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41화
이클립스의 기생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방송이 끝나고 한창 해변가를 보며 놀다가 잠들었는지 누가 다가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모습이다.
조금 전까지 이클립스가 옆에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얘는 진짜 속 편하게 자네…….”
“비화야. 얘 집으로 옮겨라. 레어가 좋다곤 해도 집에서 자야지.”
“네.”
이 레어는 그녀에게 애착 공간이나 다름없지만 가능하면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을 새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드래곤은 독립성이 강한 생명체.
하지만 교육 자체를 함께하는 존재로 가르쳤고, 그 효과가 조금씩은 나타난다.
곤히 잠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띄워서 균열 속으로 데리고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누워있던 자리를 그저 말없이 지켜보았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내가 알겠냐.”
“이클립스…… 죽은 거 아니었어?”
“죽었어. 헤라클래스와 같이.”
“그럼 내가 본건 대체 뭔데.”
“모르지. 이클립스가 가진 힘은 단순히 고대룡 내에서도 독보적으로 강한 편이었으니까. 그녀가 죽으면서 방출된 힘이 어떤 현상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물론, 그것도 가능성이 큰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실로 눈앞에 펼쳐졌다면 모든 것을 의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애초에 대화도 안 되잖아.”
“맞아.”
이클립스가 우리에게 했던 말은 모조리 ‘돌려줘’라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마치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일에 대해 잘 아는 이를 만나봐야겠다.”
“신계?”
“그녀 말고는 이 일에 대해 아는 이가 없으니까. 혹시 모르니 너희도 입단속 잘해. 이클립스와 마주하면 에반젤린이 어떤 혼란을 겪을지 모르니.”
이번에도 그녀가 곤히 잠들어있었으니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골치 아팠을지도 모른다.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 이실디와 베르단데를 뒤로한 채 나는 영웅들과 프리아 여신이 있는 신계로 향했다.
곧바로 여신의 성역에 도달한 나는 굳게 잠겨있는 여신의 성역 문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평소엔 열려있던 성역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여신님.”
조용히 그녀를 불러본다.
비록 이 자리에 그녀가 보이지 않아도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있으리라.
“여신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도와주세요.”
내 부탁이 나지막이 퍼져나간다.
지금까지 침묵하던 여신이 대답을 해줄지는 사실 의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여신의 지혜뿐이었다.
그렇기에 막연하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클립스가 에반젤린을 해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게 나름대로 확신이 섰지만, 그냥 두기엔 불안요소가 너무 많았다.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식과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여신님. 제 목소리 듣고 있죠? 도와주세요.”
담담하게 기도하듯 요청한다.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진동을 일으키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문은 살아있는 것처럼 열리기 시작했고, 나를 내부로 들여보내 주었다.
“여신님.”
오랜만에 본 여신이지만 그녀는 전과 다를 바 없이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천천히 다가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정원의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던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린 채 발로 물장구를 치다 옆에 놓아둔 태블릿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태블릿이 스스로 떠오르며 문자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거야.
“스스로 찾아낼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녀는 대답 대신 발장구를 쳤다.
이에 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여신님. 볶음밥 드실래요?”
태초신이 먹을 것에 구애될 일은 없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프리아 여신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 뒤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깔끔한 셰프 복장으로 내 모습이 변했다.
“뭐. 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을 담아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나는 질문 대신 한쪽에 생겨난 부엌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웍에 기름을 두르고 준비된 재료들을 이용해 빠르게 볶음밥을 만들어냈다.
깔끔하게 접시에 담아낸 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그것을 내민다.
이렇다 할 정해진 예법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식사를 한다는 이 행동 자체만으로도 기품이 넘쳐흘렀다.
나는 말 없이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기다렸다.
이후 그녀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했고 마지막 숟가락질이 끝났을 때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알고 싶니?
“에반젤린에게 정말 괜찮은 상황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클립스의 존재 여부. 뭐, 블랙 슬라임의 정체 이런 게 아니었다.
내게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이것들로 인해 에반젤린에게 악영향이 미치는가에 대한 여부였다.
그런 내 질문에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작게 주억거린다.
-아이의 아빠가 다됐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물론 그녀의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이니까.
-심연이 사라지던 그때.
이클립스는 헤라클래스의 품안에서 함께 사라져가면서 오랜 시간의 구원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져가던 그녀에게 몇 가지 걱정거리가 짙게 남았다.
베르단데를 포함한 울드와 스쿨드.
입양한 세 딸은 이미 다 컸기에 알아서들 살아갈 수 있다.
고대룡은 독립성이 강하기에 이미 성년이 된 세 딸의 앞날을 크게 걱정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클립스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 크게 걱정이 되는 존재가 나아있었다.
바로 아직 태어나지조차 못한 그녀가 낳은 헤라클래스와의 사랑의 결실.
에반젤린이.
-죽음의 끝에서 그녀는 자신의 새끼를 향한 걱정을 온전히 놓지 못했고, 그것은 집념이 되었지.
죽어서까지 그녀의 모성애는 질기게 남았다.
게다가 심연의 차원이 소멸하면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고 점차 압축되어가면서 그 힘은 본래의 성질과 다른. 에반젤린을 향한 모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념 아래에 모여들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며 심연은 완전히 소멸해야 했으나 그녀의 힘이 남아 그것을 방해하면서 공허 속에 숨겨진 공간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클립스는 완전히 죽은 거군요.”
여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럼 현재 저희가 본 이클립스는…… 그녀가 에반젤린에게 남긴 모성과 그녀의 힘이라는 소리입니까? 말이 안 되는데요.”
이클립스처럼 이질적이고 막대한 힘을 소유한 존재라면 힘이 잔재로 남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두 가지가 이해할 수 없었다.
