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골촌놈인 줄 알았는데 천재작가였다-27화 (27/216)

27화 미팅

오디션은 이미 봤기 때문에 미팅에서 할 건 많지 않았다.

그저 캐스팅된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에게 완성된 대본을 보여주는 것 정도였다.

대본을 나눠준 뒤 간략하게 연기를 봐서 어느 정도의 분위기로 연기할지 맞춘 다음, 조촐한 파티 이후 헤어질 예정이었다.

“오빠? 롤렉스 샀어?”

옷을 다 입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내 방에 갑자기 캐서린이 들어왔다.

아직 드레스를 입을 시간은 아니었지만 어떤지 물어보기 위해 입고 나온 듯 싶었다.

“산 게 아니라 받은 거야. 그보다 너 드레스는 어디서 났냐?”

“집에서 가져왔지! 어때? 예쁘지?”

“.....그거 설마 프롬 파티(고등학교 마지막 파티)에 입고 갔던 드레스냐?”

“응!”

“......”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친구 여동생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여자인데 과연 이 말을 내뱉어도 될지가 의문이었다.

그래도 할 말 못할 말 다 하던 사인데 이런 건 솔직하게 말해줘야지.

“너 살쪘다.”

“......뭐?”

“드레스 찢어지려고 하는데?”

“.....꺅!”

졸업한 이후에도 소설을 쓰느라 밖으로 나가질 않으니, 살이 찌는 건 당연했다.

“백화점.... 지금 열었으려나?”

“사주는 거야?”

“네가 사.”

“칫.”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래도 배우들과 감독님, 투자자들이 있는 파티에 가는데 대충 입고 갈 수는 없었다.

‘파티는 오후에 시작되지만.....’

그냥 평상시와 똑같은 복장으로 가는 건 실례가 되리라.

“드레스 렌탈하자.”

“렌탈?”

“응. 나도 정장 맞출 시간이 없어서 이번엔 렌탈할 생각이니까. 너도 같이 간 김에 거기서 드레스 렌탈해서 가자.”

“렌탈비 내줄 거야?”

“뭐..... 그 정도는 내줄게.”

“아싸! 시키는 거 열심히 할게!”

“그래, 일단 나가자. 렌탈점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응!”

*****

배우들과의 미팅은 제작사 안에 있는 오디션장에서 하기로 했다.

“하루만입니다, 감독님.”

“킁. 자네 잠을 못 잤나? 왜 그리 얼굴이 수척해 보이나?”

“어제 수정작업을 늦게까지 해서요.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 상관없어요.”

“쯧쯧. 젊은 놈이 제 몸 아낄 줄 모르는구만, 일단 인사나 나누게나.”

“네.”

어제는 그래도 푹 잔 편이었지만, 마그누스 감독님은 귀신같이 내가 무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배우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빠 잠깐.”

“왜?”

캐서린은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빗을 꺼내더니, 까치집된 머리를 펴주었다.

“배우들하고 정식으로 만나는 거니까 첫인상은 깔끔해 보여야지.”

“뒷머리 정도로......”

“뒷머리니까야. 사람들은 첫만남에서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유심하게 본다고 하더라고.”

“첫만남은 아니다만 깔끔한 게 좋겠지. 고맙다.”

배우들은 오디션 자리에서 이미 짧게라도 안면을 텄으니까.

‘조연들은 첫만남인가?’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나는 그들한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전부 나를 바라봤다.

나를 처음 보는 조연배우들은 누구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어제 봤었던 의상감독 올리버가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드래곤 원 작가님이십니다.”

“..히익!”

그러자 다들 격앙된 얼굴로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정보 상인 역할인 하베드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턱수염이 자르르 난 하베드라는 백인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제임스 권입니다. 퀀이라고 불러주세요.”

“퀀! 정말 반갑습니다! 혹시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아! 혹시 저도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교환하시죠?”

