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08화
유리아는 근방의 지리가 그려진 지도를 스윽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습도, 지형, 기온, 모든 게 그 희귀한 사슴이 있기에 충분한 장소인 거 같긴 하네요.”
“저기, 유리아.”
마을에서 적당한 휴식을 취하기가 무섭게 숲으로 돌진하는 그녀를 따라나서던 점순이가 물었다.
“그…… 사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세인트 디어요?”
“응. 그래. 세인트 디어. 다 좋은데 이 시국에 그걸 찾는 게 맞는 거야?”
“이 시국이니 찾아야 하는 거예요.”
그녀는 담담하게 뒷짐을 지고 숲을 제집처럼 거닐었다.
“세인트 디어에 대한 초기 기록은 고대 한 왕국에서 시작됐어요.”
“역사 공부도 아니고.”
“후후. 듣고 계세요.”
륀느가 주변을 조사하는 동안 유리아는 바위에 걸터앉아 말을 이어 나갔다.
“신성한 동물인 세인트 디어는 사실 그 나라의 왕녀가 키우던 반려 동물이었다고 해요. 보통 사슴과 달리 그 뿔의 형태가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죠.”
“반려 동물?”
“네. 당시의 국왕은 조금 포악한 성정으로 주변국에 패악질을 많이 부렸거든요. 그 탓에 주변국에선 그 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많은 선물을 보냈는데. 그 세인트 디어도 그중 하나였죠. 본래대로라면 왕에게 진상되어야 했던 세인트 디어지만 그런 폭군에게조차…… 유일하게 금쪽같은 존재가 있었어요.”
바로 폭군의 딸인 왕녀의 존재였다.
“몸이 약했던 왕녀는 국왕이 선물로 내려준 세인트 디어를 받고 기뻐했다고 해요. 그리고. 마치 가족처럼 아껴 주었죠. 세인트 디어도 그렇게 그녀를 잘 따랐구요.”
“그래서?”
“중요한 건 지금부터랍니다.”
후후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흔히 알려진 역사에는 세인트 디어에 대한 기록이 없어요. 하지만 제가 손에 넣은 살수왕의 보고에 있던 역사서 진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폭군의 패악질이 점차 심해지자 하늘에서 죽음의 사자가 강림했다.
“죽음의…… 사자?”
“기록에는 그리 남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이건 어쩌면 국왕이 금기를 범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신의 심판이 떨어지는 금기를 범한 국왕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네. 저주가 내려졌죠. 하지만. 여신은 단순히 그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어요.”
저주는 국왕이 아닌 그의 금지옥엽. 폭군의 유일한 아픈 손가락인 그의 딸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런…….”
“네. 그의 딸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어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죽어 갔죠. 국왕은 그 사실에 절망했어요. 일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까.”
끝내 딸은 사망했다. 하지만 여신의 분노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딸의 영혼을 억겁의 고통 속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 세인트 디어가 움직인 것이다.
자신의 주인을 지켜 주기 위해.
세인트 디어는 자신의 혼을 불태워 왕녀의 혼을 감쌌고, 억겁의 시간 저주받을 왕녀의 혼을 보호하여 그녀의 혼을 윤회의 고리로 올렸다.
이후 여신은 국왕에게 지금이라도 변한다면, 용서해 주겠다 말하였다고 한다.
“본래라면 절대 불가능했겠지만. 아빠를 생각하던 딸의 마음이 저주를 대신 받게 했고. 주인을 생각하는 세인트 디어의 마음이 그 딸의 영혼을 구원했죠.”
“그럼…….”
“네. 국왕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고 해요. 그리고. 끔찍한 폭군에서 온건한 성군으로 완전히 개과천선했다는 뻔한 이야기죠.”
“그럼…….”
“국왕은 깨달았어요. 자신의 지위 따위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유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이쯤 되면 감이 잡히지 않나요? 세인트 디어는 여신의 저주조차 중화시킬 정도로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지녔답니다.”
“라운의 국왕님의 혼은 저주를 받은 게 아닌데?”
“좋은 게 좋은 거죠. 세인트 디어의 혼은 국왕의 윤회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우리는…….”
츄르릅 하며 입맛을 다시는 유리아였다.
“그 잘나신 사슴의 고기 맛을 보고.”
