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38화
뇌술사를 포함한 데이브 킴을 돕던 각성자들을 죄다 죽여버린 뒤 그 영혼을 결박해 연옥에 던져넣는 일에는 딱히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극한의 경지에 이른 데스로드의 권능. 신의 힘인 신력과 위계. 그리고 그 외에도 추가된 여러 가지 힘은 내게 어느 정도 간섭권을 부여한다. 그중 하나만 없었어도 이런 행동까지는 불가했을 테지만 세계의 법칙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상당히 많은 편법을 써온 이상 문제 될 건 없었다.
비화는 연옥에 던져넣는 영혼들의 기준점을 만들어두었는데 이놈들은 그런 기준점을 아주 확실하게 넘어줄 정도로 악행이 많았기에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단순히 에반젤린의 그림을 위작하여 범죄를 저지른 것도 그냥 넘어가 줄 수 없는데. 이놈들이 노린 게 삼촌이었다면.
‘절대 안 되지.’
삼촌을 건드는 것들을 그냥 두는 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오래전에 한 꼬맹이가 있었다.”
“무…… 무슨 소리를…….”
모두가 돌아가고 고요함만이 남은 폐공장에서 나는 연옥으로 끌려가던 데이브 킴의 영혼만을 조용히 빼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는지 당황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여동생과 누나와 함께 살아가던 그놈은 초등학교가 지날 즈음부터 어떤 병을 앓아야 했기에 학교조차 제대로 가지 못했어.”
“…….”
뭔가 말하고 싶은 건 많아 보이지만 그의 입은 그의 의지를 배신하여 열리지 않는다.
이미 그의 영혼은 그의 존재이되 제어권 따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그래서 그놈은 20살 남짓 짧은 인생의 대부분을 특수한 병실에서 보내야 했다. 본래라면 그런 것조차 불가능해. 돈이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해외에서 누군가가 소년의 가족을 찾았다.
그 사내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세 남매에게 돈을 보내주었고, 병에 걸려 죽어가던 소년을 입원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
그놈은 평생을 병실에서 보내면서도 단 한 번도 그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은 적이 없다.
고작해야 형제의 자식, 조카들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많은 돈을 보내줄 이유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 질문을 보내도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소년은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지. 하지만 세상 참 무심하게도 그는 결국 성년이 되던 해에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동시에 제어권을 아주 조금 되찾은 데이브 킴의 영혼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냐! 그딴 이야기나 들어줄 이유 따윈…….”
“들어야 할걸? 그래야 지금 내가 하는 행동에 모든 이유가 납득이 될 테니.”
담담하게 말하며 녀석의 입을 다시 틀어막은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때 죽은 놈의 이름은 신현수.”
“…….”
그의 눈이 부릅 뜨여진다.
“현 신성 회장의 조카지. 그 조카는 그렇게 죽어 영혼이 되었고, 아주 극한의 확률을 뚫고 기억을 보유한 채 다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결국 돌아왔고 그렇게 고마웠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피가 직접 이어진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은 그에게 아버지나 다름없거든.”
“서…… 설마……. 네놈이…….”
그가 덜덜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네놈이 그 신현수라고…….”
“적어도 납득은 된 거 같네.”
“……그래서 티오니스에서 넘어오자마자 신성에 그렇게 많은 지원을…….”
왜 티오니스에서 넘어오자마자 내가 신성과 크게 연관을 맺었고, 지금까지도 신성 위주로 도움을 주고 있는지를 깨달은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티오니스와 신성을 이간질하려던 두 번째 계획은 처음부터 의미 없는 짓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실각시키려 했던 현 신성의 회장을 적대하는 게 얼마나 막무가내식 행동인지도 깨달았다.
“그러니. 이제 네가 당하는 건 단순한 괴롭힘이나 힘자랑 같은 게 아니야.”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그를 어떻게 해보려 했던 놈을 향한 조카의 복수일 뿐.
“네 영혼은 윤회하지 못하고 연옥에 떨어져 끝없이 고통받을 거다. 세뇌술사 빌이라고 했나? 그놈들이나 지금 이미 연옥에 떨어진 놈들과 달리 네 녀석은 연옥에 떨어질 정도는 아닌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으…… 으으읍!!! 나…… 난 아니야! 난 그 악랄한 놈들과는 다르다고! 인간이 욕심을 좀 부린 게 뭐가 나쁜가!”
“맞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 너는 그놈들보다는 나은 수준일 수도 있지.”
“그…… 그렇다면.”
“하지만 내 권한이라면 너 하나 정도는 연옥에 처박아버릴 수 있거든.”
씨익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자 그의 영혼이 바들바들 떨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한다.
