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18화
17. 증거(證據)(2)
나는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여아 옆에 앉아 귀여운 아기를 물끄러미 보았다.
“안녕? 우리 또 보네?”
“…….”
“나 기억 안 나?”
얼마 전에 여섯 살이 된 아이. 지하철 사건에서 심장 수술을 받고 살아난 새별이가 내 옆에 앉아 있다.
“그때 아저씨가 수녀님 쿠키 더 줬는데. 기억 안 나, 정말?”
“…….”
새별이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표정으로 내게서 자꾸 멀어지려 한다.
와, 진짜 기억 못 하는 거냐? 내가 아무리 자주 안 온다고 하지만 수녀님 쿠키는 내게도 엄청 소중한 거란 말이다. 그걸 나눠준 사람을 기억 못 하다니. 너무하다, 너.
괘씸하게 생각하려 해도 이 아이는 너무 귀엽다. 벌써 짙은 쌍꺼풀이 진 눈매, 아이답지 않게 길게 뻗은 콧날. 앵두같이 붉은 입술. 조금 촌스러운 머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새별이는 커서 정말 인기가 많을 것 같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하자, 새별이는 날 째려보며 머리를 피한다.
“어? 머리 만지는 거 싫어?”
새별이가 인상을 쓰며 자기 앞머리를 꾹꾹 누른다.
뭐야, 그게 스타일을 낸 거였어? 머리 망가질까 그런 거야? 여섯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그런 걸 신경 쓴다고? 커서 연예인이 되려나? 그럼 좋겠다. 우리 보육원에서 유명한 인물 한 명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수녀님들이 가져오신 카레라이스를 먹는 동안에도 나는 내내 새별이만 보았다.
아이는 내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자꾸만 인상을 썼지만 집에 가져가라고 싸주신 수녀님의 쿠키를 슬쩍 빼돌려 손에 쥐여주니 방긋 웃는다.
수녀님 손을 잡고 나와 잘 가라고 인사까지 해주는 아기.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온다.
차에 올라타 잠시 무음으로 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니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다. 둘 모두 연주에게 온 전화이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시동을 걸었다.
-네, 과장님.
“어, 연주야. 미안하다. 잠깐 전화를 못 봤네.”
-어디 계세요?
“어 30분 거리. 무슨 일 있어?”
-사건 떨어졌어요.
“응? 벌써?”
허해청 송치도 아직 안 끝났는데 벌써 새 사건이 떨어져? 보통은 몇 주 정도 쉬게 해주는데 좀 빡빡하네.
“알았어, 금방 가.”
-여기 KCSI 과장님이 와 계세요.
“목 과장님? 그분이 왜?”
-이번에 저희 쪽에 일을 의뢰하신 분이 그분이신 것 같던데.
응? 현직 KCSI 과장님이 무슨 사건을 의뢰해? 설마 예전 과장님의 조카 사건 같은 참혹한 일이 또 생긴 건 아니겠지? 설마, 한 사람에게 그런 시련을 여러 번 주실 리가 없어.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알았어, 바로 간다. 끊어.”
30분 거리를 15분 만에 주파해 국가수사본부 사무실로 뛰어온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목 과장님은?”
연주가 서류 정리를 하다 말했다.
“본부장님 방으로 오시라고 하던데.”
나는 얼른 몸을 돌려 본부장님 방으로 뛰었다. 노크를 해 허락을 구한 뒤 문을 열자,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본부장님과 과장님 얼굴이 보인다.
휴, 표정을 보니 또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은 아닌가 보구나. 다행이다.
목 과장님이 손을 들며 인사를 해온다.
“여, 오랜만이네?”
장영훈 본부장님이 자리를 권한다.
“앉아라.”
나는 두 분께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자리에 앉아 물었다.
“사건 의뢰를 하셨다고.”
목 과장님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꺼내 내민다.
“그래, 춘천에서 사건이 있었다.”
“춘천 경찰서에서 해결이 안 된 겁니까?”
“음, 열흘이 지났지만 꼬리도 못 잡았어.”
“저희 쪽으로 이관하실 생각으로 오신 거라면 살인사건일 텐데 시신에서는 뭐 안 나왔습니까?”
“…….”
나는 서류를 들춰보려다 말이 없는 목 과장님을 보았다.
“과장님?”
목 과장님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시신이 안 나왔다.”
“예?”
“시신이 안 나왔다고.”
