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515화 (1,515/1,559)

제 1515화

블랙 슬라임이 남긴 붉은 보석은 에반젤린의 소중한 보물 1호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목걸이처럼 줄을 감아 목에 걸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방송이 끝나고 바닥에 추욱 늘어져 있던 그녀는 목에 걸린 붉은 보석을 멍하니 바라본다.

비화가 만들어준 게임은 정말 핫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단순한 RPG 같은 느낌보다는 PVP도 제법이고 시나리오 스토리도 좋은 마당에 그 내용까지 뽕이 차오르는 내용들이 많은 터라 많은 사람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림 전시회 또한 벌써 2번째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만큼 비화의 말마따나 보석의 에너지가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온전한 양을 채우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다.

녀석이 남겨둔 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무리하게 일을 치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때였다.

우웅…… 우웅!

고요하게 반짝이던 붉은 보석이 처음으로 미동했다.

“어?”

그리고, 앗 하는 순간 붉은 보석이 신명 나게 공명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녀의 목걸이에서 빠져나와 멋대로 날아올랐다.

“뭐…… 뭐야?!”

마치 먹을 것을 찾은 맹수처럼 부유하던 보석은 허공을 열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고, 에반젤린은 한참 동안 멍하니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페어리의 낙원, 선대여왕 라그나리스 나오리아의 무덤으로 가는 열쇠를 얻었고, 그녀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위치도 어느 정도 특정한 이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형님.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메가로드리아의 등에 올라 허공에 날아오르자 바리스는 옅게 질린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하늘을 나는 게 마냥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국의 국왕, 그것도 얼마 전에 빈자리를 크게 체감한 탓에 바리스의 부재를 귀족들은 반대했지만 호위 면에선 문제가 되지 않거니와 바리스의 강한 의견 표명 때문에 물러나는 기색들이었다.

“저…… 라운의 영토 내에서 움직이는 겁니까?”

“무슨 소리. 우리가 갈 곳은 서대륙 끝이야.”

“예?”

당황한 바리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서 대륙 끝이라뇨, 서대륙 끝이라면…….”

“서대륙의 끝, 바다가 있는 지역에 섬들이 있는걸 알지?”

“네. 그렇습니다만…….”

“그곳에 저 녀석이 찾는 목적지가 있어.”

마냥 낮과 밤이 공존하는 기묘한 장소는 아니었다. 다만 고서가 가리키는 방향을 두고 보았을 때 티오니스에서 존재하는 장소는 그곳이 전부였다.

“저…… 이런 상황에 콘타스 제국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영공에 침입해도 괜찮은 겁니까?”

“무얼, 이미 대제와는 이야기를 끝냈어.”

그와는 간단한 거래를 했을 뿐이었다.

“거래? 거래라 하심은?”

“뭐, 자잘한 이야기야. 그렇게 거추장스러울 것도 없는.”

불안한 표정을 짓는 그였다.

“형님, 정치라는 게 의도와 다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겠지.”

마냥 간단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동생이 바라는데 형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줘야겠지.

대제가 아무리 내게 호의적이라 해도 어느 정도 받는 게 없을 순 없었다.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마. 고작해야 방문이야. 이 정도 일로 콘타스 쪽에서도 막무가내로 큰걸 요구할 순 없어. 기껏해야 과거 살수왕이 얻었던 콘타스의 보물 하나를 돌려준 것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바리스는 쉬이 믿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계약자. 도착했다.]

이윽고 서대륙의 끝에 있는 대양의 저편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섬들이 여럿 보였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어부들도 이곳으론 잘 오지 않는다고 한다.

“왜? 저곳이 낙원이면…….”

“이봐. 낙원이라는 게 실존한다고 생각해?”

내 질문에 나오가 잠시 침묵한다.

표정을 볼 순 없지만, 무표정의 륀느와 같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일 지경이다.

“그럼…… 낙원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 낙원에 관해선 여러 관점이 있다는 뜻이야.”

창공에서 멈춘 메가로드리아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린 나는 곧바로 뛰어내렸다.

동시에 바리스도 부유 마법에 두둥실 떠오르며 나를 따라 천천히 하강한다.

“으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나오의 말에 지금까지 침묵하던 베르단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낙원이라는 말은 참 불안정한 말이야. 명확한 기준…….”

“베르단데, 쓸데없는 말 하지 마.”

“…….”

