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89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13)
쩝쩝, 우걱우걱, 후루룩.
하얗고 가는 팔이 정신없이 수저를 움직이며 밥을 먹고 있다. 나는 지금 마룻바닥에 앉아 식사 중이다.
조그맣고 동그란 접이식 알루미늄 상은 가운데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촌스러운 디자인이고 그 위에는 물에 말아버린 식은 밥과 배추김치, 깍두기, 멸치 볶음이 놓여 있다.
고기반찬 하나 없는 초라한 식탁에 앉아 홀로 밥을 먹고 있지만 나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마루 한쪽에 포대기에 싼 아기가 자고 있는 모습을 1분에 다섯 번도 넘게 바라보는 나. 아기가 깨기 전에 밥을 먹어야 한다는 듯 전투적인 식사 중이다.
“우물우물, 오도독. 아, 살 거 같다.”
여자 목소리다. 사실 이 기억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나는 기억이 보이기 시작하는 동시에 이것이 내 부모님 중 한 분의 기억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자고 있는 아기와 함께 앉아 있는 이 마루. 그리고 열어둔 미닫이문 밖으로 보이는 작은 마당을 통해 이곳이 부모님의 집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곳에 앉아 있었으니 헷갈릴 이유가 전혀 없다. 단지 현재의 모습과 과거의 모습 간에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인 집의 구조는 같다.
엄마의 기억. 그리고 저기 누워 자고 있는 것은 나일 것이다. 잠시 내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기억나지 않는다.
잠깐 아쉬웠지만 세상 누구에게 아기일 때 기억이 있겠는가?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네 살 정도는 되어야 성인이 되고 나서도 기억할 수 있는 일이 생길 것이다.
급하게 밀어 넣느라 입가를 타고 깍두기 국물이 주르륵 흐른다.
“후릅! 와, 진짜 맛있네.”
나는 입가를 닦으면서도 자고 있는 아기를 보았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기 가진 엄마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맘 편히 식사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다.
사실 이렇게 어린 아기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기에 아직은 손이 많이 갈 때가 아니지만 첫 아이라 그런지 잠시만 눈을 떼도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잠만 자는 아기임에도 옆에서 노심초사 어디 불편한 곳은 없나, 아픈 곳은 없나 살피느라 하루가 다 간다.
오죽했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살피기도 하고, 똥오줌을 싸지 않은 기저귀를 한 시간마다 확인하기도 하는 나는 말 그대로 초보 엄마다.
대충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아기를 확인하는 나.
누워 있는 아기 뒤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어둡다. 고무장갑을 벗으며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일곱 시.
나는 마룻바닥 위에 둔 검은 전화기를 힐끔 본 뒤 마당 밖으로 발을 내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전화기가 벨을 울리려 온몸을 떨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정확히 벨 소리가 1초도 울리지 않은 시점에 나는 수화기를 낚아챈 후 자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아기가 깨지 않았다.
나는 전화기 선을 길게 뽑아 본체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 문을 닫은 후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여보 나야.
“응, 잘 도착했어?”
-어, 아까 낮에 도착했는데 바빠서 이제 전화하네.
“몇 시에 도착했는데?”
-오후 두 시.
“에? 당신 여섯 시부터 나갔는데 두 시에 도착했어?
-대구가 멀긴 멀더라. 사실 서울역까지 가는 데도 오래 걸렸어.
“우리 집에서 서울역 별로 안 먼데?”
-모르겠어, 오늘따라 새벽부터 차가 막히더라.
“어디 딴 데 샌 건 아니겠지?”
-하하, 아직도 본인이 경찰인 줄 아는 거야?
“한번 경찰은 영원한 경찰이야. 걸리기만 해, 아주.”
-난 당신밖에 없는 거 알면서.
“피.”
-밥은?
“어, 도경이 재우고 좀 전에 먹었어.”
-뭐 먹었어?
“김치랑 멸치볶음.”
-끝이야? 두부라도 구워 먹지.
“됐어, 언제 구워서 언제 먹어. 도경이 깨면 어차피 못 먹는데.”
-도경이 좀 바꿔.
“뭘 바꿔? 애 잔다고. 그리고 갓난아기가 무슨 전화를 받냐?”
-내 여자 괴롭히지 말라고 한마디 하게.
“뭐래. 당신은 밥 먹었어?”
-아니, 배고프네.
“회사에서 밥값 나와?”
-어, 출장비에 포함해서 나와.
“얼마 나오는데?”
-글쎄 만 원은 나오지 않을까?
“오, 이달 월급 기대해도 돼?”
-하하, 그래.
“나가서 자장면이라도 사 먹어. 한 700원이면 사 먹지?”
-어, 안 그래도 여인숙 사장님이 근처에 중국집 있다고 하더라. 근데 여긴 지방이라 그런지 500원이래.
“오, 좋네. 어서 가서 먹어, 배고프겠다.”
-알았어, 밥 먹고 이따 밤에 전화 한 번 더 할게. 여인숙 전화 사용하는 거라 눈치가 좀 보이네.
“응, 어서 밥 먹고 와.”
-그래, 사랑해 여보.
“어우,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말고. 끊어.”
-하하, 출장 끝나고 도경이 출생 신고하러 같이 가자.
“알았으니까 어서 밥이나 드시고 오시죠?”
-사랑해, 마누라?
“어우! 끊어!”
징그럽다는 말투로 전화를 끊었지만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한 마음이 든다. 비록 남편 없이 아이만 데리고 혼자 맞이하는 밤이지만 다정한 남편의 한마디가 마음을 사르르 녹게 만들었다.
