르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은신처를 빠져나와 황제의 어전 쪽으로 향했다.
“페르세르크 대공비님. 그렇지않아도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드시지요.”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자 살리반이 어전에 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 있는 게 보였다.
“대공비. 오시었소.”
“큰소리치고 결국 사태가 이리되었습니다.”
“아니오. 이미 전말에 대해선 들었소. 고위 마법을 디스펠하는 건 대공비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을 테지. 적어도 나머지라도 지킨 것이 다행일 것이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이 많았소. 팔란은 또 이렇게 하인스의 도움을 받는군…….”
“회의는 어찌 되었습니까.”
페르세르크의 물음에 그는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페르세르크의 눈치를 살짝 본 뒤 말했다.
“또한. 개인적인 연락수단으로 데이비 올 라운 대공에게. 현 상황을 알렸소.”
그말에 페르세르크는 동요하지도 화를 내거나 크게 반색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상사에 손을 뗐습니다. 그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어요.”
본의든 그게 아니든 결국 데이비의 손에 티오니스는 수차례 구원받았다.
“하지만 그를 대신할 이들이 이렇게 휘둘린 이상 변명의 여지 또한 없을 겝니다.”
“미안하오……. 본래라면 대공비나 내 동생 또한 이일에 깊게 관여될 이유가 없거늘…….”
“본녀 또한 결국 맡은 소임을 해내지 못하였으니 어찌 탓하겠습니까.”
“다만, 대공이 이상한 말을 하더군.”
“이상한 말이라 하심은?”
잠시 고민하던 살리반이 약간 질린 얼굴로 말했다.
“두 꼬맹이에게 좋은 경험이 되겠다고 말했소. 혹……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고 계시오? 그의 표정이 너무 음산해 보여서 묻지 못했소만…….”
그 말에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굳었다.
두 꼬맹이…….
데이비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대뜸 깨달은 것이다.
“별거 아닐 겝니다. 하면, 영애와 영식들의 생존을 놈이 눈치채고 있었다고 받아들여도 무방하겠는지요.”
“그렇소. 숨겨봐야 의미가 없다면, 차라리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 창끝을 놈에게 집중시키는 게 옳을 것이라 생각하오. 믿을 수 있는 자들을 이용해 영애와 영식들을 모두 자국으로 돌려보내겠소.”
“그리하시지요.”
살리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어전을 나온 페르세르크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본녀가 이 고생을 하고 있건만 파릇파릇한 아이들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라…….”
최근 하인스의 자금문제 때문에 다른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생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에반젤린의 레어에서 한창 바캉스나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에반젤린이 휘말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눈이 돌아가서 움직인 모양이지만 괜히 괘씸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걸렸다.
“진짜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릴 수도 없고.”
음산하게 웃으며 데이비에게 연락을 날린 그녀였다.
“데이비. 막타는 건들지 마. 본녀가 찢어버릴 테니.”
그녀의 붉은 혈안이 서슬 퍼렇게 반짝였다.
* * *
“자 얘들아. 훈련 종목을 바꾼다.”
허공이 찢어지며 모습을 드러낸 데이비가 손뼉을 치자 그 균열 너머로 온몸에 기이한 갑옷을 입은 두 사람이 좀비처럼 걸어 나온다.
“데이비이…… 이거 맞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데이비에게 말을 거는 한 갑옷의 인영을 보며 데이비는 빙그레 웃었다.
“그거 맞아.”
“나…… 나보고 평범하게 살라고 했잖아…….”
“약한 소리 하네. 힘을 기르게 스승이 되어달라고 찾아온 건 너였다. 아리스.”
“저는 요청하지 않았는데요.”
“슈네리아 레켄. 넌 기도할 때마다 네게 힘을 달라고 기도했지, 틀렸나?”
“윽…….”
할 말을 잃은 두 갑옵의 정체는 다름 아닌 외곽차원 출신의 데이비의 성녀, 슈네리아 레켄과 트로이의 용사 아리스였다.
슈네리아에 비하면 아리스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렇기에 데이비는 그녀에게 더 이상 검을 잡지 말고 그 나잇대의 소녀처럼 살아가라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되지도 못해 결국 데이비를 다시 찾았다.
일평생 데몬과 싸우기 위해 전장을 나돈 그녀에게 평범한 인생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전장이 너무 익숙했고 평범한 생이 너무도 어색했다.
당연 그녀를 위해 그녀의 동료였던 페어리 마리와 오크 기르올, 그 외에도 그녀를 돌봐주기로 한 초월급 존재. 그 외에도 국가의 인물들까지 그녀에게 평범한 삶을 선물해주려 했지만 뿌리 깊게 자리 박힌 강박증을 쉬이 떨쳐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중에서도 아리스는 짊어지고 있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기에 페어리 마리나 오크 기르올 이상으로 상태가 심했다.
겉으론 멀쩡하지만, 순식간에 닳아 문드러지기 시작한 그녀의 몰골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이들은 결국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데이비의 제자가 되라고.
