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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안배-37화 (37/60)

37화

“지구나 이곳과 같은 세계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글쎄 많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100개 좀 넘게요?”

“후훗, 귀여운 답이로구나. 그대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무수히 많은 세계가 존재한단다. 100개라니……. 어쩜, 그대는 생각하는 것마다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구나.”

남자 성인인 내가 귀엽다니 매우 부끄러워졌다.

“그, 그런데 이게 제가 알고 싶은 거와 상관이 있습니까?”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역시 그대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구나.”

눈초리가 저절로 사나워졌다.

놀림받는 것은 언제나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 상관이 있지. 중요한 문제이지 않겠느냐? 세계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관리자가 많이 존재하고, 관리자들의 손이 채 뻗지 못한 미지의 세계 또한 존재한다는 말이니까.”

미지의 세계라니……? 신이 관리하는 세계도 멸망할 수가 있는데, 그럼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생명들이 있기나 할까?

“그대 생각이 맞다. 그러한 세계들은 생명이 존재했다가도 금방 사라지기 일쑤다. 그리고…… 그런 세계들만 빛이 아닌 어둠이 집어삼키고 있지. 본래 빛이 클 때는 그 어둠의 그림자가 아주 미미했단다. 그런데 세계들이 끝없이 생기고 멸망하고를 반복하면서 어느덧 어둠이 자신의 영역을 아주 많이 넓혀 나갔다. 급기야 신이 관리하는 세계에까지 어둠이 들어오게 되었단다.”

이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가? 사실 신전에서 보내온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변명 같겠지만 시간이 하나도 없었다.

신에게 질문할 생각만 했지, 사전 학습을 하나도 안 한 것에 대해 괜히 부끄러워졌다.

“이건 책에도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다. 신화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사실을 아주 조금만 담고 있지. 그러니까 나에게서 직접 듣는 것을 그대는 영광으로 생각하거라.”

영광…… 갑자기 짜증이 났다.

이 영광스러운 일 때문에 낮에 교황이 남기고 간 빅 엿을 하마터면 그냥 정통으로 맞을 뻔했다.

다행히 마음이 넓은 나의 반려가 그 엿을 고스란히 녹여 버려 내가 맞을 일은 없었지만, 그 찌꺼기가 남아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흠흠. 아무튼 그래서 관리자들을 관리하는 높은 단계의 관리자들은 생각했지.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그대들이 말하는 진정한 신일지도 몰라. 그들은 어둠이 커질수록 빛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이 양성하는 관리자들을 늘리기로 했어. 하지만 그 수에는 한계가 있었고, 어디에선가 관리자들을 대체해야만 했지. 어디서 대체했을까?”

그러게 무한 동력일 수 없는 신이라 과연 신을 대체할 만한 것이 있나?

“그래, 관리자를 대체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지. 하지만 어둠이 커질수록 빛이 꺼지고 멸망의 세계는 걷잡을 수 없이 많아졌단다. 그래서 관리본부는 급처방을 내렸다. 가장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태어난 순간부터 수많은 시험을 내리면서 관리자의 자격을 하나하나 갖추도록 말이다. 물론 기회를 가진 인간들이 다 관리자가 된 것은 아니다. 자격이 없는 이들은 견디지 못해 중도에서 포기하기가 일쑤였지.”

하긴 신이 되는 길인데, 쉬우면 누구나 다 되겠다고 했겠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점점 신의 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모든 시련과 시험을 다 견뎌 내고 한 인간이 신이 되었단다. 뭐 첫 인간 관리자이자 다시 나오지 않을 인간 관리자였단다.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으냐?”

“궁금합니다.”

“나야. 그 인간 관리자가 나란다.”

식사 메뉴를 정하듯 대수롭지 않게 신은 말했다.

“태양의 신은 옛날부터 존재하던 신 아닙니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이렇게 멍청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게 알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나의 태초는 인간이었단다. 하지만 너무 까마득한 옛날이라 이젠 인간의 기억이나 추억 뭐 그런 걸 생각할 수 없을 정도야. 그만큼 시간이 흘렀지. 그러니까 나는 이젠 인간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무리거든. 지구의 인간들 말로 표현한다면…… 아, 살아 있는 화석이나 같지. 죽은 건 아니니까.”

너무 엄청난 것을 알아 버렸다.

“뭐, 그런데 내가 어떤 시험을 통과했는지 궁금하진 않으냐?”

“글쎄요. 제가 뭐 할 것도 아니라서 그렇게 궁금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들어라.”

거절을 받아 줄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물었는지 알 수 없다며 나는 투덜거렸다.

새의 형상을 한 신이 날개로 그러한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의 얼굴이면서 쓸데없이 아련한 표정을 짓는 신을 나는 못 본 척 외면했다.

“내가 치렀던 관리자의 시험은 많았지만, 나를 관리자가 되게 한 궁극적인 성과가 있었단다. 다름 아닌 이 세계의 어둠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 세계는 본디 관리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거든. 그러니 문명 또한 없었지. 하지만 어둠이 너무 커져서 소멸 직전이었단다. 그러한 어둠을 내가 이 세상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몰아냈거든.”

말만 들으면 사실 엄청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둠을 몰아냈다고 말하는 신의 목소리는 참으로 슬퍼 보였다.

후회하는 것 같기도 보였다.

“그렇게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세계를 관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고, 그 후로 다른 세계들도 관리하게 되었단다.”

