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106화 (106/328)

살인의 기억 106화

9. 광기(狂氣)(4)

밤늦은 시간 강력계 회의실.

관우가 빔 프로젝터로 CCTV 화면 분석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경비 아저씨를 모시고 와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한 사람들을 일일이 대조했습니다. CCTV가 설치된 곳은 1층 엘리베이터 앞,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입니다. 사건 당일을 비롯해 앞의 일주일간 데이터를 분석 결과 이 아파트에 살지 않는 사람이 찍힌 건 모두 열 명입니다. 그중 생존자가 성폭행을 당했으므로 여성은 제외하고, 남성만 추리면 모두 다섯입니다.”

다섯. 그리 많지 않은 숫자다. 나는 팔짱을 끼고 물었다.

“어떤 사람들이었지?”

관우가 씩 웃는다.

“모두 분석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뭔가 알아낸 모양이다. 관우가 키보드를 연타하자, 화면이 바뀌며 날짜가 표기된다. 5월 19일의 영상이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현관 쪽을 찍고 있는 카메라에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큰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남자는 엘리베이터 앞에 CCTV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돌려 그대로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다.

연주가 화면을 자세히 보며 말했다.

“아파트 수리공 같아 보이는데.”

나는 얼른 관우를 보며 물었다.

“당시 권진아 씨 댁에서 수리 요청한 사실 있어?”

관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경비실에 확인해 보니 거실 쪽 화장실 배관에 문제가 있어 영선반에 수리 요청한 사실이 있답니다.”

“음, 그런데 이게 왜?”

관우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런데 영선반의 수리공이 이 집에 방문하기로 한 날짜는 5월 15일이었답니다.”

연주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수리공이…… 아니다?’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화면을 보여준다. 화면 속에 2층에서 내려온 검은 모자를 쓴 수리공이 아파트를 나서는 것이 보인다.

화면이 빠르게 지나가고 약 50분이 지난 후 재생 속도가 다시 원래의 속도로 돌아오자, 또 모자를 푹 눌러쓴 수리공이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내밀며 물었다.

“다시 왔다?”

관우가 다시 화면을 빠르게 돌린다. 약 30분이 지난 화면. 1층 현관 쪽을 비추는 CCTV에 또다시 수리공이 내려오는 것이 찍혀 있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바지가 달라졌구나.”

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올라갈 때는 검은 바지였는데 내려올 때는 하얀 바지를 입고 내려옵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남의 집 배관 수리하러 가서 바지를 갈아입고 오겠습니까? 여기서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바로 영선반에 물었더니 수리공은 아직 가지도 않았더군요.”

이놈이다. 이놈이 범인이다. 관우가 제대로 한 건 했다. 비록 얼굴은 식별되지 않지만 용의자가 파악되어 신체 스캔을 돌리면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 특징이나 걸음걸이로 동일인을 판별하는 이 방식은 몇 년 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관우가 목 뒤로 깍지를 끼며 물었다.

“흉기 확인됐습니까?”

방금 KCSI에서 돌아왔기에 목 과장님께 확인을 받은 연주가 답했다.

“부엌 식칼과 몽키 스패너.”

스패너. 배관 수리공이 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도구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경비 아저씨와 아파트 관제센터에 영상 보냈는데, 거기 수리공 중에 비슷한 사람은 없답니다. 아파트 수리공들은 의무적으로 모자를 벗고 일하게 되어 있답니다. 주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함이라고 하네요. 혹시나 해서 수리공들 인적사항 확인했는데 제일 젊은 사람이 53세였습니다.”

관우가 모자 쓴 남자의 얼굴을 확대한다.

“여기 구레나룻을 보면 무척 짧죠? 계단을 올라가는 뒷모습에 보이는 목 밑 머리도 짧습니다. 현재 수리공으로 일하시는 분들은 둘인데, 한 명은 장발이고, 한 명은 대머리입니다. 둘 다 이런 모자를 썼을 때 이런 머리 모양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범인은 어떤 루트로 권진아 씨의 집에 배관이 고장 났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배관공으로 위장해 집에 들어간 후 부모와 반려견을 죽인 것이다.

