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05화
9. 광기(狂氣)(3)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연주와 함께 응급실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며 말했다.
“정말 다행스럽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양쪽 골반에 심각한 부상이 있습니다. 중증 골반 골절은 생명을 위협하는 출혈을 초래할 수 있으며 다른 기관에 대한 심각한 손상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단층 촬영본을 들며 말했다.
“뒤쪽에 위치한 골반의 가장 큰, 가장 위쪽 뼈인 장골이 부러졌습니다. 출혈이 쇼크를 유발할 만큼 중증이거나 다른 기관이 손상될 때는 사망할 수 있습니다만, 이 환자의 경우 낙상 시 두부에 가해진 충격과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혼수상태이므로, 이것이 원인이 되는 환자는 아닙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환자 상태라는 것이 갑자기 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며칠 만에 깨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뇌사 상태가 되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망할 새끼가 겨우 열아홉의 여성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한가하게 권진아가 깨어날 때를 기다려 진술을 받을 수는 없다.
나는 의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바로 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CCTV 분석 좀 해봤어?”
-예, 팀장님. 몇 명 걸렸습니다.
“어떤 놈이야?”
-분석 완료하고 저녁에 보고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최영현 경위는?”
-권진아 씨 학교로 바로 출발했습니다.
역시 최영현이다. 그는 본래 단독으로 다른 사건을 수사하려 준비 중이었다. 아직 수사에 투입된 것은 아니고, 서류를 검토 중에 뒤늦게 소식을 듣고 합류한 것인데 내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상황을 짐작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움직인 것이다.
“어느 학교야?”
-대전에 있는 지명 대학교입니다.
응? 대학교? 19세라며?
“권진아 씨 19세라고 하지 않았나?”
-예, 맞습니다. 1월생이라 학교를 빨리 들어간 것 같습니다.
“음, 알았다. 난 연주와 KCSI로 갈 테니 분석 계속 부탁한다.”
-권진아 씨는 좀 어떻습니까?
“아직 혼수상태.”
-하,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팀장님.
전화를 끊고 KCSI로 온 나와 연주.
연주는 시종일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형사로서 침착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건을 주시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생각과 분노로 인한 감정이 서로 다투고 있는 모양이다. 괜히 예민해져 있는 지금 그녀를 건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재빨리 KCSI로 들어가 목 과장님을 찾았다. 모든 사건을 과장님이 부검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낯익은 얼굴을 먼저 찾는 것이 좋다.
지나는 연구원들에게 물어 목 과장님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부검이 진행 중인 연구실 앞에 섰다.
목 과장님이 지금 부검 중이니 일단 담당자를 찾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부검 중인 시신의 성명을 본 우리는 그대로 기다리기로 했다. 목 과장님이 담당한 시신이 바로 우리 사건의 시신이었기 때문이다.
휴게실에 앉아 멍하게 있는 연주와 나.
문득 단양의 장진수 사건 때 이정호 반장과 함께 이곳에서 잠을 잤던 기억이 난다.
잘 수 있을 때 자두라고 하던 이정호 반장.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잘 수 없다. 아직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어린 여성이 깨어났을 때 아직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공포스러워할지 생각하니 앉아 있기도 힘들다.
두 시간여가 지나자, 부검이 끝난 목 과장님이 장갑을 벗으며 연구실에서 나오신다.
날 발견한 목 과장님이 눈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목 과장님.”
“어, 도경이 왔냐?”
“이번 사건도 과장님이 담당하셨습니까?”
목 과장님은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도 눈치 못 챘냐?”
응? 무슨 눈치? 목 과장님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영덕 사건 이후로 너희 팀 사건은 무조건 내가 맡고 있는데. 전혀 몰랐어?”
그랬었……나? 아, 그렇구나. 여기 연구원들이 이렇게 많은데 항상 목 과장님과 이야기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구나.
아마 자신의 조카 사건을 해결해 준 고마움이겠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그저 난 내 일을 한 것뿐이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뭐 좀 나왔습니까?”
“들어와.”
목 과장이 방금 나온 연구실로 들어간다. 부검을 마친 두 구의 시신. 그리고 한 구의 사체가 보인다.
목 과장이 나란히 누운 시신들 머리 위에 있는 모니터에 신상을 띄운다.
“남성은 53세, 권지혁. 여성은 49세, 이지은. 법적 부부관계다.”
이미 알고 있다. 이름까지는 몰랐지만. 목 과장은 사람 시신 앞에선 무덤덤했지만 마지막에 물에 흠뻑 젖어 있는 강아지의 사체를 보고는 얼굴을 굳힌다.
“반려견으로 보이는 푸들. 추정 나이 6세다.”
아직도 물에 젖어 바싹 말라 보이는 푸들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죽어 있다. 연주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목 과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반려견의 콧속에서 반점이 나왔어.”
나도 모르게 이가 악다물어진다. 콧속에서 반점이 나왔다는 것은 반려견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을 때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는 뜻이다. 즉, 이 아이는 산 채로 세탁기에서 익사했다는 뜻이다.
목 과장님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테이블을 짚는다. 가만히 시신을 내려 보던 과장님이 말했다.
“병원에 연락해 보니 권진아 씨에게서 성폭행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나는 화가 나 입술을 떨며 물었다.
“범인 DNA는 나왔습니까?”