“그렇군요. 그런데 관리자는 정확히 무엇을 합니까?”

“그대들이 말하는 신력, 그것을 공급하여 세계의 균형을 맞추지. 신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관리자의 능력이 검증된다.”

하지만 의문인 점도 있었다.

그래, 이곳은 신력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지구는…… 신력을 가진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신이 말을 이었다.

“그래. 지구에는 신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없지. 하지만 지구에는 수많은 형태의 신력이 존재한단다. 그것은 지구를 관리했던 모든 관리자들이 내린 축복이고, 그것들이 뭉쳐 마력이 되었단다. 그 마력들이 있어서 지구는 지금까지 관리하는 관리자의 직접적인 신력이 없이도 인류가 발전한 것이었단다. 그것이 모든 관리자가 지구를 좋아하는 이유였지.”

“왜 말입니까? 발전된 세계라서입니까?”

“그래. 하지만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대들이 말하는 신의 축복 덕분이지. 솔직히 말하면 관리자들끼리 교류가 잘 이루어지진 않아. 관리자들의 축복은 관리자들끼리도 매우 특별한 경우야. 그래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축복을 남긴 지구는 조금 더 특별했던 거고. 나도 신기하긴 해. 왜 지구를 거쳐 간 관리자들은 축복을 내렸는지 말이야. 하지만 그러면 뭐 해. 이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순간적으로 짜증이 확 났다.

나는 아직도 지구가 사라지던 날의 꿈을 가끔 꾼다.

그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사무쳐서 하루 종일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한때나마 인간이었던 신이 이렇게 인간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퉁명스레 말했다.

“그래서요…… 그다음은요?”

“음, 결론만 말하자면…… 그 어둠이 지금까지 숨어서 힘을 축적했을 거라는 것이 내 추측이란다. 그리고 그 어둠이 황제와 아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단다. 내가 말했지? 그때 어둠을 몰아낸 것이 나였다고. 내가 관리자가 되는 조건이나 내 속성이 되어 버린 거야. 그러니까 내 힘이 어둠에게 통하는 것은 맞단다. 하지만 나는 그대를 통해서 힘을 쓰기에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다. 그저 견제만 할 뿐이지. 그리고 내가 그대를 선택한 이유는…… 그대와 나의……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었을 때의 영혼과 지금 그대의 영혼의 색깔이 같기 때문이란다.”

“영혼의 색이요?”

“그래, 영혼의 색. 아주 투명한 색 말이다. 어떤 것이라도 무효화시킬 것만 같은 색 말이야. 그 때문인지 그대와 나의 상성도 제법 좋지. 황제가 이젠 환청을 안 듣지 않느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제는 확실히 내가 옆에 있으면 안정감을 느꼈다.

그랬구나. 신의 힘이 황제가 가지고 있는 어둠의 힘을 억제했던 거구나.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구나…….

“하지만 언젠간 또 듣겠지. 아주 몰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대도 황제가 괴로운 것은 보고 싶지 않을 것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젠 그대가 나와 한 약속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원해서 멸망을 막을 생각이 들었느냐?”

나는 그 질문에 멈칫했다.

사실 내가 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애당초 가족이 사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한 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혹시 내가 원해서 하는 거라면 신이 약속을 철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인간과 한 약속은 무조건 들어준단다. 안 그러면 관리자의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거든. 그 점은 염려하지 말려무나.”

속을 들켜 버려 부끄러워졌다.

“그대는 이상한 것에서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니까.”

“크흠. 그, 그러면 제가 신의 대리자라는 신탁은요?”

급하게 말을 돌린 것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 그것 말이냐? 사실 내가 힘이 많이 없었거든. 그런데 어둠과 그대가 자주 접촉하면서 어둠이 조금은 움츠러들더구나……. 그래서 그대에 대한 신탁을 내릴 수가 있었지. 힘이 약해지면 신탁 하나 내리는 데 신력이 어마어마하게 들거든.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지, 물의 양은 똑같은데 그냥 일반적인 길로 보내는 거와 바늘구멍으로 보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힘이 더 들겠느냐?”

그건 말 안 해도 다 알지 않나? 당연히 바늘구멍이겠지.

“그래. 어둠이 약해지면 관리자와 소통하는 길이 좁아진단다. 이유를 알겠느냐?”

“그래서 지금껏 신력이 사라져 간 것입니까?”

“그래. 하나의 세계에 공급할 수 있는 신력의 양은 정해져 있거든. 좁아진 구멍으로 신력을 흘려 보내는 중에 힘을 쓰는 데만 신력을 거의 허비하는 꼴이지. 뭐, 그대 덕분에 숨을 쉴 만큼의 신력을 흘려 보낼 수 있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한단다.”

“그럼 저 진짜로 대리인인가 뭔가를 해야 합니까?”

솔직히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시끄럽고 주목받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대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단다. 전적으로 그대의 의견에 따르라고 말해 뒀으니. 그대는 그저 어둠을 황제에게서 떼어 낼 방법만 생각하면 된단다. 그것이 멸망을 막는 방법이야.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면 어둠은 그것을 양분 삼아 더 강해질 것이고, 그땐 이 세계 하나 멸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단다.”

뭐 어차피 이제 발을 빼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애초에 할 생각이긴 한데 아직 궁금한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혹시 황제에게서 어둠을 떼어 내면요?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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