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78화
14. 목격자(14)
탁탁탁탁, 탁탁탁탁.
극심한 위아래 진동. 누군가의 발소리. 따뜻한 품. 추운 날씨. 나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여러 환경 요인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지금 위아래 진동 운동 때문에 어지러운 상태이다.
여긴 어디야? 이건 누구 기억이야? 최예림 선생의 기억일까?
나는 눈을 굴려 위를 보았다. 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의 턱이 보인다. 턱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내 주변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밖의 날씨가 이렇게 추운 걸 보니 겨울인 모양인데 이 여인은 무슨 일로 이렇게 땀을 흘리고 있을까?
나는 주변을 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몸에 힘이 없다.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몸도 말을 듣지 않는다. 손가락을 오므리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날 안고 있는 여인의 가슴이 들썩거리며 터질 듯 뛰는 심장 소리가 느껴진다.
콩닥, 콩닥, 콩닥…… 쿵쿵쿵…….
‘헉! 헉! 헉! 헉!’
지금 이 여자. 뛰고 있는 건가? 난 이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다. 설마 지금 난 아기인 건가?
여성의 턱이 보이는 내 시야에 하얀색에 아기자기한 무늬가 들어간 포대기가 보인다. 제길, 아기의 기억이구나. 고개를 돌릴 수 없으니 주변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다.
나는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외부 환경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날이 춥다. 지금은 겨울이다. 하지만 너무 춥진 않다. 봄일 수도 있겠다.
코끝을 간질이는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다. 지금은 새벽일까? 빛이 어스름하다.
나는 지금 급하게 뛰고 있는 여성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이다. 몸을 전혀 가눌 수 없다.
여성은 직선으로 뛰고 있지 않다. 갑자기 방향을 틀기도 하고 비틀거리다 우뚝 멈추기도 한다. 그녀는 골목길을 뛰고 있는 모양이다.
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 시야.
턱밖에 안 보이는 여성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이 보인다. 벌써 다섯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쫓기고 있는 건가?’
왜 쫓기는 거지? 누구에게 쫓기는 거지?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니 답답하다. 왜 하필 아기의 기억인 걸까? 조금만 더 큰 아이였음 좋았을 텐데. 너무 갓난아기라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볼 힘이 없다.
여성은 한참을 달렸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소리도 질렀다.
‘악!’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소리를 지르고 나면 꼭 급격한 방향 전환이 있다. 실시간으로 쫓기고 있는 거야? 누군가 쫓아오고 있는 거야? 골목길에서 그를 마주치고 다시 도망가는 상황인 건가?
여성은 사력을 다해 달린다. 이러다 이 사람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가슴에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빠르다.
‘헉! 헉! 헉! 헉!’
여성은 한참을 달리다 품에서 날 꺼냈다. 순간적으로 바깥 모습이 보인다. 저게 뭐지? 방금 붉은 건물 위에 뭐가 있었는데. 뾰족한 구조물 같다.
여자가 계단 위에 날 내려놓는다. 처음에는 그냥 포대기에 싼 나를 계단 바닥에 놓았지만 곧 오늘 배달 온 신문 뭉텅이를 가지고 와 그 위에 날 올린다.
신문에 글들이 보였지만 너무 순식간에 지나갔다. 대충 보긴 했는데 제대로 식별되질 않는다. 여성이 내 이마를 만지며 눈을 바라본다.
너무나 슬픈 눈빛. 너무나 급박하고 낭패한 얼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여성이 내 이마를 만지며 눈을 맞춘다.
‘엄마가 미안해. 금방 찾으러 올게. 조금만 기다려, 내 아기.’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 긴 생머리를 가진 여성은 마치 결혼하지 않은 여자같이 젊어 보인다. 전체적으로 매우 단아한 얼굴. 이 정도 미인이면 인기도 꽤 많을 것 같다.
여자는 잠시 날 바라보다 급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놀란 눈빛의 여성이 움찔한다. 그러고는 바라본 방향을 향해 뛴다.
잠깐, 그 방향에서 뭐가 나온 거 아냐? 왜 다시 거기로 가? 반대로 도망을 쳐야 맞지! 하지만 여성은 그대로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추운 겨울 포대기에 싸여 홀로 남겨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늘만 올려 보던 나는 슬슬 배가 고파졌다. 엉덩이가 축축한 것이 오줌까지 싸버린 모양이다.
