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제 01계-챕터 02: 의도치 않은 인연
“내 눈이 멀쩡하다면 딱히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상태로는 안 보이는데 말이지. 뭐, 얼굴을 확실히 방금 정신을 되찾은 녀석치고는 상당히 초췌해 보이는군.”
“초췌한 걸로 따지면 낮잠 자다가 끌려온 나도 초췌한 상태. 일단은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으니 나 돌아가서 자도 됨?”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느낌으로 갑작스럽게 방으로 침입한 세 사람의 모습에 공선자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던 감정들이 죄다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등장이 구원이니 하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처해서 그냥 사고 회고 자체가 셧다운 되어버렸다는 감각인 것.
그렇게 이게 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 자신이 있던 방으로 쳐들어온 세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공선자.
그리고 그런 공선자의 상태는 신경 쓰지도 않고, 아니, 정확히는 신경을 쓰기는 했는데 다른 쪽으로 신경을 썼다.
요컨대 공선자가 괜찮은 것인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감정 상태가 아니라 몸 상태를 신경 쓰며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던 세 사람 중 한 명인 한 소녀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저기……. 비명이 들려서 달려와 봤는데, 몸 상태는 괜찮아? 역시 괜찮지 않으면 병원이라도 갈까? 아, 이쪽 세계에는 병원이 없을까? 아니,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병원 비슷한 건 있겠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소녀의 목소리에 공선자는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만 볼 수 없었다.
실제로 소녀가 엄청나게 빠르게 말을 쏟아낸 것은 아니었다. 허나, 갑작스러운 지금의 상황에 도저히 대응할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던 공선자에게는 소녀의 목소리가 강 건너 옆 마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너무 멀게 느껴진 것.
그렇기에 지금 눈앞의 소녀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해하는 것에 시간이 걸려 그 반작용으로 소녀의 목소리가 너무 빠르게 느껴진 것이었다.
“어……, 저, 저기……?”
소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느리니 당연하게도 공선자 역시 대답을 버벅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소녀는 그런 공선자의 버벅거리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조금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말은 할 줄 아는구나? 어때? 정신이 들어? 3시간 전에 여관 문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버려서 얼마나 놀랐는데.”
“쯧, 비켜봐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서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녀석이 잘도 상황 파악을 하겠군. 내가 대신 설명하마. 언제까지 내 침대를 빌려주는 것도 성에 차지 않고 말이야.”
일단 겉으로 보이게는 공선자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였다. 거기에 말도 제대로 하고 있으니 일단은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모양.
그때 그런 소녀를 밀치며 백발의 한 소년이 끼어드는 것이었다. 당장 눈앞 소녀의 존재도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또 다른 남자가 끼어드니 공선자의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허나, 소녀와 다르게 눈앞의 남자는 공선자의 정신 상태는 물론 신체 상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
그저 자신이 직설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구체적으로 현재 공선자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이 녀석의 이야기대로 네 녀석은 갑자기 여관 문 앞에서 쓰러져 있었다. 그걸 이 여관을 운영하는 가족들 중 한 명인 노인장이 발견했고, 그 노인장의 목소리를 들은 우리가 기절한 상태인 네 녀석을 내 방의 침대까지 옮겨두었다는 이야기지. 일단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었으니 정신을 되찾으면 그때 상태를 보고 어딜 데리고 가도 데리고 가자고 결론을 내고 말이지.”
정말이지, 어째서 일부로 내 방을 빌려줘야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느니, 피랑 먼지로 더러워진 침구를 처리하기 귀찮아졌다느니 하는 첨언을 붙이며 사내가 직설적으로 공선자가 처한 지금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
그제야 공선자는 이 방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 눈앞의 소년에게 배정된 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감정 제어가 되고 있었다면 모를까 감정 제어가 없는 상태의 공선자는 자신의 꼴이 더럽기 그지없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고 남의 침대에 편하게 누워있을 정도로 뻔뻔한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
다행히도 신체는 피로했지만 일단 정신적 피로는 회복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런 공선자의 행동에 다행히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정말로 어딘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금 안도하는 소녀.
허나, 그러면서도 괜히 자신이 공선자에게 말을 거는데 끼어든 소년을 째려보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잠깐! 막 정신을 차린 사람한테 굳이 핀잔을 줄건 없잖아? 확실히 침대가 좀 더러워지기는 했지만 애초에 네가 빠는 것도 아니고 여관을 관리하는 사람들한테 말해주면 알아서 빨아다 주잖아?”
“단, 아침에 미리 말을 해뒀을 경우의 이야기지. 시간이 이래서야 오늘 빠는 건 글렀으니 난 오늘은 침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자든지, 아니면 침구를 치워버리고 자든지 해야 한다.”
살짝 날이 선 소녀의 발언에 사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 대꾸에 뭐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딱히 소년의 발언이 틀린 것이 아니었기에 소녀는 그저 지친 한숨밖에 내쉴 수 없었다.
“저, 저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여러분들은……?”
공선자는 자신이 기절한 직후 눈앞의 사람들이 도와줬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렇기에 일단 감사인사부터 하였다.
밤의 공선자와 다르게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인사를 전하는 공선자. 허나,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자신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기절한 자신이 눈앞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허나, 자신을 도와준 이들이 누군지 알 수가 없으니 당황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한 뒤에 자세히 살펴보니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얼굴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말하기에는 얼마 전에 보았던 기억이 있는 얼굴들이었던 것. 그러니까 이제는 하루 전, 공선자가 막 플라워 차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였을 것이다.
