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로맨스
제임스로부터 지금까지의 디자인을 전부 퇴짜맞고 난 뒤로 에일리는 또 다른 디자인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우선 여자아이가 좋아하는 옷은 드레스임이 확실하다고 생각하여, 드레스의 디자인을 더욱 구체적으로 찾고자 인터넷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찾아본 여자아이용 드레스에는 역시나 프릴이 달린 것이 많다고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공주, 귀족의 영애 같은 프릴이 달린 드레스는 역시나 여자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복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에일리는 일상복을 살펴봤다.
‘드레스는..... 너무 거추장스러워.’
[리턴 패션 디자이너]를 수십 번이나 본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며, 결국 드레스에서 생각을 바꿨다.
‘그렇다면 드레스 중에서...... 원피스는 어떨까?’
프릴이 달린 드레스보다 원피스는 비교적 가벼운 느낌이다 보니 아이들이 평소에 입기도 하고, 관리도 편하다 보니 디자인 측면에서도 비교적 수월한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운 옷도 좋지만, 가난한 환경 속에서 벤자민이 아이한테 최고로 좋은 옷을 만들어 주고 싶었을 거야. 다만, 칼리아가 어떤 아이였는지를 다시 한번 판단할 필요가 있겠어.’
활동적인 아이냐, 아니면 조금은 얌전한 아이인가.
‘이럴 땐 엄마인 루시의 성격과 초반에 잠깐 등장했던 칼리아의 활기찬 모습을 생각해야겠지..... 벤자민의 미래의 모습까지 겹쳐보면 생각보다 움직임이 많은 아이였을 거야.’
원피스의 원단을 정하고, 디자인을 정한다.
‘색상은..... 제임스가 무슨 색을 좋아하더라?’
딱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아마 초록색을 좋아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학교에 올 때도 초록색 색상의 옷을 자주 입었지? 검은색 옷도 많이 입었던 길로 기억하는데, 뭐..... 여아용 옷에 어울리는 색은 아니니까.’
지금까지 만들었던 몇 가지 디자인들보다 더 밝고 활기차면서도 어딘가 싱그러운 원피스가 만들어졌다.
마치 처음을 알리는 새싹처럼 싱그러운 원피스의 모습에 그제야 에일리는 만족하였다.
“마지막으로 브렌드를 추가해야지.”
소설 속에서 벤자민은 칼리아의 옷에 항시 자기가 만들었다는 옷 증표를 부착했다고 하였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디자인일 수도 있었다.
“각 디자인 기업의 브랜드를 참고해보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제임스를 상징하는 엠블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벤자민과 제임스......”
그러다 문득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보였다.
“Ann(은혜).....?”
그러고 보니 은혜라는 꽃말을 가진 꽃이 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
인터넷을 두들겨 보니 그곳에는 하얀 물방울 같은 꽃들이 이미지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고양이가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있네.’
그러고 보니 제임스가 고양이를 키우지 않던가?
‘거기에 꽃이니까 싱그러운 원피스의 이미지에 가장 잘 맞을 거야.’
펜스테몬을 기준 삼아 그림을 그렸고, 에일리는 거기에 D2라는 글자를 작게 적었다.
제임스가 팬들을 위해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유치하지만, 가장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인의 앞 자를 가져왔다.
“좋으려나?”
선택은 제임스가 할 것이다.
하루라는 시간만이 주어졌기에 더 이상 무슨 디자인을 만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후아암..... 이제 그만 자자.”
제임스가 마음에 들었기를 바라며, 에일리는 새벽달을 뒤로하고 잠이 들었다.
***
에일리가 보여준 원피스의 디자인을 보자마자 나는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원피스라..... 뭐. 상관없지?’
요즘에는 원피스라고 하면 ‘원피스 드레스’가 가장 먼저 생각나며, 상의, 하의 치마가 하나로 이어진 옷을 뜻한다.
활동적인 옷이기도 하고, 활기찬 아이를 기준 삼았던 칼리아에 어울리기도 한다.
“어, 어때?”
긴장이 역력한 에일리의 모습에 조금 더 고민하는 척을 할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하자. 근데 이거 엠블럼 마음에 든다. 펜스테몬 같은데 맞아?”
