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64화 - 제안
“크으으….”
곽태우가 신음을 흘리며 복부에 포션을 철철 들이부었다. 하나하나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최상급 포션을 다섯 병이나 들이부으니 괴사한 것처럼 새까만 복부가 비로소 정상적인 색을 되찾았다.
핏기 없는 얼굴로 곽태우가 신음했다.
“고작 한 대 맞고 이런 상처라니….”
곽태우가 상처 입은 배를 매만졌다. 대검이 때린 충격에 내장이 온통 뭉게지고 눌러붙은 상처. 스카이스크래퍼의 끔찍이 강력한 일격에 곽태우는 반죽음이 됐었다. 혹시 몰라 아공간에 포션을 쟁여 둔 덕에 목숨을 건졌지, 아니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스카이스크래퍼가 신재혁을 쫓는 틈에 겨우 도망친 곽태우는 현재 데스웜 때문에 반쯤 무너진 뉴욕의 폐허 속에 몸을 피신한 상태였다. 곽태우 주변에는 찢어진 일회용 텔레포트 스크롤이며 포션병 따위가 나뒹굴고 있었다.
“더럽게 아프군..! 제기랄, 스크롤도 거의 다 썼는데.”
손해가 막심했다. 파손된 갑옷은 자가수복이 완료될 때까진 한참 걸릴 테고, 얼마 없는 포션과 텔레포트 스크롤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부상에 몸을 움직이기도 불편했는데, 포션으로 치료한다고 치료했으나 여전히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에 몸이 아렸다.
고통 속에서 곽태우가 자책했다.
‘그 많은 아티팩트를 지니고도 털린다고? 병신 새끼..! 아직 너무 약해. 너무!’
평범한 각성자라면 S급을 상대로 대등한 싸움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곽태우는 자신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자랑스럽기는커녕, 그는 비참한 심정마저 느꼈다.
“앞으로 넘어야할 산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S급, 그것도 S급 중에서 가장 약한 것으로 평가받는 스카이스크래퍼에게 패배하고 내빼다니.”
곽태우가 바라보는 곳은 더 높은 곳이었다. S급은 통과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사천왕, 그리고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그 간극이 결코 좁지 않음을 생생히 통감시켰다.
곽태우가 분통을 터뜨렸다.
“재능… 그깟 재능이 뭐라고! 젠장!”
곽태우는 자신의 재능이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았다. 운명의 파도를 주도할 S급이라 불릴 주역들 앞에서 자신은 태양 앞에 선 반딧불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곽태우는 천재라는 족속을 따라잡기 위해서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첫 게이트가 열린 이래 하루도 쉬지 않고 몬스터를 사냥하고, 레벨을 올리고, 아티팩트를 모았다. 자신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모르는 정보도 알고 있었고, 숱한 전투의 경험도 있었다. 곽태우는 남들 수백 미터 앞의 스타트라인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러나 오늘, 그 이점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후발주자들에게 추월당했음이 드러나자 곽태우는 지독한 허탈감과 열등감이 엄습했다. 먼저 출발해봤자 뭣 하는가. 자신은 굼벵이였고, 천재들은 하늘 나는 새였다.
재능이란 것의 차이를 절감하며 곽태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며 피가 흘렀다. 분명 몹시 아플 텐데, 곽태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육체적 고통을 덮을 만큼 심적인 고통이 컸기에.
안 그래도 원역사보다 중요 사건이 빠르게 일어나 압박감을 느끼는 마당이었다. 곽태우는 극심한 초조함과 스트레스에 무의식적으로 가장 의지하던 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차은경….”
예전이었다면 자신을 위로해주고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동료가 있었을 텐데. 지금의 곽태우는 혼자였다. 표백된 세계에서 곽태우는 모든 짐을 혼자 짊어져야 했다. 정신적 고통도, 다가올 미래의 공포도. 아무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고독 속에서 곽태우가 우울해했다.
“이래서 어떻게 차은경 곁에 서겠다는 말이냐…. 그녀가 암흑기사에게 죽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번엔 반드시 그녀를 구하겠다고 그토록 다짐했으면서!”
곽태우의 눈이 자책감으로 충혈됐다. 자책은 곽태우의 손끝이 살을 뚫다 못해 뼈에 닿아서야 멈췄다.
젠장, 무심코…. 포션을 부어 손을 회복시키며 곽태우가 이를 악물었다. 한바탕 우울을 쏟아내니 그나마 자신의 처지를 점검할 여유가 생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최악의 상황이었다. 자신은 부상을 입었고, 뉴욕 전역에 경찰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오직 자기를 잡기 위해서란 한 가지 목적으로.