이상한 동굴에서 정신이 들었던 공선자가 행렬에서 뒤처져 웬 남자한테 시비가 걸렸을 때 도와주었던 소녀.
통성명……을 했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당시에 서로가(정확히는 소녀 쪽만) 자신들의 이름을 몰랐기에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때 안면은 익힐 수 있었던 것.
덤으로 소녀가 땅바닥에 안면 도장을 찍었던 것도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때 공선자와 잠깐 동안 말을 섞었던 소녀.
공선자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던져주었던 그 보랏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던 소녀가 공선자를 구해주었던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백발의 소년은 공선자가 지금 머물고 있는 여관을 찾기 위해서 길드 회관에 있는 약도를 쥐려고 할 때 일어났던 일에 끼어들었던 소년이었다.
동굴에서 시비를 걸었던 남자가 또다시 공선자와 충돌하는 것으로 다시금 시비를 걸었을 때 공선자를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했다.
그냥 공선자와 그 사내가 방해가 되니 그냥 당당하게 비키라고 이야기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 덕분에 공선자에게 시비를 걸었던 사내의 어그로가 눈앞의 소년에게 끌려 그 틈을 노려 잽싸게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도움을 받았다면 도움을 받은 것일까?
여하튼 그렇게 얼굴만은 알고 있는 소녀와 소년, 그리고 처음 보는 소녀까지 합쳐서 3명의 남녀가 지금 공선자가 기절해 있던 방에 모여 있는 것이었다.
‘……아니, 저 사람도 일단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그, 그러니까 같은 챌린저였던 것 같은데?’
다시금 생각해보니 처음 보는 것 같았던 소녀 역시 일단 스쳐 지나가면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워낙 정신없을 때라고는 하지만 스쳐 지나가듯이 보았던 사실 정도는 기억이 나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서 공선자는 한 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세 명 전부 나와 같은 챌린저다!’
물론 세 사람이 챌린저라고 해도 딱히 뭐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던 그들이 공선자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여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보다는 침대 위 누워있는 쪽이 회복이 빠를 터. 그러니 도움을 받은 입장인 만큼 세 사람이 챌린저라고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챌린저라면 공선자를 우연히 도와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기도 했고 말이다.
이 여관은 현재 50명에 달하는 챌린저들이 머물고 있으니 그들 중 몇 명이 우연히 공선자를 발견하고 돕는 일 따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
“아,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야 할까? 내 이름은 프로아야. 초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익숙한 느낌의 목소리인데? 거기에 얼굴도…….”
“밀리언이다. 네 녀석이 누워있던 방은 내 방이니 특히 나한테 감사하도록. 덤으로 어제 괜한 똥을 나한테 떠넘기고 간 것에 대한 사과도 받아내고 싶군.”
“쿠루미, 나나미 쿠루미. 방가방가.”
동굴에서 만났던 보랏빛 머리카락 소녀의 이름은 프로아. 백발 소년의 이름은 밀리언이었다.
추가로 프로아의 경우에는 동굴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기에 공선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모양.
하긴, 어두운 상황이었으니 확실하게 기억하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그럼 공선자는 뭐냐고? 그야 이상한 녀석이지.
한 평생 모르모트 겸 목줄 찬 사냥개로 활동하던 녀석이 이상하지 않으면 어떤 녀석이 이상하겠는가?
그래도 목소리와 이목구비 정도는 기억하는 것인지 어딘지 익숙하다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
그에 반하여 밀리언은 공선자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공선자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야 아무리 정신이 한계까지 몰린 상황이었다고 해도 공선자가 잘못한 게 맞았고, 지금의 공선자는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소년을 상대로도 배 째 라는 식으로 나올만한 깜냥 같은 게 없었으니 말이다.
“어? 서로 아는 사이였어?”
“딱히? 그냥 우연히 얼굴을 마주쳤던 수준이다. 같은 챌린저인 것 같았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은가?”
“챌린저……? 아! 기억났다! 너 걔지?! 동굴에서 하려던 애! 거기에 지금 그때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스테이터스 시스템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았던 애!”
밀리언이 공선자를 아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며 그가 자신들과 같은 챌린저라고 이야기하자 프로아라는 소녀 역시 공선자를 기억해낸 것인지 탄성을 토내해는 것이었다.
“……세 사람 다 지인? 나만 모르고 있음? 살짝 소외감을 느낌.”
“아니, 아는 사이라고 해도 몇 번 말을 섞어본 수준의 사이고, 굳이 소외감을 느낀다면 쿠루미가 아니라 저쪽에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조금 어깨를 늘어트리는 소녀. 자신과 마찬가지로 흑색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인상의, 자신을 쿠루미라 소개한 소녀의 행동에 프로아가 당황해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공선자는 ‘일본인인가?’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하긴, 챌린저들은 국제적인 것을 넘어서 차원적으로 선출되는 것 같았는데 한국인이 자신이 있는 만큼 일본인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오히려 전 차원에서 고작 50명밖에 선출되지 않는 챌린저에 일본인이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신기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새, 생각해보니까 기억을 잃었을 테니 자기가 일본인인지도 모르고 있겠네? 괘, 괜한 질문은 하지 말자.’
자신도 모르게 일본인인가요? 라고 물을 뻔한 것은 억누르며 공선자가 뭐가 되었던지 입을 열려고 하였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무난하게 자신도 자기소개를 하려고 했던 것.
‘어……, 어……. 그, 그런데 난 뭐라고 날 소개해야 하지? 공선자라고 진명을 그대로 이야기해야 하나?’
그렇게 막 입을 열려고 한 순간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공선자는 또다시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