웃으며 말하지만 점순이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유리아 방식대로의 애도라는 것을 말이다.
겉보기엔 웃고 있지만 점순이가 보는 세계의 유리아는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다.
“그의 혼이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축복을 해 주고 싶지만…… 다 자기만족일 뿐이죠. 이미 떠난 혼이니까요.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그 축복이 다음 생에 이어지기를.”
유리아의 말에 점순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륀느가 무언가 발견한 듯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쉿. 륀느가 흔적을 찾았다고 보고.”
륀느가 바닥에 찍힌 아주 미세한 흔적을 가리켰다.
“흐음? 이건 꽤 독특한 흔적이네요. 분명 무언가가 밟고 지나갔는데.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요. 이 근처의 생태를 생각하면 이런 발자국을 남길 생명체는 단 하나뿐이네요!”
눈을 반짝인 유리아가 다시 입맛을 다셨다.
이후 륀느의 압도적인 감지 능력을 이용해 조금씩 추적을 시작한 셋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발자국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기…… 저게 세인트 디어야?”
“아뇨…… 아무래도 꽝인 거 같네요.”
그들의 눈앞에 있는 건 독특하게 생긴 새였다.
기록에 있는 세인트 디어는 아니었다.
“세인트 디어는 아니지만 제법 희귀한 조류 몬스터예요. 보기 드문 식재료긴 하지만…… 지금 저희가 찾는 건 아니네요.”
“포획?”
“일단 사냥할까요?”
“숲을 사랑하는 엘프가 저런 지경이라니…….”
“어머나. 그런 거 일일이 따지면 머리 아파서 못 살아요.”
“네가 하이엘프들 사이에서 왜 이단아라 불리는지 알겠다.”
점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유리아가 조류를 낚아채기 위해 정령을 부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유리아 헬리샤나…….
아주 옅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온다.
“음?”
이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조류는 이상을 눈치채고 도망쳐 버렸다.
“앗! 도망쳤다!”
“륀느가 유리아의 경박함을 낮게 평가.”
륀느와 점순이는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유리아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똑바로 직시했다.
“잠시만요.”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눈을 살살 비빈 뒤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 옅은 광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유리아가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엘프의 정령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주변을 휘감는다.
“뭐 하는 거야?!”
“유리아가 미쳤다고 보고.”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아는 독특한 마법을 전개했다.
일반적인 엘프는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이윽고 유리아는 마법이 완전히 발현되자 천천히 그 존재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세상에…… 어째서 이곳에?”
그녀가 놀란 듯 물었다.
“다행입니다. 유리아 씨.”
“폐하.”
유리아가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자 륀느와 점순이는 서로를 흘끗 보더니 유리아를 가리키며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에 검지를 대고 빙빙 돌렸다.
“쟤 돌아 버렸나?”
“유리아의 기행. 언젠가 업보가 터질 거라고 륀느는 확신했다고 평가.”
“안타까워라…….”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아는 제법 놀란 상태로 눈앞의 영령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혼령과 다르다.
유리아가 기억하기로 이건 독특한 영령이었다.
“폐하. 어떻게 된 거죠? 왜 이곳에…….”
“사정을 설명하면 깁니다. 유리아. 당신에게 꼭 부탁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흐음……. 그런데 정말 폐하가 맞으신가요?”
“예?”
엉뚱한 질문에 바리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른 존재란 말입니까? 후우…… 저 맞습니다. 바리스 올 라운. 형님의 동생. 윈리의 오라비.”
“흐음…… 하지만 폐하는 현재 수도에서 돌아가셨는걸요. 영혼이 이런 외지까지 와 있는 건 정상이 아닌데요.”
“사정이 좀 있습니다. 당신 말고는 지금 저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리스의 간곡한 요청에 유리아는 조용히 그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볼게요.”
“실은 형님이 제 육신에 시간을 정지시켜 놓았습니다.”
“그렇죠. 은공께서 폐하의 죽음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시니까요. 실제로 지금의 은공은 냉정하게 주변을 보지 못하고 계세요.”
유리아의 말에 바리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풀어야 제가 육신으로 안착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저는 죽은 게 아닌 유체 이탈 상태라고 볼 수 있어요.”
바리스의 설명에 유리아가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러더니 물었다.
