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18화
베르단데는 복원하던 제단을 다시금 흩어놓았다.
“당장은 다시 현신하지 않겠지만…… 그것도 시간문제겠지, 그러니 일이 벌어지기 전에 원인을 이곳에서 내보내야 해.”
현신체가 날뛰는 데엔 여왕의 자질을 지닌 나오의 존재가 한몫했다.
“…….”
반면 나오는 낙원의 진실이 가져다주는 충격에서 헤어나오기도 전에 자신의 친구이자 전부였던 넨릴이 본능적으로 그녀를 이곳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지 충격이 상당한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 넨릴을 대신해서 낙원을 찾겠다고 한 건 나였는데……. 그녀는 내게 그걸 찾으라고 하지 않았어…….”
물론, 낙천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나오가 여왕의 자질을 지녔다는 것을 깨달았고 낙원에 대해 끊임없이 환상을 심어 넣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넨릴이 악의를 가지고 그랬는가는 조금 회의적인 편이었지만, 그 진실이 그렇다는 건 크나큰 충격이었다.
“넨릴이 선대여왕의 환생치라는 건…… 정말이겠지?”
“정황상 거의 맞겠지.”
물론, 페어리의 역사 속에 같은 선조와 문양을 지닌 페어리가 아예 없었는지 있었는지는 잘 모를 일이었다.
“넨릴…… 나는 대체 어떻게…….”
그녀는 낙원에 뿌려주어야 할 주체인 친구의 목걸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오, 정신 차려, 이제 와서 다 무슨 의미야. 앞으로 네가 어떻게 되건 나는 여기서 네가 무언가를 하는 건 절대 반대야.”
“바리스…….”
“짧은 시간일지라도 마지막까지 내가 친구가 되어주마. 아무리 친구를 위해서였다지만 이건 아니야. 형님, 저희가 들어온 균열은 사라졌는데 나갈 방법이 있습니까?”
“지금부터 열어야지.”
애초에 무덤에 출구가 어디 있는가. 한번 관에 들어가면 못질하고 흙 속에 파묻히는 것이 바로 무덤이다.
“무덤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하나뿐이지.”
관짝을 부수고 빠져나간다.
당장 옥좌 같은 것들은 파괴할 수 없겠지만 외부와 이어진 경계를 부수는 정도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빨리 움직여. 에너지가 모여들고 있어.”
그렇게 베어버렸음에도 어디서 힘을 축적한 건지 꾸역꾸역 부활하려 든다.
“나…… 난…….”
“빨리 결정해. 놈이 한 번 더 현신하면 나가기 그만큼 힘들어진다.”
“…….”
나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감은 눈가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넨릴을 만나고 싶어……. 정말로 그랬는지…….”
“그게 진실이라 해도 그 넨릴이라는 페어리에게서 들을 순 없어. 그녀도 의도한 건 아닐 테니.”
그 말에 나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가자……. 무엇이 되었건 이 끔찍한 지옥에 넨릴의 파편을 뿌려주고 싶지 않아.”
여왕의 굴레가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지도 깨달았다.
비록 넨릴이 죽어가면서도 찾아 헤맨 낙원이지만, 이런 지옥 같은 장소에 유품을 뿌려줄 수 없다고 판단한 나오였다.
“잘 생각한 거 맞아? 여기서 나가면 네 수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아마 높은 확률로 빠르게 죽어가겠지.”
“내 목숨엔 미련 없어, 하지만. 넨릴이 정말로 선대여왕이었다면. 그녀가 죽어가면서까지 탈출한 이곳에 다시 그녀를 돌려놓고 싶지 않아.”
충격적이지만 나오는 이해한 듯싶었다.
“다만 그전에…….”
그녀가 내게 말했다.
“저…… 원념은 어떻게 돼?”
“원념?”
나오를 막아서면서까지 차기 여왕의 대관식을 막으려던 검은 괴물.
오로지 막아야 한다는 일념만이 남은 녀석은 몸을 재생하고 있지만, 꼴이 좋지 않았다.
