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29화
이 세계의 용사라는 존재는 가볍지 않다.
특히 이 거품 세계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용사는 말 그대로 차원의 수호자이자 중재자이며, 조율자.
마지막으로 깊은 짐을 짊어진 대신 축복받아야 할 존재였다.
그런 만큼 차원의 힘을 멋대로 끌어내 만들어낸 용사와 마법의 축복을 받은 두 존재가 외압으로 망가졌을 때의 반동은 차원에 막대한 과부하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이전의 거품 세계 여신 때보다 질이 안 좋은 이유였다.
선배의 일을 돕기 위해 나타난 넬타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퍽!! 퍽퍽!!
“내가!! 어?! 니들 재미나 보라고! 어?!”
퍽퍽!! 퍽!
“일부러 독립 권한을 준 줄 알아?! 어?! 네깟 것들이 뭔데! 니들이 뭔데! 어?! 뭔데 죄 없는 생명체들을 타락시키고 축복받은 존재를 망가뜨려!”
퍽!! 퍽!!
“이건 또 무슨…….”
넬타리드는 바닥에 늘어진 두 남녀를 걷어차며 화를 내는 비화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성질머리 하나는 대단한 비화지만 그런 그녀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반드시 존재했다.
“선배님.”
“이 개자식들아!!”
퍽!!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비화의 발길질 주먹질 한 번에 거대한 노이즈가 일어난다.
조율의 여신의 권능을 이용해 녀석들에게 주어진 힘을 강제로 회수하고 조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이 완성되지 않은 차원인 거품 세계. 그리고 비화의 절대공간인 가상공간이라는 점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더 좋고 아름다운 차원을 만들어내라고 힘을 내려줬더니!”
퍽! 쾅!! 쾅!
“뭐? 유흥? 유흐으응?! 내기이?! 없어도 상관없는 것들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고결하고 소중한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고 비틀어놔?!”
비화가 겉보기엔 데이비와 조금 닮은 구석이 많지만, 성질머리만 놓고 보면 데이비보다 조금 더 다혈질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두 암세포 같은 것들이 차라리 제대로 진실을 파악했다면 비화도 굳이 이 둘을 뭉개려 들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거품 세계는 제각각이고 각기 개성도 다른 법이니까.
“네까짓 것들보다! 어?! 저 아이가 수백 수천 배는 더 고결해. 이것들아!”
신에 가까운 초월자가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런 최소한의 조건도 지키지 않은 그저 힘을 멋대로 훔쳐간 무뢰배에 불과했다.
넬타리드가 비화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선배님 진정 좀 하세요.”
“아 놔봐! 너 같으면 진정하게 생겼어?! 이것들 때문에 내가 또 쉬지도 못하게 생겼는데!”
저게 본심이 아닐까.
“끄으으으…….”
이미 남성은 극심한 노이즈로 존재가 분해되어버린 후였고 그나마 상황이 나은 여성 또한 한 대만 더 치면 분해되어버릴 것 같았다.
“놔! 저년도 지워버리게!”
“일단 진정하십시오. 당장 그것보다 수습해야 할 일도 많지 않습니까.”
기도도 기도지만 이 차원의 상태는 이 두 암세포 때문에 정말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비틀려있었다.
비화의 의도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이용해 먹은 두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그녀는 이 차원의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놈의 거품 세계들, 깡그리 통제하든지 해야지.”
“우선은 저 소녀부터 구하셔야 합니다. 이곳은 금방 정리하고 따라가겠습니다.”
비화가 빛으로 화하며 사라져버리자 넬타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이 가상공간의 창생에 그가 도움을 주었지만, 넬타리드가 이곳에서 가지는 권한은 많지 않다.
“으으…… 윽…….”
그때 넬타리드의 귓가에 아직 살아남아 있던 여성의 신음이 들려왔다.
“건방진…… 감히 이 세계의 주신인 제게 이런…… 거기 너! 내게 오거라! 내 명을 따라!!”
“딱하구나…….”
