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312화 (312/328)

살인의 기억 312화

21. 40년 그리고 35년(12)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1989년 3월 9일. 엄마가 범인에게 쫓기기 하루 전날이다.’

사건의 흐름을 시간 순서상으로 정리해 보자.

하루 전 날인 3월 9일에 아버지는 공중전화에서 습격을 받았다. 부모님이 살던 집의 전화기에서 읽은 기억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범인은 이날 아버지를 공격 후 수화기에서 들리는 엄마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확인 후 서울까지 올라가 엄마를 공격했다.

내가 성당 앞에 버려진 것은 3월 10일.

당시의 기억상으로 깊은 밤, 혹은 이른 새벽이었고 3월 10일 자 신문이 아직 성당 계단 앞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3월 9일 밤에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 심야에 서울로 움직여 다음 날 새벽에 엄마와 날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다시 공중전화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여기다. 여기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다.’

관우는 생각에 빠진 날 관찰하다 내 대신 순성이 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형들이 수사받을 때 다른 질문 받았다는 소린 못 들었습니까?”

너무 오래된 사건이고 크게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사건 자료가 전무하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순성이는 잠시 생각을 해보다 말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만 그 형님 말이 아마 누가 거기서 싸웠던 거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어…… 형사 아저씨가 계속 유리창 깬 적 있냐, 그 앞에서 누구 때렸냐 하는 소릴 했다고 했습니다. 근데 그건 이해 갑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공중전화가 다 부서졌다고 구멍가게 할머니가 경찰을 불러서 우리 아버지도 구경을 갔었는데 공중전화 앞에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고 했었거든요. 유리창도 다 깨져 있었고.”

관우가 얼른 물었다.

“피가 얼마나 많았다고 하던가요?”

“어…… 아버지 말론 솔직히 누가 칼에 맞은 게 아닌가 싶다고 했었습니다. 아주 크게 다쳤는지 바닥에 피가 엄청 많았다고 하던데요.”

“다친 사람 소식은 모릅니까?”

순성이 놈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동네 좁은데 다친 사람 있으면 바로 알죠. 처음엔 아무도 다친 사람 없다고 하길래 외지인인가 싶었습니다. 형사 아저씨들께 괜히 두들겨 맞은 동네 형들이 열이 받아서 병원들 들쑤시고 다녔거든요? 그런데 없었습니다.”

관우가 인상을 쓴다.

“병원을 들쑤셔요? 왜, 부상당한 사람 찾아내서 패기라도 하려는 거였습니까?”

“아뇨, 아뇨. 열 받으니까 다친 사람한테 어떤 놈이 그랬냐 물어보고 형들이 직접 잡아다 족치려고 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뭐 아무리 찾아봐도 다친 사람이 안 나오는 걸 뭐 어쩌겠습니까? 나중에 이게 기억이 나서 친해진 형사님께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사건 그거 피해자가 없어서 그냥 유야무야 넘어갔다고 하던데요.”

공공기물 파손과 대량의 혈흔.

하지만 피해자가 나오지 않아 그냥 넘어가 버린 사건. 요즘 이런 사건을 그냥 넘기면 그 형사는 옷을 벗어야 할 거다.

하지만 1989년도 시대상 속에서는 이렇게 넘어가 버린 사건이 많다.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무동기 연쇄살인마의 시작은 2004년에 처음 세상에 알려진 사건.

그전에도 살인사건은 있었지만 분노 장애도 없는 사람에 의한 동기 없는 연쇄살인이 국내에서 시작된 것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이라 이때에는 형사들이 이유 없는 살인이란 없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나는 공중전화가 있던 자리를 노려보다 말했다.

“더 아는 건 없고?”

“예,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알았다, 가 봐.”

순성이 놈이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녀석이 골목길을 완전히 벗어나자 가만히 공중전화가 있던 곳을 노려보고 있는 날 관찰하던 관우가 덩달아 슬금슬금 물러난다. 녀석, 혹시 내가 기억을 읽을 때 방해가 될까 싶어 그러는 모양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참 그 자리를 노려보다 몸에 힘을 풀고 한숨을 쉬며 관우를 돌아보았다.

“안 돼, 아무것도 안 보여.”

“후, 그래요?”

녀석도 약간 기대하고 있었는지 실망한 눈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능력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능력인 것을.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말했다.

