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60화 (60/62)

60화. 술 취하면 귀여운 편 (2)

“숙취는 괜찮습니까?”

【아아, 이 얼마나 자상하신…!】

“으, 아. 아니. 괜, 괜찮아요!”

아스트리드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웅성거리면서 일과표라던가 커리큘럼을 들여다보고 있는 생도들 탓에 그 뒷걸음질마저 여의치 않아, 이내 아스트리드는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었다.

아스트리드가 레오폴트를 피한다는 느낌은 너무나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아스트리드다워서, 레오폴트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움 그 자체로만 보였던 아스트리드의 새로운 모습이 이렇게 드러났다.

레오폴트는 뭔가 새로운 느낌이었다. 마냥 멀게만 느껴졌던, 그저 가까이 있으면 그 비인간적인 모습이 꺼려지기만 했던 그 아스트리드가 오늘따라 좀 다르게 보였다.

“어젯밤에는 갑자기 독한 술을 그렇게 마시니까 그렇지요. 어디, 눈은 안 부었나 봅시다.”

레오폴트의 손이 아스트리드를 향해 다가왔다. 아스트리드는 자기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레오폴트의 손을 피해 또다시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뒤에 있던 생도들이 와르르 밀려나며 무너지거나 말거나 아스트리드는 주춤주춤 물러섰고, 레오폴트는 그런 아스트리드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섰다.

“왜 그렇게 절 피하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해코지라도 하겠습니까?”

【그냥 얌전히 있어요! 전하께서 친히 봐주시겠다는데 왜 자꾸 피하는 거예요!】

‘그, 그러게!?’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성을 넘어 본능적인 레벨에서 경고등이 연신 번쩍이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피하라고, 이대로 있으면 분명히 ‘넘어간다’라는 본능적인 경고. 그 경고에 아스트리드는 뒤로 밀려나는 생도들은 추호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가만히 계시지요, 분대장님. 아니, 이제 1학년이 되면 분대 체제도 아니니. 아스트리드 생도, 가만히 있지.”

【가만히 좀 있어요! 왜 이리 진짜?!】

진짜 아스트리드가 머릿속에서 뭐라고 해대거나 말거나 아스트리드는 마침내 구원을 찾아냈다.

“여, 아스트리드.”

바이올렛이었다.

“저, 저는 선약이 있어서, 그럼 이만!”

지금 이 순간의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아스트리드는 추호도 그 동아줄을 놓칠 수 없었다. 이유 따위 모른다. 이유 따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대로 레오폴트와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게 꿈이 아닐 거라서 그럴 것이다. 사실 해장을 하면서 조금씩 기억이 살아나고 있었다. 진짜 아스트리드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아스트리드는 조금씩 기억이 나고 있었다.

- 왜… 왜 나한테는… 그렇게, 응? 그렇게… 다정하게 안해주는데에에에에… 흑.

- 왜 나한테만 차갑게 대하는데에에에에… 나아쁜놈아아아아…

- 됐어. 필요 없어. 나도 자존심이라는 거 있거든!? 너 아니면 남자가 없냐!? 어!?

그러니 그런 거다. 그거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달렸다.

힘껏 달렸다.

저기 보이는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의 동아줄을 거머쥐기 위해, 아스트리드는 달렸다.

“뭐야, 나랑 점심 먹는 걸 그렇게 기다린 거야?”

능글맞게 웃는 바이올렛은 아스트리드가 왜 이렇게 사색이 되어서 달려왔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그대로 받아줄 의향은 없었다.

바이올렛 드 오트리아.

그녀는 바닷사람이었고, 뱃사람이며, 아인트하펜의 해전단 제독의 차녀이기도 한 그녀는 장난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시, 시끄러워요. 빨리 가기나 하죠.”

레오폴트가 따라오는 게 아닌가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아스트리드는 바이올렛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웃으면서 장난을 칠 요량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스트리드의 완력은 바이올렛을 훨씬 상회해서, 그녀가 팔을 잡고 당기자 바이올렛은 속절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전하는 안 따라오는 거 같으니까 이거 좀 놓지 그래.”

강당 바깥까지 질질 끌려가다시피 나온 바이올렛은 겨우 아스트리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한숨 돌렸다. 무슨 힘이 이렇게나 센지, 바이올렛도 어려서부터 거친 수병들 사이에 섞여 자라며 완력은 남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아스트리드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였다.

“…밥이나 먹으러 가죠.”

“알았어. 가자. 가면 되잖아. 또 당기지 말고.”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아스트리드가 또 팔을 잡아당길 기세여서, 바이올렛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식당이라고 해도 여기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니까. 천천히 걸어가도 늦지는 않을 터였다.

“뭔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예를 들면?”

“어…”

이러니까 또 말문이 막혔다.

【그냥 무슨 꿍꿍이냐고 물어보면 되잖아요. 당신 바보예요?】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이 술주정뱅이 같은 게!]

【어머, 끼야으응 이러던 사람이 누군데.】

할 말이 없다.

“아스트리드?”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아스트리드에게, 바이올렛은 걸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에 건강해 보이는 그녀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짜 이상한 소리 하려는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진짜라니까?”

“이상한 짓하려는 사람이 지금부터 이상한 짓을 하겠습니다~ 이러던가요.”