“그냥 두고 싶지 않아. 그녀도…… 재울 수 있어?”
결정을 내리기가 무섭게 나는 초단이를 들어 그대로 녀석을 베어냈다.
녀석은 크게 울부짖는듯하지만, 이전과 달리 구슬프게 운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천천히 재생하던 타르를 뒤집어쓴 괴물이 무너져내린다.
현신체의 공격 때문에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는지 저항은 없었다.
이후 곧바로 초단이의 방향을 바꿔 창공을 향해 검을 쳐올렸다.
[중검]
[천지일참]
올곧은 섬광이 직선으로 내리그어지며 허공에 거대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들어왔던 균열이 다시금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단번에 나왔을 때와 달리 무슨 변화라도 생겼는지 균열 너머는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형님…… 저거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데요?”
“정상적으로 열린 것 같진 않은데. 거대한 격류…… 아마 시스템상 이물질은 모조리 분해해버리겠지. 나는 모르겠다만, 바리스 너나 베르단데 두 사람은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마.”
세계의 법칙의 비호를 받는 공간다운 방어능력이었다.
“그냥은 안 되겠는데?”
이 공간 자체가 거대한 규칙의 억제력이나 마찬가지인 터라.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죽일 수도 없고, 무력화시킨다고 크게 바뀌는 것도 없고…… 귀찮게 됐네.”
“방법이 없는 건가?”
“글쎄다. 생각을 해봐야겠다만……. 그 틈을 주진 않을 거 같다.”
마치 절대 나갈 수 없다고 말하듯 옥좌에 막대한 에너지가 모여들며 다시금 현신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녀석의 힘은 이전과 총량은 동일했지만 순간 출력은 더 올라있었다.
“베르단데.”
“말해.”
“바리스를 지켜.”
내 말뜻을 이해한 그녀는 두어 발 물러난 뒤 바리스의 근처의 공간을 장악했다.
이후 초단이를 손에 쥐고 현신체를 힘을 끌어내며 생각했다.
완전히 부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방법이야 찾아낼 수 있지만 반대로 이걸 강제로 부서뜨렸다가 만약 규칙에 버그라도 발생하면 정말로 큰일이니까.
이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현신체와 충돌하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나오가 이곳을 포기한 이상 바리스의 부탁도 끝이 난 셈이다.
다만, 문제는 이곳을 파괴하지 않고 어떻게 나가냐는 것인데…….
“그냥 다 부숴버리고 나갈까. 뒤처리는 여신님이 해주시는 거로.”
그런 불경한 생각을 품기가 무섭게 신력이 삐걱거렸다.
“아, 안 그럽니다. 안 그래요. 거, 생각도 못 하게 하시네.”
그제야 본래대로 활성화되는 신력에 투덜거려보지만, 괜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1절만 해라 1절만, 쟤가 하기 싫다지 않냐.”
한 번으로도 지겨운데 포기를 모르는 현신체는 정면승부는 힘들다고 판단을 내렸는지 곧바로 한 손을 펼쳐 뻗었다.
동시에 나오의 몸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윽…… 끄윽?! 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듯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기 시작하자 그녀의 몸 안에서 생자와 망자의 특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에너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형님! 나오가!”
“베르단데.”
내 부름에 베르단데는 바리스와 나오를 격리시켜 나오와 힘이 연동된 바리스의 몸에 이상이 가지 않도록 만들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저건 못 막아. 명심해라 바리스. 이쪽은 상당히 페널티를 안고 가야 한다.”
터어엉!!!
힘을 보증하려는 건지, 아니면 이 상황에서도 대관식을 진행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힘은 간섭하기가 어려웠다.
정당하기에. 법칙이 집행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불쾌함에 어떤 의지를 느낀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한 손으로 무언가를 시행한 현신체 때문일까.
경련하던 나오의 전신이 빛으로 휩싸이더니 모든 법칙을 무시하며 녀석에게 흡수되듯 스며들었다.