첫째는 힘의 수급.
이클립스가 죽기 전 퍼뜨린 힘은 비록 방대하지만 무한한 에너지가 아니다.
이클립스라는 주체가 사라진 잔념에 불과한 이상 힘을 보충할 수도 없으니 힘을 사용할 때마다 눈에 띄게 약해져야 했다.
하지만 조금 약해지긴 했어도 두 번 만난 이클립스의 힘은 그런 계통이 아니었다.
느리지만 어디선가 힘을 계속 보충하고 있었으니까. 여신의 설명대로라면 이클립스는 현재 충전이 불가능한 스마트폰을 빡세게 돌리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준 파괴된 심연의 공간도 아닌 외부까지 나와서 움직일 정도라는 건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그 압축된 공간 안에서야 그녀의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쳐도 바깥은 아니었으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따위, 고작 잔재에 불과한 그녀가 가능할 리가.
“또 한가지. 그녀의 행동입니다. 모성이라면 그녀가 에반젤린에게 보인 그런 행동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블랙 슬라임이 변한 붉은 보석을 그녀에게 쥐여주려 하고 있었어요.”
그 말에 여신은 말없이 내 뺨을 쓸어내렸다.
-블랙 슬라임은 심장이야.
심장은 피를 빨아들이고 다시 힘차게 내뱉는다.
그것이 블랙 슬라임이 막대한 에너지를 먹어치우는 원동력이었다.
-심장은 차원의 틈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될 거야.
그리고, 녀석이 우연히 심연 속에서 요동치던 이클립스의 잔재를 먹어치웠다.
그래.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이 이후였다.
너무 강대한 이클립스의 모성은 블랙 슬라임에게 스며 들어갔고.
블랙 슬라임을 변화시켰다.
-데이비. 블랙 슬라임이 왜 갑자기 붉은 보석이 되었는지 궁금하니?
“예.”
-그건 하나의 번데기라 할 수 있단다. 생명체를 넘어선 하나의 통념이 되기 위한 번데기.
번데기?
“진화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순환을 유지하던 블랙 슬라임은 에반젤린을 향한 이클립스의 모성에 영향을 받았고, 변했어.
마치 이클립스의 모성이 자신의 것인 양. 본래 이런 건 불가능했다. 이런 게 가능했다면 이미 예전에 블랙 슬라임은 다른 것으로 변했을 터였다.
-그야말로 기적이지. 내가 의도하지 않은. 한 아이의 어미가 태어나는 것조차 지켜봐 주지 못할 어미가 가진 집념.
이클립스의 막대한 힘과. 상상을 초월하는 그 모성 중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불가능했을 기적.
“…….”
이클립스의 모성에 영향을 받아 에반젤린에게 모성을 느끼게 된 블랙 슬라임은 에반젤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방식대로 변화를 시작했다.
“그게 붉은 보석이라는 거군요.”
다만 그 과정에서 블랙 슬라임은 그동안 에반젤린을 지켜줄 방법을 구현해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심연 속에서 똬리를 트고 있던 이클립스였다.
붉은 보석은 이클립스가 남긴 힘의 잔재를 충전하여 진화하는 동안 에반젤린을 계속해서 지켜온 것이다.
심연 속의 이클립스 잔재는 블랙 슬라임과 동일한 목적을 지녔다.
바로 붉은 보석 자체를 에반젤린에게서 떨어뜨리지 않는 것.
붉은 보석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있으면 혹여 에반젤린에게 위험이 가해져도 지켜줄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럼 초창기는 왜 조용했던 겁니까?”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이클립스가 나타난 건 최근이다.
그전에는 붉은 보석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비화나 내가 직접 그것을 회수하여 며칠이고 격리해둔 적도 있었다.
그동안은 왜 이클립스가 날뛰지 않았는가.
내 질문에 여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띠릭.
태블릿엔 글귀가 쓰인다.
-여신의 힘이 닿으면서 문이 열렸으니까.
블랙 슬라임의 진화 번데기인 붉은 보석은 그동안 에반젤린을 지켜줄 힘의 원천으로 자신이 먹은 에너지를 심연의 흔적 속 이클립스의 잔재에 쏟아 넣었다.
그렇게 힘을 회복한 이클립스의 잔재는 다시 자신의 힘을 보석에게 보내주는 것으로 에반젤린에게 혹시 닥칠 위기에 자신의 존재 이유인 힘을 보내 그녀를 지킨다.
다만 에너지의 흐름 말고 본래는 굳게 닫혀있었어야 할 그 틈을 비화가 추적이라는 명분으로 열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그 속에 있던 이클립스의 잔재가 세상 밖에 간섭이 가능하게 변했다.
이클립스의 잔재는 붉은 보석이 에반젤린의 품에서 떨어졌을 때 움직인다.
맹목적인 목적 하나만 가지고 있는 잔재이기 때문이었다.
후에 블랙 슬라임이 완전히 진화를 마치면 녀석은 이제 이클립스의 잔재를 모두 흡수하고 에반젤린만을 지키기 위한 존재로서 재탄생한다.
“에린이에게 나쁜 건 아니라는 소리네요.”
죽어서도 친딸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힘을 움직이는 어미라니.
이클립스의 모성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이걸 단순히 모성이 강하다는 말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내 질문에 여신은 미소를 지었다.
다만, 이유 모를 불안감도 느껴졌다.
내가 아는 이클립스는 이렇게 지고지순하며 한없이 사랑을 주는 어머니라기보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융통성은 쥐뿔도 없고 성질머리 더러운 고대룡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러네. 다 좋은 이야기이고 훈훈하며 따뜻한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