“저... 저한테까지! 무, 물론입니다! 작가님이 오신다고 하셔서 서점에서 책도 다시 사왔습니다! 제 건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평소 읽고 있던 책이 있었는지, 하베드는 서점에서 새 책을 사온 듯 싶었다.

‘소장용인가? 하긴, 작가의 사인이 있는 책을 마음 편히 쓰는 사람은 드물겠지.’

하베드는 내가 사인한 책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저, 저도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저도 사인 부탁드릴게요.”

“네, 넵!”

나는 차례대로 오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어제는 말을 걸지 못했거나 처음 보는 스태프들까지 차례대로 사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

“드디어 내 차례구먼.”

“.....어?”

마그누스 감독님이 내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당황했다.

“가, 감독님이 왜 거기서 나오세요?”

“여기서 사인회가 열렸다길래 나도 한 번 서봤네. 것참..... 십수 년동안 감독 생활하면서 배우들이 작가한테 사인받고 싶어 안달난 경우는 처음이군.”

“보통 이렇지 않나요?”

“몇십 년 전에 함께했던 원작자한테는 이러지 않았었지......?”

“뭐랄까..... 유명 감독님이 저한테 사인 받기 위해 줄 서있다고 생각하니, 되게 영광스럽네요.”

“시끄럽고 나도 사인 하나 해주게.”

나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감독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봤다.

“이베이에 올리실 건 아니시죠...?”

“크흠! 자네 머릿속에 있는 나는 대체 어떤 이미진가? 아내가 요즘 [사막의 전갈]에 빠져 있네. 뭐였더라..... [나, 나인 드래곤]? 거기에도 가입했다고 오늘 아침에 말하더군. 사인 받아달라고 했으니 그 밑에 르오네라고도 적어주게.”

“르오네? 그냥 영어로 적어도 될까요?”

“그러게나.”

나는 감독님이 가지고 온 독서의 흔적이 보이는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곧 있으면 미팅해야 하니까 서둘러 사인 해주게.”

“네.”

감독님 뒤로는 어차피 몇 명 없었기에 사인은 금방 끝났다.

‘그나저나 사인이 좀 성의 없기는 한데.....’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내 사인을 받자마자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있었다.

이제 내 팬들이 [Dragon two]라는 유치한 사인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오빠. 이 사인들은 어떻게 할까?”

캐서린의 양손에는 배우들한테 받았던 사인지가 들려있었다.

“잘 보관하고 있어줘. 집에 보관하게.”

“이렇게 많은 걸?”

“저 사람들도 내 사인을 소중히 보관해주는데 나도 소중히 보관해줘야지. 혹시 알아? 조연 배우들 중에서 나중에 슈퍼스타가 되는 사람이 있을지?”

“그런가? 알았어. 내가 잘 보관하고 있을게.”

*****

미팅의 과정은 간단했다.

전부 모인 장소에서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에 맞는 대본을 받고, 거기에 작중 분위기에 맞춰 러프한 연기로 맡은 인물이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할지 인지하는 정도였다.

과정은 그것 뿐이지만, 주연과 조연들 모두의 상황을 조립하고, 해석하고, 수정해야 했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시나리오 최종본이라고 해도, 수정할 건 남아있구나.’

하긴, 아무리 완성된 시나리오라고 해도 배우의 성향이나 분위기에 따라 바뀔 수도 있으니까.

제임스는 마그누스 감독님과 함께 시나리오를 재차 검토했다.

‘뭔가..... 신기하네.’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던 시나리오가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지니 더욱 완전해지고 있었다.

‘이게 명장이라는 건가?’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를 생각하고, 하나의 대화가 바뀌면 전체적으로 내용을 다시 훑어 마무리한다.

나이가 있으신 분이신데도 시나리오를 확인하는 눈빛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슬슬 끝나가네.’

솔직히 사전미팅이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마그누스 감독님과 함께 시나리오 마지막 수정을 하고 나니 배울 점이 많다고 상당히 많았다.

