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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519화 (1,519/1,559)

제 1519화

본래라면 시스템의 의도대로 태어나 움직이는 현신체다.

여왕의 존재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

하지만 현신체는 여왕을 만들기 위해 나오를 흡수했고, 이지가 깨어났다.

이성이 존재하는 시스템은 불완전하다. 그렇기에 현신체, 정확히 말해서 여왕의 형체는 의도하지 않게 불순물이 되었다.

물론, 생각 없는 판단은 아니었다.

철저하게 계산했고, 낙원을 감싸는 공허로부터 모여있는 힘을 낙원 내부로 흡수하여 여왕의 대관식을 끝내면 될 일이었다.

-브리칭!!

침략자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침략자는 공간을 깨뜨려 낙원을 감싸는 공허로 현신체를 내던져버렸고, 현재 불순물상태인 여왕의 형체는 빠르게 부식되고 망가져 갔다.

물론,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마치 차선책을 모색하는 컴퓨터처럼 빠른 속도로 차선책인 공허의 에너지들을 모두 흡수하는 쪽으로 노선을 틀었다.

그래서 낙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더욱 깊숙이 들어갔건만.

정체 모를 붉은 보석이 공허에 있던 힘을 죄다 먹어치워 버린 것을 보고 사고 연산에 정지가 와버렸다.

생명체로 치면 뇌 정지에 가까운 멍한 상황 속에서 현신체는 결국 흡수한 나오를 떼어낼 수밖에 없었고, 막대한 부하를 견디지 못해 분열했다.

처음 느껴보는 극심한 혼란과 분노 때문에 제대로 대처도 못한 채 데이비에게 제압당한 현신체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요동쳤다.

나오의 영혼은 튕겨 나갔음에도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한번 만들어진 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듯 말이다.

물론, 데이비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놈을 좇아 이 위험한 곳까지 왔는데. 왜 에반젤린과 비화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녀들은 이번 일에 이렇다 할 관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반사적으로 튕겨 나온 나오를 후려쳐 기절시켜버린 후에도 비화는 전혀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 대체 얼마나 먹어치운 거야.”

그때 비화가 에반젤린이 회수한 보석을 손에 쥐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나쁜 건 아닌데……. 이만한 힘이 여기 모여있었다고? 대체 이 공간이 뭐길래?”

“그걸 모르면서 겁도 없이 여기까지와?”

“아…….”

그제야 자신들이 사고를 쳤음을 깨달은 두 녀석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동작 그만.”

“흡.”

“어…….”

-끼아아아악!!!

동시에 쓰러져있던 현신체가 비명을 지르더니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것을 말없이 보다 다시 입을 연다.

“따라와.”

* * *

낙원으로부터 탈출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나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현신체는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었고, 그것을 기점으로 세계의 법칙은 낙원을 불필요할 정도로 수명이 다한 공간으로 판단. 서서히 그것을 완전히 붕괴시켜버렸다.

그렇게 나온 이후 근처의 밀림이 가득한 섬의 끝자락 해안가에 에반젤린과 비화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후우…… 정말 너희들은…….”

바리스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떨떠름한 표정이었고 베르단데는 복잡한 얼굴로 에반젤린의 목에 걸린 붉은 보석을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대체 저게 뭐라고…….”

“타락한 신의 힘도 먹어치우는 놈이 남긴 거야. 뭐든 못 먹겠냐.”

포식과 비슷하지만, 포식과 그 방향성이 다른 건 확실하다.

“그래도 모르잖아. 위험한 거야. 그걸 그냥 둔다고?”

“상당히 안정돼있어. 나보다는 비화가 관리하는 게 더 좋을 거다.”

“……편한 대로 해……. 후우. 그놈의 낙원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인지…….”

베르단데의 쓴소리에 바리스가 힘없이 웃으며 손위에 누워있는 나오를 바라보았다.

“나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으흠…… 크흠.”

걱정스레 중얼거리자 비화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정신을 차리려던 나오를 후려쳐서 다시 기절시켜버린 장본인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저기…… 비화야? 왜 그러니? 표정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폐……폐하.”

“폐하라니…… 삼촌이라고 불러주면…….”

“사…… 삼촌! 그나저나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애써 화제를 돌리는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다 해결되었지만…… 나오는…….”

“잠깐만요.”

무릎을 꿇고 있던 비화가 벌떡 일어나 다가온다.

“어허, 누가 일어나래.”

“윽…….”

“……확인해봐.”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화는 싱글거리며 다가와 나오의 몸에 손을 올렸다.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비화의 주변으로 맑은 빛이 감돈다.

“생명력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어요. 단순한 기절이 아니에요.”

“뭐? 그럼…….”

“네. 빠르게 죽어가고 있어요. 의식을 못 찾는 건 그것 때문인 것 같은데……. 잠깐, 무언가가 그녀의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걸 늦추고 있는 거 같아요.”