“살인사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정황증거상 살인사건이 맞아.”
약간 이해가 안 된다. 시신이 나와야 살인사건이 성립한다. 사람이 사라졌다면 아직 실종사건이다. 실종은 강력계가 맡는 사건이 아니므로 시신이 나온 후에 이관되는 것이 보통이다.
내 표정을 본 장영훈 본부장님이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너 인마. 우리와 맨 처음 만났던 사건이 뭔지 잊었냐?”
아, 그 사건. 중학교 때 처음 경찰서까지 와서 도왔던 시신 없는 살인사건 말씀이구나. 그래, 그때도 시신이 나오지 않았었다. 저수지에서 시신을 찾아 두 부부를 체포했었던 사건이었다.
“살인사건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증거는 뭡니까?”
“현장에 혈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목 과장님이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1월 7일. 초속 3.5미터의 남서풍이 불던 날이었다. 기온은 영상 2.8도로 영하 4.5도였던 평년 기온보다 높았다.”
과장님이 이런 이야기부터 꺼내는 이유는 간단히 유추해 볼 수 있다.
“혈흔이 발견된 곳이 야외였습니까?”
목 과장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덕분에 혈흔이 13도가 넘는 일교차 속에서 얼었다 녹았다 반복했지. 증거도 훼손되고.”
“현장이 어디였습니까?”
“춘천에 있는 공동묘지.”
헐, 하필 현장이 공동묘지일 건 또 뭐야? 이상한 사건이구나.
“누구의 혈흔이었습니까?”
장영훈 본부장님이 한 명의 신상명세를 내민다.
“51세 김주연 씨다.”
아주 평범하게 생긴 아주머니 사진이 보인다. 재산 상황을 보니 직업은 없지만 소유한 부동산이 있다. 건물 전체는 아니고, 어느 상가 건물의 한 칸 정도를 소유하고 거기서 나오는 월세로 생활하는 사람인가 보다.
“신고자가 있었습니까?”
당연하다. 시신이 나오지 않은 사건에 실종자가 발생했다. 누군가는 실종 신고를 했을 것이다. 목 과장님이 말을 꺼낸다.
“13세의 딸이 최초 신고했다. 엄마가 아빠와 묘지에 간 후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아빠가 있다면…… 남편도 함께 갔다는 뜻인데. 남편도 안 돌아온 겁니까?”
“아니, 남편은 돌아왔다.”
응?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나는 서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남편과 함께 공동묘지에 간 아내는 돌아오지 않고 남편만 돌아왔다고요?”
“그래.”
당연히 남편이 범인인 거 아닌가? 내 얼빠진 표정을 본 목 과장님이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시신이 안 나왔다. 김주연 씨는 현재 실종 상태이다.”
아, 그랬지 참.
“남편이 범인일 확률이 높겠네요. 물론 김주연 씨가 사망했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그렇지. 처음 집으로 출동한 건 실종 전담 팀이었다. 집에 남편은 없었고 딸을 인터뷰했는데 남편인 53세 한정수는 새 아빠라고 한다. 알아보니 두 사람은 3년 전에 결혼했고, 아내 쪽은 재혼, 남편 쪽은 초혼이었다. 슬하에 있는 딸은 엄마가 전 남편과 낳은 딸이고.”
“딸은 뭐라고 합니까? 계부가 가정폭력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고 하나요?”
“음, 자신을 때린 적은 없지만 엄마를 때린 적은 있다고 하더군.”
“음…….”
“자주 싸운 건 아닌 모양이야. 가끔 크게 다투긴 했지만 평소에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싸움이 잦아지긴 했다고 하더군.”
“남편도 만나보셨습니까?”
“당연하지.”
“뭐랍니까?”
목 과장님이 노트북을 열고 CCTV 화면을 보여준다. 춘천에 있는 공동묘지 입구에 있는 CCTV다. 화면 속에 서로 다른 시간에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두 대의 차량이 보인다.
“앞서 들어간 검은색 승용차가 남편 한정수의 차다. 23분 후에 들어가는 은색 승용차가 아내 김주연의 차.”
목 과장님이 다른 파일을 재생시키자 두 시간 후의 영상이 나온다. 나는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들어간 차는 두 대. 나온 차는 한 대네요. 남편의 검은색 차만 다시 나온 걸 봐서 아내의 은색 차량은 아직 현장에 남아 있겠군요.”