나오를 여왕으로 만들기 여의찮으니 자신만의 힘을 이용해 나오를 흡수해버린 것이다.
온전한 여왕도 아니거니와 구멍투성이의 전략이지만 녀석이 내세운 것 치고는 제법 효과가 있었다.
그 증거로 녀석의 힘의 출력이 대부분 활성화되었다.
이걸 미리 막을 수 없는 건 이쪽의 제약이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현신체의 형태가 변한다.
일반 페어리와 달리 인간 정도의 크기를 지닌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한 그녀는 공허한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 위엔 빛으로 된 왕관이 띄워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그녀의 눈에 띈 이채였다.
방금까지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와 같던 현신체. 아니 여왕의 형체가 이성을 지니기 시작한 것이다.
“껍질에 불과했던 놈이 나오를 먹어치우고 진화했다는 건가?”
-돌아가라 필멸자여. 이곳은 여왕의 정원이다.
그녀가 말하자 베르단데가 코웃음을 쳤다.
“위계는 더 낮은 게 시스템의 비호를 받았다고 까부는 꼴이네.”
“너 여기 와서 스트레스 많이 받았냐?”
“네가 날 찾았을 때부터 스트레스는 이미 가득했어.”
평소답지 않게 차가운 말투를 날리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말없이 여왕의 형체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죽이지도 못해. 제압해도 다시 일어나. 뭐 어쩌라고. 냉정한 말이지만 이미 늦었어. 제압 후에 강제로라도 공간을 찢고 나가야…….”
“가능성은 모르겠고, 방법이 하나 있긴 해.”
그 말과 동시에 여왕의 형체와 내가 찰나의 순간 사라졌다가 나타나며 충돌했다.
[신화] 상태의 내게 유의미한 타격이 가해지는 건 놀랍지만 냉정하게 파악하면 그게 전부였다.
반대로 나는 힘 조절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그그극…….
“대…… 대지가.”
여왕의 형체가 손을 움직이자 갈라진 대지들이 마치 복구되듯 모여들기 시작한다.
온전한 옥좌를 만들어내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옥좌가 완성될수록 점차 힘이 강해진다.
카가가가가각!!!
여왕의 형체가 내뻗은 손끝을 타고 빛의 줄기들이 내게 닿았고 맹렬한 파괴음을 내며 나를 한발 밀어냈다.
“오…….”
“오…….”
베르단데와 내가 동시에 탄성을 흘렸다.
“그게 밀려나?”
“이 영역의 장악력이 굉장한데. 치명적이진 않지만 놀라운 수준이야.”
일개 종족의 여왕의 힘이 신격에 닿았다는 건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왕의 형체는 내가 크게 반응하지 않자 더욱 거세게 공격해 들어왔다.
-대관식에 방해되는 필멸자여, 이곳에서 사라져라.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직접 쫓아내 봐. 난 네가 먹어치운 그 페어리를 데리고 나가야겠으니.”
바리스에게 형만 믿으라 했는데 나오를 못 구하면 체면이 이만저만 구겨지는 게 아니다.
나는 초단이를 이용해 여왕 형체의 공격을 빗겨내며 허공을 계속해서 베어 나갔다.
뭉쳐진 땅을 다시 갈라 버리고 허공에 흉터를 남기지만 여왕의 형체에 적중하는 공격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체 어딜 노리는 거야!”
급기야 베르단데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나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 주변을 베어 넘겼다.
그렇게 수차례 공방전이 오가자 사방은 초단이로 인해 무수한 흉터로 가득해졌다.
일리나처럼 온전한 시공격검이 아닌 포식으로 흉내 낸 시공격검이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쉬리리릭!! 터어엉!!!
무리하게 허공을 베어내다 보니 자연스레 틈이 보인 것일까.
나무줄기의 창이 정확히 내 심장을 향해 파고들어 왔고 나는 방금까지 초단이로 막아내던 창을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낚아채 강제로 멈춰 세웠다.
“마치 금 간 유리 같지 않아?”
그 한마디에 여왕의 형체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물론, 이제 와서 깨달았다 할지라도, 이미 늦은 후겠지만.
