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5화 – 사천왕
철썩- 철썩-
신재혁의 두 눈이 얼어붙은 바다를 주시했다. 끝 모를 수평선까지 전부 꽝꽝 얼어붙은 기묘한 바다였다. 원해遠海 전체가 얼어붙은 상태였으나, 신재혁이 서 있는 백사장 주위의 바닷물은 얼지 않은 물이 출렁거리며 파도가 치고 있었다.
철썩- 처얼썩-
‘벌써 전부 회복되었군.’
신재혁은 지금 자신의 심상공간에 있었다. 스스로 암시를 걸어 영혼 속의 신성력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심해까지 모조리 얼어붙은 저 빙원氷原은 동결되어 사용할 수 없는 신성력을 나타냈고, 연안의 얼지 않은 바닷물은 현재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신성력 회복속도가 빠른 거지? 전생과 달리 이 몸은 ‘신혈’이 없을 텐데…. 그래,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던가.’
영혼 한구석에 웅크려 있던 기억의 편린이 재생됐다. 익숙하고 그립지만, 동시에 증오스러운 목소리가.
「‘신혈’은 몸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혼으로 받아들이는 거다….」
‘이스카리옷…. 너는 어째서 우리를-’
복잡한 감정을 품은 눈동자가 철썩거리는 파도를 바라봤다. 부서지는 물보라를 보고 있으니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념을 털어낸 신재혁은 손바닥을 들어 눈대중으로 바다가 얼지 않은 범위를 어림해 보았다.
‘저번보다 늘었군.’
얼마 전, 게이트 속에서 악마 리-템을 쓰러뜨린 이후 바다의 얼음이 더 녹아 있었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의 양이 늘어난 것이었다. 이 성취로 또 새로운 신성 주문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련으로 녹여낸 양보다 훨씬 많잖아….’
어째선지 리-템을 쓰러뜨려 되찾은 신성력의 양이 수련으로 되찾은 양보다 몇 배는 많았다.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일까? 아니면 신성력의 풍부한 사용 때문일까? 아니면 강력한 악을 쓰러뜨렸기 때문에? 신재혁은 그 답을 알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았다. 어째서 자신의 신성력이 봉인된 것인가. 어째서 기억을 지닌 채 지구로 전생한 것인가…. 하지만 상관없었다. 수련을 통해서, 혹은 악마를 처치하는 것으로 자신이 본래 자기 것이었던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은 명백했다. 그러면 언젠가는 모든 의문의 해답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래. 그거면 됐다.
신재혁의 두 눈이 드넓은 빙원 저편,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접한 수평선의 너머를멀거니 바라봤다. 눈으로는 감히 볼 수 없는 저편.
아득히 뻗어진 신성력의 저 끝에는 분명 엘로아흐께서─
신재혁의 눈꺼풀이 감기며, 서서히 의식이 침전했다….
***
엘로아흐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악신 로힘이 분노와 질투와 증오에 휩싸여
자신의 종으로 하여금 물질계를 멸하도록 명하사
로힘이 악마 가운데 특출나게 강력한 힘을 지닌 자를 뽑아 지도자로 세우니
그 이름이 사탄/샤이타안/새턴/사투르누스/바포메트요, 분노의 상징이라.
지옥의 모든 악마가 위대한 분노에게 부복하며 경외를담아 ‘마왕’이라 부르더라.
마왕이 휘하의 악마 가운데 특출난 이 넷을 선출해 지옥의 군단장으로 삼으니,
첫째는 바알제붑/베일제불/베엘제붑/바알세불/바알제불/벨제브브/벨제붑이요, 질투의 상징이며.
둘째는 루시퍼/루키페르/루치페로/에오스포로스요, 교만의 상징이며,
셋째는 벨페고르/페올이요, 나태의 상징이며,
넷째는 마몬/아마이몬, 탐욕의 상징이라.
지옥의 모든 악마가 네 왕의 휘하로 들어가 기꺼이 따르며
마왕을 보필하는 네 절대자를 사천왕이라 부르더라.
그리하여 마왕과 마왕 아래 사천왕과 사천왕 아래 모든 악마들이 집결해
지옥을 가로지르는 용암 강의 상류에서 하류까지 온 벌판을 빼곡히 덮는 군세를 이루니
그 모습이 로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
“후우….”
신재혁이 땀을 흘리며 벤치 프레스 머신에서 일어났다. 목을 타고 옷 안으로 주륵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은 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청량한 냉기가 식도를 타고 흐르며 몸을 식혔다.
