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42화
광기 어린 웃음.
공격 한 번 한 번에 죽음이 오간다고 느낄 정도의 강한 힘.
신이라 불리는 존재. 태초신 프리아 여신에게 반기를 든 광(狂)신이자 심연의 신 타나토스조차 제어하는 게 불가능하여 그저 광기에 스며들게 한 게 전부였던 존재.
심연의 공주들이 오랜 시간 티오니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차원에 간섭하지 못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
고대룡의 장로이자 사실상 만 년 전 고대 시대에 존재했던 인류연합의 절대적인 힘인 이클립스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광기에 잠식되었던 미치광이 시기에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시기에도 종잡을 수 없던 그녀였던 만큼 그녀가 남긴 어떤 흔적이 형상화 한 게 사실이라면 분명 본체처럼 종잡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그렇게 제멋대로인 그녀를 예측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클립스의 잔재라면 긴장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소식을 전해 들은 페르세르크는 머리가 아픈지 한 손으로 미간을 감싸 쥐었다.
“이클립스라…… 그 여자는 좀…….”
일리나도 머리가 아픈지 앓는 소리를 냈다.
유일하게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건 직접적으로 전투를 할 일이 없는 에이리아뿐이었다.
“하, 하지만 그녀는 악한 존재가 아니지 않나요? 서방님 말대로라면 그녀는 현재 저희에게 적대적인 것도, 에린이를 해칠 의도를 지닌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에이리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래. 에이리아 말대로 직접적으로 그 여자가 날뛰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다면…….”
“하지만. 이클립스는 심연의 공주일 적에도 악의를 내비친 적은 거의 없어.”
순수하게 파괴를 자행한 그녀는 어떤 의미로 보면 계획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여타 심연의 공주들과는 그 급이 달랐다.
“악의를 가진 적은 악의를 없애면 적대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이클립스는 악의가 없음에도 순수하게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시한폭탄이었다.
“비록 에린이의 친모라지만 나는 살면서 그녀 이상의 미친년은 본적이 없거든.”
떨떠름한 표현이지만 그것만큼 정확한 게 없었다.
“즉, 그녀의 잔재는 에반젤린을 위한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야.”
페르세르크가 뒤이어 설명해주자 에이리아의 표정도 걱정으로 굳었다.
“이를 테면요?”
“에린이를 지킨다는 이유로 갑자기 나와서 폭주하며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려 들 수도 있을 테지. 또 에린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 아이를 대뜸 납치해서 가둬놓을 수도 있는 미친년이 바로 그녀인 게야.”
“…….”
에이리아는 당혹스러운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세상에…….”
“그녀에게 악의는 없어. 하지만 그 악의가 없기에 예측할 수가 없는 거야. 그녀가 적대적으로 나올지 그 반대가 될지.”
예측이 안 되는 강자. 그 존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폭력인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으니까.
“데이비. 네 상황과 비슷하네.”
“난 그럴 생각은 없지만.”
“그래. 그대는 그럴 생각이 없겠지만. 사실 지구의 국가들 입장에선 그대가 그런 존재일 테지.”
복잡한 상황에서 이도 저도 못 할 처지라곤 하지만, 마냥 나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검둥이가 죽은 게 아닌 진화 중이라는 건 좋은 소식이네.”
“에린이…… 많이 슬퍼했으니까요.”
죽은 줄 알았던 반려동물인 슬라임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에반젤린은 뛸 듯이 기뻐할 아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에반젤린에겐 절대로 비밀로 하고.”
내 당부에 모여있던 모두는 긍정의 표시를 보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특별할 일은 없었다.
놀랍게도 미식연구부서가 생각보다 조용하게 사고도 치지 않는다는 점과 영지개발부의 활동 정지 때문에 멘탈이 절찬리에 갈려 나간 에오니샤가 급기야 게임에 빠져들 뻔한 사실 정도를 제외한다면 별일은 없었다.
헬창부서의 세 멍청이와 어울려 다니던 레밀리아가 요즘 페르세르크와 무언가를 진지하게 의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건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별일이 없었던 만큼 나와 비화는 혹여 이클립스의 존재가 나타날까 이곳저곳을 감시하는 입장이었다.
그 때문에 비공정 아스가르드를 포함한 하인스의 공중 병단이 대륙 각지를 고공 순항 중인 터라 아스가르드의 함장인 티아라가 앓는 소리를 내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이클립스는 기다렸다는 듯 모종의 이유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의 규칙과는 달리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그 위치는 티오니스가 아닌 지구였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장소에 대해 전해 들은 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넬타리드 교단의 사도, 케인이 전해준 그 위치 좌표는 현재 한국 군부대에서 정화능력 각성자를 이용해 한창 정화 작전을 개시하고 있는 부대들 사이에 끼인 작은 동원사단의 영내였다.
