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38화 (38/62)

38화. 바보와 바보 (4)

“아슈레이.”

“예, 누님.”

수도답게, 그리고 그 수도에서도 중심 번화가답게 식당조차도 허튼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은제 식기부터 시작해서 포크, 나이프, 스푼까지 반짝반짝 광이 나고, 전채부터 메인디쉬에 에피타이저까지 모든 면에서 격식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서, 아스트리드가 보기에는 파인 다이닝 그 이상이었다.

“야채를 좀 먹으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지?”

“에이, 누님. 인간은 육식동물인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슈레이의 포크는 스테이크 위에 걸쳐진 샐러드 조각을 포크로 쓱쓱 밀어내고서 홀랑 입안에 밀어 넣었다.

예의며 격식이 허용하는 한도를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식사.

의붓아들이기는 해도 대공가의 일족인 만큼, 어릴 때부터 미테리엔 가의 양아들로 입적하던 그날부터 식사를 비롯해 온갖 예절 교육을 다 받은 아슈레이지만, 성장하면서 집보다는 싸움터를 전전하던 아슈레이는 아무래도 예절이 완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장에는 아스트리드도 있었다. 오히려 아슈레이보다 항상 훨씬 빠르게 쳐들어가 제일 늦게 돌아 나오던 전투광, 아스트리드.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아스트리드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자, 내게 주렴.”

아슈레이의 접시에서 샐러드를 모두 집어와 자기 접시에 덜어놓고, 육즙이 흘러내리지 않게 썰지 않고 두었던 스테이크를 통째로 집어 아슈레이의 접시에 올려두었다.

“누님은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고기를 그리 안 드시고, 아니지. 식사 자체를 그거밖에 안 하시는데 어떻게 유지를 하십니까?”

“그러게.”

그게 나도 참 신기한데.

【고기를 먹으라고 했잖아요!】

‘무슨 소리야. 피부 관리에는 채식이라니까?’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시는 거죠? 사람이 산양새끼도 아니고 풀만 먹어서 무슨 피부 관리가 된다는 건가요?】

‘…귀족 아가씨, 말 좀 이쁘게 합시다, 네?’

“누님, 안 드시고 뭐 하십니까?”

아슈레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멀뚱히 자길 바라보고 있는 아슈레이가 정면으로 보인다.

이게 문제다. 머릿속에서 아스트리드가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리로 혼이 쏙 빠져버린다.

‘좀 조용히 해. 신경 쓰여서 뭘 하질 못하겠다.’

【제 핑계 대지 마세요.】

“누님은 부쩍 말수가 줄어든 거 같습니다, 어째.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닙니까?”

아슈레이가 빵을 반으로 갈라 한쪽을 수프에 푹 찍었다.

노란 옥수수 알갱이와 잘게 다진 당근이며 피망,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고소한 버터의 향이 잘 구워져 육질이 쫄깃해 보이는 빵에 듬뿍 묻어났다. 그 빵을 한입 턱 베어 물며 아슈레이의 시선이 아스트리드를 향했다.

“별일 없어. 나는 항상 이랬잖니.”

“하기야,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도 레오폴트 전하가, 아니지. 매형인가?”

히죽히죽 웃는 아슈레이.

【역시 내 동생!】

“그래도 매형한테는 그렇게 싸늘하게 대하지는 않으실 거 아닙니까. 뭐, 매형은 그런 모습도 좋아하시겠지만요.”

“정말 별일 없어. 예뻐하기야 하겠지.”

진짜 아스트리드를 예뻐하건 말건 내가 알 게 뭐야. 아스트리드는 슬쩍 심통이 났다. 그러면서도 접시 위로 포크를 소리 나게 득득 긁으며 샐러드를 긁어모아, 그대로 소스에 찍어서 한입 먹었다.

“어, 그거 감귤 소스 아닙니까? 누님 싫어하시던 소스잖아요?”

“…입맛이 변했을 뿐이야.”

이 새콤달콤한 감귤 소스를 싫어하다니, 하여간 머리 나쁜 여자들은 이해를 못 하겠다고 아스트리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얘기 좀 하자.’

식사를 하고 돌아와서 아슈레이와 가볍게 환담을 했다.

그리고는 2층의 방으로 돌아와, 이제 내일 황제와의 면담을 위해서 수면을 취해야 할 시간.

아스트리드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진짜 아스트리드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저 졸린 데, 내일 얘기하죠.】

‘내가 안자면 너도 못 자잖아. 몸이 하난데 어떻게 따로 자?’