게이트 사건 후 3개월이 지났다. 그 끔찍한 사고가 있었는데도 언론은 조용했다. 언론 통제가 이뤄진 게 틀림없었다. 신재혁에게도 군으로부터 게이트 클리어 보상과 함께 협박성의 권고가 날아왔었다. 그날의 일에 대해 조용히 입을 다물란 내용이었다.
그 사건은 신재혁의 행동에도 제약을 주었다. 안 그래도 위조한 헌터 라이센스라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수 없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정부나 군부 쪽 누군가의 눈에 들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이 세달이란 시간 동안 신재혁이 집에 잠적해 얌전히 수련만 한 까닭이었다. 그래도 세달이나 지났으니 상층부의 기억 속에서도 그 사건이 잊혀졌을 법했다.
‘고작 한 번 밖에 게이트에 입장하지 못했는데, 세달이나 활동을 못한 것을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한 번 만에 엄청난 정보를 얻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나….’
자숙의 시간 동안 신재혁은 자기가 첫 게이트 탐사를 통해알아낸 정보를 정리해보았다.
우선 신재혁의 가설대로 게이트 너머는 지옥이 아니라 에덴이었다. 에덴 대륙의 공간 일부가 외부와 회색 안개로 단절된 채 지구와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가 첫 번째로 입장한 게이트는 에덴 남부의 밀림 지대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됐다.
또 비석의 내용을 고려했을 때, 에덴 대륙은 그가 사망하고 최소 200년은 지난 것 같았다. 비석의 글귀에는 씨앗, 현자, 영혼 같은 단어도 있었지만, 신재혁으로서는 무슨 의미인지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그나마 현자가 그 유적을 제작한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했다.
‘내가 아는 현자는 내가 태어나기도 몇백 년 전에, 제국의 현왕으로 칭송받던 헤르메스 레온하르트뿐인데…. 내가 죽은 이후 새로운 현자가 등장한 것일까. 아니, 마력집광포를 최초로 구상한 사람이 헤르메스니 현자란 단어가 비석에 새겨진 것도 이상하지 않나.’
신재혁은 이어서 리-템의 말을 떠올렸다. 분명 리템은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수십 년 만의 대화, 사탄으로부터 받은 기만의 권능, 자신을 봉인한 가짜 마왕, 사탄의 죽음. 이로부터 조합해낼 수 있는 정보는 충격적인 비밀을 가리켰다.
“사탄이 죽은 건가? 하지만 마왕이 죽었는데도 어째서 지옥의 침공이 계속된 거지?”
신재혁이 사탄에 대한 리-템의 충성도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가짜 마왕이라…. 모종의 이유로 사탄이 죽은 후 2대 마왕이 탄성한 것이군. 그 마왕이 전대 마왕의 최측근인 리-템을 축출한 거고. 지금 지구를 침공하는 것은 2대 마왕의 지시인가….”
그렇다면 마왕좌에 오른 것은 누구일까? 교황청에서 배운 전생의 지식을 떠올렸다.
지옥의 생태계는 지옥을 지배하는 마왕 아래 지옥의 네 영토를 차지한 사천왕과 사천왕 아래의 귀족들, 그리고 일반 악마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마왕은 황제, 사천왕은 제후에 대응되는 일종의 봉건제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스카리옷,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곤 했었지.”
신재혁의 눈동자가 아득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가 수습 성기사 론지노였을 때의 기억이었다. 론지노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친구와도 같았던 늙은 마법사가 그 기억에 있었다. 키 작은 론지노의 머리를 헝클이며 성서를 재미있게 읽어주던 기억. 노인은 그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악마의 모습과 일화를 생생하게 소개하곤 했었다.
‘아니…. 지금 그를 떠올려봤자 바뀌는 건 없다, 그는 결국,’
신재혁이 고개를 털어 잡념을 쫓아내고는 다시 본제로 돌아갔다. 네 명의 사천왕중 누가 2대 마왕이 되었을 것인가.
사천왕은 여러 발음으로 불리지만, 보통 바알제불, 루시퍼, 벨페고르, 마몬이라 불렸다. 신재혁은 이 네 강자 중 누가 지옥의 왕관을 썼을지 추리했다.
마몬은 부와 황금을 관장하는 탐욕의 악마다. 그는 지옥에서 가장 많은 재물을 지닌 존재인데, 마왕보다도 많은 황금을 가지고있다고 전해진다. 그는 좋은 땅을 발견해 차지하려는 생각으로 늘 땅만 보고 다닐 정도로 치사한 근성을 지닌 악마였으며, 마왕성 판데모니움(Pandemonium, 만마전)을 건설한 것도 그라고 한다. 그와 계약한 자들은 황금 광맥이나 은닉된 재산을 찾아내는 힘을 가졌기에, 많은 모험가들이 황금의 유혹에 휩싸여 마몬과 계약하고 타락했다.
