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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516화 (1,516/1,559)

제 1516화

그녀의 손짓에 따라 낙원은 꽃을 만발하고 아름다운 향기와 싱그러운 과일이 열렸다.

그녀가 옥좌에 앉으면서 만들어낸 에너지는 서서히 말라가던 페어리들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같이 온 모두를 잃고 홀로 그곳에 도달한 라그나리스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웃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여기서 모두를 지켜줄게.

사이가 그토록 좋았던 자매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좋지 않지만, 자신이 노력함으로써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할 수 있어. 그들의 희생을 절대 헛되이 하지 않을 거야.

온전한 요정 여왕으로 각성한 그녀는 마치 본능처럼 페어리에게 축복을 만들어냈다.

그 옥좌에 그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페어리라는 종족 전체에 거대한 에너지를 가져다줄 수 있으니까.

실제로 그녀가 여왕의 옥좌에 오르고 페어리들의 삶에 축복이 깃든다.

여왕의 위계에 오르기 위해 평생을 고초를 겪으며 준비해온 자매들도 처음엔 슬퍼했지만, 라그나리스가 여왕으로서 페어리에 축복을 가져오자 서서히 그녀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의 곁에 라그나리스 나오리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라그나리스 나오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는 이 낙원에서 마치 자신을 베터리처럼 페어리 모두에게 축복을 전해 주는 게 전부였다.

희생당한 이들의 기억은 슬프지만, 그 희생 끝에 종족 전체가 밝은 미래를 맞이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다행이에요. 모두가 웃을 수 있다면, 그들의 희생이 헛되진 않았다는 게 증명되는 셈이니까.

하지만.

그게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났을 때.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처음엔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음 같아선 금의환향이라도 하고 싶지만, 자신은 많은 이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이곳에 도착한 존재였다.

그러니 이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다만, 고독의 끔찍함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녀는 페어리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축복을 내려주며 페어리들을 더욱 부흥시켰지만 정작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만한 힘을 지녔으니 그만한 고통은 필수불가결.

처음엔 당연히 그리 생각했다. 그게 자신의 사명이라고, 그리 여겼다.

하지만 그게 몇 년이 지나고 몇십 년이 지났을 때.

그녀는 끔찍한 고독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달았다.

-부탁이에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여왕 같은 거 한다고 날뛰지 않을게요…….

-부탁이에요. 너무 외로워요…….

페어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더욱 그 고독감은 극심해졌다.

차라리 보이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까.

특히 라그나리스 나오리아처럼 외로움을 잘 타며 남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이 같은 일은 끔찍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100년이 훌쩍 넘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동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자신 또한 행복하다는 말을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지독한 고독은 단순 글자로 보는 고통과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울어봐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200년, 300년이 속절없이 흐른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시간이 지났다.

그 후로도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며 더 이상 그녀가 교감했던 가족들은 남지 않았고 이제는 남이나 다름없는 페어리들만이 남았다.

-아…….

그녀는 페어리의 기존수명을 아득히 넘어서며 끔찍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풀어주세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신님, 너무 미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소를 잃지 않고 어떻게든 목적을 찾아 여정을 멈추지 않았던 불굴의 정신력도 시간의 고독 앞에선 여지없이 무너져내렸다.

그럼에도 그녀를 대신할 존재 따윈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페어리와 세상을 사랑하던 작은 요정은.

-세상 따위……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세상을 증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엔 단순한 원망에서 점차 증오로 바뀌고 이내 혐오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그녀가 존재하는 것으로 페어리에게 축복이 내려지는 만큼 그녀가 싫다고 하여 축복을 거두고 다음 대의 여왕이 이곳을 찾아오게 할 수도 없었다.

이런 끔찍한 시스템을 대체 누가 만들었는가.

그녀는 급기야 세상을 만든 신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반드시 지옥 밑바닥에 떨어지길 기도합니다.