“그건 그러네.”

숨기지도 않고 그건 그렇다고 긍정하는 바이올렛. 이게 정직한 건지 숨김이 없는 건지 쾌활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점심 메뉴는 고기를 왕창 넣은 볶음국수였다. 해물도 간간이 들어가 있었지만 주로 들어간 건 가늘게 썬 돼지고기였는데, 돼지고기를 얼마나 넣었는지 고기 반 국수 반. 거기에 보너스로 해물들도 잔뜩 들어있었다.

“오, 이거 남부식 볶음국수잖아. 이런 것도 나오다니. 주방장이 견문이 아주 넓은가본데.”

식판을 내려놓으며 바이올렛이 마치 아스트리드가 들으라는 것처럼 티 나게 감탄을 했다. 아스트리드도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제법 놀랐는데, 여기서 먹어본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을 것 같은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포크로 면발을 둘둘 감아서 후르륵. 중간중간 섞인 신선한 조갯살이며 오징어를 비롯한 해산물들의 향긋한 바다향과 잘 다져진 고기와 함께 소스로 볶아낸 국수의 면발이 탱글탱글한 게 실로 굉장한 맛이었다.

“순무 간 거랑 호밀빵 쪼가리만 줄 때는 무슨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나 싶었는데 말이지.”

“그러게 말이에요. 이렇게 잘하면서 무슨.”

동감이었다. 입교 후 일주일 동안 나왔던 식사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판이었다. 그만큼 끔찍한 식단이었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중 최악의 식사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만 좀 먹고요.”

연신 국수 가락을 후르륵 후르륵 먹기 바쁜 바이올렛에게 아스트리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재촉을 했다.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지 않은가. 해야 할 말을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아, 그렇지 참. 그거 얘기해준다 그랬지.”

“본론을 잊어버리시면 어떡하나요.”

“오랜만에 고향 음식을 먹으니까 좋아서 그랬지. 아무튼 내가 무슨 얘기 하려고 그랬더라.”

“…반으로 접히고 싶으신가요?”

“농담이야. 그런 눈으로 노려보진 말아줘. 진짜 그럴 거 같아서 무섭거든.”

그제서야 바이올렛이 포크를 식판 위에 내려놓았다. 가져온 볶음국수의 절반이 사라진 뒤였다.

“그러니까, 나는 황태자비 따위에 별로 관심이 없어.”

“그 말을 믿으라고요?”

“야, 내가 레오폴트 전하 같은 흰둥이를 좋아할 거 같아?”

【반으로 접죠.】

‘가만 좀 있어봐.’

“나는 덩치 크고 곰 같은, 근육이 많은 남자가 취향이야. 레오폴트 전하처럼 허여멀건한 멀대랑은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 결혼하고 싶지도 않다고.”

“당신, 레오폴트 전하에게 무슨 망발을.”

듣고 있자니 영 너무하다 싶었다. 아스트리드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욕은 내가 해야지, 남이 레오폴트를 욕하니까 기분이 좀 그랬다.

“나는 군인이 되고 싶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전단의 군인이 되고 싶단 말이지. 그런데 아버지는… 음,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아무튼… 에이. 그냥 솔직하게 까놓고 말할게.”

바이올렛이 머리를 박박 긁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문과 혼사를 치러서, 미테리엔 가를 넘고 싶어 한단 말이지. 아빠는.”

“…저희 집안을요?”

“그래. 미테리엔 가는 대공이면서 우리 집안은 후작. 이 차이가 뭐겠어? 육지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미테리엔 가에 비해 우리는 해전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공을 세울 기회가 적었지. 하지만 아빠는 그걸 인정하고 싶진 않은 거고. 게다가 이제 전쟁이 다시 터질 일도 없으니, 아빠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높은 지위를 얻어서 미테리엔 가를 이기고 싶은 거야.”

미테리엔 대공가를 넘어서는 권세를 누리려면 역시, 황태자비 말고는 없다.

“그래서 아빠도, 여기 날 보낸 거야. 레오폴트 전하가 여기 입학하니까. 어떻게든 꼬셔봐라… 인데, 나로서도 나쁘지는 않은 제안이었어. 4년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근데 너도 왔잖아.”

그렇게 되었다.

아스트리드는 원래 입교 예정이 아니었지만, 막판에 아스트리드가 마음을 바꾼 덕에 황명으로 입교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래서 나는 네 편을 들어주기로 했어. 네가 황태자비가 되는 건 사실 기정사실이지만, 아케밀라 같은 떨거지도 그렇고, 에밀리에까지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는 이상 너도 불안하겠지. 나라도 네 편이 되어서 팍팍 밀어주겠다는 얘기야. 이해가 돼?”

이해는 되지만, 이걸 어떻게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듣기 좋은 말은 언제나 함정이 있는 법이라지만, 지금 바이올렛이 하는 말에서 어떤 함정이 있는지 아스트리드는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너, 레오폴트 전하가 좋아서 미치겠지? 그렇지? 내가 보기엔 그런데. 맞아, 아니야?”

【믿어보죠. 사람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이니까.】

아스트리드는 아니라고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주말동안 열심히 삽화를 그렸습니다...

공모전 끝나면 삽화 주르륵 넣을겁니다...

안쉬었어요... 안쉬었다구우우우우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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