“하지만, 마몬은 다른 사천왕에 비해 무력이 약해. 악마들이약한 왕을 섬길 리는 없지.”
나태의 악마인 벨페고르는 자신이 관장하는 죄악에 맞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악마였다. 하지만 그는 흑마법의 정점에 달한 강력한 사령술사(Necromancer)였기에 계약자가 많았다. 론지노가 태어나기 이전의 이야기지만, 그의 강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일화가 하나 있었다. 그가 단 한 번 에덴에 출현한 때의 이야기였다.
지옥의 사천왕이 중간계에 강림하자, 중간계의 질서와 평화를 수호하는 조율자를 자처하는 드래곤들이 그를 퇴치하려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드래곤들을 이끌고 벨페고르를 공격한 드래곤 로드는 역대 최강의 드래곤 로드라 불리던 폭룡왕 칼스텐이었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전투가 계속됐다. 결과는 참담했다. 드래곤의 전멸이었다. 전투 직후 벨페고르는 지옥으로 돌아갔다. ‘귀찮다’라는 것이 이유였다고 전해진다. 그날 이후로 중간계에서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사라졌다. 그 참사를 직관한 사람들은 벨페고르의 무력을 두려워하며 그를 용 도살자(Dragon Slaughterer)라고 불렀다.
벨페고르는 틀림없이 무시무시한 사천왕이었으나, 만사를 귀찮아하는 그가 마왕직에 올랐을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지구 침공이2대 마왕의 일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이 벨페고르가 2대 마왕이 아닐 것 같았다. 신재혁의 추리는 주저 없이 다음 사천왕으로 넘어갔다.
루시퍼는 오만과 교만의 악마였다. 한때는 빛의 신 엘로아흐를 섬기는 대천사였으나, 자신의 힘에 취해 주에게 반역한 죄로 천국에서 추방된 타락천사였다. 교황청에서는 천사조차 타락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관련 정보를 숨기려 했는지, 루시퍼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만한 성격의 루시퍼가 왕좌를 취한 것일까? 하지만 신재혁이 생각하기로는 악마들이 천사였던 루시퍼를 정통성 있는 마왕의 후계자로 인정할지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사천왕인 바알제불은 질투의 악마다. 거대한 파리의 형상을 한 거대한 악마는 에덴 역사책의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장소에서 등장한다. 과거엔 스스로 신을 자처하며 어떤 부족을 다스렸다는 기록도 있었다. 그는 출현 목격담만큼이나 많은 이름으로 불렸는데, 바알, 바알제불이나 벨제부브라고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역병과 벌레 떼를 몰고 다니는 그 악마는 기근과 흉년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바알제불은 자기를 신이라 칭할 정도로 질투심이 심해 자신보다 강한 사탄을 질투했다고 전해진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수많은 일화가 전부 교황청의 기록에 남겨졌으니. 그의 질투심을 고려하면 바알제불이 마왕직에 욕심을 가질 것은 확실해 보였다.
“바알…. 하필이면, 또,바알인가.”
그 악마는 신재혁의 원수였다. 그와는 전생에 두 번의 악연이 있었다. 모두 신재혁에게 쓰라린, 최악의 경험들이었다. 하나는 그의 가족과 같은 이들을 바알의 권속들에게 몰살당한 경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재혁 자신의 죽음이었다. 그 자신과 함께 12 영웅이라 불리는 동료들과 지옥에 쳐들어간 론지노는 최후의 순간, 바알을 상대하다 패배해 목숨을 잃었었다.
그랬던 바알제불이 이젠 세 번째 상처를 그의 영혼에 남기려 하고 있었다. 마왕이 되어서 지구를 침공하다니…. 뇌리에 깊숙이 박힌 혐오스러운 겹눈을 떠올리며 신재혁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번은, 이번만큼은 절대로 네 뜻대로 되게 두지 않겠다..!”
굳은 결심을 가슴에 새긴 신재혁이 다시 체력을 단련하려 헬스 기구로 향할 때였다.
♬~ ♬~
스마트폰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려왔다.
“누구지? 딱히 연락 올 일은 없을 텐데….”
신재혁이 화면을 확인했다. 유성하 누나였다. 얼굴이 환해지며 신재혁이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로 전화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재혁아….”
건너편에서 유성하의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신재혁이 기대하던 목소리는 아니었다. 신재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목소리는 아주 다급하고, 위태로웠다.
“재혁아, 도…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