“우리 딸이 정말 좋아하는 방법을 나도 써볼까 하거든.”
“너 설마…….”
“브리칭!!!”
마치 금이 간 유리처럼, 조금만 충격을 줘도 깨져버릴 것처럼 갈라진 허공에 초단이를 빠르게 찔러넣자 여왕의 형체가 황급히 그것을 막으려 내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을 강제로 제동시키며 내질러진 초단의 검 끝은 균열의 중앙에 정확하게 꽂혔다.
콰직…… 챙그랑!!!
동시에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새까만 심연 같은 어둠 속으로 그녀가 추락했다.
“미친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틀어막은 균열 너머로 보내서 불완전하게 만들 생각을 해?!”
“갔다 올 테니 이곳의 대지를 완전히 조각내버려.”
그 말을 끝으로 내가 검은 심연 아래로 추락한 여왕을 쫓아 낙하했다.
* * *
닿는 모든 것을 분쇄하고 비틀어버리는 극심한 힘의 소용돌이.
나오를 먹고 이성을 얻게 된 여왕의 형체는 빠르게 분해되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 공간은 그야말로 옥좌에 담긴 힘 그 자체였다.
다만, 여왕의 형체 또한 정상적인 형태로 대관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불순물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 탓일까.
그녀의 육신은 빠르게 붕괴되어 갔고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흡수해버린 나오와 분리되면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생기지만 그리되면 침략자를 저지할 수단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하찮은 필멸자가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물론, 당황한다 할지라도 그녀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 공간은 옥좌의 힘 그 자체. 이 검은 심연에 퍼진 모든 무형의 정신 에너지를 빨아들인다면 순간적인 오버드라이브(과부하) 현상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막대한 힘으로 그를 찍어누른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터였다.
이에 그녀는 몸의 절반이 노이즈처럼 깨졌음에도 침착하게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흡수하려 했다.
-무슨? 이곳에 있던 힘이 전부 어디로 사라진…….
당황한 그녀는 황급히 주변을 분석했다.
거대한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문제점의 원인을 파악했고, 대량의 힘이 소실되고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허공에 뜬 채 미친 듯이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는 붉은 보석과…….
그런 보석을 말리려는 듯 매달려서 버둥거리는 작은 소녀 하나.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이는 여신을 말이다.
-안돼!!!
이렇게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닌 이질적인 침략자를 이기려면 반드시 필요한 힘을 저 보석이 모조리 삼켜버리다니. 전혀 생각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외부에서 어떻게 이공간으로 들어온 건지 이해할 수가 없자 AI에 가까운 여왕 형체의 의식이 무수한 버그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석은 마지막 한 줌의 힘까지 빨아먹다 못해 여왕의 형체가 내뿜는 힘까지 깔끔하게 빼앗듯 삼켜버렸다.
생명체 같지는 않지만 붉은색의 보석이 잘 먹었다고 트림하는 듯한 기분 나쁜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존재의 의의를 부정당하고 붕괴하는 건 의식에 익숙하지 않은 여왕의 형체에겐 너무 큰 혼란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분노가 서린다.
“어…… 음……. 저기…… 언니, 미안한데. 얘가 배가 많이 고팠나 봐요. 그……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에린아 물러나. 저거 일개 생명체가 아니야.”
비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어두운 심연에서 이곳 회색의 공간으로 빠져나온 데이비가 그대로 여왕의 형체의 뒤통수를 잡아 보이지 않는 지면에 처박아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도망도 끝…….”
스산하게 웃으며 말하던 데이비가 고개를 든다.
동시에 데이비의 시선이 에반젤린과 비화에게 닿았다.
어지간한 일에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던 데이비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너희가 거기서 왜 나와?”
“아빠?”
“…….”
부녀의 재회는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 * *
데이비는 몰랐지만, 그가 공간을 깨뜨려 혼란스러운 격류로 여왕의 형체이자 옥좌의 힘을 밀어 넣어버린 그 순간부터 시스템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전체적인 틀은 멀쩡하지만 그 안의 프로그램에 무수한 오류와 버그가 발생한 것과 같았다.