앙증맞은 미소와 해맑은 웃음은 사라졌다.

지독한 자조와 저주가 섞인 외침. 옥좌를 벗어나지 못해 물어뜯다 못해 완전히 갈라져 버린 손톱과 자해의 흔적만이 남았다.

망가진 몰골을 치료할 수는 있었으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혹여라도 이러다가 죽어버리면 해방되지 않을까. 그런 자그마한 희망만큼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자해로 인한 고통이 없으면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릴 것 같았기에 방치한 것도 있었다.

“만약…… 다시 이런 선택지가 내려진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거지 같은 여정은 하지 않을 거야.”

세상에서 페어리를 가장 사랑했고, 그들의 미소를 지켜주고 싶어 했다.

-페어리가 멸종하는 게 문제라고? 알 게 뭐야.

세상 모든 이들의 미소를 지켜주고 웃다 보면 언젠가 행복한 일이 올 거라 믿었다.

-이 세상은 쓰레기야. 그리고 여신은 최고의 오물이고. 망할.

격한 욕설을 토해본들 돌아오는 건 없었다.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위치에 있는 그녀에게 불로장생은 그야말로 저주나 다름없었다.

-이 세상에 저주를. 멸망의 저주를!!

핏발이 선 눈으로 제 목을 사정없이 꼬집고 긁으며 저주를 퍼부을수록 그녀의 몸과 정신은 비틀려갔다.

낙원?

이건 낙원이 아니다.

다른 페어리에겐 낙원으로 보일지라도. 나오리아에게 이곳은 지옥이며, 무덤이었다.

이딴 게 낙원?

그저 저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낙원, 아니 지옥 같은 무덤에 처음으로 어떤 이변이 발생했다.

정체 모를 검은빛의 단검 하나가 닿은 것이다.

말하는 법도 잊어버릴 정도로 공허하게 존재하던 그녀는 죽은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금속이라고 하기엔 미묘하게 물컹한 느낌이 담긴 단검이었다. 그리고 그 단검의 핵에는 붉은 보석이 담겨있었다.

이게 대체 무엇일까.

아름답던 꽃도, 싱그러운 과일도 구역질이 나는 것으로 바뀐 이 지옥 같은 무덤에서 그녀는 이 검은 단검이 오히려 역겨운 꽃이나 과일보다 직관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역하지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흑빛.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없다는 듯 단검의 끝을 제 심장에 겨누었다.

이런 거로 죽을 수 있었다면 애초에 몇 번이고 혀를 깨물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심장에 박았고.

동시에 그녀가 앉아 있던 옥좌가 무너진다.

-저주합니다. 신이시여. 당신이 만든 이 지옥의 끝자락에서 당신을 저주하겠습니다. 향후 그 어떤 존재도 이 지옥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이 세상에 붕괴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으로 낙원은 붕괴하듯 부서져 내렸고, 그녀는 조각조각 흩어지며 사라졌다.

-바라옵건대. 이 저주받을 세계에서 두 번 다시 나와 같이 속아버리는 희생양이 나오지 않기를. 부디 이 지옥이 제발 이제 끝나기를.

그 말과 함께 환각이 사라진다.

선대 요정 여왕 라그나리스 나오리아의 정신이 저것으로 완전히 흩어진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붕괴하며 만들어낸 이 참상을 합치면 다시 그 지옥이 도래한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이곳에 남은 무언가는 그리 말하는 느낌이었다.

처벅…… 처벅…….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서진 파편들 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새까만 타르를 뒤집어쓴 것 같은 형체의 무언가였다.

-그우우우…….

“저거…… 선대여왕인가?”

“아니. 그녀가 남긴 저주와 원한이 형상화한 거겠지.”

타르를 뒤집어쓴 괴물은 이렇다 할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 베르단데가 다시 이 지옥을 복구하려 들면 덤벼들지 않을까.

실제로 녀석은 모습을 드러낸 뒤로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흐악!! 끄윽…… 흐읍.”

