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14화
베르단데가 해석을 하는 동안 사실 할 일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도움을 주고 있는 그녀를 혼자 두는 것도 우스운 상황이라 나는 이틀간 그녀의 곁을 지킨다는 연락을 보냈다.
나오는 곧바로 낙원을 찾아 떠날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건 참 안일한 생각이었으니까.
국왕인 바리스는 왕성을 장기간 비울 수 없으니 최선의 수는 낙원을 찾아낸 뒤 바로 이동하는 것이 전부였다.
딱히 베르단데와 나 사이에 문제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지 페르세르크는 잘 다녀오라는 말만을 남겼다.
그리고 현재.
나는 조용히 베르단데의 해석을 지켜보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근처 자리에 자리를 폈다.
아공간 속에 넣어둔 캠핑용 장비들을 펼친다.
“기술력 굿.”
낄낄거리며 간이텐트를 설치하고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한 뒤 적당히 모닥불도 펼쳤다.
바깥은 사람이 익기에 딱 좋은 후끈한 공기로 가득하지만, 내부는 서늘하기 짝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베르단데나 나에게나 의미 없는 기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는 낭만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물론 준비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적당히 고기를 꺼내 불판에 올린 뒤 나는 아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꺼내 들었다.
“크으…… 이거 못 참지.”
천마가 만든 영웅들을 취하게 만드는 술.
바로 우화등선주와 열반주가 바로 그것이었다.
우화등선주의 경우 열반주에 비해 도수가 낮은 편인 만큼 적당히 입가심용이고 메인은 열반주였다.
“안주는 충분하고, 술도 있고, 이게 천국이지.”
나는 간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낄낄거렸다.
이에 한쪽 벽면에 앉아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베르단데가 나를 째려본다.
“누군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주 팔자가 좋은 거 같네?”
“쉬엄쉬엄해. 간식거리 다되면 부를 테니까.”
“…….”
내 대답에 그녀가 조용히 나를 째려보더니 이내 다시 고서에 집중한다.
고서의 얇기는 훨씬 얇지만, 해석난이도가 아무래도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해석을 잠시 멈춘 건 그로부터 약 30분이 지나서였다.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기의 향기에 취했는지 피곤한 얼굴로 다가온 그녀는 내가 깔아놓은 간이 의자 옆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흐으…….”
추욱 늘어진 채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노려보더니 이내 내게 눈빛을 보냈다.
“받아.”
그녀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기 한 점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운 맛이네. 담백한 게 아주 좋아.”
“진척은 어느 정도 됐어?”
“주기적으로 텀이 있을 거야. 바로바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고서 안에 있는 힘을 자극해서 내용에 변화를 줘야 해. 아직 확정된 내용은 없어서 이렇다 할 건 안 되지만, 아마 그 페어리 여왕의 무덤을 찾는 건 가능할 거야.”
듣던 준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후로도 그녀는 적당히 휴식 후 다시 해석을 시도하기를 계속 반복했고, 그동안 나는 그녀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휴식을 취하면서 이것저것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편하네…….”
그리고, 그렇게 이렇다 할 대화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그녀는 묵묵히 간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사실 숲은 평화롭지만 따분한 곳이거든.”
“오늘 해석은 여기까지. 저 고서는 시간에 따라서 변하고 있어. 지금은 아무리 붙잡아봤자 더미 데이터뿐일 거야.”
“그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진행해야지.”
그녀는 그리 말하며 근처 테이블에 놓인 열반주를 집어 들었다.
“어? 그거 마시게?”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지금 와서 생각하기에 그녀도 제법 말투가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땐 참 딱딱한 편이었는데.
“아니, 그거 취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취해? 내가? 취할 수 있으면 취하면 좋겠네.”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망설임 없이 열반주를 잔에 따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꽤 독한 술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묵묵히 술잔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내게 보냈다.
“거봐, 별거 아니잖아.”
“…….”
말술이라 불리는 콘타스의 대제도 한 방에 보내버린 술인 만큼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심연의 신 타나토스가 죽어 해방되었다 해도 그녀가 보통은 아님을 다시 보여준다.
그때였다.
말없이 열반주를 노려보던 그녀가 휘청거린다.
“……흐헤…….”
기묘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취한 거 아니야?”
“취하긴 무슨…….”
그녀는 열반주를 한잔 더 들이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반사적으로 따리 일어서자 그녀가 휘청거리며 그대로 내 품으로 쓰러질뻔했다.
“…….”
취했네.