【따로 잘 수 있어요. 상관없는데 그런 건.】

그건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몸은 안자는데 의식은 잘 수 있다? 말이 되나. 하지만 몸속에 오래 머물렀던 진짜 아스트리드가 그렇다고 하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레오폴트에 관한 얘기야.’

【좋아요.】

애정이 무겁네.

진짜 어마어마하게 무겁네.

‘일단, 내일 황제 폐하와의 면담에서 나는 황립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할 거야.’

【거기, 이용 자격이 대단히 깐깐할 텐데요.】

황립 도서관.

당연히 제국 최대의 장서량을 자랑하는 도서관이다.

하지만 그에 걸맞게 온갖 자료들이 넘쳐나고, 개중에는 일반 국민들에게 공개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자료들도 있기 때문에 황립 도서관만큼은 미리 허가를 얻은 이들만 이용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내일 면담할 때 자격을 얻겠다고 하는 거야.’

【왜죠?】

‘왜라니… 약속 벌써 잊은 거야?’

【아아, 당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거에 대한 자료를 찾아야겠다. 그 얘기죠? 그리고 그 단서가 황립 도서관에 있을지 모르니 이용 허가를 받겠다는 거고요.】

‘맞아. 이럴 때는 좀 영리하네.’

【제가 미테리엔의 영재예요. 무슨 실례되는 말씀을.】

미테리엔은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의문이 남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튼, 그때는 네가 나와줘야 할 거 같아. 아무래도 어른들은 노련한 데가 있으니 금방 눈치챌 수도 있어.’

【음…】

사실 뭐 들켜도 별문제 없지 않을까. 자기가 남자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서, 밝혔을 때 어떤 식의 후폭풍이 몰아칠지 모르니 일단 지금은 조심해야 했다.

【그래요. 확실히 지금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니, 밝혀지거나 들키면 좋은 꼴은 못 보겠죠.】

‘이해가 빨라 다행이다.’

【실례잖아요.】

*

보통 황제를 독대하는 것은 보통 인물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접견을 신청해서 허락받는다고 하더라도 주변에 대신들이 죽 늘어서고 경호원들까지도 동원되어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접견이 이루어지곤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다소 예외다.

무슨 일이 있을래야 있을 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 막으려면 힘들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지만, 황제가 그토록 총애하는 며느릿감이라는 이유로 지금은 최소한의 경호 인력만이 남은 상황. 아스트리드가 무슨 일을 벌이면 최소한 시간이라도 벌 수 있을 정도의 상황에서 황제와 독대하게 되었다.

“아스트리드, 그냥 연락을 했으면 됐을 텐데 접견 신청을 하다니, 별일이로구나.”

크로이츠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스트리드를 맞이했다.

“아버님, 이라고 하면 아직 좀 이를까요?”

“내 듣기에는 좋다만, 아직 식을 올리지 않은 상태이니 좀 이르긴 하겠구나.’

【황제 폐하는 좀 상식이 있으시네.】

‘시끄러워요.’

“그래, 식기 전에 차부터 들자.”

접견실에 이미 마련되어 있던 다기.

시종이 소리 없이 다가와 크로이츠와 아스트리드의 잔에 차를 조르륵 부었다.

【윽, 그 맛없던 차…】

상견례 자리에서 마셨던 바로 그 차.

더럽게 맛없던 그 차.

“아카데미는 무사히 수료했다고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었고. 그 마물, 헬베이가가 어째서 거기에 나타났는지는 지금도 교관들이 조사하고 있다 하니, 결과가 나오면 네게도 알려주마. 많이 놀랐을 텐데, 거기서도 늠름히 상대해 줄 줄은 몰랐다.”

“아인트하펜을 지키는 얼어붙은 방패이자, 진격의 창이 될 미테리엔의 영애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아스트리드는 평소의 그 지성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차갑고도 냉정한 얼굴로 크로이츠에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처음 보는 모습에 가짜 아스트리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래, 용건을 말해보거라. 필요한 게 있느냐?”

“아닙니다. 오늘은, 황립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 허가를 얻고자.”

“황립 도서관이라? 네가?”

크로이츠는 적잖이 놀랐다.

황립 도서관. 책을 볼 수 있는 곳. 아스트리드가 그 도서관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니, 크로이츠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드디어 이 아이가, 지성의 탐구에 관심을 가진 것이로구나. 훌륭하구나… 볼프강, 자네가 이 자리에 있었어야 하는 것인데.’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 이용하거라. 서기장, 미테리엔의 영애 아스트리드에게 황립 도서관의 이용 허가를 내주도록 하게. 기한은 원하는 만큼.”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서기장이 무언가 받아적기 시작하고, 아스트리드는 그런 크로이츠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하해와도 같은 은혜, 감사드립니다. 폐하.”