* * *
전방에 배치된 소규모 동원사단.
이곳에 배치되는 병력들은 주기적으로 경계선을 지키는 근무병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반 동원사단과 같은 적당히 느긋하고 적당히 긴장되는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박원일 병장님? 빨래 마쳤습니다.”
“어. 거기 가져다 놓고 조금 있다가 알아서 찾아가라 해.”
병장 하나가 느긋하게 과자를 까먹으며 중얼거리자 옆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상병 하나가 낄낄거렸다.
“박 뱀? 그러고 보니 옆 부대 소식 들으셨슴까?”
“옆 부대? 옆 부대 왜.”
“그 이번에 정화작업 때문에 한창 시끄럽지 않았슴까. 그래서 정화능력 각성자들 진입하는 거 직접 지원한다고 군단장이 방문했다고 했잖슴까.”
“와…… x발 끔찍하네. 사단장이 와도 난리가 나는데 군단장이면……. 어휴 나 같으면 목매달았다.”
“그러고 보니까 저희 근처 사단들은 최근에 별들 무자비하게 떨어졌지 말임다?”
“그렇지. 윗동네는 쓰리스타. 아랫동네는 투스타. 어휴 그래도 우린 진짜 운이 좋은 거다. 사단장 방문한다고 난리 치는 것도 없고.”
“생각해보니 저희만 피해갔지 말임다. 듣자 하니 군단장 왔을 때 군 기강 확립이니 뭐니 헛소리나 지껄이면서 사열까지 했다고 들었슴다.”
“우리 부대 위치가 적당히 애매하게 뒤쪽이라 이런 점은 좋지.”
별의 낙하는 그런 느낌이다.
일개 부대에 별이 떨어진다 하면 그날로 도로 미싱에 빗자루질에 아주 부대를 갈아엎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근데 박뱀? 저희도 이러다가 재수 없게 별 떨어지는 거 아님까?”
“야. 별이 뭐 한가한 줄 아냐? 옆 부대들은 전부 보여주기식으로 하는 거고. 우리 부대는 북한 인접 지역이 거의 없어서 문제없어, 어휴 사단장도 원스타인 이 쥐꼬리만 한 사단에 투스타, 쓰리스타? 생각만 해도 토 나오네.”
“그러고 보니 맞지 말임다.”
콰앙!!!
그때였다.
내무실의 문이 열리며 원사 계급의 사내가 후다닥 뛰어들어온다.
“야야! 지금 작업 없는 놈들 싹 다 연병장으로 집합!!”
파랗게 질린 원사의 외침에 병장 박원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올렸다.
“충성. 행보관님? 무슨 일 있슴까?”
“큰일 났다…… 큰일!! 야 성현수.”
“일병 성현수.”
“니는 가서 미싱 도구 싹 다 끄집어내 와라. 그리고 박원일이.”
“병장 박원일.”
“니는…… 어디 짱박힐 생각 말고 애들 다 데리고 청소도구함 가서 빗자루하고 있는 대로 다 끄집어내서 책임지고 집합해라.”
“아니 행보관님 저 말년입니다.”
“말년이고 천년이고 자슥아! 열외 같은 건 없다!”
뭔가 불안하다.
한창 여유로운 이 작은 사단은 좋은 말로 느긋한 곳이고 나쁜 말로 생각보다 야메가 많은 곳이다.
그렇기에 보통 이런 일도 잘 없는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평소에 어지간한 일로 놀라지도 않는 행보관이 저렇게 다급하다는 것은……
“행보관님? 설마…… 저희도 별 떨어집니까?”
최근 근방 부대에 죄다 별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박원일이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
“별은 무슨 얼어 뒤질 소리 하고 자빠졌노!”
다행히 장성급이 방문하는 사태는 아닌 듯싶었다.
“휴우…… 다행이다.”
“다행은 얼어 죽을 놈아! 별이 문제가! 내일 부대에!!”
뭔가 말하려던 행보관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티…….”
“티?”
“티오니스 대공이 온단다…….”
“…….”
그 말을 끝으로 병장 박원일은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과자봉지를 떨어뜨렸고 털썩 주저앉았다.
“행보관님? 제가 뭐…… 잘 못 들었슴까?”
“귓구멍이 막혔나! 빨랑 튀어나온나! 시간이 없다 안카나!”
사형선고는 깔끔했다.
투스타? 쓰리스타?
그게 뭐.
이쪽은 부대에 다른 의미를 지닌 핵폭탄이 터졌다.
