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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107화 (107/328)

살인의 기억 107화

9. 광기(狂氣)(5)

관우는 키보드를 연신 두들겼지만 폐쇄성이 짙은 국방부 인프라에 접근해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는지 금방 고개를 젓는다.

“기록상 남아 있는 건 폭행으로 인한 군사재판, 집행유예 1년 선고라는 정보밖에 없습니다.”

최영현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내 주변에 군대 가서 영창 다녀왔다는 놈은 몇 있지만 군사재판까지 가서 집행유예 받은 놈은 없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피해자는 누구냐?”

관우가 마우스 휠을 내리며 말했다.

“후임병으로 보이고, 이름은 박재상, 23세이고 지금은 제대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전역 계급이…… 상병이네요?”

최영현이 코끝을 찡그렸다.

“후유 장애가 있었던 모양이네. 의병가 제대가 아니면 상병 제대 사유가 없지.”

그쪽은 천천히 알아봐도 될 일이다. 지금 중요한 건 과거의 죄가 아니라, 현재의 죄니까. 아직 지현우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상대는 일가족을 처참하게 몰살시킨 흉악범이다. 주요 용의자를 이대로 거리에 활보하게 둘 순 없다. 나는 일단 관우에게 지시했다.

“관우는 여기서 권진아 씨 댁에서 나온 배관 수리공 동선 계속 추적하고, 시간 남으면 지현우 개인신상 확인하도록 해. 최대한 자세히.”

“예, 팀장님.”

최영현과 함께 밖으로 나오니 학생들을 각기 다른 취조실에서 대기하게 한 연주가 말했다.

“일단 한 명씩 맡으면 될 것 같습니다, 팀장님.”

최영현이 냉큼 말했다.

“제가 1번 취조실 맡죠.”

연주가 날 바라본다. 먼저 고르라는 뜻이겠지.

“먼저 골라, 난 남는 곳에 들어갈 테니.”

연주가 잠시 고민한 뒤 3번 취조실에 있는 학생을 고른다. 내게 배정된 것은 2, 4번 취조실에 있는 두 명의 학생. 물론 최영현과 연주 둘 중에 누군가 먼저 진술이 끝나면 나머지 한 명을 맡아줄 것이다.

아직 학생들에 대한 신상도 모르는 상황. 어디에 어떤 학생이 있는지 모르고 일단 2번 취조실 문을 열자, 남학생이 앉아 있다.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취조실에 앉아 있으니 괜히 좌불안석이던 학생이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본 나는 손을 휘휘 저어 보이며 말했다.

“아,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참고인 진술일 뿐입니다.”

“…….”

내 말에도 엄청 불편한 자세로 엉거주춤 앉는 남학생. 나는 간단히 그의 신상을 묻고 기록했다. 이름은 정명훈. 대전 지명 대학교 2학년이고 군대는 미필이다.

나는 노트북을 두드리다 물었다.

“함께 온 형사님께 지현우가 범인일 거라고 진술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랬습니까?”

정명훈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 형은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고…… 또 엄청 폭력적인 사람이거든요.”

“두 얼굴이요?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게…….”

정명훈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 평소에 다른 이의 뒷담화에 끼지 않는 성격일 것이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좋은 학생이다.

나는 괜찮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같이 온 다른 친구들이 진술할 겁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

정명훈이 잠시 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현우 형을 처음 알게 된 게 동아리 연합 술자리 때였습니다. 제가 1학년 때였는데 그때 정말 호탕하고, 남자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동아리였습니까?”

“아, 같은 동아리는 아니고, 현우 형이 동아리 연합 회장이거든요.”

“연합 회장?”

“네, 학생회장만큼은 아니지만 교내 영향력이 큰 자리죠.”

대부분의 학생이 동아리 하나쯤은 든다. 그런 동아리 모임의 연합 회장. 꽤 많은 돈을 만질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명예로운 자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현우는 군대에서 전과를 달았다. 이 학생들은 지현우가 전과자라는 걸 모르고 그 자리에 앉혔을 것이다.