“건방지고 품위도 없구나! 감히 내가 누군…… 커헉?!”
정신 못 차리고 분노를 드러내는 그녀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 크게 경련하더니 무너져내렸다.
넬타리드의 힘이 그녀를 찍어눌러 분해시켜버린 것이다.
“태어나기를 오만하게 태어났으니 당연하겠지.”
지금 넬타리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화가 얼마나 히스테리를 부릴지, 또 이일을 처리한답시고 무슨 사고를 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 *
거품 세계는 미성숙한 차원이다.
일반적인 차원과 달리 시스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영혼의 순환까지도 정상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거품 세계는 일정 성장을 빠르게 가속하여 거쳐야 하고 일정 수준에 이르면 우주에 존재하는 보이드에 차원을 고정함으로써 하나의 신생 차원으로써의 발돋움을 준비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차원이 온전해지면 하나의 차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비화는 차원이 가지는 고유의 의사를 존중해주고자 상당한 권한을 위임했다.
힘이 부족하여 불완전한 차원으로 완성되는 걸 그녀는 원치 않았으니까.
대부분의 차원은 그런 비화의 의도에 따라 온전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을 지속했지만, 지금같이 특수한 케이스도 존재했다.
바로 이곳처럼 말이다.
그렇게 태어난 이들은 오만하고 교만했으며, 비화의 권능을 자신들의 고유의 힘이라 착각하며 정도를 모르고 휘둘렀다.
유흥이라는 명목으로 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든 것이다.
그들은 두 명의 소년 소녀에게 막대한 힘을 주고 강제로 빼앗으며 유희를 즐겼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여 지구를 아프게 하는 것과는 격이 다른 수준의 사고였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내려다보며 비화는 담담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언제까지고 지켜볼 수는 없으니 슬슬 나설 때가 되었다.
“어…… 어어?! 어째서 저 마녀가 타오르지 않는 거지?!”
“말도 안 된다! 마나 서클은 분명 끄집어냈을 텐데?!”
모든 것을 태울 것처럼 타오르는 화염은 비화의 힘으로 인해 레밀리아의 육신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물론, 소녀 레밀리아 본인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공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다.
“마녀가…… 마녀가 사술을 쓴다!”
“악마의 힘이다!! 마녀를 어서 죽여!!”
군중들의 성난 외침이 퍼져 나온다.
하지만 레밀리아는 그들의 저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지켜주는 힘을 발현하던 비화는 천천히 자신의 신력을 끌어내며 이 차원과 동화시키기 시작했다.
“여신님이 거품 세계를 그만 만들었으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
짜증을 부려보지만, 현실이 달라지진 않았다.
이 차원에 있는 가짜 신계를 넬타리드에게 맡겼으니 그녀가 할 일은 이 비틀린 세계를 정화하고 본래 받아야 했을 고결한 운명을 빼앗기고 추락한 소녀를 구원하는 것뿐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비화의 등 뒤로 빛으로 된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며 기상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마법이 아닌 신의 의지에 따라 기상이변이 일어난다.
툭…… 투툭……. 쏴아아아아아!!!
“비?”
“갑자기 무슨…….”
동시에 화창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며 일순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빗방울과 어둑어둑해진 하늘에 광기로 가득하던 군중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마, 마녀가 비를 불렀어.”
“아니, 저걸 봐!!”
그때 일부 군중이 비화를 발견했는지 경악한 목소리를 냈다.
“저…… 저게 뭐야?!”
놀란 이들은 비화의 정체를 쉽게 추론하지 못했다. 설마 신이라는 존재가 직접 강림할 거라고 생각한 이는 이곳에 없을 테니까.
비화는 말없이 천천히 내려섰고 묵묵히 화형대 위에 묶인 레밀리아를 향해 나아갔다.
비화의 발이 닿은 곳이 빛을 내뿜으며 일대를 정화해나가는 것처럼 옅은 파장을 만들어냈다.
“…….”
소녀 레밀리아는 공허한 눈으로 비화를 시야에 담았다.