* * *
일개 부대에 사단장이 방문해도 부대가 발칵 뒤집힌다.
당연히 그건 병사만 해당하는 게 아닌 간부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투스타도 아니고 티오니스 대공이 방문한다?
그로 인해 생길 엄청난 낙수효과는 멍청이가 아닌 이상 상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티오니스 대공은 뉴스에서 볼 땐 그저 먼 곳에서 느껴지는 존재지만 막상 들이닥치면 부대의 입장에선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빨리 빨리 쓸어 이 새끼들아! 야야! 저기 돌 안 보여?! 야야 박동수!!”
“이병!! 박! 동 !수!”
“대답할 시간에 돌 치워 이 새끼야!! 네 눈에 저기 널린 돌 안보이냐?! 어어? 손 보이지. 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군 생활 끝나냐?! 빨리 움직여 이 굼벵이 새끼야!!”
전역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짬 때리고 숨기엔 너무 일이 크게 번졌다.
병장이자 최고참인 박원일은 파랗게 질린 채 분대원들을 닦달하며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와…… x발. 진짜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미친. 아니. 그 미친 인간은 왜 여길 와서 진짜…….”
티오니스 대공이라는 존재는 옆 부대를 방문한 투스타나 쓰리스타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핵폭탄이었다.
차라리 타국 대통령이 방문했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시간도 촉박했던 탓에 계급이 낮은 장교나 부사관 가릴 것 없이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부대 미용을 신경 쓰고 있는 꼴이 퍽 가관이다.
그렇게 난리 부르스를 떨면서 별별 짓을 다했다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지금 하는 모든 뺑뺑이는 결국 준비일뿐. 결국, 티오니스 대공, 데이비가 방문하는 일정 자체가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말이다.
“야야!! 손 보이지 어?! 빨리 안 움직여?!”
애초에 데이비가 부대 외관을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걸 신경 쓴다고 크게 무언가 달라지겠는가.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안 할 수가 없는 게 군인이라는 신분이었다.
박 병장의 경우엔 그래도 속으로 최소한 사열 같은 거지 같은 일은 안 해도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최소한의 다행스러운 일로 남았다.
두두두두두!!!
하늘에서 헬기 소리와 함께 커다란 헬기 한 대가 빠르게 부대 안으로 날아 들어온다.
부대를 발칵 뒤집어놓은 원흉이자 직접적인 원인.
데이비의 등장이었다.
당연히 병사들은 직접 마주할 일이 없었기에 슬쩍슬쩍 보는 정도지만 안내를 맡은 몇몇 간부들에겐 피가 마르는 입장이었다.
헬기에서 내린 청년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충!!! 성!!!”
“그래. 쉬어!”
직접적인 상관은 아니기에 경례를 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데이비와 함께 온 존재는 경례를 안 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포스타.
별 4개의 빛나는 약장을 지닌 사내가 엄숙한 목소리로 쉬어를 외치자 간부들은 마치 갓 전입해 온 신입 이등병처럼 군기가 바짝 든 채 절도있게 경례를 마쳤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이후 간부들의 귓가에 담담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어린 느낌이 남아있는 청년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이봐, 연대장.”
“대령!!! 라윤석!!”
가히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는 위치나 다름없는 대령이었으나 잔뜩 군기가 든 모습으로 관등성명을 댄 대령이 대장의 부름에 대답한다.
“얼마 전에 병사들이 발견했다던 이상 현상이 발견된 장소로 이동하지.”
“예! 준비는 해두었습니다!”
그가 미리 준비된 차량으로 안내하자 데이비는 담담하게 그의 안내를 따라 차량에 올랐다.
* * *
“와…… x발 우리랑 비슷한 나잇대 맞냐?”
“포스 장난 아니지 말입니다.”
“옆에 포스타가 있는데 왜 이렇게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 데냐…….”
“사실 포스타정도면 쓰리스타 투스타 급보다 훨씬 빡세지말입니다.”
“말이라고 하냐? 근데 옆에 있는 사람이 더 개 쩔어버리니까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병사들의 입장에선 가히 놀라운 존재였다. 자신들과 나이 차이도 거의 안 나는 청년이다.
누군 병사로서 이 상황을 벌벌 떨고 있는데 누군 저렇게 군 최대 계급이나 다름없는 포스타를 대동한 채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없이 막대한 위압을 뿌려대고 있으니 그 차이를 직감하는 이들에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런데 티오니스 대공이 여긴 무슨 일로 왔는지 들은 게 없냐? 정화 작전에 투입하는 것도 아닐 텐데.”