“네, 그런데요?”

“진아는 올해 들어온 신입생입니다. OT 마치고 동아리 미팅부터 나왔죠. 연합 술자리를 자주 갖는 편인데 거기서 현우 형이 진아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권진아 씨는 어땠습니까?”

“진아도 처음엔 좋아했습니다. 형이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남자답고 시원시원한 사람이거든요.”

“아까 두 얼굴이라고 하셨는데. 그것과 지현우 씨 성격이 관련 있습니까?”

정명훈이 다시 침을 꿀꺽 삼킨다.

“그게…… 오늘 같이 온 친구 중에 진아와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지혜라고…….”

나는 연주가 주고 간 학생 리스트를 대충 살폈다. 이름 김지혜. 아직 아무도 참고인 진술을 받지 않고 대기 중이다.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4번 취조실로 가 문을 열었다. 단발머리에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흠칫 놀라며 날 바라본다.

“혼자 기다리기 적적하죠? 지금 정명훈 씨 참고인 진술을 듣는 중인데. 같이 하시죠, 시간 절약도 할 겸.”

“아…… 네!”

김지혜가 얼른 일어난다. 아무래도 이런 곳에 혼자 앉아 불안해하며 기다리기보다 그쪽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쪼르르 정명훈이 있는 취조실로 달려가는 김지혜. 친구가 어디 있는지 묻지 않고 달리기부터 했지만 문 열린 취조실이 하나뿐이니 금방 찾아 들어간다.

김지혜를 따라 취조실로 오자, 함께 있어 그런지 표정이 한결 나아져 있는 두 사람. 나는 편안히 손깍지를 끼고 물었다.

“정명훈 씨 말이, 김지혜 씨가 권진아 씨와 친했다고 하던데.”

김지혜가 정명훈을 힐끔 본 후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맞아요. 친해요.”

“정명훈 씨와 대화하다 보니 지현우 씨가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면이 달랐다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지혜 씨 이야기가 나와 한자리에서 이야기 듣고자 합류하게 된 것이고.”

김지혜가 몸을 내밀며 말했다.

“그 자식은 미친놈이에요!”

응? 갑자기?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김지혜가 잔뜩 인상을 쓰고 말했다.

“그 자식이 진아와 사귄 게 삼 개월도 안 됐던 때였어요. 그날도 동아리 연합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새끼가 저와 진아가 친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제 앞에서 진아 욕을 하는 거예요. 술에 취해서 주절주절하는데, 애들도 다 듣는데 진아와 둘만 아는 이야기까지 다 늘어놓으면서. 마치 이런 게 남자다. 난 내 여자라도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하는 멋진 남자다. 막 이 지랄……. 아,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으니 계속하세요.”

김지혜가 자리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너무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래서 술자리에서 대놓고 뭐라고 했어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애들 다 듣는 앞에서 뭣 하는 거냐고. 진아가 알면 얼마나 창피하겠냐고, 그러고도 네가 남자 친구라고 할 수 있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뭐라고 합니까?”

정명훈이 쓱 끼어든다.

“갑자기 소주병을 들어서 지혜를 때리려고 했습니다. 바로 옆에 있던 저와 친구들이 뜯어말렸고요.”

기분이 나빴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을 소주병으로 때리려고 했다고? 그건 살인미수가 될 수 있는 특수폭행이다. 게다가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면 특수범죄가중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정명훈이 말을 잇는다.

“그때부터 좀 이상했어요. 원래는 진짜 시원시원한 사람이었거든요. 삐치는 것도 없는 진짜 남자. 진짜 쿨해서 후배들이 좋아하던 형이었는데 아무리 술기운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한테 소주병을 휘둘러요?”

“술자리가 끝난 후에 지현우 씨는 뭐라고 했습니까?”

“사과는 받았어요. 술이 너무 취해서 그랬다고.”

“음.”

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상대의 평판은 바닥에 떨어질 수 있지만 이게 상대가 살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증명할 순 없다.