“사건 당시 권진아 씨는 집에 있었나?”

관우가 고개를 흔들며 다시 CCTV 화면을 보여준다.

“첫 방문 후 50분이 지나고, 다시 방문한 뒤 하얀 바지를 입고 나갔던 범인은 한 시간 후에 가방 없이 빈손으로 또 올라갑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권진아 씨가 왔습니다.”

“영상 보자.”

화면 속 권진아. 전혀 당황하거나 급해 보이지 않는다.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생생한 그녀. 이 상황을 알고 달려온 것이라면 이런 모습일 리가 없다.

“권진아는 이 상황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건데…….”

관우가 CCTV 화면을 모두 내리고, 디지털 포렌식 프로그램의 화면을 보여준다.

“여기 아버지인 권지혁 씨와 권진아 씨 핸드폰을 복원한 자료입니다. 사건 직후 확인 결과 총 세 개의 핸드폰이 발견되었으며 아버지, 어머니, 권진아 씨 본인의 것으로 보이는 핸드폰이 모두 부서져 있었습니다.”

역시 관우다. 안 시켜도 알아서 여기까지 수사를 진행했구나. 대단한 녀석. 관우가 검은 화면에 파란색 글씨로 문자들을 재생시킨다.

“여기, 권지혁 씨가 5월 19일 저녁 열 시 삼십 분에 권진아 씨께 보낸 문자가 있습니다.”

화면에 떠오르는 문자.

[진아야, 성년의 날 선물 사놨는데 집에 언제 오니? 빨리 들어와. 같이 저녁 먹자.]

언뜻 보면 별문제 없는 문자. 하지만 문자를 보낸 시간이 문제다. 나는 얼른 물었다.

“배관 수리공이 당일 몇 시에 집에 들어갔지?”

“첫 방문은 일곱 시. 두 번째 방문은 일곱 시 오십 분. 세 번째 방문은 열 시입니다.”

문자를 보낸 것은 열 시 삼십 분. 배관 수리공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면 이미 살해된 사람이 문자를 보냈다는 뜻이다.

연주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범인이 아버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구나. 이치카와 살인사건처럼…….”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CCTV 화면을 띄운다.

“권진아 씨가 집에 도착한 것은 그날 늦은 밤인 00시 30분경입니다.”

나는 눈을 감고 상황을 그렸다. 밤에 집에 도착해 아버지가 준다는 선물을 기대하며 현관문을 열었을 권진아 눈에 보인 참혹한 광경들이 상상된다. 그리고 무려 4일간 계속된 폭행과 감금.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관우가 KCSI가 보낸 자료들을 띄우며 말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두 개의 지갑에서 현금이 모두 사라져 있었습니다. 쓰레기통에서 소주병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컵은 없었답니다. 혹시나 해서 KCSI가 소주병의 주둥이 부분에서 DNA 채취를 시도했지만 입을 대지 않고 마셨는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답니다.”

범인은 지갑에서 현금을 가져갔고, 냉장고에서 소주까지 꺼내 마셨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말했다.

“이지은 씨 시신 사진 다시 보자.”

관우가 어머니인 이지은 씨의 사진을 띄운다. 얼굴 쪽에 칼에 의한 자상 아홉 개가 남겨진 시신이다. 나는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확대해 봐.”

시신의 얼굴이 확대된다. 아무리 KCSI가 부검을 위해 깨끗이 세척했다고 하지만 사람 얼굴에 찔린 상처가 저리 많은 사진은 보기 역하다.

나는 뚫어지게 이지은 씨의 얼굴을 보았다. 칼이 들어간 자리를 확인 중인 것이다. 연주는 보기 힘든지 고개를 돌리고 있다.

나는 사진 속 자상의 위아래 굵기를 자세히 보다 말했다.

“칼을 거꾸로 잡았다.”