목 과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 파일을 연다. 사진 속에 혈흔이 튀어 있는 은색 자동차가 보인다.
“다음 날 공동묘지 관리인이 안쪽으로 혈흔이 튀어 있는 은색 차량을 보고 신고했다. 강력계가 출동해 현장을 정리하고 차량 명의자를 찾는 도중에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는 걸 알게 됐고.”
“실종 신고 접수 시간은요.”
“새벽 두 시. 딸이 새벽까지 엄마를 기다리다 신고한 모양이야.”
“주변 수색도 다 한 겁니까?”
“공동묘지 전체 수색을 하고, 반경을 넓혀 묘지 중심으로 3㎞를 수색했지만 김주연 씨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CCTV에 찍힌 한정수의 차량을 눈짓하며 말했다.
“차량은 추적해 봤습니까?”
“음, 했다. 묘지에서 나온 후에 홍천 시내로 들어갔어. 남편은 잠깐 거기서 볼일을 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고 진술했어.”
“무슨 볼일이었답니까?”
“아내와 싸워서 화를 풀어주려고 평소 좋아하는 홍천 한우를 사러 간 거라고 했다. 실제로 집 냉장고에서 홍천 한우가 나왔고, 카드 매출 전표 확인 결과 당일 구입한 것이 맞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상황을 정리해 유추해 보면 두 사람은 따로 묘지에 왔고, 거기서 싸움이 일어난 후 남편은 먼저 나왔고, 아내는 거기 남아 볼일을 보다 일을 당했다는 겁니까?”
“일단 그렇게 유추하고 있다.”
“혈흔의 양은 얼마나 됩니까?”
“3리터 이상이다.”
몸무게 70㎏ 남성의 과다출혈 치사량이 5L이다. 여성이라면 그보단 몸무게가 적게 나갈 테니 충분히 살인사건으로 볼 수 있겠다.
“현재 관할은 춘천 경찰서입니까?”
“아니, 강원 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광역수사대까지 나섰구나. 그런데도 일이 해결되지 않았고, KCSI로서 사건에 참여하고 있던 목 과장님이 보다 못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구나.
나는 본부장님을 보며 물었다.
“우리가 맡겠습니다. 정식 이관해 주시죠.”
“가능하겠어? 허해청 송치 아직 안 끝났는데.”
“서류 작업은 연주가 하면 됩니다. 나머지 인력으로 해결하겠습니다.”
“사람 좀 뽑으라니까 이놈아. 몇 번을 말하게 하냐?”
“오 선배 데려왔는데 뭘 또.”
“미친놈아 네놈들이 그냥 강력계 일개 팀이냐?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과 인력이 달랑 넷이라고 하면 지나가던 개가 웃어, 이놈들아.”
“넷이면 충분합니다. 더 많으면 방해만 됩니다.”
“후, 저 고집 봐라. 누굴 닮았는지. 에혀.”
“그럼 정식 이관 부탁드립니다. 전 바로 팀원들 데리고 춘천으로 가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영훈 본부장님이 얼른 묻는다.
“너! 병원 잘 다니고 있는 거냐?”
예전 같았으면 좀 기분이 상했겠지만 강혁 아저씨의 마음을 안 뒤로는 이 모든 것이 사랑과 관심으로 느껴진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민망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두 번 갔는데. 이번 주도 갈 겁니다.”
장영훈 본부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약 시간 잘 지켜서 가, 이놈아.”
“예, 그럼.”
장영훈 본부장이 나가는 도경을 물끄러미 보다 목 과장에게 말했다.
“이거, 오랜만에 오셨는데 밥 먹자는 말도 안 하고 가는 저 배은망덕한 놈 덕에 제가 민망해지네요. 어째, 저녁 하고 가시겠습니까?”
목 과장이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하하, 괜찮습니다. 이제 막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벌써 무슨. 열심히 일하는 건데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도경이만큼 열심히 하는 놈 찾기 힘듭니다.”
“에잉, 적당히 좀 할 것이지. 여러 사람 걱정 시키고. 저놈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쉬라고 다른 일 돌려도 지가 알아서 일거리를 찾아와서 수사를 시작하니 이거 원.”
목 과장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젊은 시절 강혁 청장님과 꼭 닮았군요, 하하.”
장영훈 본부장이 반박하려 말을 꺼내다 멈칫한다.
“음…… 그러고 보니 둘이 하는 짓이 엄청 비슷하네요.”
“하하!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