“상태가 심각하네…….”
비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는 묶여있는 그녀의 밧줄을 입자화시키듯 분해시켜버린 뒤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
“네 기도가 들렸어.”
“왜.”
레밀리아의 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제 와서?”
“…….”
“그토록 울부짖을 땐 듣지도 않았던 주제에 왜 우리를 용사로 만들었고 이렇게 만든 거죠?”
그녀의 목소리에 비화는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일단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왜! 왜!!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용사로 만들어서 무거운 짐을 지게하고 이제 와서 버리는 건데!! 이렇게 비참하…… 악!!”
빠악!!
악을 쓰듯 소리치는 모습에 비화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통을 후려갈겨 버렸다.
“…….”
“어머, 미안.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네.”
레밀리아는 착각하고 있었다.
성격이 제법 거친 비화가 자애의 여신인 프리아처럼 그저 자비로울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일을 저지른 건 자신들을 신이라 믿는 초월자들이 멋대로 이 차원의 힘을 가져다 쓴 것이지 비화가 한 게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비화의 뜬금없는 행동에 군중도 침묵한 채 입을 떡 벌렸다.
“당신…….”
“미안한데. 번지수 잘못 찾았어. 널 가지고 논 것들은 내가 아니야. 신의 탈을 쓴 암세포 같은 것들이지.”
“그럼, 당신은…… 대체 뭐죠?”
“네 기도를 듣고 온 존재. 너를 구해달라고 차원이 올린 기도를 듣고 온 존재. 자, 내 손 잡아.”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에 그녀가 손을 잡아 형을 집행하던 귀족과 병사들이 비화를 포위했다.
“멈춰라! 감히 폐하께서 명하신 마녀의 처형을 방…….”
물론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비화의 손을 잡기가 무섭게 레밀리아와 그녀의 신형이 그곳에서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레밀리아가 정신을 차린 곳은 으리으리한 배경을 지닌 건물의 실내였다.
“여긴 어디…….”
“이 모든 원죄의 시작점이겠지. 지금부터 나는 네가 빼앗긴 것들을 되찾아줄 거야.”
그것이 이 차원을 수복하는 첫 발걸음이다.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힘이 없어 휘청거리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따스한 빛이 레밀리아에게 스며든다.
“네 원한의 대상은 누구지?”
소녀, 레밀리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언급했다.
“……자신보다 더 명성이 높다는 이유로 자격지심에 빠져 용사를 단두대에서 비참하게 처형시킨 황제.”
“그의 누이를 농락하고 죽인 황제의 명을 받은 그믐달의 기사들.”
“그리고, 지켜주겠다 약속한 내 동생을 몬스터에게 산채로 잡아먹히도록 떠넘기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주제에 재판에서 뻔뻔하게 내 동생을 조롱하고 자신의 무죄를 강하게 주장했던 그 귀족!!”
하나하나 끊어 말하는 레밀리아의 눈에 서슬 퍼런 독기가 서렸다.
“마지막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의 모든 인간들.”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 거짓은 없었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
레밀리아가 비화에게 시선을 보낸다.
“죽었다는 그 용사. 그 소년은 네게 어떤 존재야?”
비화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악우. 소중한 친구. 그리고 가족 같은 존재.”
“남녀로썬?”
“그게 중요한가요?”
“그냥, 궁금해서.”
“신이라도 그런 건 모르나요?”
“배려라고 해줄래? 맞기 싫으면.”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도 비화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마지막은 제외해.”
“어째서죠?”
“이 차원은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종말을 맞이하고 리셋될 거야. 그러니 그들이 널 외면했듯 너 또한 그들을 외면하면 돼. 네가 이차원의 생명체를 위해 더는 희생할 필요는 없어.”
받은 만큼만 돌려주되 그 이상은 하지 말라.
비화가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애초에 여신으로써 복수를 종용하는 것도 정상은 아니지만, 비화의 성격상 이런 걸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좋아요. 복수가 끝나고 죽는다면, 어차피 나도 가족들의 곁으로 떠날 생각이니까.”