“그건…… 내 계약 때문인가?”

“아뇨. 삼촌과 이어진 계약은 엄청나게 약해져 있어서 유의미한 결과는 내지 못해요. 애초에 제대로 된 계약도 아니었고, 단순히 삼촌의 마나를 받아 상태를 호전시키고 있던 것뿐이었으니까요.”

“너는 대체 얼마나 많은 걸 혼자 떠안고 있는 거야.”

바리스에게 있어서 그녀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친구인 만큼 그 애착은 깊었다.

그녀의 설명에 바리스는 굳은 얼굴로 작디작은 나오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우웅…….

동시에. 바리스의 몸이 옅게 빛나기 시작했다.

“형님? 비화야. 이건…….”

“내면에서 삼촌을 부르는 거예요. 가는 건 선택이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제가 끌어내 드릴게요. 다른 사람들은 가상현실 접속기기처럼 매개체가 필요한 것 같지만 괜히 과부하를 줄 필요는 없겠죠?”

“그래.”

이전 나오가 흡수될 때 계약상태였던 바리스의 영혼도 같이 유체이탈을 당할뻔했던 것과 같았다.

비화의 설명에 바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저항하지 않았고.

이전과 동일하게 온전히 유체이탈을 하며 나오의 정신세계로 밀려 들어갔다.

다만 이전과는 달랐다. 바리스는 자신의 영혼이 마치 무언가를 관전하는 것처럼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가 나오의 내면인가?”

나오의 내면은 거대한 충돌이 일고 있었다.

검은 연기와 백색의 연기가 뒤엉키며 경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저 멀리 보였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주저앉아있는 나오와 그런 나오를 끌어안고 있는 작은 페어리가 보였다.

‘나…….’

황급히 나오를 부르려던 찰나.

바리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둘은 바리스가 보이지 않는지 서로 대화에 집중한다.

“넨릴…… 넨릴……. 정말로 미안해……. 널 구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나오…….”

“너와 약속을 지키고 싶었지만……. 사실. 너무 무서웠어……. 선대여왕이었던 네 기억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선대여왕과 넨릴은 같은 혼이지만 다르다.

선대여왕의 기억이 없는 넨릴에게 그리 말해본들 달라지는 건 없지만 어째서인지 넨릴은 신비한 빛을 흩뿌리며 그저 그녀를 다독이며 괜찮다 말할 뿐이었다.

“흐윽…… 으흐흑…….”

나오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넨릴이 본능적으로 희생양으로써 나오를 골랐다는 것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 울뿐이었다.

“낙원을 찾았는데…… 낙원에 네 영혼의 파편을 뿌려주기로 약속했는데…….”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오히려 내가 미안해……. 그 끔찍한 곳에 널 보내려고 했다는 게……. 거짓된 낙원을 알지도 못하고 그곳에 대해 떠들었던 게……. 네게 여왕을 강요할뻔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

나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넨릴을 본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죽고 나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라, 네가 그 인간과 계약을 했을 때. 나는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며 깨어났어, 그때 알게 된 거야…… 나는 후대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넨릴이라는 페어리의 말에 바리스는 그제야 이해했다.

넨릴은 본능적으로 나오를 희생양으로 삼은 게 아니었다.

반대로 여왕의 자질을 잃을 정도로 조각났음에도 낙원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묶여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나오라는 이름을 준 것은 본인도 모르게 선대의 이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낙원을 계속해서 찾아 헤맨 것은 본인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혼의 조각 파편일 뿐인데 말이다.

“나는…… 라그나리스 나오리아……. 선대여왕의 파편이었던 모양이야. 여왕의 자질조차 잃어버렸음에도 조각나서 자격조차 잃어버린 주제에.”

“흐윽……. 넨릴…… 얼마나 힘들었어……. 얼마나 고통스러웠어……”

“괜찮아.”

넨릴의 말에 나오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왜 하필 네가 후대인 것일까.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해. 크게 억울하진 않을 테니까.”

“무슨…… 말이야?”

“…….”

“나…… 낙원이 부서진 게 아니야?”

“지금은 이상을 감지하고 시스템이 붕괴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아.”

시스템은 여왕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판단할 때까지 계속해서 디버그하고 고쳐나갈 것이다.

“그 말은…… 마치 네가 다시 낙원의 여왕에 오르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장난이지? 넌 자질이 없잖아.”

“맞아. 이전의 낙원에서 나는 갈기갈기 찢어졌어. 하지만…… 합친다면 본래의 힘을 낼 수도 있고.”

“조건이 있구나…….”

“그래. 그 촉매로 네 힘을 먹어치울 거야.”

영혼 상태인 넨릴이지만 나오가 가진 자질을 먹어치우면 다시 그녀는 여왕으로서 완전해진다.