“심지어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원인을 놓치다니….”
곽태우가 스마트폰을 꺼내 뉴스를 확인했다. 간밤의‘테러’ 사건으로 인터넷은 시끌시끌했다. 그러나 새벽에 큰 폭음이 들려 신고했다느니, 경찰이 무슨 사건인지 조사중이라느니 하는 내용뿐 누군가 스카이스크래퍼와 싸웠다거나 신재혁이 잡혔다는 소식은 없었다.
“놈도 스카이스크래퍼에게서 어떻게든 도주한 모양이지.”
곽태우의 머릿속에 차라리 스카이스크래퍼에게 죽었으면 일이 편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제 손으로 직접 차은경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찰나에 교차했다.
경찰에게 체포되지 않았다면 신재혁이 어디에 숨었을지 곽태우는 생각해보았다. 딱히 떠올리는 장소는 없었다. 자기야 인식 저해의 아티팩트 덕에 코앞을 지나가도 사람들이 자기를 찾지 못했지만, 신재혁도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도 신재혁이 아직 뉴욕을벗어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 곽태우가 미스터 B에게 연락해 신재혁의 소재를 확인하려 할 참이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띠링 울렸다.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음.
그리고 제게 연락이 올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곽태우가 급히 문자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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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정오, 찍어준 주소에 있는 뉴욕 외곽 폐공장으로와라.
그곳에서 신재혁과 일대일로 만나게 해 주지.
- 미스터 B.
===
***
5성급 호텔, 미국 외교부가 국가적 귀빈을 모시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객실 안에서 김재민이 제 복장을 점검했다. 가벼운 운동복. 약속 장소로 나가기에 적당한 차림새였다.
“텔레포트.”
김재민이입술을 달싹이자, 다음 순간 그가 서 있는 배경이 변했다. 아늑한 실내에서 웬 상록수와 묘비석의 숲 한가운데로.
그곳은 뉴욕 시내 한 편에 위치한 공원이었다. 데스웜 사태 이후로는 넘쳐나는 시체를 묻기 위해 용도가 묘지로 변경된 곳이다.
김재민의 드넓은 기감이 이 공원에 사람은 둘뿐이라는 것을 탐지했다. 자신, 그리고 자신을 부른 이. 대담을 요청한 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김재민이 걸음을 옮겼다.
묘지 한구석에 누군가의 비석 앞에서 묵념하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이 미터가 넘는 거인이
누군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헨리 클라크.”
초월적인 청각으로 조용한 호명을 들었는지, 혹은 기척을 감지했는지 헨리 클라크는 고개를 살짝 돌려 김재민을 확인하더니, 다시 앞의 비석에 집중했다.
김재민도 따라서 그 비석을 쳐다봤다. 비문은 영어로 새겨져 있었다. 자연스레 언어 이해의 가호가 발동했다.그가 에덴에 용사 소환되었을 때, 이계인과 의사소통 가능하도록 신이 그에게 부여한 능력. 그로 인해 김재민은 어떤 언어라도 완벽히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다.
김재민이 쳐다본 비석엔 어떤 여자의 이름이 거칠게 조각되어 있었다. 라나 클라크.
‘클라크….’
김재민이 비석의 주인을 짐작한 가운데, 헨리 클라크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내게는 아무것도 필요없었다. 으리으리한 저택보다, 산처럼 쌓인 돈다발보다, 바다 너머까지 닿는 명성보다, 인간을 초월한 힘보다,
오직 한 명의 행복을 원했다. 단지 그녀의 미소면 충분했다.”
김재민은 귀가 들리지 않는바, 잠잠하지만 깊은 회한이 숨어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불규칙적인 호흡에서, 터질 듯한 심장 박동에서, 꽉 움켜쥔 주먹에서 절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슬픔, 죄책감, 그리고 분노.
불현듯 김재민은 그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상실의 원인이 자신의 능력 부족임을 인지할 때의 죄책감, 모든 일의 원흉에 대한 분노.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탐욕의 사천왕, 마몬에게 자신의 연인이었던 2대 성녀 아이샤를 잃었을 때, 자신 역시 앓았던 감정이었으니.
‘그렇군…. 아내를 잃었기에 뉴욕이란 도시에 그리 집착하는 것인가.’
김재민이 스카이스크래퍼란 초인의 사고회로를 이해하는 한편이었다. 갑자기 헨리 클라크가 화제를 전환했다.