* * *
힘이 부족했던 자가 막대한 힘을 내려받았다면 복수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비화의 힘을 받아 차원의 힘을 다루기 시작한 레밀리아는 말 그대로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아…… 안돼……. 안돼!!!”
한때 대륙을 구한 용사를 비참하게 죽인 제국의 황제는 서슬 퍼런 날이 달린 단두대에 목이 걸렸다.
그 누구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고, 그를 동정하지도 못했다.
세상에 신벌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가상공간 안에서 성장하는 거품 세계에 한해서 비화는 가히 창세신에 가까운 힘을 발휘했다.
작물은 마르고, 강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인간들은 마치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하나 모두에게 잊히듯 사라졌다.
단신으로 황성으로 밀고 들어간 레밀리아는 앞을 막는 모든 것을 처단하며 모든 일의 시작인 황제를 끌어내렸다.
오래전 처음 용사의 직위를 인정받았을 때 부끄럼이 많고 소극적이었던 소녀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레밀리아는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용사, 즉 소년을 죽였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황제의 머리를 단두대에 걸었다.
-그들은 죽어서도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부디 바라는데 네가 복수에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기를 바랄게.
비화의 경고를 기억하듯 레밀리아는 철저하게 복수의 대상만을 찾아 헤맸다.
마치 신중하게 한수 한수를 두는 체스처럼 행동에 온 신경을 쏟았다.
레밀리아는 스산한 얼굴로 단두대에 목이 걸린 황제의 머리채를 잡았다.
“레…… 레밀리아여! 지금이라도 나를 풀어라! 그대는 용사의 조력자가 아니었나! 네게 힘을 내린 악한 악마의 말 따윈 믿지 말고 짐을…… 짐을!!”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황제.”
“내 모든 것을 주겠다! 보화를 원하나? 아니면 으리으리한 저택을?! 그것도 아니면 권력을?! 짐의 자리를 주겠다! 그러니 제발 짐을…….”
“아무것도 남지 않을 이 세계의 왕이라…… 오만하네.”
“이이 불경한 년! 연놈들이 감히 짐의 권위에 도전했으니 당연한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어찌 그것을 모르고 짐의 탓을 하는…….”
스르르릉- 터어어엉!!!!
망설임 없이 마법으로 만들어낸 칼날로 거대한 칼날을 붙잡고 있던 밧줄을 끊어내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단두대의 칼날이 황제의 목을 날렸다.
이미 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비화가 그들에게 신벌을 내렸기 때문일까.
황제는 목이 떨어졌음에도 바로 죽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떨어진 그의 목을 그녀의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눈을 마주했다.
“권위에 도전? 황제.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소녀와 결혼하여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어. 나 또한 언젠가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고. 소박한 꿈을 지닌 우리를 질투하고 짓밟은 건 당신이야.”
보는 이 하나 없는 고요한 처형이지만 레밀리아는 독기어린 눈으로 그의 죽음을, 그리고 죽은 그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며 연옥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려는 의지로 가득 타올랐다.
친구이자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용사. 소년의 원한을 갚은 레밀리아가 다음으로 찾아 나선 존재는 레밀리아의 동생을 몬스터에게 산채로 잡아먹히게 만들고 도망쳐버린 귀족이었다.
“으…… 으아아악!!!! 그만! 그만! 제발 살려줘!! 나도 무서웠어! 무서웠다고! 어쩔 수 없잖나! 다급해지면 사람은 이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
“전장에서 경고하는 부하들의 말도 무시한 채 술을 마시고 여자를 끼고 놀고 있던 네가 최소한의 의무만 이행했다면.”
“…….”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이…… 이익!! 감히 천한 평민 주제에!! 내가 누군지 알고?!”
“무슨 상관이야? 황제도 단두대에 머리통이 날아갔는데. 네까짓 게 뭐라도 되는 거 같아?”
스산하게 웃으며 그녀는 염동력을 이용해 동생을 잔인하게 죽게 만든 귀족을 똑같이 몬스터의 밥으로 던져주었다.