다른 말로 하면…… 붕괴된 낙원이 다시 재구성했을 때. 그녀는 필사적으로 탈출한 그곳에 다시금 갇히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런 지옥에 다른 희생양이 생길 순 없어.”

넨릴은.

나오리아 선대여왕이 죽기 전 바랬던, 희생양이 없기를 바란 그 마음의 파편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페어리보다 소중한 친구인 널 위해서 하는 거라면…… 그래도 위안이 되지 않을까.”

“안돼…… 안돼!!”

이후 나오가 넨릴을 붙잡으려 했지만, 넨릴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현재 여신님의 가호로 그곳에서 벗어나 있지만…… 지금 방식대로라면, 낙원의 존재를 한번 인지한 너라면 죽고 윤회한다 해도 다시 마지막 페어리로써 태어나게 될 거야. 그리고,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낙원을 찾아 헤매고 끝내 찾아내고 말겠지.”

일반 페어리가 아닌 시조나 다름없는 여왕급 페어리였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진실에 나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지금은 해방되어 그녀가 죽더라도, 어쩌면 나오는 다시 태초의 봉오리에서 홀로 태어나 마지막 페어리로써 다시 이 고행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신은 나오가 낙원을 찾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한 게 아닐까.

어떻게 되어도 시스템상 낙원을 찾아 헤매게 되지만. 차라리 모른 채로 영원히 찾지 않기를 바라면서.

참혹하지만 결국 시간 벌이였다.

낙원과 그 진실에 접촉하지 못한 나오는 비록 구슬픈 굴레에 갇히더라도 상당히 많은 시간 동안 낙원에 도달하지 못할 터였다.

숨겨진 아픈 진실이 있기에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넨릴은 힘겹게 빠져나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나오라는 후대여왕의 존재가 필요 없어지게끔.

“그만둬! 그만두라고! 내 말 안 들려?! 넌 이제 퇴물이야! 여왕 따위가 아니라고! 그럴 거면 여왕의 위를 당장 내놔! 내가 여왕이 돼서…… 여왕이 돼서 널 쫓아내 버릴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나오는 넨릴이 흡수하려는 나오의 힘을 마구잡이로 방출했다.

“그만둬! 제발 부탁이야…… 나오!”

“나도 무서워! 그런데 가족 같은 너를 희생시켜서 내가 살아남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넌 다시 세상을 증오하게 될 거야.”

“한번 겪어본 나는 익숙해.”

“그리고…… 언젠가는 네가 나를 저주하는 날도 오겠지.”

나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오…….”

넨릴이 희생하던지. 나오가 희생하던지.

결국, 양자택일의 이 끔찍한 굴레를 보며 바리스는 속으로 기도했다.

저 불쌍한 두 페어리에게 구원의 기회는 정년 없는 것인가 하고.

비록 모든 게 잘 풀린다 해도 나오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고 넨릴이 부활할 일도 없겠지만.

적어도 죽은 후의 그녀들이 속박에서 벗어날 기회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두 페어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텐데.

이건 너무 잔인한 결과가 아닌가.

형님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데이비에 비해 그가 가진 지식이나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눈앞의 상황을 보고도 도와주지 못한다는 건 굉장한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실제로 그가 간섭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으니까.

기적이라는 것도, 전능의 권능이라는 것도 결국은 완전하지 못하구나.

그럼에도 그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려 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때였다.

그의 정신력이 영향이라도 미쳤는지 서서히 감각이 돌아온다.

“안돼…… 안돼! 나오!!”

“바리스?!”

놀란 나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둘 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당신은?”

“바리스 올 라운. 나오의 계약자야. 넨릴이라고 했나? 둘 다 일단 멈춰!”

“그럴 수 없어요. 나오를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려면 제가 희생해야 합니다.”

“웃기지 마! 지금 여왕의 자격을 지닌 건 나야! 그러니……!”

“일단 잠깐만 진정해요!”

바리스는 무작정 떼를 쓰는 아이처럼 두 페어리를 말렸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그였지만 그렇게 포기할 거면 예전에 모든 걸 내려놨으리라.

“방법이 있을 겁니다. 둘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건 없어요.”

넨릴의 단호한 대답에 바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냉정하지만 넨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

“착한 인간이네요……. 우리를 위해서 슬퍼해 줄 수도 있고…….”

넨릴이 아릿하게 웃으며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바리스의 뺨을 쓸어내렸다.

“나는 인간을 잘 믿지 못했지만, 만약 내가 살아있었다면 당신은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바리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반드시 단서가 존재한다. 넨릴이 했던 말, 데이비가 했던 말. 그리고. 나오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그러던 중 바리스의 머리에 한가지가 번뜩였다.

‘시스템을 속여?’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모든 일은 여왕의 부재로 인해 생긴 문제다.

