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77화
잘 가지 않는 시간도 다급해지면 엄청난 속도로 흐르는 느낌을 주곤 한다.
아직 이렇다 할 흐름도 보인 적이 없으나 벌써 2주가 넘게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성과는 아직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진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작정하고 검사를 해보려 할수록 일리나의 육신과 무의식은 더더욱 그녀의 태반에 짙은 마나를 둘러 내부를 정밀하게 확인하지 못하게 막았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모성이 발현된 탓이었다.
차라리 최근에 검진을 했었다면 덜했을 텐데. 제일 마지막으로 검진했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몇 주 전이면 설사 진짜 임신이라도 확인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웁!”
“…….”
조용한 침묵이 감돈다.
식사를 하던 일리나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 미안해. 잠깐 자리를 좀 비울게…….”
입덧이 상당한지 피곤한 얼굴로 나서는 그녀를 보며 홍단이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아바아. 엄마 아파?”
“아니. 괜찮아. 홍단아. 홍단이 동생이 엄마 뱃속에서 반찬 투정하는 거야.”
“으음…… 반찬 투정하면 혼난댔는데에…….”
“그래. 투정하면 혼나야지.”
그때 눈치를 보던 청단이가 황급히 손을 들고 말했다.
“청다니 다 먹었으니까 가서 청다니가 가르쳐줄게! 청다니 이제 채소도 잘 머거!”
의자에서 내려선 쪼르르 뛰어나갔다. 이후 홍단이는 선점을 빼앗겼다는 것을 깨닫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가, 같이 가아!!”
두 아이가 나가고 고요해진 식당,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중 내가 어렵게 운을 뗐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어. ‘안 되면 되게 하라’라고 했지만 사실 무리한 프로젝트인 건 다들 잘 알고 있을 거야.”
진짜 임신이길 바라는 건 기적에 거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은 전부 실패라고 봐도 무방해.”
오죽하면 일리뿐만이 아니라 내 몸에도 버프 마법을 떡칠할 생각까지 했겠는가.
“하면…… 더 늦기 전에 진실을 털어놓는 것이…….”
“내방에…… 모빌 만들어놓은 거 봤어?”
내 침실에는 일리나가 있는 실력, 없는 실력 모아 직접 만든 아이의 모빌이 담긴 상자가 있었다.
날마다 짬짬이 시간을 내서 만든 것을 보면 얼마나 그녀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솔직히 난 사실을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럼 어찌하려고.”
“알아봐야지. 근본적으로 우리는 정보가 너무 부족해. 레이나가 알고 있는 기억은 일부야. 그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들어야겠어.”
“누구에게? 죽은 팔란의 황비나 황태자? 아니면…… 황제?”
그 질문에 나는 대답을 내놓는다.
애초에 어릴 때부터 일리나를 그 알게 모르게 챙겨온 인간이 하나 있지 않은가.
“갔다 올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곧바로 공간을 뛰어넘자 페르세르크가 나를 부르려다 멈추는 게 보였다.
* * *
살리반은 비공식적으로 연락이 오기가 무섭게 찾아온 무례한 존재를 눈앞에 두고도 화를 내지 못했다.
“무슨 연유입니까.”
제국의 황제, 거기에 나이만 놓고 봐도 데이비보다는 많은 살리반 황제였으나 어째서인지 데이비에게만큼은 함부로 말을 놓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지금은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다.
분노는 아니었다. 그저 담담함. 그렇기에 오히려 저 미친놈이 또 무슨 용무인지 겁이 난다.
“폐하.”
“말씀하시오. 대공.”
“일리나의 몸 상태…… 아니, 과거에 뱀파이어로 인해 생긴 사고.”
그말에 살리반은 눈을 부릅 떴다가 억지로 얼굴의 표정을 죽였다. 재상에게 했던 말대로 자칫 이번 일로 일리나가 입지가 좁아지거나 구박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알아낸것일까.
그렇지않아도 정보원으로부터 일리나가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측하긴 했었다.
“흐음…….”
“그것에 대해 들으려고 왔습니다. 현재 팔란이 바쁜 것을 알기에 비공식적으로 온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 말에 살리반은 시종장에게 손짓을 했다.
이에 시종장은 눈치를 챈 듯 모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후우…….”
“현재 일리나는 임신상태입니다.”
그 말에 살리반이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엔 정말로 놀람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저, 정녕 그 아이가 아이를 가졌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요.”
“그게 무슨…….”
“증세는 임신 증세가 맞습니다만……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제야 살리반은 표정을 굳히고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사정이 있어서 일리나가 어떤 몸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들은 바 있습니다.”
