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황제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아까 그 뜨겁던 눈빛만 보면 당장 교황이나 성기사를 검으로 베어 버릴 것만 같았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좀처럼 편안하지가 않았다.
매도 첫 매가 가장 안 아프다고 하던데, 이왕 맞을 거 지금 맞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왜인지 지금 마일리지 적립하는 기분이라 이렇게 크고 편안한 소파에 앉아 있는 게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 와중에 황실과 신전의 협상은 물 흐르듯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떤 식이냐 하면…….
“내가 요청했던 사안은…….”
황제가 이렇게 말을 떼면,
“염려 마십시오, 폐하. 저희 신전은 신의 대리자께서 황실에 의탁하고 있는 한 모든 것에 협조하겠습니다.”
이런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황제의 썩어 가는 인상을 마주하는 나만 속이 타들어 갔다.
어쩌면 교황은 정말로 나를 먹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신이 대리인이 자신이었는데 자신도 못 듣는 신의 음성을 후궁 따위가 듣고 있으니 질투를 할 수도 있었다.
머릿속에 온갖 음험한 세력 전쟁을 떠올리고 있을 때 교황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협상을 마무리했으니 가 봐야겠습니다. 앞으로 언제든 저희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신전에 문의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걸고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평안, 또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교황이 숙이자 뒤에 있던 성기사도 절도 있는 인사를 했다.
내가 이렇게 큰 사람인 걸 나만 몰랐나 싶어 나 자신을 잠깐 뒤돌아봤지만, 나는 이들이 예를 차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사를 거절하기도 뭐해서 나 또한 깊숙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과 그 일행은 협상이 끝나자마자 황실을 떠났다.
가난하다고 들었던 신전에서 돈이 어디서 났는지 나에게 선물을 가득 안기고 떠난 것을 빼면 그들이 간 것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흐뭇한 얼굴로 그들이 간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냉기가 철철 풍겨 왔다.
뒤돌아보기가 겁날 지경에 이르렀지만, 사내가 무섭다고 피할 수는 없으므로 한껏 긴장한 채 뒤로 돌았다.
억지로 웃느라 입술 끝이 부들부들 떨려 왔지만 이를 앙다물고 미소를 머금었다.
“연, 얼굴이 이상하다. 아…… 안 이쁘다는 것은 아닌데 어쨌든 이상하다.”
나의 노력이 먹혔는지 황제는 내 얼굴을 보고 찬 기운을 조금은 풀었다.
그래서 나는 억지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이상한 얼굴도 이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나한테 설명할 말이 있지 않나?”
그래. 설명할 말이 있긴 있는데 내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말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죄짓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것은 대답해 줄 수 있나?”
“무엇을 말입니까?”
“아까 교황이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황제는 나를 걱정하듯이 바라봤다.
그제야 나는 황제가 걱정하는 방향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처럼 나도 자아를 잃고 날뛰는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폐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신이 친구처럼 나와 대화를 하는 것이지 나의 이지를 빼앗거나 나를 함부로 조종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제야 황제는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겠지. 신이 인간의 생에 간섭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래야만 하지. 만약 그대에게 해가 된다면 설사 신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저에게 화가 나셨던 것이 아닙니까?”
안도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가 나긴 했었지.”
황제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런데 왜 화를 내지 않으십니까?”
황제는 나를 한 번 앞쪽을 한 번 그렇게 몇 번이나 번갈아 보다가 입도 몇 번이나 달싹이고서야 말문을 뗐다.
“그거야 미움받을까 봐. 나는 그대가 원해서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해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못한다. 물론 그대가 믿음이 안 가서가 아니고 철저히 내 문제이지. 그러한 불안을 안고 있는데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화를 내겠나.”
마음이 아팠다.
그가 불안한 이유를 알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내가 미웠다.
그런데 내가 이 몸의 진짜 주인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평생 실재하는지도 모를 환청과 환상에 시달려 온 그에게 사실을 말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겁이 났다.
아, 나 또한 불안하구나……. 나도 황제와 다를 바가 없이 불안했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의 담담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의 귀에 들어왔다.
