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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2화 (2/60)

2화

황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었다.

머리칼은 허리를 넘길 정도로 긴 검은 생머리였고, 눈동자 또한 모든 것을 삼킬 만큼 진한 검은색이었다.

창백하다 못해 질린 듯한 새하얀 색의 피부가 황제의 검은 것들을 더욱더 부각시켰다.

“안녕.”

황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읊조렸다.

“이젠 집에 가야지.”

황제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폐하!”

공작이 소리쳤다.

“목소리 낮추게, 공작. 감히. 누가 그대 앞에 있는지 잊은 건가?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는데.”

나른하면서도 싸늘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를 보며 해사하게 인사하던 목소리는 거짓이었다는 듯 황제의 목소리에는 혹한의 추위보다 더 찬 바람이 불었다.

“폐하…… 제발…… 소신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공작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황제에게 부탁했다.

“이미 나에게 준 것은 내 것이다. 그러니 공작, 더는 내 앞에서 내 후궁의 소유권을 주장하려 들지 마라.”

황제는 그길로 나에게 곧장 걸어왔다.

그리고 나는 황제의…….

짝!

그렇다.

뺨을 때렸다.

나는 유교 사회에서 자랐고 어른을 공경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것보다 앞서 나를 물건 취급하는 황제의 행태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하찮더라도 나는 한 명의 인간이었고 황제의 물건 따위가 아니었다.

황제의 하얀 뺨에 내 손자국이 강하게 찍혔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 또한 나의 행동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왜냐고? 내가 사내를 주먹도 아니고 손바닥으로 쳤기 때문이었다.

후궁이라고 하더니 무슨 소심하게 뺨이나 때리냐고!!!

나는 이번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공작이 머리를 박은 것만큼 황제에게 주먹을 날릴 작정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탁.

하지만 내 손목은 황제에게 가볍게 잡혔다.

“이것이 다시 한번 내 얼굴에 닿는다면 그대 아비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네가 이따위로 사는데 나라가 건재한다는 것이 웃긴다.”

나는 실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번에 들어온 후궁께서는 황제에게 대단히 불만이 많은 것 같군.”

황제는 애완동물에게서 즐거움을 찾듯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뭐야?”

“글쎄. 그냥 예쁘게 얌전히 내가 내준 궁에 박혀서 살아가는 것?”

황제는 곰곰이 생각이라도 하는 듯이 느리게 내뱉었다.

“후궁이 무슨 컬렉션이냐? 30명을 예쁘게 앉혀만 놓게?”

그러자 황제가 실소를 터뜨렸다.

크으으으 큭큭.

소리를 내면서 웃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컬렉션이라……?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 그냥 예쁘게 있는 것만으로 가치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

나는 당장이라도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입을 열수록 새하얗게 질려 가는 공작 때문에 그냥 삼켜 버렸다.

“집으로 보내 줘.”

나는 전투력이 빠져나간 몰골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함께 그대의 궁에 가면 되겠군. 오늘은 거기서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대의 돌발 행동으로 우린 아직 첫날밤도 치르지 않았으니까.”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참았다.

황제와 몇 마디 섞어 본 결과 그는 미친놈이며 정상적인 사람의 목소리가 잘 전달이 안 된다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남자인데 무슨 후궁이냐, 남자인데 무슨 첫날밤이냐, 와 같은 소리는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저 미친 황제 놈은 나를 후궁으로 들이려고 동성혼까지 합법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미 몸의 기억을 통해 알아 버렸다.

정말로 미친놈이었다.

“본가로 보내 줘.”

나는 비굴해 보이겠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인 말을 내뱉었다.

어쨌든 황제가 법이고 황제의 말이 절대적인 이곳에서 내가 아무리 외쳐 봤자 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왜지?”

황제는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을 했다.

“나 죽었다 깨어났잖아. 숨을 못 쉬었는데 이 정도는 봐줘.”

“봐 달라는 사람치고 너무 성의 없지 않나? 아양이라도 떨어 보든지.”

황제는 쿡쿡하고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눈동자는 기대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담지 않았던 눈동자에 미약하게 호기심 같은 기대감이 스민 순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폐하…….”

부르긴 불렀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황제는 한쪽 입 끝만 올린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공작의 집에 가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궁이든 공작저든 똑같이 나에겐 새로운 공간일 뿐인데 굳이 애써야 하나, 라는 생각이 찾아든 것이다.

“그냥 궁으로 가겠습니다.”

한숨과 함께 뱉은 말에 황제의 얼굴이 구겨졌다.

진심으로 기대했다는 얼굴에 내가 더 어이가 없어졌다.

“연아.”

공작의 한탄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죄책감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지만,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저에게 오시는 방법밖엔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피식 웃더니 뒤돌아 걸어갔다.

그러다 멈칫하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후궁전엔 외부인 출입 금지지만 공작이 충신이라는 점과 제국의 검이라는 점을 감안해 두 사람에게만 특별히 출입할 권한을 주지.”