“나오! 괜찮아? 정신 차려!!”

그때였다.

고요하게 침묵하고 있던 나오가 고통스러운 듯 온몸을 비틀며 바닥에서 소리를 질렀다.

황금빛이던 그녀의 육신은 빠르게 점멸하며 본래의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온전히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환영 속에서 본 전대 여왕과 닮은 점이 많았다.

동일인물이냐 묻는다면 애매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르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정도의 모습이었다.

“전대 여왕의 이름이 뭐라고?”

“라그나리스…… 라그나리스 나오리아.”

“후손인가?”

“봤으면 알겠지만, 그녀는 후손이 없어. 다만 신기하네, 그녀는 분명 일반 페어리로써 태어났으니 전대 여왕과는 관련이 없을 텐데. 어쩌면…… 환생체가 아닐까.”

“x랄도 병이구만. 그렇게 괴롭혀놓고 또다시 그 자리에 앉으라고?”

“어디까지나 가설이지 확정은 아니잖아. 사실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페어리의 태생은 일반적인 종족과 달리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종족 내에서 번식을 통해 아이가 생기기보다는 아이를 가지고자 하는 페어리가 기도를 올리고 의식을 진행한 뒤 태초, 혹은 탄생의 봉오리라 불리는 큰 꽃에서 아이를 점지받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나오는 그렇게 태초의 봉오리에서 태어나 생자와 망자의 모든 여건을 지니고 있었기에 얼마 가지 않아 봉인 당한 것이다.

“이름도 비슷하고…….”

“복잡하게 볼 게 있어? 여왕의 자질을 지닌 페어리는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얄궂네.”

“으…… 으아아…….”

타르를 뒤집어쓴 괴물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지만, 바리스는 경계대상인 듯 굳은 얼굴로 물어왔다.

“형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나라고 다 알겠냐. 다만, 저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우리와 달리 더 깊게 교감 되었겠지. 여왕의 자질을 지녔으니까.”

“그럼 어떻게…….”

“선택은 그녀가 할 거다. 그리고 이건 그녀가 선택을 하기 위해 보여주는 현실이고. 그걸 네가 간섭하는 건 월권이다. 바리스.”

바리스는 나오를 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여신이 우치를 통해 그곳을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은 강제성이 없었다.

이렇게 되리란 걸 알기에 막았지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 이상의 간섭은 할 수 없게 막은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절규하던 그녀가 천천히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완전한 페어리의 모습으로 변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 물었다.

“낙원의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도 전부!”

“페어리들에게 이곳은 낙원이 맞아. 이 낙원이 존재하는 것으로 그들은 축복을 받고, 이 땅은 축복의 터나 다름없으니까. 우치가 말했던 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낙원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뜻이지.”

“그럼…….”

“다만 페어리와 달리 여왕에게 이 땅은 지옥이며 무덤이고 세상을 저주하게 만드는 감옥에 불과해.”

특히 선대여왕인 라그나리스 나오리아처럼 정이 많고 누군가와 엮이는 걸 좋아하는 장난꾸러기 요정의 입장에선 그 이상의 지옥도 따로 없었을 것이다.

“하…… 하지만 나는…….”

“여신께서 널 막은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네가 여왕이 될 가능성도 생각해둔 거겠지. 이 시스템은 그녀에게도 죄책감이 들 테니까.”

실제로 이곳에 들어선 이후 나오의 모습은 변했고, 그 내면의 힘은 점차 커진다.

한 종족을 관리하기에 이만한 시스템도 없긴 하다.

단 한 명의 희생해서 나머지 모두를 이롭게 하는 현실.

그것이 페어리의 전설이었다.

“잔인해…… 너무 잔인하다고! 이건 낙원도 뭣도 아니잖아! 대체…… 대체 여신은 무엇 때문에 이런 잔인한 시스템을 만든 거야?!”

