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217화 (216/328)

살인의 기억 217화

17. 증거(證據)(1)

“허허, 과장님. 뭐 좋은 일 있으십니까?”

“오, 과장님 오늘 피부 완전 좋으시네요.”

“과장님, 왜 그렇게 웃으시는 겁니까? 설마 또 승진하십니까?”

사무실로 들어온 날 본 팀원들이 한마디씩 던진다. 좋은 게 그렇게 티가 많이 나나?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놀림감이 되어도 오늘만은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은 별달리 특별한 일이 없다. 앞의 사건이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허해청은 아직 유치장에 있고 검찰에 송치하기 위한 서류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오진규가 외투를 입으며 말했다.

“저 KCSI 가서 증거물 좀 받아 오겠습니다. 검찰 측에서 요청한 게 좀 있어서요.”

“네, 다녀오세요.”

오진규가 나가자 이번엔 연주가 일어난다.

“과장님, 저 허해청 추가 진술 받으러 다녀올게요.”

“무슨 추가 진술?”

“단원 경찰서에서 요청이 왔는데 두 달 전에 상록구 쪽에서도 사건이 있었나 봐요. 버퍼 존 밖의 사건이라 아닐 거라고 말은 했는데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죠.”

“아, 그래. 알았어.”

연주가 나가고 마지막 남은 관우가 말했다.

“과장님, 저 검찰에 CCTV 분석자료 넘겼는데 추가 설명 필요하다고 검찰 수사관님이 요 앞에 오셨다고 하네요. 잠깐 가서 설명 좀 하고 올게요.”

“그래.”

다들 바쁘구나. 어째 나만 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으니까.

모두가 나가고 홀로 앉아 사건을 정리하고 있는 도중 문득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최예림 선생의 방에서 읽었던 그 기억. 다른 사건이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읽은 기억들 중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이 아닌 것들도 있다.

경찰이 되고 난 후에는 거의 없지만 중, 고등학교 때는 날 괴롭히는 일진 놈들의 기억도 자주 읽었었다. 내가 읽는 모든 것들이 밝혀내야 할 비밀스러운 사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상한 기억이었다.’

아기를 안고 누군가에게 쫓기던 여성이 성당으로 보이는 곳에 아기를 내려놓고 도망쳤다. 나는 왜 아기의 기억을 읽었을까?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기억을 읽은 후 내가 어지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뭐가 달랐던 걸까?

선생의 방에 반쯤 누워 편안한 자세로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보통 사건 현장에서 서 있거나 앉아서 기억을 읽어왔다. 누운 자세로 기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다. 음, 그렇다면 앞으로 난 기억을 읽을 타이밍에 재빨리 누워야 할까?

사건 현장에서 갑자기 냅다 누워 버리면 미친놈 취급 받기 딱 좋지. 가뜩이나 차 안에서 기억을 읽다 연주에게 걸리고, 건강원에서 뱀을 보다 기억을 읽는 바람에 오 선배도 날 걱정하는 판국에 드러누워 버리기라도 하면 이 사람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다. 당장 병원에 끌고 가 MRI 촬영을 시키겠다고 하겠지. 가뜩이나 내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니까.

할 일이 없어 휘파람을 불며 그동안 못 했던 생각들을 해본다.

강혁 아저씨가 날 양자로 삼을 생각까지 했다는 생각이 드니 다시 빙긋 미소가 지어진다. 남들 다 있는 부모라는 존재가 내겐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행복한 마음이 든다.

나는 집에 두고 온 서류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구청으로 갈지 안 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아저씨도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된다고 하셨으니 조금 더 생각해 볼 작정이다.

물론 아저씨가 싫다거나, 부모가 필요 없어 그런 건 아니다. 이런 내 존재가 아저씨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렇다.

아저씨는 아직 멋진 사람이다. 곧 은퇴이긴 하지만 청장으로 정년을 채운 사람이 그냥 놀지는 않을 거다. 어느 기업에서 전문 CEO로 모셔갈지도 모른다. 아저씨 성격에 그런 걸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직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란 뜻이다.

새 장가도 가셔야 할 텐데 애 딸린 홀아비보다는 깔끔한 혼자가 낫지 않겠는가?

뭐, 정식으로 입적 신청을 하지 않아도 좋다. 아저씨가 날 그만큼 생각해 주셨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냥 아끼는 녀석과 자식을 삼을 만큼 아끼는 녀석 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나는 그것을 안 것만으로 너무 행복하다.

내게는 보육원 수녀님들이 계시다. 그분들을 어머니라 생각하고 살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부재는 항상 아쉬웠다. 이제는 내게 그런 아버지가 생겼다.