황제는 그길로 사라졌고 그제야 공작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안심한 기색이 서렸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 * *

며칠 동안 정신이 없는 나날을 보냈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도 해야 했고 인정하기 싫은 내 위치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30번째 후궁이면서 남자인 나를 인정하는 데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기에 아직도 불안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위치를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공작은 하루도 집에 가지 않고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그리고 나는 공작의 보살핌 속에서 이 몸의 원주인인 블리 연 웰렌이라는 남자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가져올 수 있었다.

블리 연 웰렌은 어린 시절부터 몸이 매우 약했다.

달수를 채 채우지 못하고 세상 밖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작 부인은 이 몸을 낳다가 난산으로 저세상으로 떠났고 아내를 사랑했던 공작은 아기를 한동안 돌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블리 연 웰렌의 몸은 더욱 나빠지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공작은 자신의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아이는 사랑하는 법조차 모른 채 수많은 상처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저 공작저에서 시들어 가는 꽃처럼 숨만 쉬고 살아왔던 것이다.

황궁은 항상 얼음판이었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오늘은 몇 명이나 죽었지?’였다.

왜 이런 말이 도냐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황제가 매일매일 사람의 목을 무 썰듯 베었기 때문이었다.

숨을 크게 쉬어서 죽이고, 차를 따르는 이의 손이 마음에 안 들어서 죽이고, 엎드린 모양새가 맘에 안 들어서 죽이고, 이래서 죽이고 저래서 죽였다.

제가 무슨 궁예도 아니고 다 죽이고 있었다.

무성한 소문 속 미친 황제와 내가 본 미친 황제는 거의 차이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뺨을 때린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나는 매우 놀란 상태였다.

나의 한국 이름은 강은성이다.

연이라는 이 몸의 주인과 나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 사랑을 못 받았다는 것이었다.

뭐 나중에 사랑을 듬뿍 받은 것 같지만. 연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았지만 나는 양부모님에게서의 사랑을 받았다.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 몸의 기억을 이어받아도 크게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판타지 소설처럼 기억을 잃은 척할 필요도 없었다.

이 몸의 주인은 철저히 고립된 생활을 하였기에 적응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그랬기에 일단 첫 번째로 할 일은 공작부터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아버지. 이제는 일을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공작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재차 말했다.

“저는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괜히 그 미친ㄴ,,, 아니 폐하에게 미움을 받기 전에 일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미친놈 소리가 튀어나왔다.

애써 공작은 못 들었을 거라 여기며 순화하여 말했지만 공작은 더욱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젠장! 공작이 미친놈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공작의 눈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공작을 돌려보내는 이유는 미친 황제의 폭정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을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 몇 번이나 들었던 것이다.

나는 진짜 신인지 확인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공작이 24시간 들러붙어 있어서 좀처럼 짬이 나지 않았다.

“내가 불편했구나. 미안하다. 아비는 그저…… 아니, 아니다. 이만 가 보마.”

공작은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 아들과 이리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처음이라 아쉬운 공작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나는 지금 당장 신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더욱더 신경이 쓰였다.

왜냐하면 지구에서 살 때 신이 살아 있다고 믿지 않았지만, 나는 실제로 신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 높은 존재가 나를 관음증 환자처럼 지켜보고 있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공작이 나가고, 나는 방 안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나의 물음에 방 안의 공기가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왠지 숨기고 싶었는데 들켰을 때의 반응처럼 분해서 부르르 떠는 것 같기도 했지만, 설마 신이 그럴까 싶어 나는 일렁이는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느냐?”

설마가 맞았다.

거기서 맨날 알아 달라는 것처럼 알짱거렸으면서 모르길 바랐다니 참으로 우스웠다.

“저 보라고 늘 그곳에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러자 절대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므로 나는 말을 돌렸다.

“왜 찾아오셨는지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말에 신은 잠시 멈칫하더니 허둥거렸다.

왠지 우물쭈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기 혹시 제가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까? 막 말하면 큰일 난다거나 하는……?”

처음 신이 관음증처럼 나를 지켜볼 때에는 영혼이 받았던 충격 때문에 겁이 났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이지 않고 느껴만 지는 데다가 위압감을 풍기지 않아서인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운 것 같기도,

“그건 아니다. 그냥 지금 삶에 만족하는지 지나가다 들렀다.”

신의 대답에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일단 만족하냐 묻는다면 글쎄, 아직 살아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답을 할 것 같다.

그나마 며칠 지나서 모르겠다는 답이 나왔지, 첫날이었으면 절대 아니라는 답이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가다 들렀다는 것치고는 내가 이곳에 온 날부터 주야장천 터를 잡은 신이었기에 그의 대답이 귀엽게까지 느껴졌다.

“조용히 하거라.”

신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고 대답하려 했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신 쪽을 쳐다보았다.

신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고 문은 아무런 제지 없이 바로 열렸다.

이윽고 내가 마주 보게 된 황제는 매우 언짢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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