아마 그녀도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발을 헛디뎠어.”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나를 밀어내고는 그녀의 애장품이나 다름없는 가죽표지의 책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향한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그리고는 휘청거리며 어디론가 향하더니 벽에 대고 이야기한다.
“왜 벽에 박혀있는 거야.”
“……풉…….”
순간 웃음이 나왔다.
“웃겨? 웃기냐고.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우스꽝스러워.”
그녀는 여전히 내가 아닌 벽에 대고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누가 취할 줄 알고? 난 취할 줄 모르는 몸이야. 예전엔 몰라도 지금은 이제 일반적인 생명체도 아니잖아.”
그래. 타나토스가 만들어낸 괴물이 되어버렸었지.
다만 그건 과거일 뿐이고 모든 것을 되찾은 그녀는 심연의 공주이며 하나의 독자적인 생명체가 되었다.
“아이 씨, 자꾸 헛소리할래?!”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베르단데는 잔뜩 취한 것마냥 꼬부라진 혀로 횡설수설하며 벽을 마구잡이로 걷어찬다.
“후…… 후훗……. 꼴좋네. 벽에 박혀있는 꼬라지가 아주 웃겨.”
난 네가 더 웃겨.
사실 이런 모습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제법 신선하기 그지없고, 이제 와서 그녀도 조금 특이한 육체를 지니고 있을 뿐 평범한 존재구나 싶었다.
“아하하하! 버둥거리는 꼴이 웃겨!”
아니 난 네가 더 웃긴다니까.
그리 말하더니 그녀가 발을 헛디디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더니 벽면에 얼굴을 처박아버렸다.
“꺅! 이 변태 새끼!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주제에 나한테 추파를 던져?! 꺼져!”
누가요?
어이가 없는 기분에 나는 영상 저장용 아티펙트를 꺼내 그녀를 찍었다.
“베르단데.”
내 부름에 그녀가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대답한다.
“뭐, 왜.”
“사진 한 장 찍게 웃으면서 브이자 해 봐.”
“이…… 이렇게?”
그녀는 벽에 대고 배시시 웃으며 양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차갑고 조용한 이미지의 아름다운 소녀가 평소에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저러고 있으니 이건 이것대로 굉장히 귀중한 협상 재료가 되리라.
술이 깬 후 그녀는 지금의 모습을 기억할까.
기억하면 무슨 말을 할까.
어찌 되었건 중요한 건 지금 같은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베르단데. 평소 하고 싶었던 거 다해.”
“웃기는 소리.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게 어딨어. 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살아본 적 따위 없어.”
그리 말하더니 그녀는 쪼그려 앉아 훌쩍거렸다.
“나도 많이 힘들었는데……. 엄마 보고 싶어요오…….”
“…….”
“많이 보고 싶은데 왜 우릴 두고 떠난 거예요…….”
훌쩍거리더니 이내 엉엉 울며 투정을 부린다.
그 내용은 대부분 부모를 향한 그리움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그것을 아티펙트에 담았다.
다른 이는 몰라도 베르단데와 상당히 앙숙인 이실디가 보았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손에 넣으려 들겠지.
이걸로 베르단데와 이실디 모두를 이용할 카드가 완성된 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르단데가 갑작스레 내 쪽으로 달려와 품 안에 안겼다.
“흐윽…… 아빠……. 왜 먼저 떠난 거예요. 남은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급기야 내가 헤라클래스로 보였는지 투정을 부리며 어리광부리는 모습을 나는 고스란히 담았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고 일단은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말없이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자 그녀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본다.
들켰나?
“그거 맞아요?”
안 들켰네.
그녀는 내 팔을 잡아 들더니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예전에…… 이렇게 해줬잖아요.”
“머리 쓰다듬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 않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모님의 손은 다른 법이니까.”
그 후로도 그녀는 내게 굉장히 많은 어리광을 피웠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애착 인형이 있는데 그게 어디 갔는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느니, 밤에 자다 보면 주변이 서늘해서 곁을 찾게 된다느니 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내용의 절반 이상은 베르단데가 겪은 게 아닌 그녀가 바란 것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래 착하다.”
결국,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한참을 다독여준 후에야 그녀는 내 품에 아기처럼 안겨 잠들었다.
실 나이는 그녀가 훨씬 많지만…… 무슨 상관이랴. 내 전전생의 존재만 놓고 보면 베르단데보다 연장자였을 텐데.
인류의 신녀.
프리아.