“아, 수녀님.”

오늘이 며칠이지? 내가 얼마나 보육원에 안 갔더라? 이러다 또 아저씨께 잔소리 듣겠다.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외근이 잦은 형사가 외출을 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 나는 생각난 김에 보육원에 잠시 들르기 위해 경찰서를 나섰다.

차에 타 보육원으로 가는 길. 운전대를 잡으니 다시 그 기억 생각이 난다. 내가 뭘 봤었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아기를 안은 여인이 쫓기고 있었다.

여인은 성당으로 보이는 건물 입구 계단 위에 아기를 놓고 달아났다.

성당 건물 앞은 회색의 공장 빌딩들이 늘어서 있었다. 말이 빌딩이지 단층의 낮은 건물들이었지만 긴 담벼락으로 짐작해 보았을 때 꽤 규모가 큰 공장이었던 것 같다.

아기의 옆에 놓인 신문은 1989년 3월 10일 자 신문이었다.

운전을 하며 생각에 잠긴 나.

“1989년. 내가 태어난 해와 같다.”

나는 89년생이다. 생일은 3월 17일. 내 생일과 아주 근접한 날짜에 일어난 일이다.

그 성당은 어디였을까? 그 아이는 누구일까? 살아는 있을까? 그 엄마는 나중에 다시 돌아와 아기를 데려갔을까? 왜 그 이후의 일은 보이지 않는 걸까?

여러 생각을 하며 운전을 하길 30분여. 나는 보육원 앞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는 도중, 보육원 앞에 삽을 들고나와 있는 두 분 수녀님을 발견한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뛰어갔다.

“수녀님!”

루이사 수녀님과 로사 수녀님은 보육원 앞 정원에서 뭔가를 하다 날 발견하고 활짝 웃으신다. 루이사 수녀님은 삽까지 던져 버리고 마중을 나오신다.

“도경아!”

“잘 계셨어요?”

“암! 넌 어때? 잘 지냈어?”

“하하, 저야 항상 잘 지내죠.”

오랜만에 찾았다 타박하실 만도 한데. 두 분은 몇 년 만에 집에 돌아온 아들을 반겨주시는 듯하다.

내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는 두 분. 이 두 분이 내 어머니들이다. 신부님도 계셨지만 아쉽게도 정들 만하면 다른 성당으로 전근을 가시는 통에 신부님들께는 정 붙이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가족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유일한 사람은 두 분 수녀님뿐이다.

나는 루이사 수녀님이 던져놓은 삽을 보며 물었다.

“도와드려요? 뭐 하시는 중이었어요?”

“어, 아니야. 내가 나중에 하면 돼.”

“에이, 저 힘 좋아요. 아시면서.”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삽자루를 들었다.

“여기 파면 돼요?”

“아니, 거기 조금 옆에.”

“여기요?”

“응.”

“뭐 하시게요?”

“나무 심으려고.”

“아, 나무. 크기가 얼마나 돼요?”

“저기 저거.”

보육원 옆 담벼락에 기대 있는 나무. 묘목인 줄 알았는데 꽤 큰 나무다.

“50센티는 파야겠네. 이걸 수녀님들이 어떻게 하신다고. 자, 갑니다!”

군 시절부터 삽질 하나는 자신 있었다. 순식간에 땅을 파 내려가자 루이사 수녀님은 박수를 치셨고, 로사 수녀님은 내게 줄 음료수를 가지러 가신다.

중간에 큰 바위가 있어 낑낑거리며 파낸 후 로사 수녀님이 가져다주신 음료수를 시원하게 마신 나는 나무를 심은 후 이마를 닦았다.

“끝.”

두 분 수녀님이 박수를 쳐주시며 웃는다. 음, 이래서 치어리더가 있나 보다. 옆에서 이렇게 응원해 주니까 하나도 안 힘드네. 나는 삽자루를 옆에 세워두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는 왜 심어요?”

“어, 매년 한 그루씩 심어.”

“한 그루씩?”

보육원 주변은 나무가 많다. 이걸 전부 수녀님들이 매년 한 그루씩 심었던 것이구나.

“무슨 의미가 있어요?”

혹시 죽은 누군가를 위로한다거나, 뭐 그런 이유가 있나? 루이사 수녀님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원래 요 앞에 건물들이 많았는데 다 없어진 후로 너무 안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담벼락을 더 높게 세우면 돈이 드니까 나무로 대체하는 거야.”

“아, 자연 친화적인 담벼락이구나.”

“하하, 그렇지.”