괜한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후에 진실이 펼쳐졌을 때, 선택은 그녀의 몫일 테니까. 애초에 베르단데도 나도 진실을 눈으로 본 게 아니기에 섣부른 판단은 좋지 않았다.

야생이 그대로 드러난 섬은 소문대로 누군가의 손이 닿지 않았다.

간간이 해안가에 인간의 흔적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일부일 뿐, 조금만 깊게 들어가도 위험천만한 몬스터들이 가득할 테니까.

“저기…… 형님, 이런 곳에 정말로 낙원…… 인가요? 페어리가 체격이 작다곤 해도 섬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혹…….”

“아니. 여기가 맞아.”

그때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던 베르단데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입니까?”

“페어리의 낙원, 황혼과 여명의 정원은 이곳이 분명해.”

그녀의 말에 페어리. 나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게 뭐야……. 이곳이 정말 낙원이라는 말이야? 이곳의 생태는 페어리에게도 그리 좋지 않아! 숲에 환장하는 엘프들이라도 오랜 시간 교감하고 개발해야 하는 험지…….”

“그래. 그러니까 낙원의 입구지.”

“무슨?!”

“낙원이 이런 곳에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했을 테니까. 베르단데.”

내 부름에 베르단데는 바닥을 새하얀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나뭇잎과 흙바닥을 걷어내자 단단한 석재 바닥이 보인다.

“이건? 자연적인 게 아니군요.”

“열쇠 구멍이지. 숲을 돌면서 이걸 찾아다녔어.”

고서와 공명하는 장소를 찾아다닌 결과였다.

이후 베르단데는 타르타로스 지하산맥의 숨겨진 동굴에서 발견한 작은 종이 한 장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동시에.

작지만 사람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의 균열이 열리기 시작한다.

다만, 일반적인 균열과 달리 극도로 불안정하고 흉포한 기류가 쏟아져나왔다.

들어가면 조각도 남기지 않고 찢겨버릴 것처럼 섬뜩함이 감돈다.

“이건……마나 폭풍 같은데요? 어지간한 익스퍼터도 잘못 발을 디디면 조각나버릴 정도로 흉포한 기운입니다.”

바리스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낙원의 입구를 이렇게 막아놓은 건가?”

“막은 게 아니야. 그냥 들어가면 돼.”

“자살 행위입니다!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나오는 게 불가능한 게 정설입니다!”

단순히 찢겨나가는 걸 너머 이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

간간이 티오니스에서 보이는 자연현상으로 전조가 워낙에 확실하고 극히 드문 현상이라 인명피해는 거의 없지만 분명한 건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건?”

“낙원의 입구. 고서에는 어떤 인물이 페어리의 인도를 받아 낙원으로 향했다고 하지. 사실 반쯤은 거짓이지만…… 통행증이 있어야 하는 건 사실이야.”

“낙원에 아무도 들여선 안 되니까요?”

바리스의 질문에 베르단데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서 확인하면 되겠지.”

그렇게 말한 내가 먼저 발을 내디뎠다.

뒤이어 베르단데가 따라왔고, 바리스는 걱정스레 격류를 보다 눈을 감고 나를 따라 뛰어들었다.

동시에 세상이 일변하는 느낌이 들었고, 마치 전후좌우 상하가 뒤바뀐듯한 울렁증과 함께 일순간 세상이 돌았다.

마치 역천세계라도 된 것마냥 뒤집힌 세계는 중력의 개념조차 없어 보였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내가 처음 본 것은 조각난 세계였다.

생명체라곤 흔적밖에 남지 않은 공간.

파괴되어 조각난 대지의 아래는 마치 신의 영역 심층을 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관이네.”

뒤이어 베르단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리스와 페어리 나오가 모습을 드러내며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축하해. 페어리의 낙원, 황혼과 여명의 정원에 온 것을 축하한다.”

하늘은 맑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 하늘은 일반적인 차원의 하늘, 즉 우주가 있는 하늘과 달리 마치 끝이 정해진 가상공간 같았다.

“여기가…… 황혼과 여명의 정원이라고?”

“그래.”

“말도 안 돼!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해! 이게 대체 무슨 낙원이야! 이건 그냥…….”

“지옥 같다고?”

“…….”

“아니면. 무덤 같아?”

나는 가볍게 몸을 날려 조각난 대지의 위에 온전히 남아있는 썩은 나무 재질의 옥좌에 다다랐다.

“이게 무슨…….”

