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3화 - 부탁
이해할 수 없던 것을 이해하면 한층 두려움이 가시는 법이다. 헨리 클라크는 가장 충격적인 상대의 무력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 내려지자 비교적 덜 충격적인 상대에게 관심을 옮겼다.
“그럼 다른 한쪽은 어떻게 됐지? 내가 제압했던 녀석. 전신에 괴상한 갑옷형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어서 찾기 어렵지 않았을 텐데.”
질문을 듣고 제시카가 곤란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흔적이야 찾았는데… 웬 크레이터에 가운데 피가 잔뜩 묻어있으니 찾기 싫어도 못 찾을 수가 없었죠. 문제는, 그 피해의 장본인이 이미 도망치고 없더라구요.”
“뭐?”
“근처에 빈 유리병이 굴러다니는 걸로 보아 포션 빨고 도망친 것 같은데.”
‘아뿔싸, 이런 멍청한 실책을!’
헨리 클라크가 아차했다. 도망친 녀석을 쫓기 급급해 상대가 포션을 지니고 있으리란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렇다는 말은 놈이 뉴욕 어딘가에..!”
뉴욕의 평화를 깨뜨린 놈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헨리 클라크에게 그런 위험분자는 몬스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제 아내를 죽인, 모조리 찢어 죽여야 마땅할 몬스터.
아내의 죽음을 떠올리는 헨리 클라크의 심박이 거칠어지며 안면이 붉게 물들었다. 산산이 깨진 유리 파편이 심장 속에서 요동치며 온갖 세포를 찌르고 헤집는 느낌이다. 결코 다른 시민마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게 할 수는 없다….
흥분한 채로 헨리 클라크가 다그쳤다.
“어디로 도망쳤는지 근처 CCTV로 확인 못 하나?”
“하필 싸움이 일어났던 장소가 데스웜 때문에 파괴되서 재건축 중이던 거리라 CCTV가 없네요. 그나마 유일한 흔적이라면 주민들 신고가 들어왔던 호텔뿐인데, 안 그래도 부하들이 수사하러 갔어요. 지금쯤 조사가 끝나서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그 말대로 몇 분 후에 전화기가 울렸다. 제시카가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보고해. 응? 뭐? …알아내지 못했다고? 왜? 끄응…. 일단 지배인을 살살 구슬려 봐. 나는 국장님께 보고 올려 볼게.”
제시카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헨리 클라크가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 호텔 조사하러 간 부하 요원 전화인데, 투숙객 신원을 확인하고 싶다니까 호텔 측에서 협조를 안 해준다네요.”
“CIA의 수사를 거부한다고? 일개 호텔 주제에 그게 가능한 건가?”
“네, 그 호텔은 좀 특별한 호텔이라….”
“어째서?”
“어, 그건 기밀인데….”
답해주지 않으면 직접 쳐들어갈 기세였기에 제시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껍지 않은 기색으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음… 그냥 말씀드릴게요. 거기 호텔은 게헨나라는 뒷세계 최대 범죄조직이 운영하는 호텔이라, CIA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어요. 워낙 건드리는 사업이 크고 다양해서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간 어떤 여파가 있을지….”
잘못 건드렸다가 상대가 화풀이라도 하면 국제적인 재앙이었고, 그 모든 책임은 자기네들이 덤터기 쓴다는 이야기였다.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강압적으로 나가기엔 꺼림칙한 상대인 모양. 그런 거대한 범죄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한편 스카이스크래퍼는 고민했다.
자기가 쳐들어가면 괜히 제시카의 입장만 곤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트로이 바이러스처럼 뉴욕 한가운데를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고 있을 갑옷 기사의 존재가 몹시 신경 쓰였다.
‘녀석을 잡아야 하는데…. 하지만 어떻게?’
헨리클라크는 자존감이 하락한 상태였다. 녀석을 찾아봤자 직접 처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지난밤의 전투 여파가 아직 몸에 남아있었고, 무기도 없었다. S급 강체술사의 근력을 견딜 수 있는 무기를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새로운 대검을 제작하려면 시간이 몇 달은 걸리겠지. 그리고 그때는 너무 늦는다.
그렇다고 맨손으로 싸우기도 꺼려졌다. 자기가 간신히 쓰러뜨린 갑옷 기사는 각종 아티팩트를 사용하며 검 든 자신을 상대했다. 그렇다면 검 없는 상태에서라면? 다시 맞붙었을 때 최후에 서 있는 승자가 누구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아니라면 누가 그를 쓰러뜨릴 수 있지?’