“감정을 무시하고 효율만 놓고 볼 때 이만한 게 없잖아?”

내 설명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지금의 여신은 감정이 있기에 좀 더 공감하고 같이 가여워할 수 있지만, 초기의 여신은 그런 점이 부족했다.

그런 점을 보면 여신이나 여왕이나 다를 바가 없긴 했다. 물론, 그것을 견디는 주체가 너무 극심한 차이가 난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녀가 변화를 조금씩 일으키기 시작한 건 신녀 프리아의 희생, 그 끝에 륀느의 몸에 그녀를 받아들여 기적을 일으키면서였다.

“아하하……. 나오. 좋게 생각하자고. 어찌 되었건 이곳이 선대여왕의 낙원이라는 건 분명하잖아. 그럼 네 친구의 유언대로 이곳에 유품을 뿌리고 돌아가자. 여긴 네게 너무 위험해. 여왕 같은 건…….”

“…….”

“여긴 낙원이 아니잖아…….”

“그…… 그게 중요해?! 그럼 뭐, 낙원을 완성시켜서 유품을 뿌려주자고? 네가 여왕이라도 돼서 그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갈 생각이냐?!”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닌데…….”

“무섭지?! 무섭잖아! 넌 그걸 우리 이상으로 교감하고 직접 봤잖아.”

“…….”

바리스가 화를 내며 그녀를 다그쳤다.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이미 유품이잖아! 네가 여왕이 되면 결국 여기가 낙원이 되는 장소야! 과거엔 낙원이었고, 지금은 폐허가 되었어도 그 장소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죽은 이보다 산자가 더 중요한 걸 몰라?! 일개 미신 때문에 네 미래를 시궁창에 처박아버릴 생각이냐?”

바리스의 말도 정론은 정론이었다.

넨릴은 쇠퇴하는 동족의 부흥을 위해 낙원을 찾아 헤맸다.

설마 낙원의 본질이 이딴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넨릴과의 약속은 중요해. 난 그녀에게 요정의 맹세를 했어. 내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겠다고.”

“형님…… 그 요정의 맹세라는 게 중요한 겁니까?”

“뭐, 페어리에겐 중요할 수도 있겠지.”

낙원이 이런 지옥이 아니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지금 상황대로라면 그녀는 약속을 위해 여왕이 되어야만 했다.

“그딴 게 어딨어……. 죽은 네 친구도 이런걸 원하진 않았을 거야.”

“그것과 약속은 별개의 문제라는 거지. 그리고.”

베르단데가 나오를 향해 물었다.

“넌 여왕이 되기 위해 그 힘을 이용해서 수명을 유지하고 있어. 틀려?”

“마, 맞아.”

그녀는 요정 여왕이 겪어야 할 끔찍한 현실에 두려워하면서도 조심스레 답했다.

“그럼 네가 여왕의 위를 포기했을 때, 그 힘이 사라진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어야 할 거야.”

다른 말로 하면…….

“그 말은…… 힘을 잃은 나오가 이른 시간 안에 죽게 된다는 말입니까?”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그래도 일개 악령처럼 미쳐버리진 않겠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우치는 그녀가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여왕으로서 존재할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뭐…… 이딴 게 다 있답니까…… 죽던지, 고통받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니…….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래. 차라리 몰랐다면, 시간을 더 벌었을지도 모르겠네.”

“그…… 그럼 나오가 여왕이 되고 제가 주기적으로 그녀를 찾아간다면…….”

“안돼.”

짧게 일축한다.

“무슨 뜻입니까 형님? 정치적인 이유라면…….”

“그런 문제가 아니야. 페어리의 낙원은 수많은 조건이 완성된 후에야 활성화 될 거야. 그렇다면 그 낙원에 불순물이 있어선 낙원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어.”

자칫했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녀는 낙원의 진실을 알았기에 이곳에 얽매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수명을 어느 정도 줄이는 신호탄이 되었으리라.