“대체 어떤 놈이…….”
“걱정 마세요. 누군가가 배신한 게 아니라 우연히 알게 된 거니까.”
이래 봬도 대륙에서 유명한 의사이기도 합니다.
데이비의 적당한 거짓말에 살리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극비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알아가는 모습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후우…… 그래 그 아이는 지금 어떻습니까.”
“본인은 자신이 불임이라는 걸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대공이 짐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때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십시오. 그래야 거짓임신도 진짜 임신으로 바꿔버릴 수단을 찾을 테니.”
그제야 살리반은 그가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불임의 근본적인 원인을 조사하여 치료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상한 점을 눈치채기 전에 가정을 진실로 바꿔놔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이후 살리반은 일리나의 상태에 대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뱀파이어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그 날.
일리나는 뱀파이어의 공격에 당했다.
운이 좋아 목숨은 건졌지만, 뱀파이어의 힘이 그녀에게 스며든 뒤 폭주하며 그녀의 몸에 몇 가지 변이를 일으켰다.
그 예시로 장기는 멀쩡하나 난자들이 모조리 죽은 것으로 판단된 것이다.
자세한 검진은 당시의 기술로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팔란의 주치의 중 하나가 일리나의 몸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고 그녀의 상태를 보고했다.
주치의의 말은 결국 극비리에 붙여졌지만, 일부는 그때 확신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의 힘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일리나의 장기가 기존의 장기와는 조금 다른 유전적 정보를 가져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 짐의 생각일지도 모릅니다만.”
“또 있습니까?”
“일리나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천재라곤 했지요.”
“음?”
“다만 제 눈에 보기엔 그날을 기준으로 그녀의 재능이 폭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제야 데이비는 침묵했다.
“그렇구나…… 육체에 해를 끼치지 않았으니 환골탈태를 겪어도 바뀌지 않는 거였어…….”
“대공, 일리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잘못이라면 그 사실을 숨긴 우리에게…….”
“폐하.”
데이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심해같이 깊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살리반은 침을 삼켰다.
그는 어떻게 나올까.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일리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
다급히 그가 데이비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황급히 외쳤다.
“만약 이 일로 대공이 사기 결혼이라 생각한다면 나는 그 아이를 다시 팔란으로 데려가겠습니다. 모든 부담은 이쪽에서 지는 것으로…….”
“누구 마음대로 돌아갑니까.”
그말에 살리반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예?”
“일리나는 제 와이프입니다. 친정으로 돌려보낸다니요. 무슨 물건이라도 된다는 듯 말씀하시네.”
“……대공……. 지금 이일은 절대 가벼운 일이…….”
“사소합니다. 너무 사소해서 죽고 싶을 정도예요.”
그는 아공간에서 포도주 하나와 잔을 두 개 꺼낸 뒤 따랐다.
그리고 긴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가볍게 툭 건드렸다.
그러자 와인잔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그의 앞으로 미끄러진다.
“드세요. 처형, 브룩스 100년산입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귀족이건 황족이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건 거대한 결함이라 치부됩니다.”
“그래서요?”
“일리나는 예쁘지요. 성격이 괄괄하긴 해도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재능도 뛰어나지요.”
“그래서요?”
“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지금 상황을 보니 거짓임신이라는걸 알게 되면 그 아이는 큰 충격을 받아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요.”
데이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럼에도 그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는 겁니까? 짐의 입장에선 혹여나 이 일로 일리나의 입지가 좁아지거나 구박받는 상황이 오는 게 달갑지 않습니다.”
그말에 데이비는 와인을 가볍게 들이켰다.
“그래서요.”
“…….”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폐하. 나는 지금 내 와이프의 상황을 알아보러 왔다고.”
“…….”
“불임이 뭐 대숩니까?”
미친놈.
귀족사회에서 가장 큰 결함 중 하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게 황당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이것은 기쁨일까. 안도의 웃음일까.
걱정했던 일이 자연스레 조용히 묻히는 기분이었다.
“그 아이…… 울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제 자식이 몇인 줄은 아십니까? 하나둘 없다고 문제 되진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자꾸 착각하시는데.”
데이비가 표정을 굳혔다.
“일리나는 불임이 아닙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불임이 아닙니다. 아니게 만들 겁니다.”
그제야 살리반은 완전히 대공이라는 존재를 이해했다.
눈앞의 이 젊은 미친놈은 안 되는 일조차 기적을 일으키듯 해내 버릴 생각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당시 상황. 습격했던 뱀파이어에 대한 극비정보들을 전부 넘겨드리겠습니다.”
