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45화
12. 지하철 괴담(11)
청량리역 플랫폼.
이미 시신이 발견되었으나, 뒤쫓던 살인사건의 시신이 한 구가 아니라 여러 구였으므로, 추가 발견되는 시신이 있을 수 있어 수색 작업을 지속하라는 지시를 받고 지휘를 하던 오진규 경감이 선로 위로 뛰어올라 가장 가까이에 있던 형사에게 말했다.
“어디까지 수색했어?”
“선로는 플랫폼부터 200미터까지 수색 완료했습니다.”
“음, 일단 300미터까지로 늘리고, 여기 직원들 다니는 통로 있을 거야. 설계도면 기준으로만 찾지 말고, 직원 한 명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수색해.”
“예, 알겠습니다.”
오진규 경감은 손을 툭툭 턴 후 주머니에 넣고 수색에 여념이 없는 동대문 경찰서 인력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다.
‘국가수사본부가 아니더라도, 내가 할 일은 어디에나 있다.’
사실 그는 국가수사본부의 수사1과 해체 후 며칠을 술에 의지해 살았다.
수사 중에 피해자가 사망한 것을 자신 탓으로 미루는 언론을 보았을 때도, 수사1과가 해체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따르던 가족 같은 부하 형사들이 다른 서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을 때는 정말 절망했다.
술만 퍼마시던 오진규 경감을 정신 차리게 한 것은 동료도, 가까운 상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쳐 본 적이 없던 사람. 대한민국 경찰의 정점에 서 있는 신임 청장 강혁이었다.
동네 아저씨처럼 건들거리며 나타나 소주나 한잔하자던 그 사람. 그는 순댓국집에 앉아 며칠 굶은 사람처럼 국밥을 퍼먹으며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요한 절망 속에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지금 밑바닥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아직 진짜 밑바닥이 아닌 거요.’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잔만 기울이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오 경감, 사람이란 짐승은 원래 희망에 속기보다 절망에 속는 거요. 그리고 스스로 만든 절망을 두려워하는 거지, 병신들. 무슨 일이 실패하면 비관하고 이젠 앞길이 막혔다고 생각해 버리고 말지. 그러나 어떠한 실패 속에서도 아직 희망으로 통하는 길은 남아 있는 겁니다.’
고개를 든 오진규 경감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경찰청장. 그가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희망의 봄은 달아나지 않고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청장의 말. 사실 그의 입장에서 자신은 쓰다 닳으면 언제든 갖다 버릴 장기 말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수행 인원 하나 없이 찾아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위로를 해주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를 만난 다음 날, 오진규 경감은 동대문 경찰서로 발령받았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 사건, 그리고 다음 사건. 국가수사본부 때처럼 심각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피해자를 만나고 범죄자를 잡고, 안심한 피해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경찰이라는 직무가 주는 소명감과 만족감.
피로에 찌들어 어느새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되찾고 난 후부터 오진규 경감은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중이다.
오진규 경감은 공사 중인 구간을 벗어나 유동 인구가 많은 환승 플랫폼에 도착했다. 지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던 그는 지나가던 순경을 붙잡고 말했다.
“저기 CCTV 보이지? 저쪽 것도. 전부 회수해 와.”
“기간은 어떻게 할까요?”
“30일 치 전부. 범인 새끼가 다시 여길 지났을 수도 있어.”
“예, 알겠습니다.”
물론 본다고 누가 범인인지 아는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는 건 해봐야 한다. 비록 이 사건이 동대문 경찰서의 공로가 아니라 국가수사본부의 공로가 되는 건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경찰이고, 본분을 다해야 하니까.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오진규 경감의 눈동자에 어느 순간 이채가 감돈다.
‘현도경 과장?’
저 멀리, 현도경 과장이 보인다.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참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이다.
어린 친구가 벌써 자신을 뛰어넘어 경정의 자리까지 갔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질투도 나고 시기를 했을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 사람에게는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사실 별로 친분도 없는 사이다. 마주친 거라고는 대전광역수사대 시절에 지현우를 쫓던 때 잠시 공조한 것뿐. 어떤 사건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으며, 바쁜 국가수사본부 시절에는 한두 번 복도에서 마주친 것이 전부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오진규 경감은 이상하게 현도경이란 자에게 관심이 많았다. 어쩌면 장영훈 본부장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천재 형사라 들어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사람 자체에 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여기 있지? KCSI로 간 거 아니었나?’
아까 이쪽 조사를 마치고 KCSI로 가는 걸 봤는데. 왜 다시 돌아왔을까? 오진규 경감은 도경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썹을 꿈틀거린다. 어딘가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도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움직임이 이상하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경계하며 천천히 따르고 있다.
도경의 움직임이 전형적으로 범인을 미행하는 형사들의 움직임이란 것을 눈치챈 오진규 경감은 그의 수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멀리 떨어져 따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는 도경을 따라 올라가다 지하철 도착 알림이 나오자, 뛰는 걸 보고 함께 뛴 오진규 경감.
도경이 선 플랫폼 두 칸 건너에 서서 그를 바라보는 오진규 경감은 확신을 가졌다. 그가 한쪽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추적 중이다.’
