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술 취하면 귀여운 편 (3)
레오폴트는 가만히 선 채, 바이올렛에게 달려가는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따라간다면 당연히 아스트리드의 손이든 팔이든 잡아챌 수 있었겠지만, 레오폴트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아스트리드라니. 드물게… 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본 적이 없다. 그런 아스트리드는 새로운 느낌이어서, 레오폴트는 그 맛을 느끼며 가만히 서서 멀어져가는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끝에 있는 바이올렛과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바이올렛도 눈을 찡긋 신호를 보내왔기에 레오폴트는 여운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레오폴트 생도.”
언젠가부터 레오폴트 주변에 아케밀라가 얼씬도 하지 않게 된 이후로, 레오폴트에게 또다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자주색의 머리카락은 매우 드문 편이었다. 마나에 깊이 심취하여 마도학에 성취를 이룬 이들만이 가진다는 자주색의 머리카락. 즉 후천적으로 변한 머리색이라는 의미였는데, 이 자주색 머리의 아가씨가 레오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밀리에 생도였군요. 어쩐 일입니까?”
“아버님에게서 전해달라는 말씀이 있었기에.”
“그렇습니까?”
에밀리에 폰 조르지엔. 제국 동부에 위치한 마법사의 탑, 줄여서 마탑이라고 불리는 그곳의 수장이기도 한 바이지크 폰 조르지엔의 딸이었다.
위대한 마법사이며 대륙 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물로도 유명한 바이지크였으나, 그 딸인 에밀리에 역시도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마법을 응용한 기술인 마도에 미쳤다는 바이지크와는 반대로 마도보다는 마법 그 자체에 몰입한다는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음.”
마침 식사 시간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임박해있어서, 아마 슬슬 걸어가서 식당에 도착할 즈음이면 점심시간이 될 터였다.
“레오폴트 생도, 점심이라도 들면서 이야기하면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하죠.”
제국의 황태자이면서,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이끌어야 할 차기 황제인 레오폴트는 이 4대 공신의 자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하나와도 관계가 삐끗하면 제국 전체의 안녕과도 직결되는 문제여서, 레오폴트는 에밀리에의 제안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배가 고프기도 했고.
마침 아스트리드와 바이올렛이 향한 곳도 식당일 것이라서.
“아스트리드 생도는 여전하군요.”
“그렇습니까?”
식당으로 향하면서 에밀리에가 처음 꺼낸 말은 의외로 본론이 아닌 아스트리드에 대한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면 아카데미에 입교한 이래 에밀리에와 이렇게 얘기를 나누게 된 계기가 두 번 다 아스트리드와 연관이 있었다.
처음에는 수업 직전에 어디론가 가버린 아스트리드를 찾아 헤맬 때 에밀리에의 신세를 졌고, 두 번째로는 수료식 전야제의 무도회에서 아스트리드가 갑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황태자비 후보 어쩌고 하면서 무례를 저지를 때. 그렇게 두 번에 걸친 일로 인해서 에밀리에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었다.
“왈가닥 중의 왈가닥이지만, 그 무력만큼은 제국 제일의 여걸. 설원의 표범이라는 그 평판에 걸맞은 행동인 것 같군요.”
“음…”
아니, 그렇기만 한 건 아닌데.
“조금은 귀족이라는 것에 대해 자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말이지요. 황태자비가 되려면 지금 상태여서야…”
“하지만 그런 점도 매력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요.”
생각해보면 아스트리드를 진짜로 싫어했느냐 하면 그건 아닐지도 몰랐다. 아스트리드가 자길 싫어하는 게 확실하니,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를 좋아하면 그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아스트리드는 많이 변했다. 분대장 역할을 수행하면서 타인을 이끌 줄도 알게 되었고, 레오폴트가 보기에는 서툴어도 지휘 역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에라냐를 비롯해서 베라시엔과도 잘 지내는 걸 봐서는 제법 사교성을 익힌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렇게 눈앞에서 도발하는 아케밀라를 별말 하지 않고 가만히 놔두는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어머. 두 분 사이가 엄청나게 안 좋으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이 아닌가 보군요?”
“그건… 음, 그랬긴 합니다만.”
“음음, 그래요. 그럴 수 있긴 하죠.”
에밀리에는 대충 상황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폴트는 그녀의 반응에 괜히 민망해져서 뺨을 긁적였다.
‘그럴 수도 있긴 하지.’
술에 취해서 아양을 부리는 아스트리드.
술에 취해서 레오폴트의 목을 끌어안고 헤죽헤죽 웃던 아스트리드.
술에 취해서 왜 나한테만 차갑게 대하냐고 대성통곡을 하는 아스트리드.
모두 다 처음 보는 아스트리드의 모습이었으니까.
“이쁘긴 하죠? 아스트리드 생도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레오폴트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그렇지 못해서, 에밀리에는 그런 레오폴트의 얼굴을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볶음국수군요.”
“그렇군요. 싫어하시는 메뉴입니까?”
“아뇨. 안 먹어봐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레오폴트와 에밀리에는 식판을 내려놓으며 서로 마주 앉았다. 가볍게 식사에 대한 예를 표하고서 포크로 국수를 먹어보면 맛이 나쁘지 않았다. 해산물의 향과 돼지고기의 식감, 쫄깃한 면에 잘 배어든 소스까지 정말 신경 써서 만들어낸 요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메뉴.
“첫 일 주일의 식사와는 정말 비교조차 할 수가 없네요.”