그녀가 낙원을 찾았기에 트리거가 발동하긴 했지만, 그냥 두었어도 사실 그녀는 오래 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가 바랬다곤 하나 어느 정도 진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인도한 입장에선 입맛이 쓴 이야기였다.

“미안하다곤 해둘게. 끝까지 숨겼다면 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

“아니. 당신 덕분에 찾아낸 거야. 애초에 내가 부탁한 거잖아, 잘못이 존재한다면, 내가 고집을 부린 잘못이겠지…….”

나오는 단호하게 내 사과를 거절했다.

“왜 여신은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 거지?”

“복잡한 건 생각하지 말자고. 결정은 스스로 내려. 우리는 존중해줄 테니.”

“나…… 난.”

평생을 찾아온 낙원의 진실을 깨달은 그녀만큼 충격이 심한 존재가 있을까.

그렇게 혼란 속에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굳어있던 찰나.

갑자기 저 멀리서 지켜만 보던 검은 괴물이 성큼성큼 뛰어왔다.

이에 바리스와 베르단데가 녀석을 막으려 했지만 내가 팔을 뻗어 두 사람을 막아 세웠다.

“형님 무슨?!”

터엉!!!

동시에.

거대한 괴물이 나오의 앞을 막아선 뒤 팔을 들어 옥좌 쪽에서 날아든 나무줄기를 팔로 막아 냈다.

“읍?!”

터업!!!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는 나오를 휘감으려던 나무줄기를 낚아챈 뒤 크게 포효했다.

선대여왕 라그나리스 나오리아의 원한과 원념이 만들어낸 괴물.

다만 이 괴물이 만들어질 때 그녀는 자신과 같은 희생양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즉, 녀석은 선대여왕의 의지대로 나오가 여왕이 되기를 막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나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것도 잔인하지만, 이곳에 홀로 남아있는 저 원념도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한 건가?”

“그게 무슨…… 아. 그렇구나. 그녀에게 선대여왕은 정말 아픈 손가락 중 하나일 테니…….”

겉보기엔 이상하나 없이 본성으로 미쳐 날뛰는 괴물 같지만 내 눈에는 저 괴물의 점액 덩어리 안에 울고 있는 존재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무줄기는 다름 아닌 부서진 옥좌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자질을 지닌 여왕이 낙원을 복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만들어내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 고요하던 옥좌에서 끔찍하게 강하면서도 짙은 힘이 느껴졌다.

“개판 오 분 전이네.”

막대한 에너지. 그 정도의 힘을 지닌 존재는 옥좌의 근처에서 서서히 발끝부터 현신하기 시작했다.

겉모습만 보면 원념이 악이고 옥좌에서 나온 저것이 선으로 보일 정도로 고귀해 보였다.

-왕…… 여왕의 자질을 지닌 자……. 의무를 이행하라…….

“저게…… 뭐야?”

“뭐긴,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백신이겠지. 다만 오랜 시간 힘을 모으기라도 한 건지 제법 강해 보이네.”

“방해도 이런 방해가 없네. 애초에 저거 죽기는 해?”

“이 공간을 완전히 갈아버리면 죽지 않을까?”

베르단데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저걸 죽인다고 나오의 시간이 늘어나거나 구원받거나 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방해가 되는 것 또한 사실.

게다가 단순한 방해꾼이라고 하기엔 그 힘이 너무 강해 보였다.

마치 백신 시스템처럼 녀석은 나오를 여왕으로 만들고자 했고,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며 타르를 뒤집어쓴 듯한 검은 원념이 포효하듯 달려들었다.

이에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은 원념에게…….

“입 벌려, 버프 들어갈 테니.”

빵빵한 버프를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혹시, 버프가 빵빵하게 들어가면 필살기도 쓸 수 있을까.”

기대심도 들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한없이 한심하게 바라보는 베르단데의 죽은 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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