연주가 고개를 획 돌리며 사진을 본다. 자상은 베인 것이 아니라 찌른 상처였다.

“어떻게 아세요?”

나는 칼을 잡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자상의 굵기를 보면 알 수 있어. 흉기는 부엌칼이야. 위는 굵고 아래는 얇은 도 형태다. 칼을 바로 잡고 저런 식으로 찌르면 반드시 범인 손에도 상처를 입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거꾸로 잡으면 내 손에는 상처가 남지 않아.”

연주가 내 얼굴과 사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럼 범인이 전문 칼잡이란 뜻인가요?”

“음…… 쉽게 단정할 순 없고. 어쩌면 군인일 수도 있다.”

“군인이요?”

“특수 부대나 해병대 출신이면 칼 잡는 법을 배워.”

“음…… 군 출신이거나, 특수부대 전역자…….”

아직 범인의 정체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타겟을 좁혀가야 한다.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권진아의 학교에 갔던 최영현이 뛰어들어 온다.

“용의자 찾았습니다!”

회의 중이던 우리 셋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최영현이 상기된 얼굴로 신상명세를 테이블에 던진다.

“이름 지현우, 24세. 권진아가 다니는 지명 대학교 동아리연합 회장입니다.”

나보다 한발 빠른 연주가 지현우의 신상명세 파일을 집어 들고 마구 뒤로 넘기더니 눈을 파르르 떨며 나를 본다.

“지현우…… 해병대 제대 후 복학…….”

여기까지는 맞아떨어 진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나는 최영현을 보며 물었다.

“용의자로 지명한 이유가 있습니까?”

최영현이 뒤를 보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응? 누굴 데려왔나? 고개를 내밀어 보니 회의실 밖에 주춤거리며 서 있는 대학생 무리가 보인다. 모두 네 명이다. 남자가 하나이고, 여자가 셋이다.

“누구죠?”

“권진아 씨 대학 친구들입니다. 진술을 위해 모셔왔습니다.”

최영현이 이 정도까지 말한다면 저 학생들에게 뭔가 들은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관우에게 말했다.

“더 보고할 거 없지?”

“예, 팀장님.”

“아파트 CCTV 싹 뒤져서 저 배관 수리공 나가는 모습 추적해.”

“예, 팀장님.”

“최 경위님과 연주, 그리고 나는 모두 참고인 진술 듣겠습니다. 연주야, 사람 배분해서 취조실로 보내줘.”

연주가 불안해하는 대학생들을 진정시키며 취조실로 데리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뒤늦게 와 관우가 브리핑하던 사건자료들을 훑고 있는 최영현에게 물었다.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최영현이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데이트 폭력입니다.”

“…….”

“지현우와 권진아가 잠시 사귄 모양입니다.”

데이트 폭력. 사랑을 빙자한 폭력의 형태. 그것은 어쩌면 보통의 폭행 범죄보다 더욱 사람을 아프게 하는 범죄일지도 모른다. 한때 사랑하던 사람에게 받은 폭행의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테니.

또한 이러한 범죄 발생 시 원한 범죄를 먼저 의심해 수사하는 것이 기본이기도 하다.

“사건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최영현이 한숨을 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예전에 지현우가 권진아에게 전치 3주의 폭행을 한 적이 있답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현우가 권진아를 폭행했다? 사귀는 도중에 말입니까?”

최영현이 고개를 저었다.

“사귀던 때도 그런 일이 한 번 있었고, 헤어진 후에 학교 화장실에서 전치 3주의 폭행을 한 모양입니다.”

나는 얼른 관우에게 눈짓했다.

“지현우 전과 확인해.”

관우가 빠르게 검색을 한다. 하지만 녀석은 검색 결과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권진아 씨 폭행 관련 전과는 없는데. 그런데…… 팀장님. 이게 좀.”

“왜? 뭐 있어?”

“이 사람…… 해병대에서 집행유예 1년 받았는데요?”

“응?”

군대에서 영창이 아니라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집행유예를 받은 전과가 있다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놈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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