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아스트리드는 동맹을 맺기로 합니다
황태자의 안전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하는 방법은, 그냥 황실 소속임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냥 제국도 아니고 북방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정복한 아인트하펜의 국기를 내건 화려한 마차를, 감히 어느 누가 습격하겠는가.
게다가 로열 가드 바로 아랫급인 실버 가드에 대공마룡 소대까지 붙어서 호위를 하고 있는 이 마차야말로 사실상 황태자의 안전을 가장 확실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
게다가 거의 확실하게 황태자비가 될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까지 함께 태우고 수도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더욱더 철저한 방비가 필요하다.
“숙부님,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레오폴트. 아스트리드를 잘 부탁하마.”
“…예.”
시원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소 미지근한 대답을 남긴 채로 레오폴트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마차에 올랐다.
보통은 아스트리드를 먼저 태운 후 타겠지만, 지금의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의 관계를 익히 아는 이들이기에 속으로만 살짝 한숨을 쉴 뿐 딱히 별말은 하지 않는다.
아스트리드도 아무 생각 없었다.
오히려 레오폴트가 에스코트를 한다고 나섰어도 거절했을 판이다.
시종이 짐마차에 여행 가방을 차곡차곡 싣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스트리드가 휙 돌아섰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어쩔 수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아카데미로 가는 날 아침이 밝았다.
너를 데리러 가겠다고 적혀있지만, 실제 속뜻은 너를 죽이러 가겠다가 아닐까 싶은 편지가 도착하고 이틀 뒤, 황태자가 도착하고 그리고 그 다음 날인 오늘.
오늘 출발해야 일주일 뒤에 수도에 있는 미테리엔가의 수도 자택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고 좀 쉬었다가 또 그 다음 주에 아카데미 입교식.
제법 강행군이라,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럼, 아버님.”
소가주인 아스트리드를 배웅하기 위해 저택의 사람들이 전부 나와서 아스트리드의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 백곰 가죽을 덧대서 만든 외투를 걸친 볼프강이 몇 걸음 걸어 나왔다.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몸 건강하시고, 방학이 되면 돌아오겠습니다.”
“아스티.”
아스트리드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볼프강이 손을 내밀어 아스트리드의 양어깨를 움켜잡았다.
제법 힘주어 잡았음에도, 아스트리드는 전혀 아픈 기색이 없다.
볼프강의 굳게 다문 입술이 몇 차례 달싹이다가 멈췄다가, 다시 달싹이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ㅡ
“아스티.”
그냥, 가만히 딸의 이름을 부르는 볼프강.
이제 수도로 보내고 나면 몇 개월 뒤에나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입교식은 부모들의 참관이 금지되어 있고, 이제 이 자리에서 이별하면 다음의 재회는 최소 석 달은 더 지나야 할 터.
“힘들어도 꾹 참고 하거라.”
보통은 힘들면 돌아오라고 하지 않나?
아스트리드가 속으로 의문을 품는 사이, 볼프강이 가볍게 아스트리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친구가 생기면 괴롭히지 말아라. 그리고 때리지 말아라. 네가 때리면 문제가 커진다. 알겠지? 때리지는 말고 위협하는 정도로만 해라.”
“아버님, 보통은 괴롭힘 당할까 봐 걱정하지 않나요?”
그 말에 볼프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스트리드가 순간 자기가 못할 말을 했나 싶을 정도로.
“괴롭힘을 당한다고? 누가, 아스티 네가 말이냐? 네가 괴롭힘을 당한다고?”
‘도대체 얘는 이미지가 어땠던 걸까.’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는 아스트리드의 본래 인격을 원망하며 아스트리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거라.”
“아슈레이, 누나 다녀올게.”
“예! 누님, 내년엔 저도 가겠습니다!”
아슈레이가 볼프강의 뒤에 서 있다가 한걸음 나서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정말로 흑곰 같아서, 아스트리드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어서 타지. 출발해야 한다.”
내심 안타까웠던 가족과의 이별은 레오폴트의 한마디로 인해 분위기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분위기 깨는 데에는 정말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부녀간의 이별도 기다려주기 어려우신 모양이죠?”
급히 달려온 아슈레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른 아스트리드가 자리에 앉자, 시종이 마차의 문을 닫았다.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들고 있는 볼프강의 모습과 더 크게, 아예 팔 전체를 휘두르다시피 흔들어대는 아슈레이의 모습이 천천히 밀려나면서ㅡ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오해하지 마라.”
얼마 지나지 않은 참이었다.
뚱한 얼굴로 가만히 차창만 내다보고 있던 레오폴트가 갑작스레 꺼낸 말에, 마찬가지로 레오폴트와 반대 방향의 차창을 내다보고 있던 아스트리드가 레오폴트를 쳐다보았다.
“무슨 오해 말씀이신가요, 전하.”
“내가 좋아서 네게 편지까지 쓰고 데리러 온 게 아니다.”
“알고 있어요. 폐하께서 시키셔서 마지못해서 하셨겠죠. 응석받이 황태자 전하.”
“너는…!”
레오폴트의 금빛 눈썹이 있는 힘껏 찡그려졌다가, 나직한 한숨 소리와 함께 원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미간 주름이, 레오폴트의 심기가 전혀 편치 않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스트리드.”