하지만 자신 말고 갑옷 기사를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자신은 뉴욕의 유일한 S급이다. 그리고 상대는고작 A급 수준이면서 자신과 겨룬 능력자고.
경찰이나 군대가 출동한대도 그 초인을 체포할 수 있을까? 딱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좀 더 강한 이가 필요했다.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강력한….
“나 대신 누군가-”
무심코 혼잣말하던 헨리 클라크가 갑작스레 말을 멈추었다.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같은 S급으로 분류되나, S급 중에서도 탁월한 실적을 자랑하는 초인. 그는 마침 지금 뉴욕에 있었고, 심지어 범인과 같은 한국인이기까지 했다.
‘김재민! 말이 통하니 범인을 더 쉽게 잡을 수 있을지도….’
헨리 클라크는 어쩌면,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심한 헨리 클라크가 제시카에게 부탁했다.
“김재민을 만나고 싶다.”
“음, 이 테러 사건 때문에 환영 행사는 취소됐는데요? 혹시 범인의 목적이 S급 두 명이 만나는 자리를 테러하는 걸지도 모른다 프로파일러들이 추측해서.”
“내가 원하는 건 공식적인 만남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단둘이.”
그 요구에 제시카는 스카이스크래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눈치챘다. 이미 행사가 전부 취소된 마당에 두 S급이 만나게 하는 일은 상부의 의사와 어긋났다. 하지만 절친한 파트너로서 뉴욕의 안위를 향한 헨리 클라크의 비정상적인 집착을 이해하고 있는바, 제시카는 작게 한숨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연락은 취해 볼게요. 그래도 상대측에서 거절하면 헛수고인 거 알죠?”
“그래. 알고 있다. 일단 만나서 부탁은 해 봐야지. 고맙다.”
“뭘요. 이게 내 일인데.”
***
“어서 와! 아직 청소가 안 끝나서 좀 지저분하지? 대충 아무 곳에나 앉아.”
메피스토의 환영에 따라 신재혁이 의자를 드르륵 끌어와 자리에 앉았다.
"아, 감사…."
골목에서 명함을 발견한 후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신재혁은 마땅히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었고, 유일하게 연락 취할 만한 이는 메피스토뿐이었다. 신재혁은 최후의 도박을 걸어보는 느낌으로 명함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고, 다행스레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전화를 받은 메피스토는 기꺼이 자신을 도울 용의가 있었기에 신재혁은 메피스토가 전화로 알려준 주소, 즉 메피스토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술집? 여기서 일하는 겁니까?”
“뉴욕 출장 오는 김에 빌린 곳이지. 지하실에 비밀 탈출구도 있어서 누가 들이닥쳤을 때 꽤 유용하겠더라고.”
메피스토는 아지트를 자랑하는 말을 한참 늘여놓다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연락을?”
물잔을 건네며 메피스토가 물어왔다. 신재혁은 그 잔을 받고 단숨에 들이켰다. 정신을 차린 후로 아무것도 마시지 못한 상태라 갈증이 심했다.
갈증이 좀 가시자 신재혁이 말문을 뗐다.
“어젯밤에 일어난 소란을 아십니까?”
“아, 물론! 그런 대사건을 몰라서야 정보상 이름이 울지. 한국인 두 명이랑 스카이스크래퍼가 치고받고 싸웠다는 거, 그리고 그중 하나가 너라는 것도 알고 있지.”
메피스토가 여유롭게 와인병을 따며 대답했다. 과연 정보상답게 소식이 빨랐다. 나름대로 조사까지 완료한 모양이었다.
소란의 원인 중 하나가 자신임을 알고도 아지트로 초대했다는 건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미겠지. 상대의 말 속에 숨은 호의를 파악하고 신재혁이 부담감을 내려놓았다. 부탁을 꺼내기 앞서 신재혁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럼 이야기가 한결 편하겠군요. 저는 오늘 새벽 곽태우란 범죄자에게 이유도 모른 채 갑작스레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에게서 도망치는 과정에서 스카이스크래퍼가 끼어드는 바람에 난전을 벌였고요. 지금은 어찌저찌 겨우도망친 상황입니다.”
“음, 역시. 내가 대충 예상한 대로구나.”
메피스토가 턱에 손을 얹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팔걸이를 두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뭘 원해? 몰래 한국으로 빠져나가게 도와주면 되나?”
‘…본래라면 그래야겠지만.’