“처음엔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 말했는데 그대는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구나, 라는 생각에 피가 뜨거워지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음을 느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그대에 대해서 물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제야 안 거지. 나는 화낼 자격도 없구나. 그대가 진짜로 원하는 거에 대해서 들어준 적이 없구나. 그런 내가 화를 낸다면 진짜로 나는 연, 그대 곁에 있을 자격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말하지 않은 건 당신이 묻지 않아서가 아니고…… 내 존재 자체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라서 말을 못 했던 겁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겉으로 한 번만 내뱉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래서 묻는 말인데…… 나에게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나?”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사람이 저렇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것은 반칙이었다.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입니까?”
“그래. 하늘의 별이 필요하다 그러면 온 황궁을 별보다 더 환하고 반짝이게 만들어 줄 것이고,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하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꼭 줄 것이다. 그대가 내 옆에 있는다는 약속만 어기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나를 위해 황제도 그만둘 수 있다는 남자다.
나는 전쟁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지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살고, 황제도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섣부르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너무 많은 걸 저에게 맞춰 주셔서 다른 걸 원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니다. 그대가 내게 맞춰 주고 있는 것이지. 그러니 다른 사람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대만을 위한 어떤 것도 좋으니 말해 봐라.”
전쟁이요. 저는 폐하께서 전쟁을 하지 않고 저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목 끝까지 나온 말인데 입술 너머로 뱉지는 못했다.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일단은 폐하와 행복한 식사를 마치고 잠을 자고 싶습니다.”
나의 대답에 황제는 한숨을 삼켰다.
“언제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겠다고 약조해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그거면 되었다.”
그렇게 황제와 나는 정신없는 오늘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신은 나의 꿈에 찾아왔다.
싱그러운 들판 위에 모든 동물들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이 지상낙원인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여유롭고 풍족해 보였다.
꿈에서조차 이런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은 신이 만들어 낸 세계라는 소리였다.
“너무 오랜만이신 거 아닙니까?”
낮에 교황의 일도 있고 해서 말이 삐딱하게 나갔다.
“이젠 나인 것을 제법 알아보는구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그때 내 눈앞에 새의 모습을 한 신이 다가왔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서도 그 새가 신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못할 만큼 나의 눈엔 신비하고 성스러웠다.
“이젠 그 모습으로 살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그대에게만 이 모습으로 보일까 해서, 그대는 새를 제법 좋아하지 않느냐.”
그랬다. 나는 새를 좋아했다.
새는 내가 가지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장애물은 날아서 넘을 수 있었고, 그 어떤 선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딱 하루만이라도 새처럼 날아 보고 싶다 할 정도로 새를 좋아했다.
“네 좋아합니다.”
“황제에게 말하면 들어줄 것인데…….”
“네, 들어주겠죠. 그러면 온갖 진귀한 새들은 황실의 새장들에 갇힐 것입니다. 저는 자유로운 새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내 욕심 때문에 그들의 자유로움을 억압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그대는 늘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그대를 선택한 이유란다. 그러니까 그대는 늘 그렇게만 있어 주려무나.”
아니,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자기가 좋아하는 이유를 가둬 놓는 미친놈이 어디 있냐고……?
나는 신의 행동에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지금은 중요한 게 아닌 문제는 넣어 두기로 했다.
“그런데 저번에는 왜 그렇게 말이 끊긴 겁니까? 그리고 신탁이라니? 저번엔 안 된다고 칼같이 거절하셨으면서 무슨 변덕이십니까? 혹시 폐하께서 환청을 들으시는 것이 솔 님과 관련이 있습니까?”
“워, 워. 숨 쉬고 하나씩 하나씩 물어보거라. 일단 지금까지의 질문에 대답을 해 보자면 첫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의 답이 같으니 이건 나중에, 두 번째 질문은 그래, 그렇게 해야 할 것 같구나. 이것도 어쩌면 첫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이랑 연관이 되겠구나.”
애매모호한 대답뿐이었다.
“자세한 말씀은 해 주시지 않으실 겁니까?”
살짝 짜증이 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새의 형상을 한 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세히 말해 주마. 그래야 할 것 같으니까. 보자……. 이젠 어느 정도는 자격을 갖춘 듯싶으니까. 질문에 관한 건 자세히 말해 줘야지…….”
나는 그러는 신 앞에 자세를 똑바로 했다.
이유 없이 무작정 무엇을 하기보다 계기가 있다면 그것이 원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나는 신의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