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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507화 (1,507/1,559)

제 1507화

바리스의 죽음은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현재 바리스의 육신은 온전한 보존마법이 걸려 있어 부패가 멈춰있다.

물론 그것도 나흘 후부터는 소용이 없을 테지만 시간의 정령 알타이르의 힘을 빌려 멈춰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장의사들이 시신을 처리하는 작업 또한 멈춘 상태였다.

왕국의 귀족들은 그런 내 행동에 의아한 모습을 내비쳤지만 나는 당장 바리스의 시신을 화장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

고작 하루지만 나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리스의 죽음에 오열하고 넋을 놓아버린 이들은 많았다.

평소에 성군으로서 칭송받던 바리스였기 때문일까.

수도는 말 그대로 슬픔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뿌우우우…….

구슬픈 뿔피리 소리가 다시 한번 울린다.

주기적으로 국왕의 서거를 알리는 뿔피리 소리는 안 그래도 어둑어둑하던 수도를 더욱 어둡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그 탓일까. 하늘조차 먹구름이 잔뜩 낀 느낌이었다.

고작 하루였다.

바리스의 죽음은 내 마음속 어딘가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괜찮습니까.”

바리스가 죽어 공석이 되어 버린 국왕의 자리는 아주 바쁜 자리인 만큼 라운의 왕후인 펠리스티 공녀가 공허한 얼굴로 국정을 이행했다.

다만 그녀는 국정을 다스리는 데엔 크게 재능이 없어 보였다.

“네…… 네…….”

바리스를 참 좋아했던 소녀였던 만큼 아마 그 누구보다 바리스의 죽음이 믿기지 않고 충격적이었을 터.

기본적으로 국정을 다스리는 재능이 능숙하지 못한데 충격까지 받았으니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녀를 옆에서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크흡…….”

급기야 눈물을 보이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나는 말했다.

“정신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왕후마마께서 무너지면 이 나라는 끝장이니까요. 못해도 조카가 성장할 때까지만이라도 붙잡으셔야 합니다.”

내 말에 그녀는 촉촉하게 적은 슬픔이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대공…… 나는 어찌해야 하나요…… 하루아침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나는…….”

“…….”

그 어떤 위로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열하는 그녀는 가녀린 한 명의 소녀일 뿐이었다.

제왕학 같은 것은 거의 배울 일이 없는 그저 공국의 공녀.

계승권 따위는 이미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있었기에, 그녀가 제왕학이나 정치에 대해 깊게 배우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면…… 나는, 나는 앞으로 십수 년을…… 차라리 대공이 이 자리를 맡아주세요…… 나는 도저히…… 이 자리를 지켜 낼 자신이 없어요…… 흐흐흑…….”

“안 됩니다. 왕후마마. 마음 굳건히 지키셔야 합니다.”

고작 몇 시간. 몇 시간 만에 자신이 국정을 다스리는 실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그녀는 내 품에 안긴 채 오열하며 차라리 자리를 가져가라 말했다.

욕심이 있는 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아마 욕심 이상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지켜오던 자리가 망가진다는 걸 견딜 수가 없는 것일 터.

“그 자리는 절대 함부로 남에게 물려줄 자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어요…….”

“괜찮습니다. 내가 다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조카의 대관식까지 이 나라를 지켜 낼 수 있게. 내가 모든 방법을 써서라도 지켜드리겠습니다.”

남들이 보면 오해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다행히 현재 이 모습을 보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는 지쳐서 잠들었다.

다행이라면 그녀가 없어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오늘 하루만큼은 그녀도 편히 쉴 수 있으리라.

왕후를 공주님 안듯 안아 든 나는 베스퍼스 시종장을 불렀다.

“왕후마마께서 지쳐 잠드신 듯하니 침소로 안내해.”

“알겠습니다.”

베스퍼스 시종장은 이미 예상한 듯 조용히 그녀의 침소로 나를 안내했고 나는 그녀를 침대에 뉘인 후 그곳을 벗어났다.

“각하.”

“뭐지?”

나도 모르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나간다.

“너무 가까이 계시면 좋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시종장.”

“누군가가 보면 오해를 할 수도…….”

“그럴 수도 있지 별 같잖은 말이 나올 수도 있어.”

내가 왕후와 정분이 나서 국왕을 암살했다는 헛소리도 나돌 수 있다.

고작 이런 사소한 장면 하나로.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문의 근원지를 찢어발기면 돼.”

“각하…… 그리 억압하는 것은 폭군의 방식입니다.”

베스퍼스 시종장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1왕자궁에서 며칠간 머무르기로 결정한 내게 몇몇 귀족이 찾아왔다.

“각하.”

“무슨 일이지?”

1왕자궁에는 바리스가 간간이 찾아와 키우던 화초들이 존재한다.