“네.”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전하.”
덩달아 아스트리드의 심기까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일주일이다. 이 일주일 동안 이렇게 불편한 자리를 이어가야 한다는 게 아스트리드로서도 새삼 끔찍한 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너는, 네가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부와 명예와 가문과 무력. 하지만ㅡ”
“틀렸어요.”
감히 황태자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고 끼어든단 말인가.
레오폴트는 울컥 치받아 오르는 짜증을 애써 눌러 참았다. 화보다도, 뭐가 틀렸다는 것인지가 더 궁금했다.
“뭐가 틀렸단 말이냐.”
“미모도 포함하셔야죠.”
어처구니가 없다.
너무나 담담하게 사실을 말하는 듯 평온한 얼굴의 아스트리드.
“너는…! 아, 아니. 됐다, 됐어. 그래, 정정하지. 부, 명예, 가문, 무력, 미모까지. 다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서요.”
마차 안의 공기는 이미 싸늘했다.
금발 머리에, 가만히 있어도 웃는 상이라서 사람 좋아 보이는 레오폴트와는 달리 아스트리드는 가만히 있으면 서릿발이 내릴 것처럼 차갑고 냉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네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하나가 있다.”
“그게 뭔가요.”
레오폴트는 주먹을 쥔 채 엄지손가락만 펴고, 자기 가슴팍을 가리켰다.
“나다. 나만은 절대로 가질 수 없을 거다. 알겠느냐.”
‘줘도 안 가집니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어쨌든 황태자다. 어지간한 무례는 다 용납하고 넘어간다고는 하더라도, 저 말만큼은 일선을 넘는 말이리라.
아스트리드는 그 말을 꾹꾹 씹어 삼키며 심호흡을 했다.
“전하, 그 말씀은 저도 그대로 돌려드리죠. 저보다도 더, 아니군요. 일단 무력은 저보다는 확실히 아래이실 테니까. 그러면 부와 명예와 가문과 외모를 모두 가지신 황태자 전하. 전하께서도 절대 가지실 수 없는 것.”
그래, 너도 마찬가지라고.
이 노랑이놈아.
“바로 저,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의 마음입니다. 아시겠나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는…! 아무튼 피차 잘됐군. 4년, 4년이다. 4년 동안 반드시 너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서 파혼을 하고 말 테다. 이렇게 아카데미까지 따라올 정도면 너의 집착도 어지간하다 싶지만, 절대로 나는 너와 부부의 연을 맺을 생각이 없다. 알겠나!”
아스트리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당황스러움, 당혹스러움, 혼란스러움이 뒤범벅된 아스트리드의 눈빛에, 레오폴트는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일들보다도 큰 통쾌함을 느꼈다.
한참을 달싹이던 아스트리드의 입술이 움직였다.
“…지금 하면 안 되나요? 그 파혼.”
뜨거운 열정이 일렁이는 그 눈동자.
지금 아스트리드의 머릿속에는 레오폴트와 파혼하면 아슈레이랑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이미 흔적조차 없이 날아가버리고, 오로지 레오폴트와 파혼하고 싶다는 욕망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
“저는 전하와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아시겠나요.”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 오히려 잘됐군. 이런 곳에서 의기투합하게 되다니, 실로 의외다.”
마차 안을 가득 채웠던 싸늘한 공기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아스트리드와 레오폴트는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결혼하기 싫다는 얘기로는 파혼이 안 되니까요.”
“그렇지… 적어도, 서로보다 더 적당한 반려자 감을 찾아내는 게 가장 확실하지 않겠나.”
“그렇겠지요.”
아버지들로부터 맺어진 굳건한 약속.
자식들의 의지는 일단 무시한 채 아버지들끼리 맺어버린 그 약속.
그 약속을 어떻게든 파기하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레오폴트의 경우라면, 장차 황후로서 황제의 반려로서 제국민의 어머니로서 아스트리드보다 더욱 적절한 영애를 찾아낸다.
아스트리드의 경우라면 황태자 레오폴드보다도 더, 미테리엔의 발전과 나아가 아인트하펜의 무궁한 영광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영식을 찾아낸다.
이러면 파혼과 함께 각자 다른 배우자를 맞이할 수 있다ㅡ 라는 것이, 그 두 사람의 결론이었다.
일단 찾아낼 수 있는지는 둘째 문제다.
제국의 온갖 영애며 영식들이 모여드는 곳이 아카데미이니까 있겠지, 설마 하나가 없겠느냐는 것이 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발견 확률을 높이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반려자를 찾는 것에 적극 협조한다ㅡ 라는 약속.
이렇게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양 가 아버지들 모르게 비밀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너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마라, 아스트리드.”
“전하, 제가 드릴 말씀이군요. 가급적 전공도 반… 아니, 다를 수 밖에 없겠군요. 전하가 조금이라도 사내다워지신다면 또 모를까.”
“세검을 무시하는 것이냐!”
“피하기만 하다가 한 방으로 이기겠다는 게 사내답지 못한 게 아니라면, 사내답지 못하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마, 말 다했나 지금!”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스티가 맘먹고 때리면 큰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