“어젯밤, 도심에 웬 소란이 있었다. 너도 알겠지. 그 때문에 환영 행사가 취소됐으니…”
무슨 맥락에서 튀어나온 말이지 알 수 없었지만, 김재민이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제스처를 알아들은 헨리 클라크가 이어서 설명했다.
“술래잡기를 벌이던 범인은 한국인이었고, 나는 둘 모두와 싸웠다. 한 명은 겨우 쓰러뜨렸으나, 다른 한 명에겐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 현재는 내 실수로, 그리고 뜻하지 않은 우연으로 둘 다 자취를 감추어 생사 불명인 채지만, 나는… 아마 둘 다 살아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날 이곳까지 부른 이유는?”
김재민의 물음에 헨리 클라크가 부탁을꺼냈다.
“뉴욕을 혼란에 빠뜨린 두 놈을 잡고 싶다. 나에겐 뉴욕이 전부다. 이 도시는 그녀와 나의 마지막 연결고리이자 추억이야. 나는 결코 그 무뢰배들이 뉴욕을 망치는 걸 두고볼 수 없어. 그렇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힘이 부족해. 이미 만전의 상태에서 패배의 문턱까지 밀렸는데, 무기도 잃은 상태에서 놈들을 이길 자신이 없다.”
그러곤 헨리 클라크가 몸을 돌려김재민을 주시했다. 그가 정신을 집중해 기감을 확장했다. 마주 본 상대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도, 신성력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상대의 역량이 탐지자보다 월등히 우수할 때.
“역시.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군.”
명백한 힘의 격차를 인지했음에도 스카이스크래퍼는 차분했다. 이 시도는 단지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재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며칠 전 우연히 네가 순간이동을 사용하는 걸 목격하면서 추측했는데, 이제 확실해졌다.”
“…무엇을?”
“너는 실력을 숨기고 있어. 설사 같은 등급으로 분류되는 우리마저 짐작할 수 없는 힘을. 네 각성 스킬도 단순한 신성력 방출이 아니겠지?”
김재민이 말없이 긍정했다.
김재민은 각성 스킬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용사 소환 동시에 부여된 상태창과 언어 이해의 가호가 그의 스킬이라 할 수도 있겠다. 김재민이 받은 상태창은 프로토타입이라 부를만한 것이었기에, 현대 각성자들의 상태창과 다른 점이 많았고 각성 과정에서 자동으로 마나를 깨우치지도 못했다. 김재민이 사용하는 마법이나 신성 주문은 모조리 에덴에서 구르며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텔레포트…. 본 것인가.’
김재민은 새삼 당황하지는 않았다. 귀찮아질까 봐 자주 사용하진 않은 것이지, 작정하고 숨긴 능력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재민은 헨리 클라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잠자코 기다렸다. 무슨 의도로 꺼낸 말일까? 협박? 회유? 둘 다 아니었다.
침묵을 당황으로 해석한 헨리 클라크가 말했다.
“힘의 비밀을 묻지는 않겠다. 그건 내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 다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한 가지뿐이다.”
“….”
“부디 도와다오. 나 대신 놈들을 잡아 줘. 그리하면,언젠가 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너를 한 번 도와주겠다.”
그리고 계속해서 절절한 고백이 잇따랐다. 그것은 필사적이다 못해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김재민은 헨리 클라크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건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자가 궁지에 몰렸을 때 최후의 희망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김재민은 스카이스크래퍼의 이런 약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S급 회의에서 본 스카이스크래퍼는 언제나 분노한 야차탈을 쓴 채 악마 사냥에 집착하는 복수귀였는데. 가면 아래 이런 약한 모습이 있을 줄이야….
감정적으로 공감한바, 김재민은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어젯밤의 그 기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몹시 익숙하고도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너무나 은밀한 힘의 유동에 김재민마저 그것이 실제로 발생한 힘의 파동인지 착각에 불과한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확인할 필요성은 충분했다.
‘혹여 그 기운의 주인이 정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놈이라면…. 아니, 있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이 세상에 죽은 자가 부활하는 주문 따위는 없는데….’
고작 범인 둘 잡는 것보다 수백 배는 더 중요한 안건이었기에 김재민의 고민은 오래 이어졌다. 헨리 클라크는 고민하는 김재민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몇 분 후, 마침내 김재민이 숙고를 하나로 종합했다.
“외교부엔 며칠 더 머무르겠다 전해 주십시오.”
간결하나 확실한 의사 표현에 헨리 클라크는 만족한 듯이 편안히 눈을 감았다. 바람과 함께 싱그러운 풀내음이 스쳤다.
그가 한번 심호흡을 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김재민은 그곳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