당연히 세계의 법칙은 가장 우선시되는 버그를 잡기 위해 여왕의 형체를 비틀고 부숴버렸고, 급기야 여왕의 존재 자체가 방해된다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여왕의 형체는 빠르게 분해되어 갔고 그녀에게 흡수된 나오 또한 그녀에게서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의식을 잃어버린 나오의 영혼이 목에 걸고 있던 그녀의 친우이자 소중한 가족, 넨릴의 목걸이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목걸이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명백히 이상 에너지였으나 모든 것을 분해하는 세계의 법칙도 목걸이에서 느껴지는 힘은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마치. 저건 건드리면 안 된다고 말하듯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걸이에서 느껴지는 힘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프리아 여신의 힘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오…….
“으으…….”
-나오…….
여왕의 형체 속으로 흡수된 채 떠돌던 나오의 귓가로 누군가의 부름이 들려온다.
-나오…….
그제야 정신이 든 것일까. 나오는 천천히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뜨며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네…… 넨릴?”
-나오. 내 소중한 친구. 네게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
“넨릴?!”
-걱정 마. 내가 널 지켜줄게. 그리고, 미안해. 이 정도밖에 해줄 수 없어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넨릴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나오가 걸고 있던 넨릴의 유품이자 그녀의 영혼의 파편이 담긴 목걸이였다.
넨릴의 목소리와 함께 나오는 모종의 힘이 목걸이에서 터져 나오며 의식이 강제로 각성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완전히 분해되기 시작한 여왕의 형체 속에서 나오가 완전히 분리되면서 튕겨 나왔다.
“으왁! 뭐야 이 날파리는.”
이후 튕겨 나간 나오의 영혼에 다시 육체가 입혀졌고, 그녀는 힘없이 튕겨 나가 에반젤린을 향해 날아들다 비화의 스파이크에 맞아 튕겨 나갔다.
“비화야……. 아빠가 성질 좀 죽이라고 말했지.”
의식이 가물가물한 그 속에서 나오는 비화가 데이비의 딸임을 직감했고, 멀어져가는 의식 너머로 투덜거렸다.
-딸이나 아빠나 아주 성질머리하고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붉은 보석이 이곳의 방대한 에너지를 모조리 먹어치워 버렸고, 데이비가 비틀린 현신체를 완전히 분해해버리면서 현신체는 가동을 정지했고, 일대의 막대한 격류는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던 것들은 사라졌고, 나오를 강제로 여왕으로 만들려던 시스템 또한 셧다운 된 셈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놀랍게도 페어리라는 종족의 완전한 끝을 고하며 끔찍한 굴레의 종막을 선언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의 축이 비틀리기라도 했는지 잠잠해진 격류, 그 틈을 베르단데가 강제로 찢어발기며 튀어나왔다.
그의 뒤엔 바리스가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둥둥 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낙원 전체가 붕괴하고 있어! 빨리 나가야 해!”
그녀의 외침에 데이비도 이 상황이 조금 당혹스러운지 비화를 본다.
“비화야.”
“어……음……. 아빠. 우리 사고 친 거…… 아니죠?”
“그건 모르겠고. 왜 여기 있는 거야.”
“저 붉은 보석이 제 맘대로 이곳까지 날아와서 찾아온 거예요.”
“네가 온 길은?”
“이쪽?”
비화가 한켠에 펼쳐진 미묘한 균열을 가리켰다.
“그럼 저쪽으로 나가!”
데이비의 외침과 동시에 에반젤린은 포식을 한 붉은 보석을 낚아챈 뒤 내달렸고 그녀를 시작으로 모두가 낙원에서 빠르게 탈출하듯 균열 너머로 몸을 던졌다.
그중 유일하게 의식을 잃어버린 것은 이제 완전히 마지막 페어리가 되어버린 나오뿐이었지만 그녀는 무의식 속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