국정을 다스리다 지치면 이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다는데 제법 화초들이 사랑을 많이 받은 흔적이 보였다.

그런 고요한 공간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제 목을 내놓고 간언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충신. 이자 또한 바리스에게 충성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자 중 하나였다.

차갑게 쏘아붙이긴 했지만 나는 그 압박을 금방 거두었다.

“바리스의 육체에 문제라도 발생했나?”

“아닙니다. 폐하의 육체는 이전과 동일하옵니다…… 하나 제가 찾아온 건 이 나라의 미래를 의논하기 위해서입니다.”

“…….”

화초에 물을 주던 내 손길이 멈췄다.

“말해.”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다시 물을 주며 내가 말했다.

바리스가 죽었는데 그놈의 국정, 국정, 국정.

빌어먹을 놈들.

생각은 그리하면서도 내가 뭐라 하지 않는 것은 바리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사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지 외부인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들에겐 바리스의 죽음이 슬플 수 있으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게 얼마든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는 바리스의 충신이되 라운의 충신이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올바른 판단을 못 하면 죽은 바리스를 볼 낯이 없다.

“실은. 하루지만, 왕후마마의 국정을 다스리는 능력을 분석해보았습니다만.”

“부족하다?”

“외람되오나 그렇습니다. 정치를 전문적으로 배우신다면 가능하겠지만 그 전까지 얼마나 많은 라운의 국민들이 죽어 나갈지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담담하게, 그리고 강하게 쏘아붙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곡해하지 말고 들으시옵소서. 서대륙의 일부 왕국에서는 이리 부르더군요. 형사취수제.”

“…….”

“각하. 소신은 각하께서 이 나라의 국정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올바른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해한 것이 맞나?”

“예. 왕후마마와 혼인하십시오. 그리고 각하께서 국정을 다스리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됩…… 커헉!?”

순식간에 내 손이 그의 목을 틀어쥐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이런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겠지. 형사취수제. 야만적이긴 해도 정치에서 이용해 먹을 건덕지는 충분히 있었을 거야.”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노려보자 그는 어떻게든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그를 한참 노려보던 나는 천천히 손을 풀어 그를 떨어뜨렸다.

쿠당탕!!

“쿨럭. 쿨럭.”

고통스러운 듯 기침을 토해 내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던 내가 말했다.

“그 계획을 왕후께서 받아들였다면 몰라도 멋대로 결정하는 건 선 넘었지.”

“각하!”

“그리고, 내 부인은 오로지 셋뿐이다. 그 이상은 없어.”

“국정을 생각하십시오! 하루하루 수많은 국민들이 죽어 나갈지 모릅니다! 왕족인 당신들은 국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인간의 개인적인 사욕이나 자존심 따위는…….”

그는 원론적인 것을 논하고 있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하기에 일개 개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정략혼을 하는 공주나 영애들에게 잘 쓰이는 방법이기도 했다.

가문을 위해 정략혼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시집을 가는 여성들처럼.

가문을 위한다는 이유로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전장으로 내몰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젊은 영식처럼.

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다만.

“어차피 셋입니다! 넷이 된다 하여 무엇이 달라진 끄윽?!”

“선 넘지 마라. 과격하긴 해도 충신인 네게 주는 마지막 자비야.”

그의 목을 낚아채 벽에 강하게 처박고는 차갑게 살기를 흩뿌리자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바리스가 죽은 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다.”

“…….”

“국장도 끝나지 않았지. 경은 이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어떻게든 개인의 바람을 이루려 하는가?”

“어째서…… 어째서 그만한 힘과 재능이 있으시면서도 고작 하인스로 만족하려 하십니까! 이 나라에는, 이 나라에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신만이 이 나라의 위대한 국왕이 될 실력을 지니고 있단 말씀입니다! 좀 더 넓게 보십시오! 라운이 향후 일백 년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그의 외침에 나는 살기를 거두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는 끝내 내게서 물러나지 않았다.

깡다구 하나만큼은 좋지만. 그의 제안은 재고해 볼 가치도 없이 폐기처분이었다.

다만, 그게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 * *

“그래서? 그들은 네가 왕후마마와 혼인을 하길 바라고 있는 거야?”

“뭐. 야만적이긴 해도…… 그런 전례는 린디스에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선대 중에 형의 부인을 노리고 형을 암살한 동생도 있었거든요.”

내가 왕후와 혼인을 하여 그녀를 거두면 나는 국정에 간섭할 권한을 얻게 된다. 아니, 정확히는 간섭해야만 하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간섭할 계승권은 존재하지만 나는 과거 계승권을 포기하는 것을 빌미로 그걸 완강하게 거부한 전례가 있었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안타깝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바가 아닌데…….”