언제 오는 거야? 나 버려진 거야? 어떻게 된 상황이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우는 것. 나는 사력을 다해 울었다. 내가 여기 있다. 날 좀 살려줘. 누구라도 좋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울었다.
* * *
“과장님? 과장님.”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노란색 조명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상담실.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늘 그랬듯 남의 기억을 읽고 밀려올 어지러움에 대비했다.
“어……?”
응? 어지럽지 않다? 나는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최예림 선생의 얼굴이 보인다. 기억을 읽은 직후에는 사람 얼굴이 두 개로 보일 만큼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은 예외다. 기억이 아니라 꿈이었던 걸까?
“제가…… 잠들었습니까?”
최예림 선생은 내가 잠이 들었을 때 뭔가 메모를 했는지 수첩을 닫으며 말했다.
“네, 잠드셨어요.”
“아…… 요즘 좀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최예림 선생이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리고 있는 날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앞으로 매주 1회씩 치료를 진행하겠습니다.”
“치료는 무슨. 이제 괜찮습니다. 그냥 피곤해서…….”
“과장님.”
“예?”
“방금 과장님 많이 우셨어요.”
“…….”
울었다고? 서른 넘은 남자가 울어? 하, 쪽팔려. 이래서 정신과 상담이 싫었던 거다. 정신이 없을 때 내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 모르니까.
최예림이 말했다.
“한 시간이 넘게 우셨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시간이 넘게?”
“네.”
나는 벽시계를 확인했다. 헐, 두 시간이나 자버렸다. 벌써 퇴근 시간이다. 최예림 선생이 말했다.
“과장님은 남의 기억을 보신다고 들었어요.”
“…….”
“그 과정에서 살인범이나 피해자의 기억도 보셨을 겁니다. 살인하는 순간에 범인이 느꼈던 희열도, 살해당하는 순간에 피해자가 느낀 공포심도 모두 느끼시며 수사를 하신 겁니다.”
“…….”
“과장님 마음속에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계속해서 쌓이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과장님의 정신건강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반드시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음,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긴 한데. 하지만 난 진짜 괜찮다. 스트레스 따위 소주 한잔에 털어버리면 되는데.
최예림 선생이 일어나며 말했다.
“청장님 특별지시도 있었던 만큼 치료 거부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무조건 주 1회는 나오세요.”
“하…….”
“아니면 청장님께 바로 전화드릴 거예요.”
“……알겠습니다.”
“시간 충분히 드릴 테니 천천히 일어나 정신 차리시고. 물 드릴까요?”
“아, 감사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네, 잠시만요.”
나는 천천히 의자의 전동 스위치를 눌러 등받이를 올렸다. 오래 누워 있다 일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띵하긴 하지만 평소에 워낙 어지러움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금세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바로 앉은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 있는 선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기억은 뭐야? 정말 꿈인가?’
나는 기억 속에서 봤던 젊은 여인을 떠올렸다. 최예림 선생의 기억인가? 얼굴이 다르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그녀 얼굴을 나는 모른다.
나는 순간적으로 주변을 훑었다. 사진이 걸린 액자 몇 개가 있었지만 대부분 최근 사진이다. 젊은 시절 그녀의 얼굴이 이 방에는 없다.
최예림 선생이 작은 물병을 하나 내주며 말했다.
“드세요.”
나는 물병의 뚜껑을 따며 아무렇지 않게 슬쩍 물었다.
“실례지만 선생님 연세가 어찌 되십니까?”
최예림 선생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자에게 나이 묻는 건 실례라는 거 몰라요?”
“아, 어려우시면 됐습니다.”
“하하, 아뇨. 치료를 위해 환자와 긴밀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건 당연합니다. 과장님은 올해 서른넷이죠? 전 마흔여덟입니다.”
음, 마흔여덟.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 엄청난 동안이구나. 나보다 열네 살이나 많을 줄이야.
“혹시…… 결혼은.”
“네, 했어요.”
나는 방금 이 방에서 기억을 읽었다. 이 방에는 선생밖에 없다. 이 사람의 기억이었던 걸까?