나는 성당 앞을 바라보았다. 내 기억 속에 성당 앞은 빌라들이 가득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조금 넓은 골목길의 건너부터 빌라들이 서 있다.

“원래 저기 뭐가 있었는데요? 원래 빌라 말고 다른 게 있었어요?”

로사 수녀님이 빈 음료수 잔을 가져가며 말했다.

“응, 예전에 치약 공장이 있었어. 거기 다니는 형제님들도 우리 성당에 많이 오셨었는데.”

“치약 공장이요?”

“응, 아주 큰 공장이었어. 직원 수가 이백 명도 넘었으니까.”

“음, 망했어요?”

“응, IMF 오기 전에 망했어.”

IMF면…… 1997년 언저리이니까. 내가 아홉 살 때. 그보다 더 전에 망했으니 내 기억에 없는 것이로구나. 별생각 없이 수녀님 말을 듣던 나는 문득 눈썹을 꿈틀거렸다.

“공장?”

가만, 이 앞이 공장이었다고? 나는 고개를 돌려 성당을 보았다. 기억 속 성당의 색깔은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성당의 색깔은 따뜻한 갈색이다. 둘 다 벽돌 건물이긴 하지만 이렇게 지어진 성당은 전국에 수십 곳이다.

나는 가만히 성당을 바라보다 물었다.

“로사 수녀님.”

“응?”

“혹시 성당 외벽에 칠을 다시 한 적 있어요?”

로사 수녀님이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응, 칠이 다 벗겨져서 한번 다시 칠했어.”

설마 아니겠지.

“원래…… 무슨 색이었는데요?”

“원래도 갈색이었지.”

휴, 다행이다. 우리 성당의 기억은 아니구나. 그럼 그렇지. 그런 일이 우리 성당에서 일어났을 리가 없지. 나는 빙긋 웃으며 삽을 챙겼다.

“이거 어디다 둬요?”

“어, 뒤쪽 창고에. 고마워.”

“뭐 이런 걸로.”

“점심 먹고 갈 거지?”

“그럴까요?”

“기다려, 수녀님이 카레 해줄게.”

“오! 그리웠습니다.”

“하하, 능청은.”

로사 수녀님이 주방으로 간다. 먼저 주방에서 아이들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루이사 수녀님이 물었다.

“도경이 식사하고 간대?”

“네, 수녀님.”

“오랜만이네, 우리 도경이 좋아하는 카레라이스 한 날인데 잘됐다.”

“안 그래도 말했더니 잔뜩 기대하고 있더라고요, 호호.”

“어릴 때부터 카레를 좋아했거든, 우리 도경이.”

“저도 알죠.”

루이사 수녀님이 감자를 썰며 물었다.

“다른 이야긴 없었고? 도경이 녀석.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찾아오는 아이라 걱정이 되네. 특별한 말은 없었어?”

“네, 별 이야기 안 했어요. 그냥 성당 건물 외벽을 칠한 적 있냐고 묻던데.”

“응? 그건 왜?”

“모르겠어요. 그냥 묻길래 답만 해줬죠. 기억하시죠? 2004년에 외벽 다시 칠했던 거.”

“기억하지, 그때 로사 네가 고생스럽다고 얼마나 찡찡댔는데.”

“아이참, 수녀님도. 제가 언제 그랬다고.”

“호호, 그런데 나도 그랬어. 내가 막내일 때도 건물 외벽 칠할 때가 오면 기겁을 하곤 했지.”

“그랬어요?”

“응, 로사가 우리 성당으로 온 게 언제였지?”

“저 1991년이요. 도경이 세 살 때.”

“그렇구나. 벌써 세월이 그렇게 지났네.”

“루이사 수녀님은 언제 오셨어요?”

“나는 1984년에 왔어.”

“와, 조상님!”

“놀리는 거야?”

“하하, 농담이에요. 그런데 저 오기 전에도 외벽 칠했어요?”

“당연하지. 적어도 25년에 한 번은 해줘야 해. 아님 다 갈라지거든.”

“아하, 그럼 저 오기 전에 언제 하셨어요?”

“음…… 아마 1990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수녀님 몇 분이었는데요?”

“나까지 셋. 두 분은 돌아가셨어.”

“그렇구나…….”

양파를 썰던 로사 수녀님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원래 성당 외벽 색이 갈색이었어요? 제가 왔을 때는 갈색이었는데.”

루이사 수녀님이 다 썬 감자를 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아니, 원래 붉은색 벽돌 건물이었는데 1990년에 오신 신부님이 너무 을씨년스러워 보인다고 따뜻한 갈색으로 바꾸자고 하신 뒤부터는 계속 이 색으로 칠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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