“무얼 이 정도로. 더 필요한 건 없느냐?”

“아닙니다. 오늘은 오직 황립 도서관의 이용 허가를 얻고자 함이니.”

“허면, 하나 물어봐도 되겠느냐?”

“무엇이든지 하문하시지요.”

크로이츠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확인은 해 볼 필요가 있었다.

“황립 도서관을 이용하려는 게, 이유가 있느냐?”

“마법을 좀, 공부하고 싶습니다.”

“마법이라? 너는 중장 기사가 아니더냐?”

중장기사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공격 마법을 구사하는 건 마법사가 하지만, 마도기사는 왼손의 매직 브레이슬릿을 이용한 다양한 서브 마법들을 구사한다.

어릴 때부터 마나의 자질을 보여야 가능한 마법사. 당연히 아스트리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 마도기사를 지망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세검 같은 이쑤시개 가지고 무슨 싸움을 하냐며 진정한 싸움의 꽃은 중장기사라는 철학을 올곧게 유지했던 것이 바로 아스트리드다.

그런 그녀가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한다니, 적잖이 의외였다.

“나아가 레오폴트 전하의 반려로서 더욱더 이 아인트하펜의 발전을 위한다면, 저 역시 마도기사의 편린이나마 배워두고자 합니다.”

“오오.”

볼프강, 자네 보고 있는가.

자네의 딸이 이토록 훌륭하게 자랐다네.

먼 곳에서나마 반드시 지켜보시게나…

크로이츠는 크게 감동하며, 반드시 어떻게든 기필코 아스트리드를 며느리로 맞이해야겠다고 거듭해서 다짐했다.

*

“네가 여기 어쩐 일이지?”

여기는 아카데미가 아니니, 생도 신분이 아니다.

그래서, 경어도 생략.

레오폴트는 접견실 복도에서 딱 마주친 아스트리드를 보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전하. 어쩐 일이시온지요?”

“여기는 황궁이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 너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폐하를 뵙고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아스트리드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무표정의 냉담함이 그녀의 얼굴을 가득 뒤덮었다.

옛날, 10년도 더 전의 일.

아직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가 어색함이 남아있던 그때.

그 어색함을 치우고자 레오폴트가 억지로 짜내다시피 했던 그 말.

- 너는 무표정할 때, 침착해 보여서 예쁜 것 같아. 잘 어울려.

그리고 그 뒤로 아스트리드는 항상 무표정한 상태였다.

정작 레오폴트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지만.

“…하아.”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딱히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여기서 마주친 이상 주변의 이목도 있고 하니 이대로 돌려보내는 것도 모양이 이상했다.

“어찌, 차라도 한잔하겠나?”

“그리하신다면야,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좋게 좋게, 그러죠- 정도로 대답해도 될 일이건만.

레오폴트는 여전한 그녀의 말투에 살짝 치미는 짜증을 삭히며 그녀의 앞을 몇 발 앞서서 걸었다.

“그래서, 어쩐 일로 찾아왔나?”

“그저, 황립-“

【도서관을 이용하고자 하는 허락… 어?!】

“…도, 도서관을 이용하… 하려고. 허가를 받으… 려고 왔지요.”

【어, 어째서 지금 바뀐 거죠?! 빨리, 빨리 지금 당장 바꿔요! 빨리!】

“황립 도서관이라. 거기는 왜?”

【빨리 바꿔달라고요!】

“지금은 못 바꾸… 가 아니라, 그, 좀.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도서관? 거기는 무슨 일로?”

“그, 그냥 머릿속에 교양을 좀.”

【몸에서 힘 빼!】

“빼고자 하… 아니, 좀 더 쌓고자.”

어딜 봐도 이상한 아스트리드의 말에, 레오폴트는 살짝 의아한 느낌이었다.

날이 선, 뾰족한 말투로 대답하던 그녀의 어조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온화한 느낌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횡설수설.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스트리드,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아무래도, 며칠 전부터 너는 좀 이상하군.”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몸은 건강해요.”

【자상하셔라…】

미친년 보는 것 같은 눈인데.

레오폴트는 명백히 그런 시선인데.

어딜 봐서 자상하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얘는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스트리드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힘을내자_457 독자님

생일을 축하 드립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세상에서 제일 빠른 생일 선물을 드리려고 했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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