“여왕의 옥좌.”

고서를 펼쳐 든 베르단데가 중얼거렸다.

“요정 여왕의 자리. 고서에는 이 옥좌는 절대 변질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다고 되어있어. 하지만 망가졌지.”

“낙원이…… 파괴되었다고?”

넋이나간 목소리로 그녀가 휘청거렸다.

“드디어 찾았는데……. 드디어…… 그렇게 찾아낸 결과가…… 이 폐허라고? 장난이 지나치잖아……. 이 정도면 차라리 바깥이 낙원처럼 보일 정도잖아…….”

나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다시 보니 파괴되어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대지 조각들은 거대한 정원이 갈라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

“…….”

“왜 그래.”

“잠깐…… 손을 봐야겠어.”

그리 말한 베르단데가 눈을 감고 손을 뻗자 그녀의 품에 쥐어져 있던 가죽표지의 책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동시에 옅은 빛이 감돌며 주변에 퍼져나갔고, 허구의 힘이 현실화되며 대지를 휘감았다.

이윽고 마치 퍼즐을 맞추듯 조각나버린 세계가 천천히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박살 난 대지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지던 찰나.

-안돼!!

누군가의 비명 같은 소리가 들린 것 같은 환청이 느껴졌다.

“방금 뭐라고 했어?”

베르단데가 하던 일을 멈추고 나오를 바라보았지만, 낙원의 현실이 낙원이 아닌 파괴된 폐허라는 사실 때문에 나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단데나 나는 명확하게 들었다.

이에 내가 신호를 보내자 베르단데는 복구를 다시 시작했고.

다시 한번 환청이 들려온다.

-안돼!!

필사적인 외침이었다.

그럼에도 왕좌는 서서히 완성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급기야 사방에 흩어져있던 미약한 에너지들이 진동하며 번뜩인다.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에너지에 나는 곧바로 베르단데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고 거대한 빛은 우리 모두를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으윽…… 눈부셔.”

제대로 방비가 되지 못한 건지 베르단데가 인상을 찡그리며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투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치 거대한 기억 속에 들어온 것처럼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공주님. 그렇게 막 날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아하하하!!

-공부시간입니다. 공주님!!

-공부 지겨워!

작은 페어리 몇몇을 대동한 채 숲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귀여운 페어리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베르단데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선대여왕의 기억 같지?”

끔찍한 파괴의 현장.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저 기억의 끝에 해답이 있으리라.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어리고 순수한 페어리는 1차 성장을 위해 세례를 받는 곳에서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한마디를 전해 들었다.

-공주님. 당신은…… 여왕의 자질을 지녔습니다…….

여왕의 자질?

순수하고 어린 페어리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그녀의 자매로 보이는 페어리들의 질투 어린 표정이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잠깐만요!! 왜 라그나리스에게 자질이 허락되는 거죠?! 저희는 긴 시간 페어리를 위해 헌신해왔어요!

-이……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동안 우리가 고행까지 하면서 준비해온 것들은…….

-공주님들…… 쇠락하는 우리 동족에게 여왕의 자질을 지닌 이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럼 우리는 대체 왜!

그리 말한 페어리 하나가 세례장 밖으로 나가려 하자 라그나리스 나오리아가 쪼르르 날아 그녀의 팔을 붙잡는다.

-언니?

-…….

-어…… 언니. 제가 뭘 잘못…….

짜악!!!

순식간에 동생의 팔을 소리 나게 쳐낸 언니 페어리는 울먹거리며 라그나리스에게 소리쳤다.

-긴 시간을 노력했어!! 여왕이 될 자질을 가지기 위해서 밤낮 가리지 않고 노력했다고!! 아무리 소중한 동생이라도! 네가 내 생의 전부를 이렇게 허무하게 빼앗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고!!

그것은 다른 페어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여왕의 자질이 정해진다는 걸 몰랐던 자매는 옛전설에 따라 필사적으로 선행을 베풀고 교감하며 여왕의 자질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수련하고, 노력했다.

반면 라그나리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느긋하게 지내던 게으름뱅이였다.

여왕이 되면 라그나리스는 내가 곁에서 지켜줄게. 그러니 네가 바란다면, 그렇게 살아도 좋아.

툭하면 간식을 가져오고 즐겁게 이야기하던 언니들의 눈에 맺힌 한 맺힌 눈물을 보며 라그나리스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왜…… 왜 나를 고른 거야?