“오빠. 여기.”

“고마워.”

캐서린은 주위에 있는 배우들의 매니저들을 데려가 어제와 같이 마실 것들과 간단히 먹을 만한 것을 사왔다.

“보통 이런 거는 제작사에서 준비해주지 않아?”

“그렇지.”

“근데 왜 오빠가 내는 거야?”

“내가 만든 작품을 위해서 저렇게 열심히 해주니까, 그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뿐이야.”

“멋진데? 아무튼 수고했어.”

캐서린도 내 옆에 앉아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으음! 맛있어!”

“그렇게 먹으면 또 살찐다.”

“괜찮아. 내 거는 채소만 들었으니까.”

주섬주섬 샌드위치를 씹어 삼키며 시간을 확인해봤다.

‘6시간이나.... 걸렸네.’

그렇게 사전미팅이 끝이 났다.

****

이 이후에 남은 것은 제작사 측에서 준비한 파티뿐이었다.

파티에는 이 영화에 투자한 투자자들까지 참석하다보니 신경쓸 게 많아보였다.

내가 딱히 도움될 곳이 없었기에 나는 그냥 파티장 구석에서 조용히 음료를 홀짝였다.

배우들을 지그시 관찰하고 있던 캐서린이 내게 다가왔다.

“오빠는 투자자들하고 대화 안 해?”

“만나서 할 말이 없어.”

“할 말이 없다니?”

“돈이 오고 가고를 떠나서 난 작품 얘기밖에 할 줄 모르니까. 거기에 인사는 끝났으니 그냥 파티에선 조용히 있으려고.”

“Geed(아웃사이더) 같아.....”

“닥쳐. 근데 네 말도 반박은 못하겠다. 투자자들하고는 더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방금 인사를 나누고 왔을 때 투자자들의 눈빛은 마치 무언가를 물어뜯을 것만 같은 하이에나같았다.

작가인 나한테 갑자기 경제이야기를 하지 않나, 또 다른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면 불러달라질 않나.

더욱 가관인 건 내가 돈을 많이 벌어들였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느 기관이나 단체, 혹은 기부를 할 생각이 없냐고 말했다.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거면 충분해. 여기서 더 나설 생각하지 말자.’

마그누스 감독님도 계속 도전하라고 그랬으니, 내 작품을 우선으로 하고 싶었다.

“하하하하. 그래도 명색이 작품을 만드신 작가님이신데 이런 구석에 있으시다니요.”

캐서린과의 대화를 들었는지 단정한 옷차림을 가진 훈남이 다가왔다.

“그게..... 데이비스?”

“데이비스보다는 라울이라고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라울.”

라울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지고 온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나는 라울의 잔에 내가 마시고 있던 음료 잔을 부딪쳤다.

-챙~!

“파티가 부담스러우신가요?”

“네, 아무래도 이런 자리는 처음이다보니 조금 어색하네요.”

“영화가 끝나거나 성공하면 이보다 더 규모가 있는 파티를 열겁니다. 작가님도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영환 분명히 성공할 테니까요. 제가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라울이 매력적인 얼굴로 다가오자 캐서린은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나저나 이 분은.....?”

“제 친구의 동생이에요.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권유하진 마세요.”

“반갑습니다. 라울 데이비스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캐서린 휴즈입니다! 패, 팬이에요!”

“오! 감사합니다. 혹시 사인해드릴까요?”

“네, 넵! 잠시만요! 종이 가지고 올게요!”

그러더니 캐서린은 볼이 발그레해진 채 어디론가 뛰어갔다.

우리 둘이 남게 되자 라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작가님 혹시 시간 되신다면 저와 이야기 좀 나누실 수 있으실까요?”

“네. 물론이죠. 무슨일이신데요?”

“[사막의 전갈]에 대해서 여쭈고 싶은게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정말 북미 박스오피스 1억 달러를 달성하면 2부 작성해주시는 거 맞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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