“아. 그 얼마 전에 숲 쪽 초소에서 발견된 빛 있잖습니까?”
“빛? 아 애들이 근무서다 발견했다던 그거?”
“예. 그거 때문에 찾아온 거로 알고 있습니다.”
“와…… 시x 거기 근무서고 있는 새끼들 피가 바짝바짝 마르겠네. 그래. 근무는 누가 서고 있는데.”
“제가 알기로 천 병장님하고 안 상병으로 알고 있슴다.”
“그것도 고참에 에이스만 싹 모아놨네.”
낄낄거리며 명복을 빌어주는 박 병장이었다.
“근데 웃기지 않으냐? 쟤는 부대 미화에 별로 관심도 없는데 우린 전날부터 그 개 뺑이를 친 거 아냐.”
“별수 있습니까. 게다가 괜히 들쑤시는 것보단 낫지 말입니다.”
“그렇긴 하다야. 어우. 난 벌써부터 속 쓰리다. 빨리 가자.”
괜히 더 지켜보고 있어서 좋을 게 없었기에 박 병장은 잽싸게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어떠십니까?”
“부대가 정말 멋지네요.”
“감사합니다!”
“저기 저 삭막한 화단만 빼면요.”
“네…… 네?”
“장난입니다. 신경 쓰지 말고 가시죠.”
장난스레 말하는 데이비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아…… x발.
박 병장은 데이비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고 가버리는 것을 보며 미래를 직감했다.
“대대장!!”
“소령 임차호!”
“이야기 들었지?! 오늘 안에 저 화단 싹 엎어버리든지 아예 바꿔버리든지 정리해.”
“알겠습니다!!”
데이비가 차량에 오르기가 무섭게 연대장이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대대장을 닦달하는 소리가 퍼지는 건 당연했다.
* * *
사실 반쯤 장난이었다.
사실 내게 있어서 군대라는 게 직접 겪어 본 적 없는 남들의 이야기였으니까.
입영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나는 몸이 약했고 그렇게 죽었다.
단순 빡센 경험만 나열하자면 군대에 들어가는 것 이상으로 못 할 짓도 많이 했지만, 한때 이 나라 국민이었던 입장에서 볼 때 군대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접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부대에 사단장이 방문해서 저 산이 마음에 안 든다 말하니 얼마 후 산이 없어졌다더라.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물론 정말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유도할 생각은 없었기에 적당한 화단을 말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자리를 벗어나기 무섭게 뒤집어엎으려 들 줄은 몰랐다.
“이곳입니다.”
괜히 요란스럽게 안내한답시고 포 스타급 장성이 따라붙은 건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이 양반은 할 짓이 없는 건가.
물론, 그의 입장에선 굉장히 억울한 표현이겠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자잘한 상념은 이클립스의 흔적이 발견된 장소에 도착했을 땐 모조리 날아가 버린 후였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흔적이 굉장히 짙게 남아있었다.
“잠시…… 물러나 주시겠어요?”
그 말과 함께 한 손을 허공으로 뻗어 튕기자 아무것도 없던 초소 바깥쪽 숲으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결계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클립스가 힘을 이용해 이곳의 모든 기억을 봉인해둔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기억까지 봉인해둔 것일까.
어떤 꿍꿍이를 감추기 위해?
뭐가 되었건 확인은 해봐야 했다.
이클립스의 힘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와 달리 작정하고 그걸 해제하려 든다면 나도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이클립스의 결계를 모두 부숴버리자 공기가 일면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실프
이후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 이 땅의 기억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이클립스가 이곳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바람의 정령 실프가 보여주는 기억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고 벙찐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담담한 얼굴로 멧돼지 하나를 순식간에 제압해버린 이클립스가 제 몸보다 큰 멧돼지의 뒷다리를 잡고 기분 좋은 듯 어디론가 향하는 기억만이 담겨있었으니까.
“뭔가 확인하셨습니까?”
“아…… 네.”
다만 그녀가 향한 곳이 부대 이쪽임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 있는 마나의 유동을 안정화시켜 혹여라도 게이트가 생길 수 있는 문제를 틀어막았다.
곁에 있는 포스타급 장성은 곧바로 이동하는 내 행동에 의문을 가질 법도 했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필요한 정보를 모두 안내했다.
“대장님. 혹시 저쪽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쪽이라면…….”
포스타급 장성이 빠르게 눈치를 보내자 뒤따라온 연대장이 소곤거리듯 보고한다.
“간부식장이 있는 장소입니다만…….”
멧돼지를 잡아서 식당으로 향했다?
직접 먹으려고 잡은 건 아닐 텐데. 대체 뭘 하려고?
이클립스의 기행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