살리반의 말에 데이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가임을 유도하는 것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 * *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일반적인 백작급 뱀파이어…… 이 정도 힘으로는 그런 변이를 일으킬 수 없어.”
차라리 일리나가 급소를 다쳐서 아이를 못 가진다면 몰라도 이렇게 독특하게 변이를 일으키는 경우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원인이 된 것일까.
살리반에게서 받아온 당시의 기록, 정보, 그리고 일리나의 문제를 눈치챈 유일한 주치의의 진단기록을 훑어본다.
그 주치의는 이미 은퇴를 하고 종적을 감추었고 찾기조차 쉽지 않다. 듣자 하니 일리나의 몸을 치료할 방법을 찾다가 어딘가에서 객사했다는 정보가 나돈다는 모양인데 확실하진 않았다.
애초에. 그는 무슨 방법으로 문제를 찾아낸 것일까. 당시의 일리나는 굉장히 어렸기에 일반적인 진단으로 그런 문제를 찾기가 어려웠을 텐데.
“데이비? 뭐해? 그건 또 뭐야?”
그때였다. 갑작스레 등장한 일리나의 말에 나는 황급히 서류를 숨기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언제 온 거야?”
“조금 전에. 아무리 부르고 노크해도 문도 잠겨있고 대답도 없길래. 슬쩍 들어왔는데 여전히 모르더라.”
그녀가 방의 한쪽 창문을 가리켰다.
또 창문을 타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들켰나? 들킨 건가?
식은땀이 흘렀다. 너무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기척을 숨기는 게 익숙한 일리나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평소답지 않은 실수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하하. 좀 피곤했나 보다. 볼일은 다 본 거야?”
“응. 네 일 좀 도와주고 눈을 붙이려고.”
“아니. 오늘 일은 끝났어.”
“방금 그 서류는?”
“개인적인 서류.”
의심 서린 시선이지만 일리나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데이비.”
“어…… 어어?”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구나.”
그녀의 말에 나는 속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그동안 뻔뻔한 낯짝으로 수많은 사기를 쳐오지 않았던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사람이 개인적으로 숨기는 거야 다 하나씩은 있는 건데.”
“그래? 헤헤 우리 소원이 봐서 용서해줄게.”
“…….”
“데이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정보대로라면 유일한 수단이 하나 존재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 진찰이나 해보자. 팔 좀 줘봐.”
그녀는 거리낌 없이 왼팔을 내밀었고 나는 맥을 짚으며 마나를 스리슬쩍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태반 쪽은 그녀의 마나가 짙게 쌓여 파고들기 어렵지만, 그 외의 호르몬 분비 쪽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 아이 태어나면 참 좋겠지?”
“그렇겠지.”
“이 아이는 너와 나중에 누굴 닮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머리카락 색은 너와 같은 검은색에 나와 같은 눈 색이면 좋을 거 같아. 키는 나처럼 작지 않았으면 좋겠고, 성격은 너처럼 너무 능글맞지 않으면 좋을 거 같기도 해.”
그녀는 내 앞에 마주 앉은 채 행복한 상상을 펼쳤다.
“아이를 낳을 때 엄청 고통스럽다던데…… 괜히 떨리면서도 무섭고…….”
일검에 차원까지 가르는 존재라곤 해도 두려움은 있는 모양이었다.
“엄마로서 잘 해낼 수 있는지 걱정도 되고.”
내가 손을 떼자 그녀는 곧바로 내가 앉은 의자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허벅다리 위에 올라앉았다.
“지금 나 너무 행복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런 그녀에게 어떻게 사실을 말하겠는가. 이 와중에 그녀를 붙잡고 사실 너 임신한 게 아닐 가능성이 커. 라고 한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 그녀가 임신했을 가능성은 눈을 다쳐서 의안으로 교체한 시각장애인이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이 안에 있는 아이도 지금 있는 다리안이나 아벨, 그 외에 다른 아이도 전부 똑같아.”
“헤헤. 아가, 아빠한테 물어보고 싶은 건 없어?”
그녀가 납작한 배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이에게 해줄 말은 없어?”
“아직 말해봐야 의미 없을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런 게 다 행복인데.”
그리 말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팔란 제국에서 찾은 단서들을 종합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건 한가지였다.
시도할 수 있는 건 다해보겠다고 말한 이상 어떤 수단이라도 취할 생각이었다.
“웁!”
그때였다. 갑자기 헛구역질한 그녀가 내게서 떨어진다.
“왜 그래?”
“아니…… 갑자기 웁!”
“…….”
“미안. 데이비. 나 잠시만…….”
후다닥 뛰어나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쉰 뒤 내 손에 대량의 생명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하자. 저 웃는 얼굴 하나 못 지키면 가장이 아니지.”