그때 김지혜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근데 사과도 완전 건성으로 했어요. 받으려면 받고 말려면 말아라 하는 식으로. 너무 열 받아서 진아를 불러내서 카페에서 그날 일을 이야기했어요. 네 남자 친구가 애들 다 듣는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더니 내게 소주병을 휘두르고 다음 날 건성으로 사과하더라. 뭐 그런 인간을 사귀냐, 이렇게요.”

열 받은 건 알겠는데 이 여자도 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인가 보다. 그냥 팩트만 말하면 될 것을.

“그래서 권진아 씨는 어떻게 했습니까?”

“화냈죠, 당연히 화나죠! 형사님 같으면 화 안 나요?”

몰라, 연애를 안 해봤거든.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화가 나긴 하겠네.

“그래서 두 사람이 싸우게 됐습니까?”

“네! 대판 싸우고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래서 헤어졌나요?”

“진아가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했는데 그 쓰레기가 절대 안 된다고 빌고 또 빌고 난리도 아니었죠.”

음, 뭔가 가면 갈수록 10대 하이틴 드라마 내용 같은데. 이거 계속 들어야 되나? 아냐, 그래도 대전에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대학생이면 사리분별 하는 나이이니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눈짓으로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김지혜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한 달을 피해 다녔어요, 진아가. 애들이 막 그 새끼 지금 어디 지나간다고 톡으로 알려주면 일부러 피해 다니고 그랬거든요? 아니, 막말로 진아가 뭘 잘못했어요? 피해 다니려면 그 새끼가 피해 다녀야지, 왜 피해자인 진아가 피해 다녀요?”

끈질기게 들러붙는 전 남자 친구를 한 달이나 피해 다녔다. 음, 이건 법으로 걸면 충분히 걸고넘어질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전히 살인을 할 수 있는 친구로 볼 수는 없다.

“그리고요?”

김지혜가 정명훈을 바라보며 눈짓한다. 이제 정명훈 차례인가 보다.

“전공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좀 특이하셔서 수업 시간에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은 말없이 조용히 뒷문으로 다녀오게 하셨거든요. 전날 술을 좀 마셔서 전 출석만 하고 엎드려 자려고 누웠는데 진아가 일어나서 뒷문으로 나가더라고요. 화장실 가나 보다 하고 그냥 엎드려 있었습니다.”

김지혜가 끼어든다.

“저도 봤어요. 그런데 수업 시간이 세 시간인데 진아가 한 시간이 지나도 안 돌아오는 거예요. 이상하다 싶어서 쉬는 시간에 애들 모아서 화장실로 갔어요. 근데 아무도 없는 거예요. 뭔가 이상해서 화장실 문을 하나하나 열어봤는데 글쎄! 화장실 맨 끝에서 두 번째 칸 바닥에 피가 튀어 있는 거예요.”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여기구나. 이래서 이 학생들이 서울까지 올라온 것이구나. 나는 잠시 상황을 정리해 본 뒤 물었다.

“바닥에 있는 피의 양은 얼마나 됐습니까?”

여자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이라 그런지 김지혜가 다시 답했다.

“코피 쏟은 정도요.”

“그게 권진아 씨 피라는 증거는 없을 텐데.”

정명훈이 끼어든다.

“예, 저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친구들도 일부가 그렇게 말했고요. 그래서 혹시 모르니까 전공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려 보자 하고 다시 수업에 들어갔는데 수업이 끝날 때까지 진아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김지혜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때 빨리 지현우 그 새끼 자취방 가 보라고 했었잖아! 그때 바로 갔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됐을 거 아냐!”

정명훈이 슬쩍 고개를 숙인다. 미안한 얼굴이다. 나는 김지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게 안 됐을 거란 건 무슨 뜻입니까?”

김지혜가 마른세수를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날, 수업 시간 도중 화장실에 갔던 진아는 화장실에서 그 새끼를 우연히 마주쳤어요. 그리고 거기서 심각한 구타를 당하고, 자취방까지 끌려가서 맞았어요.”

나는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자기 여자 친구를 때렸다고? 그것도 자취방까지 끌고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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