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55화 – 비행기 (2)
성서에서 이르기를, 엘로아흐는 빛의 신이자 창조신이다. 또한 엘로아흐는 정의의 신이자 사랑의 신이며, 자애의 신이자 운명의 신이다.
엘로아흐는 이 외에도 각종 관념을 관장하는데, 그의 정적이자 어둠의 신인 로힘과 대비되어 마치 정상적인 지성체라면 반드시 자신을 믿도록 유도하는 듯한 … (중략) … 엘로아흐를 섬기는 성직자들은 영혼에 신성력을 품는다. 성직자들에게 신성력의 양은 신으로부터의 사랑, 혹은 관심의 정도로 간주된다. 이들의 평생 목표는 독실한 기도나 선행, 각종 종교 행위 등으로 신성력의 총량을 늘리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신성력을 이용해 신성 주문을 사용할 수 있다. 성서에 따르면 태초에 엘로아흐가 세계수를 중심으로 에덴의 대륙을 창조했을 적, 세계수의 지킴이로 엘프족이 창조되었다 한다. 엘프는 엘로아흐의 사제 역도 겸했는데, 그때 하이엘프들에게 최초로 신성 주문이 전수되었다고 전해진.
… (중략) …
신성 주문은 대게 빛, 혹은 번개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종류가 마법만큼 다양하지는 않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큰 이유는 에덴의 오랜 역사 동안 치유, 공격 주문과 같은 유용한 주문만 자주 쓰이면서 덜 유용한 주문은 자연스럽게 사장됐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문들은 유적이나 고서적에서 간간이 재발견되기도 한다.
신성 주문을 통달하기 어렵다는 점이 주문의 유실 현상을 심화시켰다.
신성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힘이기에 제어가 어려운바, 하나의 주문에 숙달하기도 오랜 훈련이 필요했다. 신성 주문의 발동 조건은 정확한 아리아, 명료한 심상, 강렬한 의지의 조화다. 견습 사제와 성기사들은 세 조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랜 훈련을 거친 성직자는 심상이나 의지가 몹시 강렬하여 아리아를 모두 읊지 않아도 주문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아리아 축약이라 불리며, 고위 성직자와 일반 성직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척도다.
성직자들은 아리아 축약의 단계를 넘어서 신성 주문을 고치거나 발전시킬 수 없을까 기대하며 연구를 거듭했는데, 어떤 경우에도 신성 주문의 효과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는 신성 주문이 신에게 사용을 허락받은 기적, 다시 말해 빌린 힘이기 때문이다. 주인 있는 힘을 사용자가 멋대로 바꾸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 (중략) …
고대에는 간간이 내려오던 엘로아흐의 신탁을 통해 신성 주문이 새로이 선사 되기도 했다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신이 잠에 빠진 것처럼 신탁이 거의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그 무렵,하늘에 새로운 성단이 생겨났다. 막 만들어진 것처럼 천구에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이 성단은 밝은 별 주위로 천체들이 회전하는 모양새였는데, 어째선지 에덴과 시간의 흐름이 다른 마냥 기이하게 운동해 천문학자들이 관측에 어려움을 겪었다.
학자들은 그 성군에 태양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자의 서> 中.
***
전투는 약 30분간 비슷한 양상이 계속되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기장의 회피 솜씨가 점점 능숙해지며 정체불명의 헌터의 도움도 필요 없이 불덩어리를 가벼이 회피 가능해졌다는 것, 그리고 미약한 뇌기가 익룡의 몸에 점점 축적되며 그 움직임을 점차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집중해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정체불명의 헌터의 존재도 까먹은 가운데, 빌헬름은 희망을 느꼈다. 익룡은 이전보다 비행이 확실히 굼떠졌고, 이젠 대부분의 번개를 맞아줬다.
하지만 빌헬름의 마나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투를 더 끌 수는 없다. 이제 승부수를 걸어야 한다….
“Haaaaaah-!!!”
빌헬름이 기합을 지르며 남아있는 모든 마나를 끌어모았다. 어디선가 용솟음쳤는지, 마나가 폭주하는 수준으로 요동치며 스파크를 튀겼다.
필살의 각오로 끌어모은 마나로 화살들이 수십 발이나 생겨났다. 여태껏 생성한 것 중 가장 많은 수였고, 하나하나가 확연히 크고 난폭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빌헬름은 이번 공격으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몸이 이곳저곳 그을려선 보호색을 유지할 기력도 없어진 익룡은 상대가 최후의 발악을 벌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익룡도 맞서 입에 마기를 응축했다. 불길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주위의 공기가 일그러져 보일 지경이었다.