“당시 아버지가 출장 간 회사. 이제 없지?”

“예, 내려오기 전에 알아봤는데 폐업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이 지금 동네에서 작은 양조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예, 전통 막걸리 공장인데 여덟 명이 하는 작은 작업장이라고 합니다.”

“좋아, 가 보자.”

“예, 과장님.”

다시 차를 타고 약 30분을 이동해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든 우리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국도를 벗어나 산길로 올라갔다.

말이 산길이지 국도에서 50미터도 안 올라간 곳에 있는 공장. 그래도 술을 옮기는 트럭이 많이 지나다니는지 산길이라도 심하게 덜컹거리는 길은 아니었다.

차를 주차하고 내리자 큰 바구니를 들고 공장 밖으로 나오던 아주머니가 우릴 보고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관우가 신분증을 보여주고 용건을 말하자, 아주머니는 경찰의 방문이 생소한 모양인지 약간 당황하다, 공장 안을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여기 잠깐 나와보세요!”

안에서 답이 없자, 아주머니는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밖에서 잠시 기다리자 다시 나온 아주머니가 공장 문을 열어준다.

“들어오세요. 저쪽 사무실로 가시면 돼요.”

양조장이란 곳을 처음 와봤다. 군대에서 백 명이 먹을 국을 만들던 솥같이 생긴 기계들이 몇 개나 돌아가고 있는 곳을 지나 사무실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대낮부터 한잔했는지 얼굴이 벌건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경찰이라고?”

나는 신분증을 그가 앉은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두고 말했다.

“예, 몇 가지 여쭐 것이 있어 왔습니다.”

노인은 우릴 올려 보다 옆에서 놋쇠 그릇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는다.

“앉아요, 대접할 건 없고 막걸리나 한 잔 하셔.”

“죄송합니다, 근무 중이라.”

“한 잔인데 뭐 어때. 성의 표시인데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예, 그럼 조금만 주십시오. 맛만 보겠습니다.”

“허허, 시원해서 좋네. 거기 그쪽 형사도 좀 드시고.”

반쯤 따른 막걸리를 맛보니 꽤 괜찮다. 마트에서 사 마시는 일반 막걸리와 비교도 안 되는 깊은 맛이 단맛과 합쳐져 미각을 즐겁게 한다.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막걸리 괜찮죠?”

“예, 아주 맛있네요.”

“허허, 그래. 내가 이 맛 잃지 않으려고 돈도 안 되는 짓을 이 나이까지 하고 있지. 그래, 왜 왔소?”

나는 막걸리 그릇을 내려두며 물었다.

“혹시 현지성 씨 기억하십니까?”

“음?”

“서울에 있는 주류 회사에 다니던 사람이고 1989년에 여기 출장을 왔었습니다.”

노인이 머리를 긁는다.

“1989년이면 몇 년 전이야? 40년도 전에 잠깐 출장 온 사람을 무슨 수로 기억해요?”

나는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다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당시 출장 중에 실종된 사람입니다.”

노인은 내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어! 그래! 그런 사람 있었어. 기억이 나. 당시 서울에 주류 회사 사람들이 내려와 그 사람 찾는다고 한참 뒤지고 갔는데.”

다행이다. 기억을 하는구나.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기억하십니까?”

노인이 막걸리를 따라 마시며 말했다.

“그때 우리 공장 술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사업 확장을 하던 시기였지. 서울 주류 회사도 계약하자고 찾아왔고 직원 수도 서른 명까지 늘렸어요. 그때는 앞날이 참 밝아 보였는데 말이야. 대기업들이 TV 광고 때리며 한두 군데 주류 회사가 대한민국 전체를 먹어버린 후로는 중소 양조장은 다 문을 닫았지. 나는 그때 차장 자리에 있었어. 회사가 부도 난 뒤로 혼자 이 공장을 차렸고.”

“현지성 씨 이야기를 묻는 겁니다.”

“아, 그 양반. 음, 아주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할까? 우리 공장에서 일하던 아줌마들이 그 양반을 아주 좋아했어. 시골 남자들은 거칠기만 한데 다정한 말투 쓰는 서울 양반이 오니 정신을 못 차렸지.”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래, 엄마와 통화를 할 때 목소리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평소에도 매우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실종 전후로 특이점은 없었습니까?”