“귀찮게 굴지 말고 쉽게 가자. 너와 함께 한 놈들의 명단. 그놈들이 뭘 했는지. 전부 뱉어. 그럼 최소한 너만큼은 용서해주지.”
내 말에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어떻게 할래.”
“내…… 내가 널 어떻게 믿고…….”
“그럼 이야기는 끝이지. 연옥에 처박혀서 네 행동 모든 것을 끝없이 후회하며 완전히 뉘우치기 전까지 그 지옥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거다.”
다시금 땅이 갈라지며 시뻘겋게 타오르는 화염의 팔이 그의 영혼을 휘감는다.
-그아아아아아!! 데이브!! 데이브으으으!!!
-네놈만 왜 멀쩡한 거냐!!!
이미 먼저 끌려들어 간 놈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에 끔찍한 화염을 두른 채 괴성을 토해내는 세뇌술사의 악다구니에 데이브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두 번은 없다.”
“마……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전부 다 말할게. 제발!!”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던 그는 죽음 이후에 더 무서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자 미친 듯이 매달리며 자비를 구걸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신성 내의 모든 배신자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자…… 자잘한 다리는 몰라! 다만 나와 함께했던 대가리는 그놈들이 전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한 채 내가 물었다.
“이게 전부라고?”
“그…… 그래 맞아! 이…… 이제 약속을 지켰으니…… 제발…… 제발 나를 그곳에는…….”
콰지지직!!
균열이 더욱 커지더니 검은 화염으로 휩싸인 팔이 그를 휘감았다.
“무…… 무슨?! 이야기가 다르잖아!!”
“나는 용서하마.”
담담하게 말한 나는 겁에 질린 데이브의 영혼을 짓밟았다.
“하지만 저놈들이 널 용서할까?”
-어림도 없어! 같이 가는 거다!
-네놈만 빠져나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으…… 으아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데이브는 결국 연옥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자. 그럼 나머지 놈들도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지.”
물론, 그놈들이 평소에 악행을 저질러온 극악무도한 놈들이 아니라면 연옥까지 처박을 순 없겠지만.
“현아야.”
스마트폰을 들어 현아에게 전화하자 그녀가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낯간지럽게 갑자기 왜 이름으로…….
“지금부터 이름과 부서, 직책을 불러줄 테니 잘 기억해놔. 데이브 킴과 함께 삼촌을 노린 놈들이니.”
-빨리 불러…….
삼촌의 존재가 소중한 건 전생했던 나뿐만이 아닌 현아나 연희 누님에게도 같은 문제였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현아라면 그들을 죽이는 게 아닌 적법한 절차에 따라 벌을 받게 만들겠지만…….
상류층에 있는 그놈들을 삶의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것 정도는 그녀에게도 어려울 게 없는 일일 터다.
* * *
뉴스를 통해 신성 내부에서 공금횡령. 숨겨진 범죄. 신성이 지원하는 아이들을 몰래 빼돌린 혐의로 다수의 임원과 신성의 직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데이브 킴은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중국, 프랑스 등 여러 지부에 자신과 뜻을 같이한 이들을 두고 있었는데 현아가 한번 작정하고 털기 시작하니 그들로썬 어찌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현 회장인 삼촌과 현아가 가지고 있는 세력의 힘이 거대한 것도 있었고 티오니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해서 손해 볼 게 없는 각 국가는 괜히 두둔해줬다가 자칫 크게 지뢰가 터질 수 있는 이들을 옳다구나 하며 잡아 들이는 데에 협조해왔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여러가지였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어린아이들을 몰래 납치해서 자신들의 병기로 써먹으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나라든 아이들은 최우선 보호 대상. 특히 선진국이라 말하는 국가일수록 그런 점이 유독 강한 편이기에 이래저래 대서특필되며 한창 시끄러워졌다.
다만 그 태풍의 시작이었던 에반젤린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른 채 늘 그렇듯 방송을 이어간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차원의 마지막 복구를 마치고 돌아온 비화는 넬타리드의 뺨을 사정없이 잡아당기며 눈을 흘겼다.
“으윽. 선배님…….”
“야. 너 내가 각성자에게 부여하는 힘. 관리 잘하랬지. 세뇌술사? 미쳤어? 아빠가 안 나섰으면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했을지라고.”
“그렇게 허술한 시스템은 아닙니다만…… 으윽.”
“이게 말대꾸를 해?”
“선배님! 이건 폭거입니다!”
넬타리드가 반항을 해보지만, 비화는 그의 등짝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신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부터 황당한 일이지만 비화도 결국은 여신인 만큼 아직 어린 신인 넬타리드에게 간섭할 방법은 많았다.
그렇게 한참을 푸닥거리하고 나자 넬타리드가 물어온다.
“가셨던 일은 잘됐습니까?”