“.....뭐야? 이 꽃을 알아?”
“응. 은혜라는 뜻이잖아? 앤의 이름에서 착안한 거야? 디자인도 마음에 드네.”
“그걸 어떻게 알아?”
“소설에서 비교적 자주 나오는 꽃이니까? 아무튼 수고했어. 디자인 상세 설명을 그린 다음에 메일로 나한테 보내주면 내가 빌에이든 미디어에 보내줄게. 의뢰비는 빌에이든 미디어가 줄 거야.”
“두둑하게 주면 좋겠는데.”
“뭐. 처음이니까 많은 걸 바라지는 마. 그렇다 해도 내가 개인적으로 의뢰한 거니까 나도 주긴 할 거지만.”
“에이. 안 줘도 돼.”
“비즈니스는 정확히 해야 해. 신뢰에 직관된 문제니까.”
“으음..... 알았어.”
비즈니스든, 친구 관계든 간에 신뢰라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자들과의 약속을 위해 [사막의 전갈 2부]를 쓰고 있으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월리 오늘 입대 아니야?”
“그렇지? 뭐. 알아서 하겠지.”
“하나뿐인 친구인데 너무 무신경한 거 아니야?”
“원래 남자들인 이래.”
그렇다 해도 월리한테 아무것도 안 준 건 아니다.
캐서린을 통해서 한인마트에서 구매한 정이 많은 초코파이를 전달하였다.
군대에 가면 가장 먹고 싶은 1순위 과자라고 하는데, 솔직히 훈련소 가면 미친 듯이 많이 줘서 다 먹지도 못했다.
“아무튼 이만 갈게. 오늘은 이만 집에 가야 하니까.”
“응. 잘 가.”
“참참. 메일 주소를 깜빡했네.”
수첩에 메일 주소를 적어준 뒤 밖으로 집 밖으로 나갔다.
***
“끄응.....”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있는 사람이 3명밖에 없다 보니, 노트북을 보며 좌절하고 있는 제임스의 신음소리는 다른 사람한테 들리지 않았다.
“뭘 적는데 그래?”
티아는 피곤한지 잠을 자고 있었고, 누나는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다가 나를 바라봤다.
“아니 그게..... 하아. 아무것도 아니야.”
연애 경험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창피한가.
그것 때문에 [사막의 전갈] 첫 부분을 적지 못하고 있다고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냥 연애 이야기를 뺄까? 그냥 잘살고 있었는데 에이가 갑자기 찾아왔다고......’
쓰기 싫은 내용을 적을 때나,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내용을 적을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이런 식으로 옮긴다면 문제가 되는 게 있었다.
‘에단하고 로즐리의 사이가 엄청 좋다고 설명하기 힘들어. 그런 걸 표현하기 위해선 연애하는 장면이나, 데이트 장면에서 에이랑 만나는 게 가장 좋기는 하지.’
그렇다면 어떤 장면에서 만나야 하는지를 정하는지가 관건인데, 에단하고 로즐리의 사이가 애틋해 보일 때 만나는 게 가장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
“뭐야? 왜 연애 경험담을 읽고 있어?”
“.....응?”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궁금증을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난 누나가 내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뭐야? 너 루이나가 소개팅 어쩌구 했었는데 연애해보게?”
“아니 그게 아니라..... 아.”
그러고 보니 누나는 연애 경험이 많았다.
엄청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도 못 해본 나로선 많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누나 연애 많이 했었지? 나 군대 가기 전만 해도 남자친구 있었고.”
“......”
“뭐. 금방 헤어질 줄 알았지만.”
내가 처음 미국에 와서 누나랑 만났을 때, 누나한테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다.
물론 어떻게 해어졌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해어졌단다.
그렇게 1년 정도 흐르자 두 번째 남자친구가 생겼고, 성격상의 이유로 해어졌다.
또 그렇게 2년이 흐르고 세 번째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이번엔 조금 오래가는 듯했으나 결국 헤어졌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네 번째 남자친구는 일주일 만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누나가 6번 정도 사귀었나? 그리고 내가 군대 갔으니 뭐..... 그 이상으로는 안 사귀었지?”
“닥쳐.”
아무튼 누나는 연애 경험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다만, 남자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고 결국에는 결혼 포기 선언을 내뱉었다.