그렇다고 여왕이 자리를 지키게 되면 그 자리를 지키는 요정 여왕은 참혹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고. 시스템이 여왕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면?

그렇게 되어서 문제가 발생해도 상관없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페어리 시스템 자리를 디버그해버리거나 아예 완전히 분해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 좋은 예시는 이미 데이비가 현신체를 박살 낼 때 보여주지 않았던가.

시스템의 비호를 받아야 하는 현신체의 상태가 불완전한 점을 이용해 역으로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격류에 휩쓸려 파괴해버리는 방법.

그거라면…….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울까? 애초에 무슨 방법으로 시스템을 속이지?’

당장 데이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힘든 상황.

바리스가 아는 정보만으로는 해결법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나오의 의식에 잠시 들어온 넨릴에겐 시간이 없다.

나오는 그나마 시간이 있지만 그래 봐야 조금 더 틈이 있을 뿐이다.

당장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넨릴은 더 늦기 전에 여왕으로 돌아가려 할 터.

바리스는 살면서 이렇게까지 머리를 굴린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뇌를 풀 가동했다.

부디 두 페어리가 윤회의 고리에 올라 다음 생부터는 이런 굴레에 엮이지 않고 살아가기를.

그때였다.

나오가 날아올라 그의 손가락을 꼭 잡았다.

“바리스.”

“…….”

“괜찮아, 네 친구인 나는 어차피 곧 죽어. 다음 행의 나를 위해서 네가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괜찮아. 그러니까 넌 이제 여기서 나가. 네 덕분에 마음이 정리됐어.”

그녀의 힘없는 미소에 바리스는 허탈함까지 느꼈다.

그리고, 그 허탈함 뒤에 찾아온 것은 분노였다.

“이것들아! 니들은 억울하지도 않냐!? 둘 중 하나를 희생시켜야 한다니! 그걸 뭔데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어!”

“바…… 바리스?!”

“너 임마 너!”

바리스가 거칠게 나오의 머리를 꾹꾹 누르자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뭐든 방법을 찾아서 최악은 면할 생각을 해야지, 마냥 넋 놓고 포기하고 있으면 뭐든 해결된다던?!”

“그…… 그럼 어떻게 하라고! 방법이 없는 거 아니야?!”

“왜 없어! 니들 둘 다 죽고 영혼마저 사라졌다고 속여서 아예 페어리 시스템 자체가 존재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들거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게 아니면 나오 네가 가진 여왕의 자질을 여왕의 자리에 대신할 허수아비에게 덧씌워서 둘 다 해방되던가!”

“말이 되는…… 잠깐.”

나오가 멈칫했다.

“그런 존재…… 하나 있었지? 심지어 그 녀석, 내 힘을 흡수해서 반쪽짜리이지만 여왕의 형체까지 만들어냈어.”

완전히 사라졌는지 확인하진 못했다. 하지만 붕괴되는 낙원에서도 옥좌와 함께 존재하며 여왕의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 움직이던 존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옥좌에서 구현되었던 현신체의 존재였다.

“하지만 현신체는 여왕이 될 수 없어. 녀석은 내 힘을 먹어치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대관식에 밀어 넣으려 했으니까. 그게 가능해?”

나오가 질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바리스는 자신이 어째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의문이 품을 만큼 말끔한 대답을 내놓았다.

“형님께 물어볼게.”

적어도 바리스에게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존재는 만능의 해결법이었다.

* * *

같은 시각.

무릎 꿇고 팔을 들고 있다가 스리슬쩍 내리던 비화가 데이비의 시선에 깨갱 하며 다시 팔을 들었다.

“아빠아아…… 나 팔 아픈데…….”

“어허, 뭘 잘했다고.”

“아…… 아니 우리가 솔직히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멋대로 들어와. 잘못하면 크게 다칠뻔한 거 알아 몰라.”

데이비가 비화의 귀를 콱 잡아 들자 그녀가 아프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때였다.

꼬르륵.

에반젤린 쪽에서 굉장한 공복의 사운드가 울려 퍼지자 그녀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고개를 저어댔다.

“나…… 나, 나 아니야!!!”

“…….”

“에린아, 밥은 먹고 다녀? 너 또 설마 귀찮다고 인스턴트로 때우는 거 아니지?”

“아니라니까요!!”

에반젤린의 비명에 가까운 대답이 울려 퍼졌다.

꼬르륵…….

그러거나 말거나 또다시 공복의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제야 모두는 그 소리가 에반젤린이 아닌 에반젤린이 목에 걸고 있는 보석에서 나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설마…… 그렇게 처먹고 또?”

“대체 얼마나 처먹는 거야. 저 돼지 같은 보석은.”

블랙 슬라임 검둥이는 보면 볼수록 정체가 궁금한 생명체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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