“그래. 차원은 이제 안정화 단계에 들어갔어. 유일한 문제였던 레밀리아의 문제도 해결됐으니까 차원 자체적으로 이제 별문제는 없을 거야.”
차원을 리셋하는 과정에서 비화는 레밀리아의 상태 호전에 따라 차원이 안정기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를 차원과 완전히 격리했다.
이제 와서야 레밀리아도 굳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별로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향수를 느낄 수 있으니 돌아갈 틈 정도는 만들어놓겠지만 이제 차원과 그녀가 이어져서 문제가 생기거나 하진 않게끔 시스템을 조율했다.
보통이라면 비화라도 해주지 않을 특혜이긴 했다.
“그 외에 차원도 이딴 경우가 나오지 않게 완전히 틀어막았고.”
“그건 듣던 중 다행이로군요.”
“아 연옥에 영혼이 또 밀려들어 왔던데…… 아빠가 보낸 거야?”
“예.”
“그것들도 좋은 꼴은 못 보겠네.”
그녀는 넬타리드의 성역 한켠에 놓인 소파에 뭉그적거리듯 드러누웠다.
“저기…… 선배님.”
“뭐. 왜.”
“아…… 아닙니다.”
여기가 지 집 안방이냐.
아무리 신이라지만 선대와 다르게 감정을 가진 현재의 넬타리드는 괜히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켜야 했다.
“참. 그 붉은 보석. 에너지 거의 다쳤을 텐데?”
“벌써 말입니까?”
“그래. 예정과 달리 에너지를 여기저기서 많이 처먹었더라고. 벌써 조금 됐을 텐데? 별 변화는 없나?”
분명 텅 비어 있던 에너지를 모두 채우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다 차올랐으면 변화가 생겨야 정상이건만. 이 뻔뻔한 붉은 보석은 아직도 에반젤린의 목걸이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단순히 알려진 레인보우 슬라임 계통을 대조해봐도 이런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생명 반응이 느껴지지 않는데 멋대로 움직이는 존재. 단순히 생자와 망자 같은 걸로 구분하기도 어려운 존재.
애초에 녀석이 먹어치우는 힘은 그 제한이라는 게 없었다.
마치 목표한 힘을 채우기 위해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목적이 있을 텐데…… 대체 뭘까…….”
늘 그렇듯 붉은 보석을 감시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던 그때였다.
“어?”
가득 차 있던 그 힘이 어딘가로 훅! 하며 사라져버린 것이다.
벌떡!!
“선배님?”
“…….”
놀란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던 비화는 뭔가 생각하듯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 놀러 간다.”
‘방금…… 붉은 보석에 모여 있던 힘이 전부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량이 사라진 걸 그녀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사고만 치지 마십시오. 선배님.”
심드렁하게 말하는 넬타리드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비화는 복잡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광포한 공허 속으로 몸을 던진 그녀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빠르게 나아갔다.
“흔적이…… 아 찾았다.”
평소라면 거의 찾지 못했을 만큼 은밀하게 이동한 아주 옅은 흔적이 그녀의 시야에 잡힌다.
차원과 그 틈은 본래 이렇게 누군가의 간섭을 허락하지 않는 견고한 요새였다.
하지만 데이비가 신과의 전쟁으로 여기저기 흠집을 내고 프리아 여신이 자신의 위계를 떨어뜨림으로 인해 차원의 벽은 예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물러진 것도 사실이었다.
프리아 여신의 본체가 기약 없는 잠에 빠져든 것도 그런 이유였다.
지금이야 여신의 분신체가 있으니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비화가 해야 할 일은 프리아 여신이 관리하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어라? 여긴?”
딱히 문제점이라곤 보이지 않는 차원의 사이를 유영하던 중. 그녀는 문득 파괴된 차원의 흔적의 앞에서 멈춰섰다.
“심연?”
오래전 회랑의 영웅 헤라클래스가 단신으로 박살 내버린 타나토스의 영역.
지금은 그저 심연이 있었던 공간 정도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공허였다.
본래라면 그 흔적도 남김없이 사라졌어야 했으나 심연은 지구와 이어진 마굴 이상으로 너무 방대한 힘이 응집되고 분해 융합되기를 반복한 공간이다.
“회복기를 거쳐야 할 정도로 엉망이라곤 들었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네. 섬뜩할 정도로.”
과거 심연의 생명체나 심연의 공주들이 존재했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옅은 흔적은 이곳에서 끊어져 있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처럼 말이다.
이에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뒤 양손을 가볍게 모았다.
화아아악!!!!
동시에 그녀의 날개옷이 반짝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변의 힘의 격류가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핏!!
그중 일부의 힘의 흔적이 비화의 뺨에 작은 상처를 남겼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뭐야 이거…… 이런 게 왜…….”
아무것도 없어야할 공허였다.