“아무튼 왜 보고 있는데? 글 때문이야?”
“그렇지 뭐. 그래서 연애 경험 좀 이야기해봐.”
“싫어.”
“아니 왜?”
“그냥 말해주기 싫어. 너 같으면 말해주겠냐?”
하긴 여섯 번이나 해어졌으니까.
“아니면 부탁을 해보든가. 돈 주면 그런 거 해주는 데 있잖아?”
“그건 내가 너무 비참할 것 같고, 거기에 내 얼굴이 상당히 팔렸는데 그게 될 것 같아?”
“맞다. 그렇지? 유명인들은 연애조차 쉽지 않다고 하니까. 아니면 그냥 네가 연애를 해보든가.”
“유명인들은 연애하기 쉽지 않다며?”
“그냥 인정해버리면 쉬워지잖아.”
“......누구랑?”
“올리비아랑 하자고 해봐. 아니면 다이애나...는 할아버지 때문에 안 되겠네. 아무튼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하면 해줄 것 같은데? 올리비아 연기 잘하잖아.”
“아니, 그래도 이런 일에 올리비아한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지. 그냥 로맨스 소설 몇 개 보면서 따라 할래.”
그 말에 누나는 혀를 차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체리 새끼.”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알겠어.”
누나는 싱겁다는 듯이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로맨스라......’
내 주변에 로맨스 소설을 쓰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하다만, 그건 로맨스라고 보기에는 야설에 가깝고 무엇보다 수필도 아닌 그냥 자기 생각대로 적는 편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조금의 디테일이라도 더 추가하려면......
‘경험하는 게 가장 좋긴 하지.’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
이래저래 집에 도착했다.
티아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도착하니 이미 해가 떨어지고 저녁이 되어 있었다.
“누나는 아직도 다이어트?”
“응.”
“그럼 내 것만 시켜 먹어도 돼?”
“그러든가. 근데 웬만하면 냄새 적은 걸로 시켜.”
“이 세상에 그런 음식은 존재하지 않아.”
그렇다 해도 누나를 위해서 일식 전문점에 전화를 걸어 배달 초밥을 주문시켰다.
“밥은 탄수화물, 흰살생선은 단백질. 고추냉이는 매우니까 살 빠질 거야! 나도 먹을래.”
“.....근거 있는 이야기야?”
아무튼 초밥이 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다 보니, 나는 다시 컴퓨터에 앉아 [사막의 전갈 2부]를 켜고 또다시 끙끙거렸다.
알콩달콩한 이야기를 적을 때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
누나는 한참이라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지 말고 내일은 좀 쉬는 게 어때?”
“내일?”
“그래. 어차피 목요일에 회장에 가는 거잖아? 내일 공모전이 열린다고 해도 너는 할 것도 없고. 애초에 공모전도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음......”
처음에는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할 줄 알았는데,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몰릴 줄 모르기에 몇 개의 주를 대상으로만 한다고 들었다.
“휴식이라..... 근데 나 지금도 휴식을 취하고 온 거 아닌가?”
“에일리 만나고, [사막의 전갈 2부] 때문에 끙끙 고생하고, 그리고 너 맨날 휴식한다면서 결국에는 글로 이어지잖아?”
“그렇.....지?”
“이번에는 아예 전부 내려놓고 휴식을 취해봐. 스포츠를 즐겨도 좋고, 먹고 싶은 걸 먹어도 좋고 아니면 쇼핑을 해보는 것도 좋아. 그냥 푹 쉬어봐.”
“.....그럴까?”
“어. 너 어차피 저쪽 시내로 나가면 길 잘 모르니까 내가 내일 안내인 붙여줄게.”
“음..... 알았어. 고마워.”
“글이나 열심히 써. 다음부터 끙끙거리지 말고.”
-띵동!
누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초밥 왔나 보네.”
“내가 나갈게.”
초밥을 계산하고 식탁으로 가져왔다.
‘근데 초밥 칼로리 엄청 높지 않나?’
밥을 압축시키고 거기에 양념까지 해서 높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뭐.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니까.’
행복한 듯 초밥을 기다리고 있는 누나 앞에서 그런 말 하기는 그랬다.
모르면 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