이미 일리나나 페르세르크 에이리아는 내가 이래저래 신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몇 번이고 내가 죽었다고 착각하는 사태를 겪은 바 있었다.

“그녀의 속은 아마 검게 문드러지고 있을 거야. 그토록 금슬이 좋았으니까.”

매너 있고 착하며 헌신적인 바리스는 어떤 의미로 보면 조금 지루한 남자상일 수도 있지만, 왕후인 펠리스티 공녀는 그런 바리스의 순진무구한 면을 가장 좋아했다.

바리스와 나, 윈리 사이의 유일한 정략혼치고는 정말 너무도 금슬이 좋아서 놀랄 정도였던 건 분명했다.

같이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할 생각이었던 남편이 갑자기 죽어 버렸으니 그 충격도 큰데 국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압박이 그녀를 더욱 옥죄고 있을 것이다.

“조금…… 안쓰럽네…….”

“그녀에게 정치와 제왕학을 가르칠 거다. 그녀가 온전히 이 나라를 지켜 내고 종래에 조카 녀석에게 이 나라를 물려 줄 수 있게.”

바리스를 소생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현재로선 그게 불가능했다.

어째서인지 소생 마법이 발동되지 않는다.

죽은 지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른다.

왕후, 그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는 좀 더 힘을 내주어야 했다.

“데이비. 넌 우릴 두고 어디 가지 마.”

일리나가 시큰해진 눈시울을 애써 숨기며 품에 안겨들었다.

“네가 떠나버리면 난 견뎌낼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바리스의 시신은 본래라면 장례를 치르고 매장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 그의 시신은 완전히 보존된 채 아직 신전의 중심에 안치되어있다.

그리고. 며칠간 왕후는 자신의 모든 재능을 쥐어짜 내며 국정을 다스리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문제점이 계속해서 발생하니 자연스레 귀족들의 불만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외부의 문제. 외교나 국경선 분쟁 같은 것까지 밀려왔다간 아마 그녀도 퍼져버렸으리라.

그나마 라운과 충돌하지 않는 건 나라는 억제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며칠은 안 그래도 슬픔에 가득 찬 펠리스티 공녀. 즉 왕후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다.

그날 밤.

말없이 바리스의 육신이 안치된 신전에서 홀로 울고 있는 그녀를 찾았다.

“흑…… 흐흑…… 어째서 이렇게 간 거예요…… 난 당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녀는 바리스에게 푸념하듯 계속해서 말했다.

“난, 난 이런 높은 자리 따위 필요하지 않았어요. 그저 당신과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했는데…… 왜 야속하게 나를 두고 먼저 간 건가요…….”

그녀의 슬픔이 눅진하게 묻어나온다.

“오늘…… 대신들이 찾아왔어요. 이 나라를 위해…… 당신을 포기하라고…… 대공과 혼인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기라고…….”

나는 소리죽인 채 그녀를 그저 뒤에서 바라보았다.

“대공은 내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말해요…… 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난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생각도 없고, 이 나라를 지켜 낼 자신도 없어요. 흐흑,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난 그저 로맨스 소설 읽는 걸 좋아하던 일개 공녀일 뿐이었는데…….”

누구나가 옆에서 보면 할 만한데?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국정을 다스리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바리스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걸 알아보지 않았다면 아마 그에게도 맡기지 않았으리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이대로면 모든 게 무너져내릴 거예요…… 당신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요? 고작 며칠 만에?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 아이의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 그에게 안겨야 하는 건가요…… 난 싫어요…… 좋은 사람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이란 말이에요.”

처절한 흐느낌 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확실히 내가 그녀를 가르치면 더 좋아질 수야 있겠지만 냉정하게 분석했을 때 그녀는 재능이 없었다.

아마 제 기능을 발휘하려 해도 시간이 꽤 걸릴 터.

그동안 많은 이들이 고통받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본래대로라면 이 나라의 명운이 휩쓸리는 건 이 순간이 될 것이었다.

“부탁이에요. 말해줘요. 난, 난 어떻게 해야 하죠?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건가요.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건가요.”

당연히 영혼이 없는 바리스가 대답할 리 만무했다.

그렇게 홀로 외로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던 찰나.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가는 게 보였다.

다름 아닌 내게 왕후를 취하라 간언했던 귀족이었다.

“왕후마마.”

“대신.”

그녀는 애써 눈물을 숨기려 소매로 눈가를 닦았지만 붉게 변한 눈시울을 숨길 순 없었다.

그것을 본 대신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납작 엎드렸다.

“용서하십시오…… 불충한 저를…….”

“대신. 고개를 드세요.”

“감히 왕후마마께 그런 고통스러운 결단을 강요한 저를 용서치 마시고 제 목을 치시옵소서…….”

“대신!”