나는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마루 문을 열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 자고 있는 아기를 바라본다.
귀여운 홍조를 볼에 머금고 입술을 약간 내밀고 잠이 든 아기.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아기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꿈나라에 가 있다.
나는 검지와 엄지로 조심스럽게 아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주며 속삭였다.
“우리 도경이, 좋은 꿈 꾸고 있어? 아빠 오면 같이 출생신고하러 가자, 알았지? 미안해, 아빠가 꼭 자기가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좀 늦었어. 출생신고는 1개월 내에만 하면 되니까 괜찮을 거야.”
마음속에서, 가슴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울컥한 느낌이 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하지만 이건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너무 아끼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 같다. 엄마는 나를 이토록 사랑했구나.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기를 바라보다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잠깐 아기 얼굴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여덟 시가 넘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곤히 잠든 아기를 바라본 뒤 조심스럽게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밀려 있는 빨래를 하고, 집 청소를 하고. 마당도 한번 쓸었다. 누가 보면 왜 밤 중에 부산을 떠냐 하겠지만 아기 키우는 부모가 밀린 일을 하는 때는 아기가 잘 때이다.
아기가 깨어 있을 때는 이것저것 먹이고, 씻기고 챙기느라 정신이 없고, 아기가 잘 때는 밀린 집안일을 하는 혹독한 하루.
하지만 나는 괜찮다. 모든 것이 저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힘든 빨래를 하면서도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음음~ 음음음~”
한참 유행이 지난 가요였지만 요즘은 희망적인 노래만 하려고 노력한다. 혹시라도 자는 아기가 노래 때문에 나쁜 영향을 받을까 이별 이야기 같은 가요는 절대 부르지 않으려 노력한다.
가끔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면 화들짝 놀라 입을 막곤 한다.
혹시 아기가 슬픈 노래를 듣고 울면 어쩌지? 나중에 이것 때문에 애가 어두운 생각을 하면 어쩌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내 새끼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다.
싱크대 청소를 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된 느낌에 수세미로 빡빡 문질러 씻고 손을 닦은 후 시간을 확인하니 밤 열한 시다. 이제 다시 신랑에게 전화가 올 것이다.
“으에, 으에에에엥.”
“어머! 우리 도경이 깼구나, 엄마가 시끄럽게 해서 그랬어? 미안해.”
나는 얼른 달려가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아직 너무 어려서 안아주기보다는 눈앞에서 딸랑이 장난감을 흔들어주는 것이 최고다.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조그마한 눈으로 눈앞에서 흔들리는 장난감을 바라본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배고프지? 엄마가 얼른 분유 타 줄게.”
모유를 먹이면 좋겠지만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병원에 가봤지만 의사 선생님 말이 모유가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내 새끼 먹일 제일 비싼 분유를 사놓았다. 맛은 어떤가 직접 먹어봤는데 엄청 맛있다. 물론 살이 무지막지 찔 것 같은 맛이었지만 아기들은 영양공급이 중요하니까 괜찮을 거다.
미지근한 물에 여러 번 손을 대어보고 혹시 아기 혀 데일까 적정 온도를 맞추는 데 수 분이 걸린다. 초보 엄마 티를 팍팍 내며 겨우 가져온 분유를 흔들자, 아기가 병을 바라본다.
“아이고, 우리 도경이. 배고픈가 보네? 젖병 보는 거 봐, 아이고 귀여워! 아이고, 내 새끼!”
아기를 조심스럽게 들어 품에 안은 후 젖병을 물리고, 전화기를 발로 끌어 내 쪽으로 가져왔다. 언제 신랑에게 전화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기 전에 한 번은 전화하겠지. 만약 전화 안 하면 이상한 곳 가서 술 마신 거라고 생각할 거다. 그럼 집에 올라와서 죽는 거지, 아주 그냥.
나는 귀여운 아기를 볼 때면 활짝 웃고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볼 때는 노려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전화 벨이 울리는 순간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네 아빠는 믿을 만한 사람이야, 엄마가 결혼은 참 잘했어, 그렇지?”
젖병을 물고 있는 아기 볼을 톡톡 건드린 나는 수화기를 들어 어깨와 턱 사이에 끼웠다.
“어, 여보. 밥 먹었어?”
-하아, 하아, 나, 나은아!
“응? 여보? 목소리가 왜 그래?”
-나, 나 이상한 걸 봐버린 것 같아!
“무슨 말이야, 그게?”
-보지 말아야 될 걸 본 것 같다고!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얼른 자세를 고쳤다. 하지만 아기를 안고 있어 그게 쉽지 않다.
“여보, 잠깐만 기다려 도경이 좀 내려놓고.”
나는 얼른 무릎걸음으로 이불까지 기어가 아기를 놓은 후 빠르게 돌아와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나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응? 여보 뭐라고?”
-저, 정말입니다! 으! 으아! 안 돼!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보! 여보 왜 그래? 거기 어디야!”
뭔가 부서지고, 때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여 계속 소리를 질렀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사하면 말 좀 해봐!”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는 침묵이 감돈다.
나는 일반인이 아니다. 원래 경찰 출신이었고 꽤 능력 있다고 인정받아 진급까지 했었던 만큼 현재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대화체로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옆에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만히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 수화기를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숨기고 말했다.
“너 누구야.”
-…….
“너 이 새끼. 나 경찰이다. 남편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인다.”
-…….
“너 누구냐고, 이 새끼야!”
-……어디까지 들었지?
“뭐……?”
-아내인가?
“그, 그래!”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너, 너 또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강북구 쌍문동 390-1589.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이놈이 우리 집 주소를 말했기 때문이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