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아니! 절대 아니다. 그런 생각은 아니다.”
“그, 그럼 제가 하는 건 아니겠지요?”
신이 하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그대에게 하라고 하겠느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신이 쿡쿡거리며 웃든 말든 솔직히 안도감이 먼저라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영혼의 영역에서 신이 주던 압박감을 잊지 않았다.
뭐 신도 예전엔 인간이었는데 나도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또한 언감생심 하지 않았다.
그가 신이 된 데에는 그만한 능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감히 내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외 존재였고, 인간인 내가 그들과 맞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폐하의 몸 안에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솔 님은 저 안에 안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대를 통해 내 힘을 내보내지. 그러니까 어둠도 똑같이 그리할 것이다. 일종의 계약 관계 같을 거란다.”
“그럼 폐하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일종의 링크 주소 같은 거군요.”
“똑똑한 것. 맞다. 그것을 알아야만 황제와 연결된 어둠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계약은 해지할 때 계약자가 숨어 있다가도 노출이 되거든. 그때를 노려야 하는 거고.”
“그때를 제가 알 수 있습니까?”
“아니, 내가 알려 줄 거야. 그대는 황제를 통해 어둠이 힘을 쓰는 것을 막으면 된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런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황제가 지금 난리가 났다. 고생 좀 하겠네. 이만 가 보마.”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신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나를 애타게 찾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폐하?”
“연. 왜 그러나. 괜찮나?”
황제가 허옇게 뜬 얼굴로 나를 흔들었다.
궁의가 옆에 서 있었고…….
“무슨 일은 폐하께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대가 갑자기 깨어나지 않아서 걱정했다. 아무리 불러도 듣지를 못했다. 난, 나는……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황제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망할 신 같으니라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 싶으면 다음을 기약하고 나를 빨리 보내 줄 것이지, 안 그러니까 가뜩이나 마음이 여린 황제가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혹시나 들을지 모를 신을 신나게 욕하며 황제를 마주 꼭 안아 주었다.
“폐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깊은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폐하의 품이 너무 안락해서요. 그러니까 저는 너무나도 괜찮습니다.”
내 어깨가 젖어 들어갔다.
이게 뭐 그렇게 울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더 울 것 같아서 그만 내버려 뒀다.
문제는…….
“이만 나가 보게.”
나는 황당한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궁의와 시종들을 내보냈다.
시종장이 있었으면 벌써 이들을 다 내보냈을 텐데 오늘따라 그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황제의 이런 귀여움을 다 들켜 버리고 말았다.
황제로서의 위엄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까?”
“그래. 벌써 오후다.”
“아…… 그럼 폐하 식사는요?”
황제는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밥이 다 무엇이냐. 그저 나는 그대가 다시는 못 깨어날까 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신을 찾았는걸.”
신을 싫어하면서도 급하면 찾는다니…… 황제의 반응이 매우 귀여웠다.
“신께서 들으셔서 저를 보냈을 겁니다.”
“이젠 신의 대리인으로 있기로 한 것인가?”
마음을 조금 추슬렀는지 황제가 농담을 했다.
신의 대리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아파 왔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황제가 위엄 있는 목소리를 냈다.
그래 봤자 내 품에서 울먹거린 것이 몇 분 전이기에 그마저도 나에게는 귀엽게만 들렸다.
“폐하. 신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시종장이었다.
황제에게 아뢴 그는 나를 보고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시종장의 부재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긴 신력이 빵빵한 걸 봤으니 황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나로서는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더더욱 신으로 인해 이런 부산스러운 날을 맞는 것은 더더욱 사양이었다.
그래…… 이왕 신 때문인 거 신전 사제들이나 갈구어야겠다.
“돌아가라고 할까?”
황제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 절대 안 되지.
“이왕 온 거 신의 축복이나 해 주고 가라고 해 주십시오. 저뿐만 아니라 황실 곳곳에 말입니다.”
전투력이 상승한 나의 말에 황제가 멈칫거렸다.
하지만 황제는 내가 해 달라는 것을 물릴 사람이 아니었고, 신전에서 누가 왔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신력이 완전히 바닥날 만큼 굴렸다는 보고를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드네.”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그때 황제가 나에게 다가왔다.
“뭐가 말이냐?”
“그냥 뭐 이것저것 다 마음에 듭니다.”
그냥 대충 대답한 말이었는데 황제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대 기분이 좋으니 나도 기분이 좋구나.”
그러고 보니 신과 대화한 말이 생각났다.