전생이 여성이었다는 건 조금 껄끄러운 진실이지만 애초에 윤회를 거치면서 남성이 여성이 되기도 하고 여성이 남성이 되기도 하는 건 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곤히 잠든 그녀를 텐트 안 침낭에 눕힌 나는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의자에 앉아 조용히 책이나 보며 술을 홀짝였다.
* * *
베르단데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아마 술의 영향이리라.
말없이 머리를 감싸 쥐며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마치 숙취에 찌든 대학생마냥 엉금엉금 기어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할 준비도 못한 채 중얼거렸다.
“뭐지…… 어제의 기억이 없어…….”
“잘 잤느냐?”
내 부름에 그녀가 흠칫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나를 보더니 이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무…… 무슨?!”
“왜 그래.”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자신의 착각이거나 나도 기억을 못 한다고 판단했는지 그녀는 말을 아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어제 찍은 영상 아티펙트를 가동시켰다.
-아하하하! 꼴좋다! 벽에 꼬인 꼬라지 좀 봐!
-그거 맞아요? 머리 쓰다듬어줘요…….
-더 더! 왜 멈추는 거예요.
영상을 쭉쭉 넘길 때마다 베르단데의 얼굴은 붉은 걸 넘어서 이젠 창백하게 질리고 있었다.
“덕분에 재밌는 영상도 챙겼어.”
“…….”
베르단데는 마치 창백한 시체처럼 공허한 얼굴로 나와 아티펙트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수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 쓰레기 같은 작자가…….”
“쓰레기라니. 이런 귀한 건 찍어놔야지. 그리고 그거 맞아?”
“닥쳐!”
“선남네? 이실디한테 보낸다? 처신 잘하라고.”
“크윽?!”
그녀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그녀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지워!! 지우라고!!”
급기야 허구의 힘을 사용하며 나를 압박해오지만 나는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하며 그녀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너 진짜 싫다!!”
그녀가 이렇게 강하게 의지를 표명하는 것도 신선하기 그지없다.
“알았어. 이실디에게 보내진 않을게.”
“……그냥 지워.”
“그건 안되고.”
뿌드득…….
그녀가 이를 강하게 갈았다.
“어금니 나간다. 조심해.”
“…….”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그녀는 더 이상의 대화를 해봐야 이득이 없다 판단했는지 허공에 떠 있는 고서 쪽으로 향했다.
“반드시 복수할 거야.”
“그래.”
그래. 그렇게 세상 다 산 늙은이처럼 굴지 말고 살라고.
나는 느긋하게 커피를 내밀었다.
“한잔할래?”
“됐어!!”
그녀가 격하게 소리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페이스를 유지했다.
“아 참. 거기에 선대 요정 여왕의 기록도 있나?”
“……있어.”
“그래? 알아낸 건?”
“많지 않아. 그녀가 세상을 저주하며 죽었다는 이야기나 이름 정도.”
“이름?”
“라그나리스 나오리아. 해석이 이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이름이야.”
* * *
데이비가 떠난 후 바리스는 데이비를 기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낙원을 찾는 단서를 정리해서 가져오겠다며 떠난 데이비를 기다리는 나오 때문이었다.
“있지 바리스. 몸이 엄청 가벼워.”
“그건 다행이네.”
“그렇지? 이제 그 인간이 돌아오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야. 길고 길었던 방황도 이제 종지부가 보이는 거라고.”
그녀는 해맑게 웃어대며 말했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정화 덕분에 그녀는 요정 여왕으로서의 자격을 일부 각성함으로써 엄청난 시간을 얻어냈다.
당장 바리스의 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를 압박하던 시간은 상당히 확보한 셈이었다.
“그렇게 좋은가?”
“내 전부였으니까. 넨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난 못할 게 없어.”
그렇게 말한 나오는 조용히 날아올랐다.
바리스에게서 멀리 벗어날 순 없지만 적어도 이 왕성 내부 정도는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이의 눈에 보이지 않던 과거와 달리 정화를 받으면서 다른 이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다.
“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날아가던 나오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시녀를 시야에 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시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땔 수가 없었다.
이윽고 시녀가 그녀를 지나쳐가는 그 순간.
나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굳은 표정을 했다.
-후회밖에 남지 않을 여정임에도 너는 그곳으로 향하는구나. 미안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이었다.
시녀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며 사라졌고 나오는 푸른 머리의 아름다운 시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녀가 모퉁이를 지나 사라진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시녀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오의 시야에 시녀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오, 형님이 돌아오셨다. 갈 준비해.”
그때 저 멀리서 바리스가 외출용 의상을 입은 채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왜 그래.”
“어…… 응? 아무것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