그리고는 세례를 내려주는 정화의 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왜…….

결국, 자신의 생 전부가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페어리 자매들은 패닉에 빠졌고 무기력하게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언니…….

-미안…… 라그나리스. 네 잘못이 아닌 건 알아. 하지만…… 지금 널 보고 있으면 너무 괴로워…….

평생을 여왕이 될 준비만 하고 왔건만, 정작 정화의 꽃은 다른 아이를 지목했다.

바보같이 착하고 순수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 라그나리스를 지목하는 것으로 모든 그들의 의지를 짓밟은 것처럼 느껴졌다.

착한 언니들이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여왕이 될 준비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온 만큼 그녀들은 그녀들만의 자부심이라는 게 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실제로 정화의 꽃은 라그나리스의 자매들에게 과할 정도의 시련을 주기도 하면서 그녀들을 시험해왔다.

고통 속에서도 웃으며 자신들의 길을 밟아온 그녀들에겐 하루아침에 버려진 듯한 허탈함이 느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무기력증에 빠졌다.

그러니 가장 고통스러운 건 라그나리스였다.

-저…… 언니…….

-미안 라그나리스…… 다 이해하고는 있는데……. 흐흑…… 지금 네 얼굴을 보기가 너무 힘들어…….

-내가 여왕이 되어서 페어리들을 더 잘살 수 있게 만들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고통스러워도 참았는데.

그렇게 착하던 맏언니와 둘째 언니까지 흐느끼는 모습을 보며 라그나리스의 마음은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 찼다.

애초에 요정 여왕의 자질이라는 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걸 페어리들은 모르고 있었다.

-왜 내게 이런 게 내려져서…….

라그나리스는 슬피 울어야 했다.

하지만 운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진 않았다.

다른 페어리들은 여왕의 자질을 지닌 존재가 나타났다며 기뻐했지만, 당사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라그나리스는 소중한 자매들이 그렇게 무너지는 걸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공주님? 어디 가시나요.

-나갈 거야. 가서 그 낙원에 도착할 거야. 그곳에 가면…… 언니들을 다시 웃게 만들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순수하기 짝이 없는 그녀는 막연한 목표를 잡았고, 평생 나가 본 적 없던 부족을 가출했다.

시종 몇몇을 데리고서 말이다.

그렇게 떠나버린 라그나리스에게 바깥세상은 상상도 못 할 위험천만한 장소였다.

그녀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위험한 험지를 지나며 낙원을 찾아 헤맸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한 명의 시종을 제외하고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세요 공주님!! 제가 막겠습니다!

-안돼! 그럴 수 없어!

-가셔야 합니다! 공주님은 우리 페어리의 희망이세요!!

자신을 희생하며 떠나보내는 시종들의 모습에 라그나리스의 마음은 점차 부서져 갔다.

고요한 모닥불 아래에서 침묵하던 라그나리스는 퀭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언니들은 이런 고통을 이겨낸 거구나……. 난 몰랐어.

-공주님…….

-웃자…… 웃어야지. 나는 우리 자매들 중 가장 바보니까. 할 줄 아는 건 웃는 것뿐인 바보잖아. 안 그래?

해맑게 웃는 라그나리스를 보며 베르단데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바보 같을 정도로 긍정적이고 이타심이 깊다……. 여신도 참 잔인하구나…….”

베르단데의 말대로 내 시선에 비친 선대여왕 라그나리스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여왕의 상이었다.

어떤 역경에도 끝내 웃음을 잃지 않고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은…… 아니 우리 부족과 페어리의 미래를 내가 비춰 보일 거야.

그녀는 고통스러운 순회 길에서 조금씩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죽을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서대륙의 끝 섬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이곳에 있는 비석을 읽고 충격에 빠졌다.

-그럼…… 낙원은 처음부터 내 곁에 있었다는 거야?

-……공주님.

-그럼…… 나를 이곳까지 데려오기 위해 희생된 아이샤나 벨가, 링크는?

-공주님…….

-유미르, 렌가, 바르샤드, 레이첼.

하나하나 희생된 시종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진 채 절규했다.

-그 애들은!! 고통스럽게 죽어간 그 애들은 대체 무슨 죄가 있는데!!

-공주님…… 고정하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루아…….

마지막 남은 시종 루아가 거의 다 찢어진 날개를 바닥에 질질 끌며 힘겹게 기어왔다.