“그러게요…”
에밀리에가 그때를 회상하듯 진저리를 쳤다. 끔찍한 맛이었다는 건 모든 생도가 동일했는지, 정말 차마 먹기 힘든 메뉴였다는 점에서 레오폴트와 에밀리에의 뜻이 일치했다.
“그래서, 조르지엔 후작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 그게.”
국수 가락을 후루룩 빨아들이고서 에밀리에가 잠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식사를 다 끝낸 건 아니지만, 포크를 든 채로 할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조만간에 면회를 한번 오실 것 같은데, 그때 같이 뵈었으면 한다고.”
“후작께서 저를요?”
바이지크 폰 조르지엔.
마도의 마법사. 뭔가 동어 반복이라는 느낌을 주는 그 호칭은 실제로도 바이지크가 스스로 만들어 낸 호칭이었다. 마법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마법을 통해 마도를 끌어낸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마법사. 그가 바로 바이지크였다.
“새 시제품이 완성된 것 같았습니다.”
“소감을 알려달라는 말씀이시군요.”
전쟁 전, 바이지크가 만들어 낸 매직 브레이슬릿은 원래 지금처럼 팔찌의 형태가 아니었다. 매직 팩이라는 이름의, 등에 짊어지고 사용하는 일종의 배낭과도 같은 형태였는데, 저위급 마법의 영창을 생략하게 해준다는 효과에 비해서 착용에 필요한 부담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다소 기괴한 장난감 또는 우스꽝스러운 장비 정도의 인식이었던 매직 팩.
오히려 크로이츠는 그런 매직 팩에 주목했다. 아인트하펜이 왕국이던 시절 크로이츠는 바이지크를 찾아가 연구개발비를 무제한으로 지원하는 대신 개선을 요구했고, 그렇게 개발된 게 매직 브레이슬릿이었다.
연구에 연구, 개발에 개발을 거듭한 결과 매직 팩은 매직 브레이슬릿이라는 이름의 팔찌 형태로까지 개선되었다.
그 덕분에 휴대성과 착용감이 엄청나게 개선되었고, 저위급 마법이라고 하나 영창 시간이 생략된다는 효과에 힘입어 매직 브레이슬릿과 세검을 주 무기로 하는 마도 기사가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아인트하펜은 중장 기사 외에도 기동전까지 소화할 수 있는 마도 기사라는 병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인트하펜의 한 축을 이루는 마도 기사라는 존재에 빠질 수 없는 장비, 매직 브레이슬릿. 그 매직 브레이슬릿을 개발해낸 공로로 후작이 된 바이지크가, 이번에는 새로운 매직 브레이슬릿을 개발했다는 이유로 레오폴트를 찾아올 생각이었다.
“안전 검사는 모두 마쳤고 위력 테스트만 남은 시점인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 정도라면야 별로 어려운 것도 없는 일이다.
*
바이올렛은 깨끗이 비운 식판에 포크를 내려놓으며 아스트리드를 향해 웃었다.
“나는 황태자비니 뭐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 내가 되고 싶은 건 군인이거든. 아빠의 뒤를 이어서 해전단의 제독이 되고 싶단 말이야. 그러려면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네가 황태자비가 되는 게 최선이야. 어차피 미테리엔 대공가야 위세도 제일 크고, 황태자비를 배출한다고 해서 더 올라갈 곳도 없지. 뭐, 조르지엔 후작가나 유레이드가 된다면 문제가 커지겠지만 말이야.”
“흠. 그래서 저를 도와주겠다는 건가요?”
아스트리드는 눈을 깜빡이며 바이올렛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좋은 제안이었다. 손해 볼 게 전혀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뭐 하세요?】
‘왜?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어? 짚이는 게 있어?’
어쩌면 진짜 아스트리드가, 이런 곳에서 날카로운 진짜 아스트리드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짚어줄지도 모른다. 이런 달콤한 제안에는 반드시 독이 있을…
【당장 그러자고 해야죠.】
텐데 역시 알아챌 리가 없구나. 아스트리드는 괜한 기대를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듣기로 레오폴트 전하랑 너는 사이가 엄청 안 좋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어제 일을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거 같아. 너 대성통곡하고 울었던 거 기억나?”
【무슨 소리죠, 저게?】
“…그게 꿈이 아니었…”
“뭐? 꿈?”
바이올렛은 잠깐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이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찌나 크게 웃어대는지 저러다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는 게 아닐 정도로 웃어댔다.
“아, 아. 미안, 웃겨서 말이지. 아무튼, 너, 실제로는 레오폴트 전하를 좋아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아무튼 내 말이 맞지?”
【맞다고 해요, 얼른!】
‘아니, 그러면 약속이 뭐가 돼?!’
차마 맞다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맞다고 하면 바이올렛이 미친 듯이 밀어주기 시작할 테고, 아니라고 하면 그럼 뭐 없던 얘기로 하자고 하면 그것도 곤란한 이야기였다.
‘…곤란할 게 있나?’
따지고 보면 없던 얘기로 하자고 해도 곤란할 건 없는데.
“아무튼, 너 황태자비를 노리는 거면 우물쭈물하면 안 될걸?”
“무, 무슨 소리죠?”
그 말에, 바이올렛은 아스트리드의 뒤편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따라 돌아본 곳에는, 에밀리에와 마주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레오폴트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게 뭐 하는 짓…?!”
아스트리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 기다려요! 잠깐!】
머릿속에서 말리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근데 매 화 마다 삽화를 넣는 건 아니구요
그럼 저 죽어요 진짜
간헐적으로 넣을 거에요 간헐적으로...
이러면 또 소유방이라고 댓글 달거죠?!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