“그럼에도 저는 이 나라를 지켜야 하옵니다. 냉정하게 들릴 수 있으나 국왕의 자리가 빈 채 시간이 흐르면 고통받는 이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저로선 대공을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오로지, 오로지 왕후마마께서 가능하십니다.”

왕후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조건을 거십시오. 신 또한 왕후마마와 선대 국왕 폐하의 사랑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대공 각하와 혼인을 하되 육체적인 관계나 부부관계를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위치만을 요구하십시오.”

“…….”

“대공 각하는 좋은 분입니다. 대부분의 귀족이 두려워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분인지. 아마 그라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대신! 그를 그렇게 이용하고 싶은 건가요?!”

“명심하십시오! 이 나라는 현재 미중유의 위기에 봉착해있습니다. 신은 제 목숨을 내놓더라도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생각할 뿐입니다!”

그의 외침에 왕후는 입을 다물었다.

“부디…… 제 간언을 곡해하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불충하여 이런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는 신을 용서치 마시옵소서.”

흐느끼며 충언하는 대신과 그런 그를 울먹이며 내려다보는 왕후.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폐하의 죽음은…… 이 나라 모두에게 슬프면서도 재앙입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를 배신할 순 없어요…….”

그녀가 힘겹게 말했다.

“선대 폐하께서 지켜오신 이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바리스가 지켜온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혹은 바리스와의 개인적인 사랑을 위해서.

두 가지를 저울에 강제로 올려놓게 된 왕후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나 또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그녀가 내게 정말로 혼인을 요청해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나는 섭정을 맡지 않겠다고 공언한바, 이제 와서 내가 그녀를 대신해 섭정을 맡는 것 또한 불가하다. 물론, 말이야 바꾸면 된다지만 이렇게 될 경우 후에 조카 녀석이 승계를 이을 때 정말로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컸고 자칫 승계권을 얻어 버린 내 아이들이 정치 분쟁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건 절대로 피해야 할 상황이었기에 나로서도 퇴로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현명한 결단을 내리기를 빌 뿐.

이게 다 바리스가 떠나버린 탓이다.

속절없이 죽어 버린 동생에 대한 원망에 짧은 한숨이 나왔다.

* * *

“으아아악!!!”

-완전 각성까지 0시간 0분 0초.

눈앞에 보이는 숫자를 보며 바리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진정해! 망할 네 육체의 시간이 멈춰버리면서 내가 발동한 강제 각성도 멈춰버렸어! 이대로라면 네 와이프를 빼앗길 거야!

“닥쳐! 형님을 무슨 난봉꾼처럼 말하지 마라!!”

-그래도 상황이 이렇잖아! 네 와이프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또 네 아이의 미래를 위해 포기할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나는 이런 걸 흔히 봐왔어! 로맨스 소설에서!

“으아악! 그 주둥이 다물라고!”

빛으로 이루어진 페어리의 경박스런 외침에 바리스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제발…… 형님. 육체의 시간을 멈추는 마법을 거둬주세요!”

바리스로선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돌아가야 이 혼란을 잠식시킬 수 있는데. 동생의 육체가 부패되는 걸 막고 싶어 한 형이 육체의 시간을 멈춰버린 탓에 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의 곁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

데이비가 영혼을 보는 건 알지만 바리스와 페어리는 현재 왕성과 꽤 먼 곳에 있었다.

게다가 지박령처럼 묶여서 그저 왕성을 보는 것 말곤 할 수가 없었다.

페어리 중에서도 기이한 특질 능력을 지닌 페어리 나오의 힘은 잘 쓰면 정말 좋지만 반대로 보면 정말 문제가 많았다.

“내가 다시 유체이탈을 하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됐고!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누군가 대리인을 보내야 해! 어떻게든 빙의를 하든지 꿈속에 나타나든지 해서 그를 왕성으로 보내!

데이비의 꼴을 보아하니 당분간 시간 정지를 해제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왕후의 마음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대체 누구에게. 왕성에 진입해서 형님과 만날 만한 인물이 누가 있…….”

그때 바리스의 시야에 누군가가 보였다.

“그러니까. 여기 그 희귀한 사슴이 있다는 거죠? 굉장히 인적이 드문 곳이네요. 그나마 이 작은 마을조차 발견하지 못했으면 노숙을 해야 했을 거예요.”

“륀느의 정보력은 확실하다 분석.”

“다 됐으니 난 쉬고 싶다…….”

희귀한 식재를 찾아 탐사를 나온 미식연구회였다.

-엘프!! 엘프다!! 젠장! 하이엘프면 접선을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하이엘프.”

-응?

“유리아 헬리샤나 씨는 하이엘프가 분명해. 그리고 형님께 다가갈 수 있는 최측근이야.”

-무슨…… 그런 양반이 왜 이런 곳을 와?!

“왜긴. 그런 양반들이니까.”

바리스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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