내 육체를 개조할 결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생명력을 흩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분노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 * *
헛구역질은 괴롭다. 하지만 그런 만큼 행복감도 들었다.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아마 데이비가 늘 먹던 달콤한 과자 냄새에 반응한 것일 테지.
어느 쪽이건 조금만 쉬면 해결될 문제였다.
“아가. 너무 투정 부리면 안 돼. 착한 아이는 말 잘 들어야지.”
옅게 웃으며 배를 쓸어내린 그녀는 테라스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기를 몇 번.
산모들이 한다는 기이한 호흡법도 흉내 내보며 홀로 키득거린 그녀는 다시금 데이비에게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아이가 생긴 뒤로 몸이 반사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 하는 터라 기척이 자연스럽게 죽어간다.
그때였다.
“이쪽으로 옮겨주세요. 이게 마지막 물량이죠?”
“네.”
“후우…… 제발 이번엔 되어야 할 텐데…….”
“저…… 마님, 그런데 한 가지만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말씀해보세요.”
“일리나 대공비 마마께서 정말로 이걸로 임신에 성공하신다면…… 그건 어떻게 구분할 수 있나요?”
뭔가 이상한 대화였다.
일리나는 반사적으로 기척을 완전히 죽인 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에이리아와 그녀의 전속 시녀 한 명이 조용히 물건이 담긴 박스를 옮기고 있었다.
다만 그런 것보다 바로 전에 에이리아와의 대화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그녀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임신이라니. 내 뱃속에는 이미 아이가 있는데?’
“당장은 확인이 힘들지만, 변화는 반드시 있어요. 언니의 몸은 현재 무의식적으로 자기방어 상태라 확인이 힘들지만…… 서방님 말로는 틈이 생긴다고 하네요.”
“잘되면 좋겠네요…… 일리나 대공비 마마께서 아이를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만약 이게 진짜 임신이 아니라 상상 임신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기라도 한다면…….”
“그러니 조심해주세요. 절대로 언니의 귀에 들어가면 안 돼요.”
에이리아의 단호한 말에 시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돌아서려던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일리나는 눈을 멍하니 뜬 채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앗?!”
당황한 에이리아가 귀를 쫑긋 세우며 허둥지둥거린다.
“어…… 언니. 여긴 무슨 일로?”
“에이리아. 방금 무슨 이야기냐고.”
자신도 모르게 날을 세우며 묻는 그 모습에 에이리아는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일리나는 모든 것을 들었으니 말이다.
“상상임신? 가짜라고? 내가 들은 게…… 사실이야?”
“그…… 그게…….”
“똑바로 말해!!”
에이리아에겐 절대 소리치며 화내지 않던 그녀가 이토록 격정적으로 소리치는 모습에 에이리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데이비와 함께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고 물자를 옮긴 건데, 혹시나 해 인적이 드문 경로까지 썼는데. 그새 밖으로 나와 있었을 줄이야.
헛구역질 때문에 생긴 우연이 모든 것을 망친 셈이었다.
“언니. 그러니까 제 말 좀 일단 들어보세요!”
에이리아가 황급히 일리나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일리나는 그대로 에이리아의 팔을 떨쳐냈다.
본인도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란 듯 흠칫했지만 이내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들어본 적이 있어…… 상상 임신. 임신했다고 착각하는 게 정도를 넘어서 뇌와 몸을 완전히 속일 정도가 되면 그 증세가 나타난다고.”
“언니…….”
“에이리아. 사실대로 말해. 나는…… 아니, 지금 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고개를 든 일리나의 눈은 어둡게 죽어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이는 없었던 거야?”
“언니! 아니에요!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제대로 확인해보지 못해서!”
“웃기지 마! 그런데 왜 그런 말이 나도는데? 저건 또 뭐고! 그래…… 어쩐지. 요즘 다들 분위기가 이상했어.”
“언니…….”
“내 몸에 문제가 있었던 거야? 그래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데 가지니까 이상한 상황이 연출된 거고?”
“절대 아니에요! 아직 정말 몰라요!”
“사실대로 말해!!”
일리나의 절규에 에이리아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
다들 애써 숨겨왔는데 설마 일리나가 데이비를 벗어나 이곳까지 왔을 거라 생각지 못한 것이다.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음을 깨달은 에이리아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조심한다곤 했으나 결국 들켜버린 건 그녀였다.
그러니 스스로 책임을 지는 수밖에.
“언니…… 오래전 뱀파이어에게 습격을 당하셨던 일…… 기억하시나요?”
“…….”
일부만 기억하고 있는 당시의 일이다.