나처럼 황제가 어둠의 매개체로 쓰인다는 말. 그렇다는 것은 아직 어둠과 계약이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가 언제 나타나 강력한 어둠으로 황제를 삼켜 버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 황제는 어둠으로 무력이 강해진 것 아닌가? 아니면 원래부터 검을 잘 쓰게 태어난 것인가?
사람이란 모름지기 궁금하면 직접 물으면 될 일이었다.
“폐하. 요즈음은 환청이나 환각이 안 보이십니까?”
내 질문에 황제가 멈칫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예 안 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대와 조금 떨어지면 아주 잠깐씩 들리곤 한다.”
생각보다 심각했다.
나는 그저 나와 함께만 있으면 괜찮은 줄 알았다.
나의 안일함이 불러온 결과가 너무 무거웠다.
그때 황제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아 왔다.
“그대가 있어서 지금은 숨이라도 쉰다. 그러니까 그런 얼굴을 하면 내가 너무 죄스럽지 않겠나. 나는 그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
나는 애써 괜찮은 얼굴을 꾸며 내며 황제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환청은 그때 뭐라고 합니까?”
사실 환청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어둠 또한 존재하니까. 하지만 황제에게 그것이 실재한다고 알려 줄 수 없었다.
나중에는 다 말하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실재한다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인 것이다.
“그저 죽이라고 하지. 죽여야 한다고. 그래야 완전무결해진다고……. 난 이미 그대를 만난 덕에 완전무결해졌는데 말이다. 전에는 그런 생각조차 못 했는데 이젠 머리가 제 기능을 하니까 괜찮더군. 내가 황제인데 당연히 완전무결한 거 아닌가?”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저는 폐하께서 완전무결하지 않아도 좋아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소리가 들리면 저에게 오십시오. 제가 폐하를 많이 사랑하는데 혼자 그러고 있으면 속상합니다.”
내 말에 황제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미 좋아졌는데…… 더 좋아지게 하면 그대가 감당 못 할 텐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나는 그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
좋다고 대답하는 황제와는 달리 페로몬은 불안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도 이젠 페로몬만으로도 황제의 기분을 파악할 만큼이 되었으니까.
“폐하. 아직도 제가 폐하의 곁을 떠날까 봐 두려우십니까?”
황제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고 있는 터라 얼굴이 안 보이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그런 불안을 이야기하면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
사실 아직도 내가 떠날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면 되게 슬플 거 같았다.
나는 항상 그러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해 설득을 했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을 이야기하는 황제를 나는 계속해서 안정시켜야 했다.
불안이 안정되지 않으면 어둠이 더욱 날뛸 거고…… 언젠가는 어둠에게 집어삼켜질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어도, 내가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한다면 나는 앞으로 살아가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을 것임이 분명했다.
사랑하는 황제에 대한 일이라면 아마 살 수 없을지도…….
황제는 나에게 이렇게나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폐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저에게 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 억울함은 잠시 뒤로 보냈다.
지금은 그래야 했다.
“그러면 다가가 주면 키스해 줄 건가?”
남은 심각한데 황제는 엉뚱한 소리나 해 댔다.
하지만 눈치를 보는 황제를 보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하긴 내가 애정 표현에 좀 인색하긴 했다.
“뭐든지요.”
“정말……?”
저렇게까지 반응을 하니 내가 반성을 해야겠구나 싶었다.
“네. 키스해 달라면 당연히 할 겁니다.”
내 대답에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렇게까지 충격받을 만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눈가에 눈물까지 차오르는 황제를 보노라니 내가 저렇게까지 잘못했구나 싶었다.
“혹시 나 뭐 잘못한 것이 있나?”
“……아니요……?”
“아니. 나는, 나는 그대가 나와 스킨십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러니까 내가 놀라지 않나.”
어이가 없었다.
아니, 스킨십을 안 좋아하긴 뭘 또 안 좋아해. 내가 지금껏 좋아한다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도대체 난 그동안 뭐 했던 거지……?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황제가 재차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는 항상 나보다 여인을 더 많이 쳐다본다. 이 궁 안의 시녀들은 꼭 필요한 데를 내놓고 다 시종으로 바꿨음에도 한 가지 바꾸지 못한 여인들이 있지. 그대는 항상 그 여인들을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대의 옆에 여인이 있을까 봐 겁이 난다. 내가 여인이 아닌 것에 화가 나고, 나는 그대의 스킨십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말인데…….”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그대의 밑에 내려가도 괜찮다.”
“……뭐가 말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무지 대화의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키스할 때 본인이 아래쪽에 있겠다는 말인가? 그럼 내가 침대에 앉고 황제가 바닥에……?
“그거 말이다. 침대에서…….”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