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아스트리드는 사람을 다시 보려다가 말았습니다
미테리엔 영지를 떠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첫 식사 시간이었다.
아무리 황태자의 행차라고 하더라도 황실 조리장이 따라다닐 수는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미리 준비한 식량으로 식사를 해야 했는데, 그런데도 일반인들이 여행을 하면서 먹는 식사와는 격이 다르기는 했다.
‘격이 다르기는 하지…’
말린 빵 같은 게 아니라, 이동식 오븐에서 구워낸 빵에다가 영양의 균형을 생각한 샐러드와 함께 차려진 스테이크.
거기에 넘어지지 말라고 발이 넓은 잔에 반 넘게 채워진 포도주까지.
이만하면 이동식이 아니라 고급까진 아니어도 제법 괜찮은 식당에서 나올 법한 식사다.
게다가 아스트리드 자체가 입맛이 까다롭지도 않고 그냥 주면 주는 대로 먹는 성격.
하지만 마주 앉은 사람이 레오폴트여서야, 아무리 괜찮은 식사라고 하더라도 그 식사가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가서 먹고 싶네.’
힐끔, 아스트리드의 시선이 차창 밖을 향했다.
화창한 날씨 속에서 바깥은 호위대가 몇 개의 조로 나누어 순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리가 좀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아도 카키색의 저 조그만 철로 된 깡통과도 비슷한…
‘…저거 반합 아닌가?’
와, 저거 진짜 오랜만에 보네.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멍하니 회상에 빠져든 아스트리드에게, 그녀의 기분을 한순간에 구겨버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는 마음 편하게 하고 싶다만.”
1인용으로 제작된 조그만 탁자 위에 식판을 올려놓고, 나름 고상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레오폴트가 샐러드를 비비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의외로군요. 제 소망과 일치할 줄은 몰랐어요. 잘됐네요. 그럼 저는 이만.”
말은 빠르고, 행동은 그보다도 더 빠르게.
아스트리드는 그 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오폴트와 마찬가지로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던 식판을 들고서 마차 문을 신발 앞코로 톡톡 걷어차면, 마차 문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아스트리드, 어딜 가는 거냐!”
당황한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들려와, 마차 계단에 한 걸음 내려섰던 아스트리드가 앞의 시종에게 식판을 건네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께서는 식사를 마음 편히 하시지요. 제가 피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다.
아스트리드로서도 불편한 자리고, 레오폴트와 이 마차 안에서 마주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게 그다지 반가운 상황은 아닌데 마침 레오폴트도 그렇게 말해주니 더없이 반가운 상황이기도 했다.
“저, 저… 에잇, 마음대로 해라!”
가시가 단단히 돋친 듯한 레오폴트의 목소리를 귓가로 흘려버리며 아스트리드는 시종에게서 식판을 받아들고 걸음을 옮겼다.
호위대원들이 순환 식사를 하고 있는 조그만 공터.
그 공터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호위대원들에게 다가오는 아스트리드의 발소리가 자박자박 들려오자, 호위대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다가 이내 식판을 내려놓고 후다닥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 공녀님!”
“편하게 식사들 하세요.”
편하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바로 옆에 참모총장 사모님 겸 대통령 며느리가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아스트리드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스트리드 역시도 양보할 마음은 없었다.
일단 그녀가 배를 채우고 싶다.
소식한다고 해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공녀님, 식사는 편하게 하시는 게 어떠실까 합니다.”
독수리 문양이 하나 박혀있는 견장.
그 견장을 보면… 소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이었다.
아스트리드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는 짧게 자른 머리에 제법 날카로운 인상이기도 해서,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아스트리드의 시선에도 딱히 주눅이 드는 모습이 아니었다.
“저는 여기가 편합니다.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시고 편하게 식사들 하세요.”
그게 될 리 없겠지만, 아무튼 아스트리드는 정말로 지금이 편했다.
마차 안에서 레오폴트와 마주 앉아 식사라니, 몸이 편해도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한데… 다들 식사가.”
아무리 야전 식사라고는 해도 그래도 호위대인데 샐러드 위주다.
고기라고는 겨우 아스트리드의 손바닥보다도 작아 보이는 반면, 아스트리드의 식판에 올려져 있는 고기는 그 두 배는 넘는 면적에 두께도 세 배는 되어 보였다.
“소대장인가요?”
“예, 공녀님. 비코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비코 소대장. 식기를 가져오세요.”
“예?”
아스트리드의 갑작스러운 말에 비코라고 본인의 이름을 밝힌 소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소대원들의 눈치에 못 이겨, 이제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버린 아스트리드를 마차로 보내는 게 목적이었건만 도리어 식기를 가져오라는 명에 비코는 쭈뼛거리며 자리로 돌아가 식기를 가져왔다.
“싸워야 하는 군인들이 식사를 그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쯧쯧.”
혀를 차면서도, 아스트리드는 자기 몫의 고기에서 4/5를 잘라냈다.