하지만. 무리하게 내부 전체를 휘저어본 그녀의 시야에 생각지도 못한 것이 비쳤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의 숨겨진 공간.
비화는 홀린 듯 양손으로 그 틈을 잡아 벌렸다.
동시에 도저히 하나라곤 생각할 수 없는 대량의 에너지가 그녀의 감각이 닿는다.
“여기가 맞아…….”
지금 그녀의 피부를 저릿하게 울리는 건 그동안 블랙 슬라임이 먹어치운 것으로 추정되는 에너지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흐릿하던 힘의 경로가 이곳에선 명확하게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새카만 공간 속 그녀만이 환하게 빛난다.
찰박…… 찰박…….
얕은 물 위를 걷는듯한 소리가 소리. 공기도 중력도 느껴지지 않는 무형의 공간은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도 견디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지만, 비화는 심드렁하게, 그리고 묵묵히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이런 공간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본래라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분명 진실이었다.
“…….”
그렇게 한참을 더 들어갔을까.
그녀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동시에.
그녀의 앞에 누군가가 인기척을 드러냈다.
동시에 비화의 눈이 부릅 뜨여지더니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뭐야…….”
그리고,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허한 공간 속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누구야. 너.”
그녀는 긴장한 듯 중얼거리며 한발 물러났다.
조율의 여신으로써 태초신의 권능을 내려받은 상위신임에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다만 어둠 저편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눈동자의 빛은 여신조차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자신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저건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타나토스는 죽어서 달이 되었고, 심연은 소멸했다.
하지만 소멸되어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공간에 검은 어둠의 공간이 나타나 있었고. 그 안에 있는 저 보랏빛 눈동자의 존재가 있다.
그녀를 가장 섬뜩하게 만드는 건 저 존재에게서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망자든 생자든 분명 저것에는 어떤 흔적이 남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붉은 보석처럼 말이다.
“설마…… 검둥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용기를 내어 한 발 내디뎠다.
애초에 이곳도 블랙 슬라임 검둥이의 보석이 모았던 힘이 흘러들어온 것을 추적해온 게 아니던가.
그녀는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힘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새까만 어둠은 여신조차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종아리까지 오는 머리카락.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것처럼 뽀얗고 고운 피부.
차분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이 드는 보랏빛 눈동자.
보라색과 붉은빛이 섞인 고딕 드레스와 보랏빛 양산.
비화는 저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 어떻게……. 이게 무슨!?”
깜짝 놀란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에반젤린보다 훨씬 작은 소녀의 눈이 한번 깜빡였고, 동시에 비화의 몸이 휘청거린다.
“우웁!?”
상위신인 그녀조차 제어가 안될 정도로 그녀의 몸 안에 있는 신력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차박…… 차박…….
그리고 어둠속에서 형체가 잘 보이지 않는 그 소녀는 쓰러진 비화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고.
그녀를 내려다보다 조심스레 몸을 낮췄다.
그리고 양산을 내려놓은 뒤 조심히 쓰러진 이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그 손 치우십시오.”
서늘한 목소리가 소녀의 행동을 멈춘다.
폭발적인 신력이 터져나가지만, 소녀는 말없이 비화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에 뒤따라온 넬타리드가 인상을 찡그린다.
“선배님은 표정에 너무 드러납니다. 제가 안 따라왔으면 어쩔뻔했습니까.”
그리고 신력을 일으켜 소녀를 밀어내려던 순간.
비화의 안에서 멋대로 날뛰던 힘이 소녀의 손짓한 번에 마치 온순한 양처럼 잔잔하게 변했다.
근본 없이 뒤섞인 에너지의 격류는 어린 신인 둘에게도 부담스러웠으나 마치 마술처럼 잔잔해진 것이다.
“무슨?!”
스르륵…….
이후 소녀는 보랏빛 눈동자를 한번 번뜩인 뒤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남은 것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물을 글썽이는 비화와 그런 비화의 곁으로 다가온 넬타리드뿐이었다.
“선배님…… 방금 그 인물…….”
“네가 생각한 게 맞아……. 본래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
“……하지만 그녀는…….”
“블랙 슬라임…… 검둥이랑 비슷하겠지.”
“…….”
“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분명히……. 고대룡의 장로이자 헤라클래스의 부인, 심연의 공주였지만 그 근본인 타나토스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 에린이의 친모.”
비화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클립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없습니다. 이건 말이 안 돼요. 근본적으로 이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검둥이가 죽어서 보석이 된 주제에 에너지를 먹고 다니는 건 말이 되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붉은 보석이 가득 채운 에너지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왔어. 분명히 무언가가 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야.”
블랙 슬라임 검둥이와 똑같은 느낌을 풍기는 소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클립스 혹은 그와 닮은 무언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