그리고는 공허한 눈으로 절규하는 그녀의 양 뺨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정신 차려요! 라그나리스 나오리아!! 당신은…… 당신은 우리 페어리의 희망입니다! 여왕이 될 자격이 있는 존재예요! 당신을 목적지까지 데려가는 것이 저희 임무였고, 저희의 바람입니다! 당신이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요!

그 말에 나오리아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켰다.

-으흑…… 흐으윽…….

많은 희생 끝에. 슬픔에 빠져 무기력해진 언니들을 뒤로한 채 겨우 도달한 이곳, 낙원에서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자신의 날개를 뜯어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지지만 날개를 뜯고 산란을 준비하는 여왕개미처럼.

그녀는 자신의 상징이자 부유할 힘. 마지막으로 그녀의 힘의 근원인 날개를 뜯어냄으로써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낙원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당혹감이 채가시기도 전에 라그나리스의 멘탈을 으깨버리는 마지막 일이 벌어졌다.

-루아…….

-공주님……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그 말을 끝으로 마지막 시종인 루아는 품에 준비해둔 작디작은 뼈를 꺼내 자신의 가슴에 찔러 피를 쏟았다.

-루아! 무슨 짓이야!

-예언가님의 말이 있었습니다. 불완전한 공주님의 힘으론 낙원의 문을 열 수 없어요. 따라서 저희 중 마지막에 남은 존재는 목숨을 불태워 만든 힘으로 공주님께 헌신하라. 라고.

페어리가 죽으면서 만들어내는 상당한 힘을 그녀에게 건네준다는 소리였다.

그동안 역경을 함께 디디며 가족 정도로 정이든 시종중 마지막 시종인 루아가 죽자 라그나리스는 그 자리에서 미친 요정처럼 멍하니 울었다.

어지간한 페어리조차 허탈함과 분노, 슬픔에 휘감겨 미쳐버릴 것 같은 이 상황 속에서 그녀는 투명하고 순수한 눈물을 계속해서 흘렸다.

-어째서!! 어째서 이래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나하나 모두 희생시켜가면서 도착한 이곳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필사적으로 아픔과 슬픔을 억누르려 해도, 아무리 순수하고 착하며 밝은 라그나리스라도 이만한 고통은 도저히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건이 완성된 그녀의 힘은 그녀의 의지를 벗어난 채 생자와 망자의 힘을 모두 다루기 시작하며 그녀가 있는 곳을 기점으로 이공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빨려 들어간다.

낙원? 이딴 게 낙원?

그래서, 이런 낙원을 찾아서 대체 얻은 게 뭔데. 이 빌어먹을 낙원에 도달해서 할 수 있는 게 뭔데.

모든 것을 희생하고 도착한 낙원은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 찬 화원이었다.

그리고, 그 화원의 끝에는 그녀가 앉기엔 조금 커 보이는 옥좌가 있었다.

인간종에게 맞는 정도의 옥좌가 아닐까.

휘청거리며 다가간 그녀는 자신의 한족 눈 시야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여정 초기에 다친 눈이 이제 와서 빛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온몸이 삐걱거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도착했다.

여기서 멈출 순 없다. 죽은 이들의 염원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렇게 옥좌에 올랐을까.

그녀의 육체가 인간처럼 커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완전히 옥좌와 하나가 되듯 편안하게 등을 기대었다.

-내가 만들어낼 거야. 페어리의 낙원을, 그러니까. 그곳에서 지켜봐 줄 수 있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웃는다.

망가지면서도 웃음과 낙천적인 마음일 잃지 않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밝고 순수하며 낙천적인 라그나리스라도 진짜 고통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은 몰랐다.

이곳에 오기 전 겪은 고통과 희생은 굳이 말하자면…….

“이제 시작인가?”

“굳이 말하자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을 테니까…….”

페어리 나오가 듣지 못하게 베르단데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낙천적이라도. 그녀는 견뎌내지 못하겠지…….”

“…….”

이 환각은 라그나리스의 감각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달해왔다. 마치 우리가 나오리아가 된 것 같은 그 일체감에 정신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선대여왕의 잔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묻진 않았다.

대충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네.”

베르단데가 중얼거렸다.

“페어리의 시스템은 끔찍할 정도로 지독한 공리주의라는 거.”

다수를 위해 소수를 무자비하게 희생한다. 단순한 희생도 아닌 마치 농락에 가까운 희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베르단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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