이 상황에 누굴 추적하는 걸까? 국가수사본부는 한 팀에 한 사건만 배정한다. 그 말은 지금 그가 추적하고 있는 이가 이번 사건의 용의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도 범인의 얼굴을 모르는 이때, 어떻게 범인을 추적하고 있는 걸까?
몽타주? 그건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아까 확인했을 때는 김연주 경사가 몽타주 작업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즉, 현도경 과장도 아직 범인의 얼굴을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린다. 도경은 문이 열리자마자 탑승한다. 오진규 경감은 그런 도경을 가만히 바라보다 자신 앞에 열린 문으로 발을 들인다.
* * *
노약자석 앞에 서서 지하철 짐칸에 올려져 있던 신문을 주워 보는 척 펼쳤다. 하지만 내 신경을 온통 범인에게 가 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범인들의 꼬리를 잡았다. 지하철역에서 멍 때리며 생각에 빠져 있다 범인을 추적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구리 방향으로 가는 중앙선.
범인은 꽤 한참이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이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는 계속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통화를 하며 습관적으로 두리번거리는 통에 그를 계속 관찰하기는 어렵다.
그때, 지하철 안내 방송이 들린다.
-이번 역은 양원, 양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This stop is Yangwon, Yangwon Station. The doors are on your right.
양원역이다. 범인들이 시신을 끌고 탔던 바로 그 역. 내릴 확률이 높다는 생각에 곁눈질로 범인을 노려보았다. 범인은 지하철 중앙에 매달린 화면과 지하철 칸 전체를 노려보고 있다.
‘분명히 이번 정거장에 내린다.’
범인은 아마 문이 닫히기 직전에 내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 내리는 사람을 경계할 것이다. 모험을 해볼 것인가, 아니면 놓칠 것인가.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모 아니면 도다.’
어차피 급하게 따라 내리면 걸린다. 차라리 먼저 내려 기다리는 쪽에 걸자.
나는 손목시계를 보는 척하다 내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자연스럽게 하차했다. 내리는 이가 한 명뿐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늦지 않게 타이밍 맞춰 내렸으니 추적을 예상하진 못할 거다.
지하철 문을 스쳐 지날 때 일부러 운동화 끈을 발로 밟아 풀었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발견하는 시늉을 하곤 문 맞은편에 있는 승강장 벤치에 앉아 운동화 끈을 묶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나는 창문으로 통해 범인을 노려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닫힌다는 신호음이 들릴 때쯤 범인이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범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끈을 묶었다.
그놈이 내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간다. 내 눈앞에 범인의 발이 있다. 당장 잡아채 쓰러뜨리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
이놈이 범인인지 아닌지 밝히기 어려운 건 아닐 거다. 버젓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놈이니 CCTV로 동선 추적이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의 일당을 일망타진하기는 어렵다.
‘일단 아지트를 확인 후에 지원을 부른다.’
무모한 짓을 할 순 없다. 아지트만 확인하면 바로 지원을 부를 셈이다. 운동화 끈을 일부러 천천히 묶은 나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며 주변을 쓱 보았다.
저 멀리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범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시야에서 놈이 사라지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 계단 앞에 섰다. 또다시 계단 끝에서 오른쪽 코너로 몸을 트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
잠시 후 달동네 입구.
들키지 않게 추적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유동 인구가 극히 적은 곳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녀석 덕분에 여러 번 상가 뒤편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일부러 건물을 돌아서 뒤편으로 가기도 하고, 갑자기 사라진 녀석 때문에 전력으로 달리기도 해야 했지만 나는 놈을 놓치지 않았다.
다 쓰러져 가는 주택가를 걷는 범인. 오르막길의 달동네를 올라가는 놈에게서 한참을 떨어져 걷던 나는 그가 한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놈이 날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잠시 담벼락에 기대 속으로 스물까지 숫자를 센 후 다시 몸을 드러냈다. 어두운 골목길엔 아무도 없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놈이 들어간 건물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생소한 구조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가 텅 빈 구조의 건물. 위에서 보면 ‘ㄷ’자 형태로 지어진 3층 건물이다. 아주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일단 뒷문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 건물을 통과해 다른 곳으로 갔다면 빨리 다시 추적해야 한다.
건물 주변을 빙 돌았지만 모두 높은 담벼락으로 막혀 있다. 범인은 분명히 이 건물 내부에 있다. 나는 눈으로 건물에 몇 개의 방이 있는지 확인했다.
1층부터 3층까지 각 층마다 다섯 개의 창문이 있다. 저것이 다섯 개의 방을 의미하는지, 하나의 방에 다섯 개의 창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가운데 지하실로 가는 계단이 있다.
나는 몸을 숙이고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 앞까지 달려간 뒤 전화를 꺼냈다.
일단 지원 요청을 하는 편이 좋겠다.
계단 옆 복도 담벼락에 기대 연주 전화번호를 누르던 바로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얗게 변할 만큼 강한 충격을 받았다.
“윽!!!!”
콰당!
후두부를 가격당하는 바람에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 속에 전화기를 놓치며 앞으로 고꾸라진 나. 아득하게 흩어지는 의식 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 하는 새끼야, 이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날 때린 놈을 보았다. 시야에 문제가 생겼는지 흐릿한 안개 속에 선 자의 손에 각목이 들려 있는 것이 보인다.
“이 개…….”
흐릿한 그의 몸이 급격히 휘어지며 다시 각목이 날아든다.
뻐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