“끄아아아악!! 아파! 아파! 끄윽…… 컥!”
몬스터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산채로 포식했고, 귀족은 끔찍한 비명 속에서 죽어갔다.
세계가 리셋되기 시작하며 몬스터 같은 생명체들도 서서히 사라져갔지만, 아직 남아있는 존재도 있었다.
“다음은 네 누이를 죽인 자들이야. 저승에서 기다려줘. 내가 전부 지옥 끝에 처박아놓고 따라갈 테니.”
레밀리아는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복수를 이룰수록 그녀의 표정엔 환희가 서렸다.
그녀를 막을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시…… 신은 우리를 지켜주는 게 아니었나?! 어째서 신이 이런 잔인한 짓을 묵과한단 말인가! 그건 신이 아니다! 악귀에 불과하다! 네년은 폐하의 말대로 악귀에게 몸을 판 창녀와 다름없다!!!”
살기 위해 발악하던 기사들은 그녀에게 잡힌 채 악다구니를 썼다.
이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남자 손도 못 잡아본 모태솔로야, 창녀가 아니라고.”
안타깝게도 소년의 누이를 농락하고 죽인 그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줄 순 없었다.
이에 레밀리아는 그들을 산채로 벌레에게 파먹히도록 벌레 둥지에 내던졌고 그들은 수일간 끔찍한 고통과 비명 속에서 벌레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파먹히고 나서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레밀리아는 자신의 복수에 관련된 모든 이들을 철저하게 파멸시켰다.
공허하던 눈에 빛은 돌아왔지만, 그녀의 분노는 마지막까지 광활하게 타올랐다.
그렇게 마지막 복수를 마쳤을 때.
레밀리아의 고향이나 다름없던 세계엔 더 이상의 생명체가 남지 않게 되었다.
생명체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다시금 싹을 틔울 것이다.
“그래서. 원한은 풀렸어?”
“이런다고 내 소중한 이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겠죠. 조금, 허무하고 공허하네요.”
모든 복수를 끝마치고 바닷가 절벽에 홀로 서 있는 그녀의 곁에 모습을 드러낸 비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거봐. 단순히 복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넌 행복을 얻지 못했으니까.”
“이제 지쳤어요, 저를 죽여주세요. 그의 곁으로 갈 수 있게.”
“어…… 음……. 그건 안 되는데.”
잠시 고민하던 비화가 인상을 찡그렸다.
복수엔 성공했으나 그녀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
“넌 이제 이 차원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어, 혹시 바라는 게 있어?”
비화의 물음에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복수만을 위해 살았고, 이제 그 종지부를 찍었어요. 뭔가 시원섭섭하지만, 미련은 딱히 없네요. 제가 아는 세상은 이제 끝났어요. 혼자 살아남아 본들 달라지는 것 따윈 없죠.”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야?”
“……네. 그만…… 쉬고 싶어요.”
조용히 대답하는 이 작디작은 소녀를 보며 비화는 고민에 빠졌다.
온전한 구원이 아닌 만큼 그녀에게 새 삶을, 그녀가 잃어버린 미래와 행복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하길 잠시.
그녀의 뒤편으로 공간이 열리며 넬타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비화는 레밀리아에게서 적당히 거리를 벌린 채 넬타리드에게 다가갔다.
“행복한 기억을 심어주는 일만 남은 겁니다. 선배님.”
“알아. 아는데…… 무슨 수로?”
레밀리아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타 차원의 존재 따위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현재 이 세상에서 자신이 마지막 남은 생명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레밀리아에게 들리지 않게 대화를 나누던 두 신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저기 선배님.”
“왜.”
“저 소녀.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왜.”
“그럼 짧은 시간이라도 그녀에게 사랑이라도 느껴보게 하시는 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멍청아. 저렇게 망가진 애가 무슨 수로 사랑을 느끼고 행복을 느껴보겠어? 그리고, 누굴 데려올 건데.”