양쪽의 공격은 동시였다. 불덩이 하나와 스무 발가량의 번개가 서로를 향해 일직선으로 발사됐다. 화려한 스파크와 불티가 하늘을 어지러이 수놓았다. 가로막는 구름을 흩고 공기를 태우며 양편의 공격이 날아갔다. 투사체 간의 경로가 겹쳤다. 충돌을 예상하고 빌헬름이 마력 제어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
마침내 불덩이와 번개가 중간에서 맞부딪혔다.
파지지직, 콰콰앙-!
거대한 불덩이 하나를 수십 줄기의 번개가 막아 세웠다. 양측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려 하니 마치 서로 힘을 겨루듯 중간에서 멈춰서는 부들거렸다. 마력을 제어하는 빌헬름의 핏줄이 불거지며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비행기 속의 모든 승객이 두 손을 꽉 쥐고,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속으로 빌헬름을 응원했다. 괜히 빌헬름의 집중을 깰까 봐 숨소리도 못 내면서.
쐐액-
모두가 집중하는 가운데, 이변이 발생했다.
유독 커다란 번개 한 발이 뒤편에서 날아왔다. 번개를 보면서도 빌헬름은 어째선지 번개가 자신의 통제를 떠나 자유롭게 비행한다고 느꼈다. 전력을 다한 사투 끝에 새로운 경지에 오른 것일까? 처음 겪는 일이라 알 수 없었다….
빌헬름이 고민하는 와중에도 번개는 멈추지 않았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간 황금빛 번개는 그대로 검붉은 불덩이를 꿰뚫었다.
콰아아앙-!!!
폭음을 일으키며 번개가 마기를 흐트러뜨렸다. 중심을 꿰뚫린 불덩이는 힘을 잃고 소멸했다. 악마의 불을 파훼시키고도 기세를 잃지 않은 번개는 힘차게 불덩이의 발생자에게 쏘아졌다.
‘Please..!’
모두의 염원이 담긴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악마는 그것을 피하고자 했으나, 몸이 마비된 상태라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익룡이 죽음을 예감하고 공포로 퍼덕거리는 사이, 마침내 번개가 그 가슴을 꿰뚫었다.
“G̴̟̿̃̊̿̕̚r̷̦͈͖̱̤̼͓͎̉̌͑͗͆̀͜ą̶̨̩̲̰̭̼̱̮͎̗̗̒á̶͕̙̥͉̀̄a̶̧̦̣̲̲͎͓̔̇̒͆̚a̶̛̟͖̝͕̱̩̿͒͝a̴͓͙̗̣͉͕̓̿̆̏̿͊̑̑̈̑̕̚͝ą̸̧̼͓̟͙͈̪͓̖̭̦̓̐̎́͜͠a̵̡͓̺̯̪̳̠̣̼̼̩̒̔̊̾͑̕͜͜͜ͅa̸̬̥̾̉͐̂̊͘͝ą̵̢̗̮̞̼̠̘̭̋̆̑̓̑̉̈́a̸̧͇̙̬̻̔̅͐͗̐̊̉̆͜͝ȧ̵̝̖͈̝̲̺͈̜̭̖̮̣̐͝ą̸̳̠̬̥̲͙͖̰̭̹̻̽́͛̾̓͋͂̿̄̃͂̀a̸̻̙̞̱̎̓̉̋̅̎͆͘͝͝͝a̴̡̨͎̫͚͐̊̐̑̓̎̇́͐͂̆̽̋̒ä̵̧̳͚̪̺̩͇͓̖̾a̶̳͒͐̾å̴̬̥̗͖͇̃̈̃̄̀͗̅͋̋̀̓̕!̴̡̨̩̯̩̠̭̩̜̲̺͌͋́̍͝͝ͅ!̴̱͔̹͚͎̜̥̅ͅ!̸̢̟̘̥̳̣̤͕̼̤͓̀̾͗̅̾̑͆͝!̸̨̧̘̮̘̤͈̩͙͗̐̿̾̈́̃̈́̌̓͛̿͝”
몸통에 정통으로 꽂힌 번개가 악마의 몸속을 태웠다. 악마가 고통의 비명을 토해냈다. 누가 봐도 치명상이었다.
어째선지 마기를 이용한 회복이 통하지 않음에 당황하며 익룡이 상처 부위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땅으로 추락했다. 그것은 익룡의 살아생전 마지막 생각이 되었다. 비명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완전히 들리지않게 되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락하는 몬스터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빌헬름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벨업 알림음과 함께 승객들의 환호성이 고막을 찢을 듯이 때리고서야 빌헬름은 비로소 자신이 몬스터를 쓰러뜨렸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
‘뭐야, 한 방에 죽어?’
보호막을 형성한 장본인, 신재혁이 속으로 당황했다. 신재혁은 힘을 들키지 않고자 아주 위험한 순간에만 도움을 주며 호위 헌터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호위 헌터가 지나치게 고전하는 것 같길래 마지막에 자기도 몰래 뇌창 하나를 날려줬더니 악마가 픽 죽어버렸다.