“그러니까…… 즉 돌아가신 게 아니란 말씀이시군요?”
“부끄럽지만…… 예. 제 실수로…….”
“그럼 괜찮으시겠어요?”
“예?”
“지금 돌아가서 이 사실을 고스란히 은공께 알리게 되면…….”
유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 생각에 폐하를 그냥 두지 않으실 듯한데요.”
“큭?!”
말 그대로였다. 일련의 사태. 혼란이 다름 아닌 바리스의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찌 될 것인가.
“윈리 님이나 왕후마마, 그 외에도 은공까지. 폐하. 살아남으실 수 있겠어요?”
윈리는 당장에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라 버리려 들 것이고 왕후인 펠리스티 공녀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 이 못난 남편에게 아주 학을 뗄 것이다.
그리고.
“은공이라면…… 제가 아는 은공이라면…….”
“그…… 그만…….”
“아마 폐하를 꽁꽁 묶어 마그마가 들끓는 화산에 매달아 놓지 않으실까요.”
“그…… 그만…….”
바리스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었다.
“그…… 그건…… 일단 비밀로 좀 부탁드립니다. 기적으로 되살아났다, 이런 느낌으로.”
“하지만 폐하. 은공의 시간 정지는 다른 이가 풀 수 없어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없지 않나요?”
즉. 육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데이비를 설득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연스레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외통수에 걸린 바리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안색은 영혼임에도 더욱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쩌지? 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가 갑자기 허공에 대고 소리치며 무언가와 싸우는 모습을 보인다. 유리아의 눈에 보이는 건 빛으로 이루어진 어떤 형체뿐이었다.
저게 바리스와 함께 있었던 건가. 처음 보는 존재인데.
유리아는 그 모습을 재밌다는 양 바라보다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이렇게 해 보죠.”
유리아는 빠르게 제안했다.
“뭡니까?”
“저희는 세인트 디어라는 생명체를 찾고 있었어요. 우선 세인트 디어가 어떤 생명체인지…….”
“아…… 따라다니면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생략하시죠.”
바리스가 질린 얼굴로 말하자 유리아는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묘하게 아쉽네요. 돕지 말까요?”
“도와주세요. 유리아 씨…….”
“후후. 장난이랍니다. 폐하. 무사하신 걸 확인하니 이렇게 다행이 아닐 수가 없네요. 그럼 본론을 꺼낼게요. 세인트 디어는 영혼에 축복을 주는 신성한 동물이에요. 녀석을 잡아가서 폐하의 육신에 축복을 가할 거라고 은공께 보고할게요.”
유리아의 계획은 생각보다 일리 있었다.
즉. 세인트 디어를 잡아 바리스의 육신을 통해 그의 혼에 축복을 가해야 하니 시간 정지를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고 바리스가 깨어나면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 된다.
“겉으론 그렇겠죠. 솔직히 이걸로 은공을 속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좋습니다. 제가 뭘 도와주면 되죠?”
“그 곁에 있는 분. 누군진 모르겠지만 굉장히 자연적인 기운이 느껴지네요. 세인트 디어, 찾는 걸 도와주시겠어요? 저는 폐하를 돕고 폐하는 저희에게 그 맛있어 보이는 사슴을 먹어 볼 기회를 주시는 거죠.”
유리아의 말에 바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좋습니다. 거래 성립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설명에 부합하는 생명체를 근처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상태가 되면 시야가 굉장히 넓어지거든요.”
“후후. 탁월한 선택이세요.”
유리아와 바리스의 영령이 서로 거래를 체결하고 있던 그 시각.
점순이와 륀느는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분석했다.
폐하. 은공을 속인다. 세인트 디어.
빠르게 머리를 굴린 점순이와 륀느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륀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믿어.”
“륀느가 빠른 계산을 높게 평가.”
륀느는 아티펙트에 유리아의 대화를 고스란히 녹화한 뒤 말했다.
“데이비 님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것보다 유리아를 팔아넘기는 게 더 손쉽고 안전하다고 평가.”
둘은 빠르게 배신을 준비했다. 후에 데이비가 진상을 알았을 때 어찌 될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유리아는 두 사람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이미 륀느와 점순이는 이 사실을 데이비에게 고자질하여 자신들은 살아남는 수단을 선택했다.
배신의 아이콘은 어딜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