물론, 그녀의 혼과 고결한 위계를 이 차원과 연동시키고 다른 차원에 보내는 것도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번거로운 건 둘째치고 그녀에게 사랑을 보여줄 남성을 찾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괜찮은 이가 있긴 합니다. 하인스 영지에 말입니다.”
“괜찮은 남자? 설마 우리 아빠를 말하는 거야? 야. 경고하는데 아빠를 여기 엮이게 하면 너 진짜 내 손에 죽어.”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누구.”
그 말에 넬타리드가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게 말입니다……. 혹시나 해서 조금 거래를 했습니다.”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균열이 열리며 세 명의 미형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들은?”
“그…… 선배님도 잘 아는 이들입니다.”
“내가 잘 아는 이들이라고? 생면부지 초면인데? 영지에 저런 잘생긴 사람이 있는걸 본적도 없고.”
비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셋을 훑어보았다.
한 명은 상당한 체격에 새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다.
큰 체구에 쫙 달라붙은 와이셔츠 때문인지 단추 몇 개는 떨어져 나간 모양새였다.
특이한 점은 사내의 피부가 붉고 이마에 뿔이 두 개 돋아나 있다는 점이었다.
중앙에 있는 두 번째 검은 정장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는 첫 번째 사내보다는 체격이 왜소한 편이지만 균형 잡힌 근육이 있을법한 균형 있는 형태의 모습이었다.
매력적이다 싶을 정도의 구릿빛 피부에 짧은 머리. 은하수를 담은듯한 고요한 눈동자가 굉장히 잘생긴 남성이었다.
말수가 적으며 행동이 절제된듯한 고요한 미남을 표현한다면 이러할까.
그리고 마지막은…….
“…….”
백인계통의 새하얀 피부, 새하얀 토끼 머리띠, 선글라스에 반짝거리는 말끔한 두피를 자랑하는…… 근육질의 남성이었다.
비화의 기준으로 볼 때 저 셋은 조금 괴이쩍긴 해도 굉장히 잘생긴 존재들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대머리가 저렇게 멋있어 보이기도 쉽지 않은데…….
그러던 중 비화의 머릿속에 저들의 특징이 어디서 많이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크기가 조금 다르지만, 저들은 동일한 공통점이 있었다.
몸이 굉장히 좋다는 사실이었다.
“설마…….”
그녀는 기겁한 얼굴로 넬타리드와 그 셋을 바라보았다.
설마설마했지만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머릿속에 떠오르자 여신인 그녀조차 뇌 정지가 오고 말았다.
“신의 눈물방울로 만든 보충제를 대가로 인간화를 좀 시켰습니다.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에 사랑만 한 게 없지 않습니까.”
“…….”
비화는 할 말을 잃은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가만히 있던 구릿빛 피부에 밤하늘을 눈동자에 담은듯한 사내가 묵묵히 레밀리아 쪽으로 걸어갔다.
“읏?!”
갑작스러운 기척에 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뜨며 굳어버렸다.
이에 사내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장미 한 송이를 그녀에게 건넨다.
“이, 이게 무슨……. 당신은 누구죠? 여신님은 어디로…….”
레밀리아의 질문에 사내는 그저 고요함이 느껴지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놀라우리만치 매력적인 저음으로 말했다.
“호의의 선물.”
밑도 끝도 없는 선물 공세였다.
레밀리아는 당황한 채 비화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와, 저 밑도 끝도 없는 미친놈 좀 봐.”
이에 비화는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물론 비화는 레밀리아가 이 자식이 뭐 하는 놈이냐며 기겁할 거라 생각했다.
“아……. 고…… 고마워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는 걸 보기 전까지는.
방금까지 세상에 홀로 남았고 더는 미련 없다는 듯이 굴었던 주제에.
저 x친년이.
전장에서 평생을 살았고, 복수에 미쳐있던 숙맥 소녀에게 미남의 효과는 굉장했다!
비화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래도 레밀리아의 천성은 금세 사랑에 빠지는 스타일이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