“환자가 혼수상태라 여기 모셔오기 불가능해서 병원 측에 질 안쪽의 샘플을 부탁해 뒀다. 샘플이 오면 확인해 봐야겠지.”
“…….”
“도경아.”
“예.”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시신을 노려보고 있던 내가 목 과장님을 보자, 그가 시신을 눈짓하며 물었다.
“떠오르는 사건 없어?”
떠오르는 사건? 나는 다시 시신을 보았다. 나는 지금 지나치게 분노하고 있다. 황지영 사건과 겹친 성범죄 때문이다.
나는 분노로 사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신을 노려보며 내가 배웠던 사건 자료들을 떠올려 보다 문득 하나의 사건을 떠올렸다.
“이치카와 살인사건…….”
목 과장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비슷한 사건이지?”
이치카와 살인사건.
1992년 3월 5일에 일본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범인의 이름은 세키 데루히코(関光彦). 당시 미성년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지나친 잔혹함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살인범이다.
연주가 푸들의 사체를 노려보며 물었다.
“팀장님. 설명 좀 해주세요. 이치카와 살인사건이 뭡니까?”
나는 힐끔 연주를 본 뒤 팔짱을 꼈다.
“음…… 어릴 때부터 폭력 성향이 강한 남자가 있었다. 동생은 물론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도 있던 놈이었지. 그런 상황을 보던 외할아버지가 야단을 치자, 격분해 외할아버지의 다리를 부러뜨려 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처음 이 사건을 공부할 때 난 이게 정말 사람 새끼인가 싶었다.
“또한 외할아버지의 눈을 공격해 시력을 잃게 만들었다. 다리도 불구가 되었지. 하지만 가족 간에 벌어진 사건이라 법적인 문제까지 가진 않았다. 가족들이 덮어준 사건은 그가 십 대 후반이 되었을 때 결국 터져 버렸다. 범인은 여고생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일부러 한 여고생을 차로 친 다음 병원에 데리고 가준다고 태웠다. 그 후 차에서 성폭행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얼굴과 등을 칼로 찔렀다.”
연주는 굳은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범인은 여고생의 학생증과 수첩을 보고 집 주소를 적어두고 협박했다. 신고하면 너와 가족까지 모두 죽인다고.”
연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고생이 신고했고, 결국 범인이 가족들을 몰살시킨 건가요?”
“…….”
나는 한숨을 쉰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연주가 푸들의 사체에서 눈을 떼고 날 바라본다.
“아니라고요?”
“그래, 여고생은 겁이 나 신고하지 않았다.”
“그럼 왜…….”
“범인인 세키 데루히코는 필리핀 성매매 여성들을 납치해 폭행하는 것을 즐기는 미친놈이었다. 문제는 이런 성매매를 알선하는 것이 야쿠자들이란 거지.”
“아…… 또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야쿠자들에게 걸렸군요?”
“음, 야쿠자들은 200만 엔을 위자료로 요구했고, 범인은 주변에서 가장 약한 사람에게 돈을 뜯을 생각을 했다.”
연주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게…… 그 여고생이었다는 거예요?”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겁이 나 신고하지 못한 여고생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해.”
“…….”
“계속…… 듣고 싶어?”
연주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건과 관계된 이야기라면 듣고 싶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성범죄 사건으로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연주를 괜히 자극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우리 팀원이다. 사건의 유사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어야 현재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
나는 숨을 돌린 후 말을 이었다.
“범인은 여고생의 집으로 찾아가 어머니와 할머니를 구타하고, 그들 앞에서 여고생을 범해. 그리고 돈을 요구했는데 아버지가 와야 돈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지.”
연주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렸습니까?”
“후…… 아니, 딸에게 시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 어머니가 다쳤으니 빨리 집에 와달라고 했다.”
“…….”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상황을 보니 가관이었던 거지. 흉기를 든 범인을 자극하지 않으려 한 아버지는 회사 금고에 통장이 있다고 둘러댔다. 범인은 여고생을 시켜 아버지 회사에 가서 금고의 통장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집에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다른 짓을 못 할 거라 생각했지.”
목 과장님도 눈을 감고 계신다. 이 사건은 내가 공부한 사건 중에 참혹하고 엽기적인 것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건이다. 목 과장님 역시 다시 사건을 복기하며 참담한 마음이 드신 모양이다.
“여고생은 무사히 집에 통장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범인은 통장을 받자마자 일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당시 집에 있던 4세 막냇동생까지 죽였다.”
“…….”
“여고생은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죽은 것을 보고 반항을 시작했고,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집 밖으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행인이 발견하고 신고를 해줬고 여고생은 기적적으로 살았다.”
내 설명이 끝나자 연주가 몸을 부르르 떤다. 분노와 소름으로 몸이 떨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연주는 형사로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예전에 피해자를 만난 적 있는 누군가가 돈을 위해 사건을 벌였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비슷한 범죄가 있었다는 선례로만 받아들여야 해. 완전히 같은 사건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
여기까지 듣고 있던 목 과장님이 사진 두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둔다.
“자, 여기.”
사진 속에 사건 현장의 TV 장식장이 보인다. 그 위에 남성 지갑과 여성 지갑이 나란히 있다.
“사망한 권지혁, 이지은 씨의 지갑이다. 현장에서 발견되었고, 둘 모두 현금이 없어졌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말 돈 때문에 이런 짓을 했다는 거야? 고작 지갑에 넣고 다니는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