신재혁은 고민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고심했으나,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 그 문제란 이러했다. 지금 한국을 간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신재혁은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현재 신재혁의 문제는 셋이었다. 스카이스크래퍼, 미스터 B, 그리고 곽태우. 현재 자기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을 세 인물이다.
그나마 스카이스크래퍼는 자기 정체를 모르니 어떻게 피해다닐 여지라도 있었고, 뉴욕을 벗어나 한국으로 도망치면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둘은?
스카이스크래퍼와의 전투 끝에 곽태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지만, 만약 살아남았다면 미스터 B와 협력한 곽태우는 금방 신재혁을 찾아낼 것이다. 세계제일의 브로커이자 정보상인 미스터 B와 손잡은 이상 자신의 위치가 노출돼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들어가면 도리어 주변인만 위험해질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성하 누나나 이유진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
뉴욕을 떠나길 망설이는 이유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신재혁은 여전히 미스터 B가 자신을 배신한 까닭을 몰랐다. 그리고 신재혁이 떠올리기로 그걸 알아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미스터 B의 조력자인 곽태우를 잡아서 심문하는 것.
신재혁이 그 모든 고민을 하나의 요청으로 일축했다.
“곽태우를 만나고 싶습니다.”
“곽태우?”
메피스토가 눈썹을 찡그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신재혁의 부탁이 어지간히 예상치 못한 대답인 듯했다. 하기야 뒷사정을 모르는 그로서는 의아할 것이다.
“왜? 한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겠어? 사방에 경찰이 깔린 마당에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아니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재혁은 게헨나의 보스인 미스터 B란 인물과 곽태우가 짜고 자신을 노린 거 같다느니, 이대로 한국에 들어가봤자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느니 하고 간략히 설명했다.
'-과연.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나.'
설명을 들은 메피스토, 그러니까 미스터 B는 신재혁의 우려를 이해했다. 자기가 신재혁을 배신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추측이었지만, 신재혁의입장에서 생각하니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다.
신재혁의 말을 듣고 보니 미스터 B도 자신의 계획에 어설픈 부분이 보였다. 최근 바쁜 관계로 일처리를 대충했더니, 계획 수립이꼼꼼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가 고민했다.
‘둘을 만나게 해도 될까? 또 치고받고 싸울 텐데.’
미스터 B는 그 경우의 손익을 계산해보았다. 의외로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현상황에서 신재혁과 곽태우의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곽태우가 신재혁에게 간신히 비빌 수 있는 것은 신재혁 하나만을 저격하기 위해 모은 아티팩트들 덕분. 그러나 용울음은 이제 적응해버린 신재혁에게 효과가 없으며 파워슈트도 스카이스크래퍼와의 일전에서 파괴되었다. 둘이 다시 맞붙게 된다면 반드시 신재혁이 승리할 것이다.
그리된다면 신재혁은 곽태우를 심문하면서 곽태우가 자신을 쫓는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스터 B가 단지 위치를 전해줬을 뿐, 신재혁을 죽이려 든 건 아님도 깨닫겠지.
‘그런데 또 간밤과 같이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면? …그래도 문제 없겠군.’
저번에는 김재민을 조심하느라 끼어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가능했다. 간밤의 테러 사건에 기겁한 미 정부가 VIP인 김재민을 급히 귀국시키려는 바, 김재민은 오늘 내로 뉴욕을 뜰 것이다.
김재민이 없으면 거리낄 것 없다. 자신의 권능은 무척이나 강력했고, 설령 신재혁이나 S급이라 하더라도 은밀함이 장기인 능력의 행사를 알아차릴 수는 없다….
막 구상한 계획을 점검해 본 미스터 B가 결론내렸다.
‘그럼 내일 둘을 만나게 하고, 혹여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내가 끼어들어 어떻게든 조율하는 방침으로 가자. 이후론 둘을 강제로 떨어뜨려 놓으면 되겠지. 어차피 곽태우도 제대로 붙어보면 현재 제힘으론 신재혁을 죽이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 다음 기회를 위해 순순히 물러설 테고….’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에게 신재혁이 재차 부탁했다. 신재혁의 요청에 미스터 B, 아니 메피스토가 웃었다.
“물론! 도와주고말고. 하지만 나라도 시간은 좀 걸릴 거야. 곽태우가 경찰을 피해 꽁꽁 숨었을 테니까. 조사가 끝나려면 하루쯤 필요해. 발로 뛰어야 할 가능성이 높거든. 그러니 내일 오전에 다시 연락할게. 그동안 여기서 편히 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