그리고 그걸 포크로 찍고, 혹여나 떨어질까 봐 나이프로 아래를 받쳐ㅡ
“고, 공녀님?!”
“어허. 윗사람이 주면 그냥 잘 먹겠습니다 하세요.”
그대로 비코의 식기로 옮겨주었다.
같은 고기라도 하더라도 황태자와 황태자비(진) 이 먹는 음식과 일반 사병이 먹는 음식이 같을 리가 없다.
고기의 질부터 조리 방법, 그 위에 올라가는 소스까지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아스트리드 몫의 고기가 그 육즙을 주르륵 흘리면서 비코의 식기 위로 올려졌다.
“저는 어차피 조금만 먹는 데다 남길 게 뻔하니, 여러분들이 드셔주는 게 더 낫습니다. 자, 소대장님, 혼자 다 드시진 마시고. 나눠 드시도록 하세요.”
*
식사를 끝내고 마차로 돌아온 아스트리드를 맞이한 것은 레오폴트의 뚱한 눈초리였다.
“아스트리드.”
“네.”
마차 문이 스르륵 닫히고, 드레스 자락을 추스르며 자리에 앉는 아스트리드를 레오폴트의 시선이 따라왔다.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듣고 있어요. 말씀을 하세요. 제 이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법이군.”
비꼬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말투는 아니었다.
레오폴트는 사람을 비꼬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스트리드처럼 직설적인 성격이라, 오히려 지금의 제법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의 의미일 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아스트리드에게는 신기하게 들렸다.
일부러 레오폴트가 아닌 차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던 아스트리드가 레오폴트를 돌아보았다.
“뭐가 말씀이신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실없기는.’
그럼 그렇지.
그냥 해본 말이겠지.
아스트리드가 그렇게 자리에 앉아 치맛자락을 정돈할 때, 레오폴트가 마차 안에 드리워진 황금줄을 당겨 호출벨을 울렸다.
“부르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마차 창문이 열리며 시종이 얼굴을 드러냈다.
“오늘 저녁부터, 나와 아스트리드를 위한 식사는 따로 준비하지 말게.”
“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 시종의 눈이 커다랗게 떠짐과 동시에, 아스트리드 또한 의외여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는 편안히 마차에 타고 보호를 받으면서 갈 뿐이니, 그렇게 호화로운 식사는 필요 없지. 그 식사를 밖에서 수고하는 장병들에게 돌리는 것이 옳을 것일세. 병참 조리장에게 말해서 황족 식사는 따로 준비하지 말고, 골고루 조금씩이나마 맛볼 수 있도록 하시게.”
“하, 하오나 전하. 황실의 법도가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시종의 반응이 당연했다.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이 국가에서 황족의 식사를 일부러 낮추고 그 재료를 기사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은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기도 했다.
“법도고 나발이고, 아버님이라도 그리하셨을 것이야. 내 명대로 하시게. 아스트리드, 반대할 생각인가?”
레오폴트의 푸른 눈동자가 아스트리드를 향했다.
천천히, 천천히 아스트리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식사 자리도 따로 준비하지 말게. 나와 아스트리드 모두 호위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도록 할 테니.”
“저, 전하. 하오나 그리하시면 오히려 호위에 부담이…”
“마차에 타고 있다고 해서 습격이 없다고 하겠는가? 오히려 호위대와 섞여 있는 쪽이 호위를 받기에 더욱 안전할 듯한데. 게다가.”
레오폴트가 다시금 아스트리드를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황실의 깃발을 단 마차를 습격할 만큼 머리가 나쁜 놈들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겠나?”
그도 맞는 말이다.
“레오폴트 전하.”
“음?”
“레오폴트 폰 아인트하펜 전하.”
“…다음부터는 내가 호칭을 고치도록 하지. 기분이 더러우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라.”
‘지가 시작해놓고는. 웃긴 놈이네.’
입을 비죽일 뻔하다가 겨우 참아내고는, 아스트리드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잘하셨습니다. 제 행동을 고깝게 보실 수도 있었을 텐데, 과연 일국의 황태자 다우셨습니다.”
진심이었다.
아스트리드의 행동은 지금 시대의 귀족들이 보기에는 영 마뜩잖은 행동이고 오히려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그런데도 레오폴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스트리드의 행동이 올바르다고 판단했고, 그리고 그에 따르는 지시까지도 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아스트리드로서는 레오폴트를 조금 다시 보게ㅡ
“역시 볼프강 숙부님답다. 너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숙부님의 가르침이었겠지. 역시 대단하신 분이다. 존경스러운 분이야. 음음.”
되지는 않았다.
“그래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속이 넓으시군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너도.”
아스트리드가 어쩐 일로 옳은 말을 한다 싶어, 레오폴트의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하던 그 즈음이었다.
“전하의 애검보다는 면적이 넓으신 듯합니다.”
“뭐라?!”
레오폴트의 얼굴은 구겨졌으나, 아스트리드는 못본 척 차창만 내다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곧 아카데미 가요
진짜 곧 가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