평생을 한 몸처럼 휘둘러온 검을 제대로 배우고 힘을 기르라고.
그 과정에서 지치면 평범한 삶을 천천히 살아보며 자신의 인생을 되찾으라 말했다.
하루아침에 배경을 바꾸는 게 어렵다면.
천천히 바꾸면 되는 일이다.
이에 아리스는 데이비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데이비는 한 가지 조건을 걸고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한번 스승과 제자는 끝까지 스승이고 제자다. 어디 가서 데이비의 제자라는 명함 달고 안 쪽팔릴 때까지 훈련시켜주마.
처음엔 기뻤다. 그와 같은 강자가, 이제 트로이에서 아는 이들 중에선 거의 신격화된 잊혀진 초월자. 데이비에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시작은.
슈네리아 레켄이라는 데이비의 성녀와 만나고 훈련에 돌입한 지 하루 만에 박살 났다.
“이……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거 같아.”
“알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실전이라니…… 데이비 분명 나한테 성년이 되기 전까지 실전은 하지 말라고…….”
“걱정 마. 실전과 훈련의 차이가 뭔지 알아? 죽느냐 죽지 않느냐야. 죽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건 훈련이다. 너희는 그놈을 떡으로 만들 수 있어도 죽이지 못해. 그리고, 그놈 또한 너희를 해치지 못해. 훈련의 심화 과정이라 생각하면 될 거야.”
저 악마의 미소를 보라.
당연히 슈네리아 레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난이도로 훈련을 받는 아리스로썬 저 미소가 너무도 무섭게 느껴졌다.
데몬? 변이된 몬스터? 데몬 로드? 미쳐버린 차원?
차라리 그것들과 한 번 더 싸우고 말지…….
아리스는 처음으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요…… 괴.”
부들부들 떨며 아리스는 고작 짧은 시간 안에 데이비에게 받은 훈련을 떠올렸다. 효과가 나오기까지는 아직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상대는 강한 존재 아니야? 우리가 뭘 어떻게?”
“실전경험을 쌓는 거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박아보는 거야.”
데이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두 사람의 뒷덜미를 낚아채고 들어 올렸다.
중량이 상당한 갑옷이지만 데이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나 이런 거 입고 있으면 키가 안 자랄 거야…….”
아리스가 최후의 저항을 해보지만…….
“걱정 마라. 훈련 끝나면 마사지 풀코스로 다 풀어줄 테니.”
한번 믿고 맡겼다가 온몸의 뼈와 근육이 분리되는 고통을 느꼈었던 아리스가 기겁하며 저항했다.
“시…… 싫어!”
당황한 아리스가 주춤거리자 데이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빌어먹을 놈이 내 와이프의 팔에 상처를 냈어.”
“으…… 응?”
“죽이진 않을 거야. 쉽게 죽이면 쓰나.”
에반젤린과 싸웠고, 일리나에게 자신의 반려가 되라는 개소리를 시원하게 내지르며 되먹잖은 협박을 시도했다.
페르세르크와 마법전에서 그녀의 팔에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도 직접 찾아가 사지를 찢어버릴 이유론 충분했지만 나서지 않았다.
페르세르크로부터 온 짧은 전언 때문이었다.
직접 끝장내버릴 거라던 말.
하지만 놈이 대륙 곳곳에 인질을 잡고 있으면 살짝 숟가락 얹는 정도라면야.
“지금부터 너희가 할 일을 말해줄게.”
데이비는 아리스에게 검을 쥐여주고 슈네리아에게 스태프를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겨 공간을 뛰어넘었다.
그가 나타난 곳은 다름 아닌 깊은 숲속이었다.
-그으으으으…….
세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챈 것일까.
놀랍게도 숲속에선 언데드화된 인간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르강티아가 이곳에 중요한 것을 숨겨놓은 것이다.
놈은 자신의 계획에 이용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여기저기 흩뿌려놓았다.
당연히 그 수가 많아서인지 제대로 은폐하지 못한 것은 큰 패착이다.
설마 이걸 찾아내고 부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듯한 행동거지였다.
“그놈만 안 죽이면 되는 거 아냐.”
자기가 뿌려놓은 수단이 하나하나 박살 나는 꼴을 보여주는 정도라면야.
당연히 숨겨놓았기에 찾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런다고 해서 비화의 눈을 숙일 수는 없었다.
데이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슈네리아. 아리스. 가서 물어뜯어.”
물론, 이곳에 언데드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중요한 것을 숨겨놓은 놈은 당연히 놈이 개발한 고유의 독자 마법으로 방비를 해두었다.
페르세르크의 말마따나 구조를 해석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대하고 단단한 결계 마법.
“마법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데이비의 손가락이 퉁겨지기가 무섭게 결계에 금이 간다.
[디스펠]
팔란의 황성에 설치되어 페르세르크가 삼십 분 넘게 해석했던 결계가 단 3초 만에 무너져내린다.
“숨겨놓은 수단이 다 박살 나면 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그러게 멋대로 생명력을 끌어다가 이런 기이한 장소를 만들어놓으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