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1. 긴장될 땐 동해물과 백두산
세계가 뒤집힌 지 10년. 게이트가 툭하면 열리고 사람들이 툭하면 각성할 때, 그런 거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이하늘은 열심히 키배를 떴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착취당한 회사에서 겨우 빠져나온 지 일주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하기를 선택했건만.
게임 속엔 부모님 안부를 묻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스트레스가 풀리기는커녕 쌓이고 쌓였던 이하늘은 결국 수년간 봉인해 두었던 타자 2,000타 실력을 해금하며 상대의 멘털을 탈탈 털었다.
[가을하늘공활한데 : 싸가지를밥말아먹었나게임을발로하는건지면서어디서부모운운하고♡♡이야]
[가을하늘공활한데 : 니가♡♡못해서자꾸만뒈지는게왜내탓이야]
[가을하늘공활한데 : 손가락제대로달려있으면컨똑바로해♡♡♡야니컨이♡구리단생각은안함?]
[가을하늘공활한데 : 어떻게정치질해서날엿먹이려나본데다른사람들은너랑다르게눈제대로박혀있어서내가아니라니가못하는거다알아♡♡야]
[가을하늘공활한데 : 가뜩이나기분더러운데♡♡어디서♡만도못한게와가지고지적질이야]
[가을하늘공활한데 : 우냐?울어?왜말이없어아까처럼입털어봐♡♡아]
드르르르릉,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타자 치는 소리가 아니라 웬 말벌 소리가 울렸다. 키보드가 너무 빨리 눌리는 탓이었다.
채팅 창이 그녀의 닉네임으로 도배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매크로로 의심된다며 채팅이 금지되었다는 붉은 글귀가 사랑 가득한 글 대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짙은 회의감이 몰아쳤다. 이하늘은 열두 시간 넘게 켜져 있던 컴퓨터를 끄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슬그머니 손을 뻗어 휴대폰을 켰다. 아직도 낮 3시였다.
“동생이란 놈들은 연락도 없고.”
버릇처럼 혼잣말할 때였다. 머리 위에서 띠링, 하고 간결한 알람이 울렸다.
‘응? 컴퓨터 끄지 않았나?’
아직 안 꺼졌나 싶어 이하늘은 무거운 머리를 겨우 들었다. 그랬더니 그녀를 반기는 건 켜진 모니터가 아니라 허공에 둥둥 뜬, 웬 사각형의 반투명한 창이었다.
〔축하합니다!!! 레바브 시스템이 원하는 인재상을 갖춰 시스템 운영자 자격을 받았습니다!!!〕
뭐야, 이게.
반사적으로 바닥을 발로 차 단숨에 거리를 벌린 이하늘은 난데없이 등장한 사각 창을 바라보았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임에서나 볼 법한 사각형 창. 그게 보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리 이하늘이라 할지라도 알았다.
‘설마…… 나 각성한 거야?’
하지만 각성은 게이트 안에 빨려 들어가야만 가능하지 않나?
그녀의 표정이 삽시간에 안 좋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로운 창이 띠링 소리를 내며 떠올랐다.
〔지금부터 30초 후, 레바브탑의 최상층 레바브 시스템 센터로 이동합니다!!!〕
“뭐?”
이쯤 되면 눈치챌 수밖에 없다. 널리 알려진 각성 과정과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30초는 짧았다. 창 아래에 적힌 숫자가 1이 되었고 발아래에 오색찬란한 문양이 그려졌다.
동그란 원형 안에 길쭉한 탑 같은 것이 그려진 문양.
이하늘은 그게 뭔지 바로 알아보았다. ‘레바브탑’을 의미하는 문양이었다.
“으악!”
짧은 비명을 마지막으로 많은 것이 사라졌다. 사각형의 반투명한 창도, 이하늘도,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와 문양까지 말이다.
속이 뒤집혔다. 이하늘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놀이기구를 탄 것 같은 감각이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 메슥거리는 감각이 짧았다는 것.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잠잠해지자 이하늘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
눈앞에 펼쳐진 곳은 더 이상 제 방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야?”
원형의 넓은 공간은 방이라고 부르기엔 난감했다. 일단 뒤에 엘리베이터가 두 대 있었고 건너편엔 기다란 복도가 이어졌다.
‘무슨 로비 같은데?’
생각하다 말고 이하늘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지금 한가하게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들이닥친 이 상황이 뭔지 파악부터 해야 했다.
‘일단……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각성자에게만 보인다는 시스템 창이 떴어. 그럼 내가 각성자가 된 건가?’