이에 일리나가 침묵하자 에이리아는 레이나에게서 들었던 그 날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언니는 불임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입덧에 증세가 나오니까…….”
불가능해야 하는데 증상이 나오니 곧바로 의심부터 된 것이다.
임신 증세는 확실한데 그녀의 몸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수단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상상 임신…… 데이비는 왜 이걸 못 알아본 거야?”
“언니…… 몸은 현재 반사적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어요.”
그녀의 몸. 그것도 아이가 자라는 배 쪽은 그녀도 모르게 막대한 마나가 방어를 굳건히 하고 있어 접근이 힘들다. 데이비도 그녀에게 무리를 주지 않는 선에서 틈을 만드는 정도만 가능할 정도로 그 방어가 견고하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어요. 하…… 하지만 언니. 아직 몰라요. 정말 아이가 있을 수도 있고…….”
에이리아가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일리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거친 움직임 자체만으로도 아이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생각하여 조심조심 움직였건만.
이 모든 게 한낱 꿈일 뿐이었다니.
일리나는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그 손을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소원이가…… 사실은 없었다고…….”
“일리나!”
뒤이어 이상한 점을 눈치챈 데이비를 포함해 다른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상황을 보자마자 눈치챈 듯 굳은 얼굴을 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제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주…… 죽여주십시오. 저하!”
에이리아의 시녀는 자신의 경거망동으로 인해 일리나가 진실을 들었다 생각했는지 몸을 납작 엎드리며 죽음을 청했다.
페르세르크는 굳은 얼굴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고 데이비는 천천히 다가와 일리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악!!
하지만 일리나는 데이비의 손을 쳐냈다.
“손대지 마!”
“일리나.”
“데이비……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바보같이 상상 임신 같은 거나 해서 너희를 고생시킨 나는…… 대체.”
“그 누구도 네 행동을 탓하는 이는 없어.”
“나는…… 소원이는…….”
“일리나. 아직 몰라. 정말로 소원이가 있을 수도 있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눈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앞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마냥 어이가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녀의 절박한 외침 속에 절규가 묻어나온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일리나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이 너무도 괴로운지 구슬프게 흐느꼈다.
주변에는 그저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뿐이었다.
“웁!!”
그때였다. 에이리아가 시녀를 시켜 옮기던 귀한 과일 향을 맡은 일리나가 헛구역질을 했다.
“일리나!”
“이깟 헛구역질도 다 거짓이잖아…….”
“제발 진정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내가 반드시 성공시켜줄게!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만 완성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비록 그 과정에서 데이비는 자신의 몸을 특수한 힘을 넣어 개조해야 하고 그조차도 확률일 뿐 확정은 아니지만.
“웁!!”
일리나는 자신이 하는 이 구역질이 너무 역겨운지 흐느끼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그만해!! 내 몸을 속이는 것도 적당히 하라고!”
그녀는 자신의 몸에 윽박을 지르듯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에이리아는 눈물을 흘렸고 뒤늦게 소동을 듣고 찾아온 미식연구회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미 눈동자가 공허해진 일리나의 금안은 활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랬구나…… 페르세르크 언니가 느낀 아픔이. 아이를 잃었던 에이리아의 슬픔이 이런 거였어…….”
바닥에 주저앉은 채 흐느끼던 그녀가 입을 틀어막고 억지로 구역질을 참았다.
“그만해…… 내 몸을 그만 속이라고…….”
그리고 그 슬픔은 자신을 속인 몸에 대한 극한의 분노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그 분노로 인해 그녀의 몸에 굳게 방어선을 치고 있던 마나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데이비의 사령안에 무언가 보였다.
“잠깐!!”
그가 소리친다.
워낙에 다급한 외침이라 놀란 모두가 그를 보자 데이비가 휘청거리며 다가와 중얼거렸다.
“잠깐만.”
떨리는 눈으로 천천히 다가온 데이비는 손을 뻗어 일리나의 배에 가져다 댔다.
“그만해 데이비…… 더 이상 나 때문에 고생하…….”
“조용!”
“데…… 이비?”
“기다려봐. 방금…… 네 뱃속에서 혼의 파장을 느낀 거 같으니까.”
그말에 일리나의 공허한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영혼의 파장.
본래라면 불가능했어야 할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한번 파장을 내뿜는다.
자신이 여기 있다고.
울지 말라고.
자기를 부정하지 말라는 듯.
아주 옅게 맥동한다.
그것은 처음으로 보는 완전한 영혼의 생성이었다.
윤회의 혼이 아닌. 완전히 새로이 태어난 너무도 티 없이 맑고 깨끗한 혼이었다.
기적.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