‘괜히 도와준 건가? 중간중간 느껴지는 마기가 심상치는 않았는데, 설마 뇌창 한 방에 죽을 줄이야….’
게이트를 돌 때는 재생계 헌터라는 위조 신분의 컨셉을 유지하느라 신성 주문을 거의 사용하지 못한바, 오랜만에 신성 주문을 써본 신재혁은 주문의 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음을 느끼며 경탄했다.
‘레벨업의 효능이 이 정도라니! S급 헌터라는 족속들이 고작 몇 년 만에 인류 최강의 반열이었던 에덴 12 영웅을 뛰어넘은 것도 이제 이해가 가네..!’
시스템과 레벨업의 효험에 놀라워하며 조금 전의 기술을 복기했다. 이동하는 천상의 방어막과 쏘는 뇌창. 신성력 제어력이 상승하면서 기존의 주문이 발전한 것이다. 사실 능력의 변화는 발전이라기보단 진화라 불러야 할 정도로 엄청났다.
본래 펼치고 나면 움직이지 못하던 천상의 보호막은 이제 시전자를 따라 이동할 수 있었고, 손으로 쥐고 던져야 했던 뇌창도 이제는 직접 던질 필요 없이 화살처럼 쏠 수 있었다. 이 변화는 가려운 등 긁어주듯 기존의 불편함을 완전히 해소해줬다.
‘이것도 <신혈>이란 업적의 영향이겠지…. 업적 하나의 효과치고는 굉장히 혜자스러운데. 도대체 신혈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거지?’
신혈은 제 영혼에 융화된 물질이었으나 신재혁 자신도 신혈이 정확히 무엇이며, 무슨 효과인지 모두 알지는 못했다. 아마 본 소유주이자 ‘갓핸드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이스카리옷이나 알고 있겠지.
‘그런데 그 이스카리옷이 내 손에 죽었으니… 이젠 알고 싶어도 알 방도가 없네.’
신재혁이 양파껍질처럼 자꾸만 튀어나오는 신혈의 새로운 효능에 놀라워하는 한편이었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메피스토가 불쑥 입을 열었다.
“대단하네.”
살았다는 기쁨에 미쳐 날뛰는 승객들과 달리 그는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침착하고 차분했다. 암살자 걱정에 승객 뒷조사를 하는 둥 끔찍이도 제 목숨을 아끼더니, 막상 죽음의 위기 앞에선 굉장히 태연해 보였다.
이 기쁨의 상황에서까지 그를 무시하긴 어색했기에 신재혁도 대충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빌헬름 씨, 대단했죠.”
다음 말이 신재혁을 당황시켰다.
“아니, 내 말은 네 얘기였는데.”
“-?!”
“보호막. 네가 한 거 아니야?”
신재혁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직접 도움받은 당사자 외에는 알아채지 못했을 은밀하고신속한 기술이었다. 결코 미각성자가 알아챌 솜씨는 아니었는데….
메피스토가 표정 속의 경악을 읽었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렇게 놀라지 마. 내가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이 비행기 안의 헌터는 너랑 빌헬름뿐인데, 빌헬름의 능력은 보호막이 아니었으니 소거법으로 너만 남지. 그런데 재생 스킬 각성자가 아니었네?”
“아… 그게.”
신재혁의 얼굴이 굳었다. 여기서 그가 신고라도 하면 매우 골치 아파진다. 신분과 라이선스를 위조했다는 것이 들키면… 뒷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상대의 입을 닥치게 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한국이라면박주관이란 뒷배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이 비행기의 목적지는 뉴욕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에도 박주관이 뉴욕 법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히 메피스토의 다음 말은 신재혁을 안심시켰다.
“워워, 표정 풀어. 걱정마.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을 테니.”
“…어째서?”
“말했잖아? 너랑 친해지고 싶다고.”
메피스토가 명함을 건넸다. 깔끔한 디자인의 명함에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의도는 명백했다. 입 닥치고 있을 테니, 친하게 지내자.
‘물론 순수히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는 아닐 테고, 아마 종종 자기 일을 도와달라는 의사 표시….’
받아도 될까? 신재혁이 생각했다. 경박하게 보이지만 상대는 꽤 계산적인 성격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비밀을 유출해 A급 유망주와 척을 지려 하지는 않을 터. 메피스토가 명함을 건넨 저의에는 신뢰와 약속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감사히 받죠.”
애초에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신재혁이 명함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메피스토가 씨익 웃었다.
“좋아! 뉴욕에 있으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라고.”
그의 웃음은 꺼림칙했지만, 적어도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받아는 두자. 어차피 연락할 일은 없을 테지만….’
그리 생각하며 신재혁이 창밖을 내려봤다. 지진 난 듯 땅거죽이 뒤틀린 한가운데에 꼿꼿이 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였다.
그로부터 약 15분 후, 비행기는 순조로이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착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