“에이, 그런 거 있으면 벌써 말해줬지요. 경찰도 찾아오고 그 양반 소속 회사에서도 계속 내려왔는데.”

“아무것도 모르시는 겁니까?”

“아는 게 없어 전혀.”

실망감이 든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떨궜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혹시 모를 증거는 세월의 풍파 속에 모두 사라졌다. 너무 어려운 수사가 아닐 수 없다.

노인은 풀이 죽어 보이는 날 보곤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게 당시에 내가 좀 바빴거든. 아까 말했다시피 사업 확장 중이어서 말이야. 시간이 너무 없어서 집안일도 보살피지 못하고 마누라한테 매일 잔소리를 들었지. 게다가 다니던 성당 신부님 부탁으로 오전 시간도 빼앗기고 있던 터라 오후에는 두 배로 바빴다고. 그래서 기억을 못 하는 거니 내 상황도 좀 이해해 주쇼.”

관우가 나 대신 나서며 노인에게 말했다.

“예, 사장님. 물론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 탓하는 거 아니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노인이 머리를 긁으며 내 눈치를 본다.

“아니 뭐. 사실 그 사람이 내려왔을 때 내가 담당을 했어야 하는 건데. 내가 바빠서 다른 차장이 담당한 거거든.”

관우가 얼른 물었다.

“담당 차장님 연락처 아십니까?”

“그 양반 작년에 간암으로 죽었는데.”

“아…….”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으니 호상이지 뭐.”

“유감입니다.”

“유감은 개뿔. 죽기 전 달까지도 술 퍼마시다 갔으니 하늘 가서도 원 없이 술 마시고 있을 거요. 뭐 하여간 그때 내가 담당 안 바꿨으면 좀 자세히 말해줄 텐데 아쉬워. 그런데 그 사람 아직도 못 찾은 거요?”

관우가 내 눈치를 슬쩍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 못 찾았습니다.”

“허! 4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하, 그 사람도 참……. 그건 그거고 경찰들도 정말 대단하군그래. 지금까지 수사를 포기하지 않다니 집념이 대단해요. 그런 의미로 한 잔 더 합시다.”

관우가 술을 따라주려는 노인에게 손사래를 친다.

“아닙니다, 운전해야 됩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허허, 괜찮다니까 그러네, 한 잔만 더 하지.”

나는 술병을 들고 씨름 중인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뭔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증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당시 아버지의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거나, 혹은 누구와 다투는 걸 보았거나 하는 작은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원래 아버지 담당을 했어야 하는 이 노인은 모종의 일로 바빠서 담당을 미뤘다. 당시 아버지와 함께 일을 했던 자는 작년에 간암으로 사망했다…….’

몇 년만 더 빨리 수사할 수 있었다면. 그 담당자가 죽기 전에 질문할 수 있었다면 사건의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다시 막걸리를 마셔대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니던 성당 신부님 부탁으로 오전 시간도 빼앗기고 있던 터라 오후에는 두 배로 바빴다고.’

성당 신부님의 부탁? 사건이 일어난 1989년에 미카엘은 대구에서 근무하지 않았다. 이 노인에게 뭔가 부탁한 사제는 미카엘이 아닐 것이다. 방금 이 노인이 자신이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이라고 했으니까.

나는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아까 성당 신부님의 부탁 때문에 오전 시간을 빼앗기셨다고 했는데.”

“아, 그랬죠.”

“무슨 부탁이길래 오전 시간을 통째로 빼앗기신 겁니까?”

“후, 그때 너무 바빴는데 신부님 부탁이라 어쩔 수 없었지. 내가 그 일 덕분에 2주일이나 오전 시간에 일을 못 했다니까.”

“무슨 일인데요?”

노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가르치느라.”

“뭘…… 가르치셨는데요?”

“술 빚는 거.”

술 빚는 것을 가르쳤다. 양조장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술 빚는 걸 배우러 오셨다고?

“담임 신부님이 배우러 오셨던 겁니까?”

“에이, 그건 아니고. 담임 신부님 후배인데 그 사람도 사제였어. 아주 젊은 사제였는데 성찬 할 때 쓸 와인을 직접 담그고 싶다며 날 찾아왔었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사제가…… 술 빚는 걸 배우기 위해 여기 와 있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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