“혹시 아이가 있으십니까?”
“네, 있어요. 딸이 둘이죠.”
딸? 내가 읽었던 기억 속 아기가 딸이었나? 내 몸을 볼 수가 없었으니 알 수가 있나. 최예림 선생이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요? 결혼하고 싶어요? 요즘 그런 생각이 드나요? 어린아이들을 보면 예뻐 보이나요? 청장님 말로는 여자친구는 없다고 들었는데.”
젠장, 별 이야기를 다 했네, 이 아저씨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나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혹시 딸이 어릴 때 위험한 상황은 없었습니까?”
“음?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쫓겼던 기억이나.”
“딸이요?”
“아뇨, 딸을 안고 있던 선생님 본인이.”
최예림 선생이 잠시 생각해 본 뒤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어요. 제 딸들은 국적이 한국이 아니거든요. 미국에서 태어나서 쭉 거기서 자랐어요. 8년 전에 가족이 모두 한국에 들어왔지만 딸들은 여전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죠.”
미국. 방금 기억 속에서 본 장소가 미국이었나? 전혀 모르겠다. 도대체 이 기억이 뭐지?
나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선생이 사용하는 책상이 하나. 내가 앉아 있는 전동 의자가 하나. 나머지는 모두 책장에 가득한 책들뿐인 공간.
‘여기서 상담받았던 사람의 기억일까?’
그럴 수도 있다. 나는 손은정 씨의 차를 조사하던 도중, 차에 남겨진 기억을 읽은 적이 있으니까. 하, 이렇게 장소나 물건의 기억까지 읽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시도 때도 없이 기억이 보일 것이고 개중에는 사건 해결과 관계없는 기억까지 보일 테니까.
나는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다음 예약은 언제로 할까요?”
“목요일 시간 괜찮나요?”
“네, 뭐 별일 없으면 가능하긴 한데.”
“그럼 목요일 이 시간으로 하죠.”
“혹시 사건 배당되면 못 올 수도 있는데.”
“하하, 청장님이 안 그래도 그 소리 할 거라고 하시더니. 수사 중에도 반드시 방문하라고 하셨어요. 일일이 다 확인할 거라고.”
“…….”
“꼭 오세요, 아셨죠?”
“네…….”
“그럼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하, 귀찮게 생겼네. 그래도 생각보다 치료가 괜찮다. 뭔가 이상한 기계를 돌려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낮잠 자듯 가만히 누워서 마음만 비우면 되니까. 다음에도 같은 치료일지는 모르지만 이런 치료라면 받을 만할 것 같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도경이 나가자 혼자 남겨진 선생. 그녀는 가만히 문을 바라보다 전화를 들었다.
“접니다, 청장님.”
최예림이 도경이 나간 문을 힐끔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더 나쁜 것 같습니다. 네, 네. 앞으로 계속 치료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억을 본다는 것 말인데. 매개체가 있는 겁니까? 아직 정확히 어떤 상황에 발동되는지는 모르시고요? 아…… 악의? 경찰이 악의를 가져야 기억을 본다는 말씀인가요? 음, 아이러니한 상황이네요. 일단 알겠습니다. 더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예림 선생이 손깍지를 끼며 생각에 잠겼다.
“과장님께 기억을 읽는 능력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강제로 기억 읽는 작업을 최소화할 수는 없다는 거야. 치료에 난항을 겪을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최예림이 도경이 앉았던 의자를 바라보았다. 잠이 든 도경이 보였던 반응이 떠오른다.
“몸을 위아래로 들썩이며 숨을 헐떡이다 아기처럼 큰 소리로 울었다.”
성인도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아기의 울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감정이 움직여 우는 성인과 달리 아기는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할 방법으로 울음을 택하기 때문이다. 방금 도경은 아기처럼 목청껏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최예림 선생이 의자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건. 방금 전에도 기억을 읽었다는 뜻이네. 설마 내 기억은 아니겠지? 그건 좀 부끄러운데.”
사실 도경이 잠에서 깬 뒤 질문을 던질 때 이미 눈치챘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기억은 자신의 기억이 아닌 것 같다. 턱을 괸 최예림 선생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내 기억은 아닌 것 같고. 그럼 누구 기억을 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