이하늘은 떨리는 다리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인을 잘못 만나 함께 이동된 의자가 어쩐지 초라해 보였다.
10년도 넘게 동고동락한 의자라 버리고 갈 순 없어서 끌고 움직일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관자놀이에 찌르르 통증이 몰려왔다.
난생처음 느끼는 고통이라 숨을 흡, 들이마시며 비틀거렸다.
그런 이하늘의 어깨를 쥐는 손이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하늘은 강렬한 두통을 무시하고 잔뜩 경계하며 뒤를 돌아봤다.
어느 남자가 있었다.
정갈하게 넘긴 검은 머리카락,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이마.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단정한 스리피스 슈트.
오른쪽 눈에 위치한 모노클 때문에 미모가 살짝 가려지긴 했지만…… 말하기 입 아플 정도로 어마어마한 미인이었다.
이하늘은 모든 것을 잠시 뒷전에 두고 저도 모르게 상대를 구경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하늘 씨 맞습니까?”
세상에. 목소리도 좋았다.
이하늘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멍해졌던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해 허물어졌던 경계를 다시 세웠다.
“저, 다짜고짜 죄송한데 여기가 어디, 아, 일단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제가 원해서 들어온 건 전혀 아니거든요. 아니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 보면…… 뭔가 알고 계시는 건가요?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혹시 저 각성한 건가요? 근데 각성한다고 이렇게 막, 갑자기 순간 이동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혼란에 지배된 이하늘의 입에서 주절주절 말이 쏟아져 나왔다.
반면 참을성 있게 그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남자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일단 알겠다는 반응이다.
“혼란스러운 거 이해합니다.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시죠.”
남자가 앞장섰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를뿐더러 여전히 알 수 없는 것투성이여서, 그녀는 뭐라도 설명을 듣기 위해 일단 그를 쫓았다.
하지만 아무리 미인이라도 상대는 명백하게 낯선 이.
여차하면 휘두를 심산으로 이하늘은 의자를 끌고 갔다.
도르르르륵.
조용한 공간에 의자 끄는 소리가 넓게 퍼졌다.
가상공간.
이하늘의 감상은 이러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평범한 벽에서 주르륵 선이 그어져 문이 생길 리 만무했으니.
‘그게 아니면 혹시…… 꿈인가?’
게임하다가 빡쳐서 침대에 돌진한 걸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여기 앉으시죠.”
벽을 통과해 들어선 공간은 휴게실 같았다. 소파와 테이블, 구석에는 암막 커튼까지. 어렵지 않게 커튼 너머에는 침대도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이하늘은 조심스럽게 끌고 온 의자를 붙들고서 남자가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이하늘의 의자를 흘긋 보다 말고 명함을 건넸다.
『하이레』
아마도 남자의 이름.
참 특이했다. 그러나 더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레바브 시스템 센터 대표』
‘레바브 시스템 대표? 그 레바브 시스템?’
생뚱맞은 단어가 등장하자 꿈이라는 가설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그것을 모르는 하이레는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곳은 레바브탑의 최상층, 레바브 시스템 센터입니다.”
“그렇군요…….”
이하늘의 목소리에는 감흥이 없었다. 꿈이라 생각하니 태클을 걸기도 귀찮아진 것이다.
‘이런 창의적인 꿈을 꾸다니. 헌터니 게이트니 진저리치면서도 꽤 신경 쓰고 있었나.’
퍽 불쾌한 꿈이었다. 일어나면 시원한 물 한잔 마시자고 다짐한 찰나.
“꿈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군요.”
정곡을 찌르는 하이레의 말에 이하늘은 소리 없이 놀랐다.
“먼저 몇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헌터에 대해서 아십니까?”
“아, 알긴 알죠.”
“10년 전 재앙이 시작됨과 동시에 레바브 시스템이 인간을 하나하나 선택해 각성시켰습니다. 게이트의 몬스터로부터 몸을 지키라는 의미로요.”
‘안다고 말했는데 설명하네.’
10년 전, 갑작스럽게 전 세계 수도에 처박힌 건지 솟아오른 건지 알 수 없는 것이 생겼다.
끝을 알 수 없고 현대의 모든 기술로도 부술 수 없는 기이한 탑.
안에 들어가 보려 해도 1층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1층에 무언가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저 새하얗고 넓은 공간뿐.
대체 저 기둥, 아니 저 탑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만 남은 채로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기이한 것들이 동시에 나타났다.
톱니로 찢은 듯한 거친 타원형의 검붉은 색 균열.
하늘, 땅, 바다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 그것은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했다.